219화. 벤저민이 되어보자 (3)
주지사는 현재까지 모인 세금만으로도 대부분의 기반시설을 마련하고 여러 기업을 유치할 발판이 마련되었다고 했다.
나의 도움으로 주 경제가 일어섰으니 기회를 무조건 잡겠다고, 지켜보겠다고 했다.
첫 지역 화폐부터 첫 초상화까지……
내게도 뉴햄프셔에게 남다른 애정이 있었으므로 그가 꼭 성공하기를 빌어주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 아트밸리에서 <환생; 찬란하신 도깨비 사조>라는 이름으로 연극 공연이 이루어진다고 하던데. 꼭 생각하신 것보다 더 크게 성공하시기를 바랍니다. 저도 공연 일정이 끝나기 전엔 방문해서 관람해보겠습니다.
<환생; 찬란하신 도깨비 사조>는 어머니와 아버지, 일섭이 기획한 공연의 최종 제목이었다.
제목에 활용된 ‘환생’이라는 단어는 나의 첫 작품 <환생>에서 따온 게 맞았다.
도깨비를 주제로 한 퓨전 국악극으로, 하모니즘 사조에 충실한 기획이라는 홍보였다.
퓨전 국악극이라는 요소에 대해 사람들은 일견 우려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보통 퓨전 국악이라고 하면 너무 마이너한 클리셰를 따르거나, 서양 악기로 국악을 연구해 재구성하거나, 반대로 동양 악기로 서양악을 연주한 것일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듣기로는 꽤 실력 있는 작곡가와 기획자들이 참여했다고 하니 걱정은 없었다.
솔직히 아버지와 어머니, 일섭만 하더라도 흔하고 뻔한 기획을 할 만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예술의 전당은 굉장히 멋지게 디자인되었다.
미들타운 연안의 바다를 등지고 있는 모습이 호주의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를 연상시키기도 했지만, 아트밸리 예술의 전당만의 매력이 있었다.
아버지가 주도한 건축이기 때문인지 군데군데 동양적인 시도들이 눈에 띄었다.
전체적으로 곡선형을 이루는 실루엣이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진행한 건축과 어머니가 기획한 공연을 제대로 축하해주기 위해 정장을 차려입고 건물에 들어섰다.
그러자 곳곳에서 연을 튼 정경계 인사들이 말을 걸어왔다.
“아, 윤예준 화가님. 이번 뉴햄프셔 지역 화폐는 잘 봤습니다. 저도 겨우겨우 한 장 구하는 데에 성공했는데. 굉장히 멋지더군요. 그런데 얼마나 기다려야 그림이 나오는 겁니까? 벌써 두 달째인데.”
“그러게요. 사장님 손이 너무 깨끗하시니까 산화가 늦나 봐요. 하하하.”
입장부터 공연 시간이 다가올 때까지 많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다.
대부분은 지역 화폐와 관련된 찬사 혹은 예술의 전당 완공을 축하하는 인사였다.
종종 이번 공연에 대한 기대감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내게도-어설프게나마- 철저히 숨겨진 기획이었기 때문에 해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솔직히 처음 포스터가 나왔을 때 한국적 컨셉인 걸 보고 놀라는 척을 하느라 꽤나 애를 먹었더랬다.
당연히 미국적인 걸 기대했는데…… 허를 찔렸다고 목소리를 한 번 높여주니 부모님은 아주 흐뭇하다는 듯 화색을 띠었다.
빨리 공연을 보고 이 수고스러운 모른 척하기를 끝내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아 있었다.
물론 공연 컨셉에 기대가 되는 것도 사실이었고 말이다.
공연이 시작되었다.
공연장 안에 있는 불이 모두 꺼지자 바닥에 흐릿하게 표시되는 비상 탈출 안내등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었다.
작게 웅성거리는 소리마저 멎으면 무대 뒤편에 있는 큰 스크린에 하얀 화면이 표시되었다.
곧 그 화면에 검은 점이 찍혔고, 점은 조금씩 세력을 넓히며 한국어 글자를 남겼다.
‘샌드아트구나!’
검은 점이 지나며 직선과 곡선을 남길 때마다 크고 작은 모래 알갱이들이 화면 위를 굴렀다.
모래를 쓸며 내는 마찰음도 듣기 좋았다.
멋진 필체로 ‘찬란하신 도깨비 사조’라는 글자가 작성된 후 지워지면 다음은 영어 제목이 표시되었다.
제목 소개가 끝난 뒤 샌드아트로 산과 들의 풍경이 묘사되면 그것을 배경 삼아 무대에 불이 들어왔다.
한국적으로 묘사된 사물들 덕분에 한 폭의 움직이는 한국화를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연극은 이 같은 한국적인 회화 요소와 전 세계의 민담, 그리고 국악의 결합이었다.
옴니버스식이었는데, 각각의 상연 시간이 짧았지만 놀라운 시각효과와 매력적인 스토리텔링으로 인해 흡입력이 대단했다.
참여한 화가와 작곡가, 작가 모두가 걸작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음……? 그러고 보니.’
연극은 민담의 이야기 구조를 따르면서도 조금 익숙했다.
원래 민담이라는 게 단순하기 때문인 줄 알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아. 어머니가 쓴 나의 동화와 이야기 진행이 같다!’
옴니버스식으로 모두 구분된 이야기들이었지만 전체를 이어놓고 보면 그 동화의 내용과 동일했다.
민담마다 ‘도깨비’로 변형되어 나오는 주인공들이 모두 10살 이전의 나, 윤예준인 것이었다.
동화의 흐름을 유지하면서도 은근한 주제의식도 전달하고 있었다.
클라이막스는 연극의 후반부에서 도깨비불이 현란하게 날아오르는 장면이었다.
그게 환생을 해내는 주민들의 혼불처럼 보여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공연이 끝나고 배우들의 커튼콜까지 마치자 사람들은 아주 긴 기립박수를 보내주었다.
특히 아트밸리에 굉장히 큰 호의를 가지고 있던 아메리카 원주민 관객들의 호응이 대단했다.
도깨비는 가장 전통적인 캐릭터이면서도 그 생김새 때문에 항상 이방인 취급을 받았는데, 그걸 딛고 일어서는 전개가 큰 감동을 준 것이었다.
‘얼마나 대단한 작품이기에 그렇게 철저히 감추려고 하나 싶었는데. 이 정도면 그럴 만도 했어.’
“그럼 이 작품에 큰 영감을 준 윤예준 관장님을 앞으로 모시겠습니다.”
배우들이 퇴장하고 무대 기획자들이 첫인사를 하러 나왔는데, 그중 가운데 선 아버지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나는 지체 없이 나가서 아버지에게 마이크를 건네받았다.
아직 공연의 슬픔이 가시지 않았는지 관객들은 붉은 눈빛을 내게 모으며 박수를 보내주었다.
“오늘 예술의 전당 첫 공연에 와주셔서 정말 너무 감사드립니다. <찬란하신 도깨비 사조> 공연은 저도 오늘 이 자리에서 처음 봤는데요. 여러분들과 이 감동을 처음 나눌 수 있어서 더 뜻깊었던 것 같아요. 이런 기회를 선물해준 기획자와 배우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
공연이 끝난 뒤 어머니와 아버지는 내게 공연의 감상을 물었다.
완벽했다고밖엔 말할 수 없었다.
어머니의 극과 실내 세트, 일섭의 동양화풍 소품, 그리고 제대로 된 퓨전 국악까지.
‘계속 생각나는 공연’ 1위로 등극해 뜻밖에도 어머니를 극작가로 데뷔시킨 작품이 된 것만 해도 말은 다 한 것이었다.
출판사에서는 이번 공연에 힘입어 어머니의 동화와 나의 전기를 합쳐 도깨비 버전의 판본을 새롭게 공개했다.
공연 자체도 입소문을 많이 타 기존 1달 예정이었던 게 3달로 연장되기도 했다.
뉴햄프셔 일을 치르면서 기성품을 팔기 위한 시스템을 구축해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전기와 연극표 모두 AI FEEL U에서도 판매할 수 있었다.
극, 음악, 미술 모두 완벽하면 제대로 섞이기 어려웠을 법도 한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심지어 극은 나의 삶과 한국의 도깨비, 그리고 전 세계 민담을 잘 섞어서 풀어냈고, 음악은 각 지역의 분위기를 살리면서도 한국적 가락을 포기하지 않았다.
일섭이 대한동양재단 협회장으로 지내면서 알게 된 국악계 인맥을 총동원했으니 어울리는 음악이 나오는 건 당연했다.
진정한 하모니즘을 추구한 것이었다.
별개의 이야기이지만, 내게 가장 큰 영감을 준 건 무대 연출을 고안하던 중 아버지가 제안했다는 ‘샌드아트’였다.
솜니움 10주년 기념행사 때 드로잉 쇼도 해보았고 경매도 퍼포먼스의 일종으로 발전시켜놓은 상태였다.
듣기로 아트밸리에는 샌드아티스트가 없어서 외부에서 데려왔다던데, 대표적인 퍼포먼스 미술인 샌드아트를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이렇게나 큰 감동을 줄 수 있는 서사 미술 아니던가.
‘그럼 좋은 모래가 많이 있어야 할 텐데……’
그때 뉴햄프셔주를 여행할 때 종종 보았던 버려진 채석장이 떠올랐다.
지금은 공예를 하기 알맞은 광물들만 거래 중이었지만, 그 채석장을 다시 이용한다면 괜찮은 모래를 빻아낼 수 있을 듯했다.
뉴햄프셔 사람들이 지역 화폐를 어떻게 쓰고 있는지 눈으로 보고 싶기도 했고 말이다.
나는 주지사와 상의해보기 위해 바로 차에 올라 뉴햄프셔로 향했다.
차로 두 시간 거리에 있을 정도로 가까운 곳이었다.
그렇게 다시 방문한 뉴햄프셔는 전과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같은 붉은 하늘이라도 해 질 녘과 해 뜰 녘이 다르듯 현재의 뉴햄프셔는 조용한 곳에서도 활기가 느껴졌다.
콩코드 근교에 있는 채석장에 도착해 내리자 근처를 지나던 지역민이 나를 반갑게 맞았다.
“와~! 윤예준 씨!”
그는 한 손에 든 2달러짜리 지역 화폐를 흔들며 활기차게 나를 반겼다.
“2달러 들고 어디 가세요?”
“양파 사러요. 너무 잘 쓰고 있어요!”
지역 화폐로의 기능은 아예 사라졌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만도 않은 듯했다.
“그거 바깥에 내다 파는 게 더 비싸지 않아요? 벌써 떨어졌나?”
“훨씬 비싸죠! 이거 2달러짜리 한 장이 거의 100달러 가까이 할 걸요? 근데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좀 자제하는 편이에요.”
그는 지역 화폐를 통한 주 정부 혜택의 우수함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주에서 새로 조직된 시민단체가 외지 판매 최대 액수를 정해놨다고 했다.
한 사람당 한 달에 최대 얼마까지만 AI FEEL U에 등록해놓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야 외지 시세도 유지하면서 지역 화폐로서의 지속가능성도 보장이 된다고.
물론 강제력은 없었지만 판매자 조회가 용이하기도 하고, 그의 말대로 주민들의 애향심으로 유지되고 있다고 했다.
“와…… 뉴햄프셔 사람들 정말 멋지네요.”
“멋지긴요. 지역 화폐로서의 효과도 좋다니깐요?”
주 내 지역 화폐 거래를 통해 얻어지는 수수료의 10%는 소상공인 보조금으로 사용된다고 했다.
또 큰 마트에서는 지역 화폐 소비자에게 10% 할인 혜택도 주고 있다고.
뉴햄프셔에서는 무조건 지역 화폐를 사용하는 게 이익이라고 했다.
“그런데 뉴햄프셔에는 또 무슨 일이세요?”
나는 아직 가동 중인 채석장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내다보이는 채석장을 바라보곤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번에 광물 계약하시면서 광산이 조금 늘기는 했는데, 저런 노천 채석장은 거의 안 쓰고 있을걸요? 저기만 해도 침출수 문제로 일찍이 폐쇄된 곳인데요.”
미관상 보기 좋지 않아 채석장은 더 만들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아, 그래요? 일단 알겠습니다.”
나는 다시 차에 올라타 채석장 몇 군데를 돌아본 뒤 새로 뚫린 광산을 방문했다.
내가 방문하자 근처 휴게공간에서 쉬고 있던 광부들이 나를 알아보고 음료수를 대접하기도 했다.
그들에게 지역 화폐가 삶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고 있는지 감사 인사를 오랫동안 들어야 했다.
“그런데 여기 나오는 광물들이 다 쓸만한 광물은 아니잖아요? 남은 것들은 다 버리나요?”
“버리는 건 아니고, 그냥 그 자리에 두지.”
“그럼 모래가 될 만한 광물은요?”
광부들은 자신들도 잘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래면 화강암으로 만드는 거 아닌가? 화강암을 캐려면 채석장으로 가야지. 그런 건 산 표면에 많으니까. 물론 여기도 나오긴 나오지만.”
“채석장 다녀오는 길이에요. 거기서 유해한 물이 흘러나와서 다 폐쇄되었다길래 여쭤본 거예요.”
그들은 모래로 쓸 만한 광석이 나와도 부산물로나 취급하지, 굳이 모래로 만들기 위해 화강암만을 캐지는 않았다고 한다.
대개 그런 식으로 얻어진 걸 모래로 으깨서 공급하는 거라고.
“아…… 그럼 전문적으로 화강암을 캐서 모래를 만들기는 어렵겠네요.”
“어렵긴 왜 어려워?”
“채석장도 폐쇄됐으니 기술자가 없잖아요.”
광부들은 별걱정을 다 한다는 듯 대답했다.
“채석장 폐쇄되고 그 사람들 다 어디 갔겠어? 광산으로 갔지. 지금 우리처럼.”
그들은 아직도 채석장에서 모래를 빻는 노하우가 남아 있다고 했다.
관련 기계도 잘 다룰 줄 알았고, 눈을 감고도 용도에 맞는 모래를 뚝딱 만들어낼 수 있었다.
잘된 일이었다.
나는 광부들과의 대화를 마치고 바로 주지사 사무실을 방문했다.
건물에 들어서기 전에 전화를 걸었더니 주지사는 허둥대며 나를 안내했다.
“오기 전에 말씀해주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그럼 극진히 맞았을 텐데.”
“아니에요. 그냥 근처만 둘러보고 전화 드리려다 혹시나 해서 돌아가는 길에 들른 거예요.”
“둘러보시다니요?”
나는 뉴햄프셔 분위기가 얼마나 바뀌었는지 구경도 할 겸 채석장을 알아보고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샌드 아트를 위한 모래를 구하고 계시다구요?”
“네. 그리 많은 양은 아닐 텐데, 그래도 취급한다면 이쪽에서 들여오고 싶거든요. 근데 모래는 아예 안 만드나 봐요?”
그렇다고 했다.
뉴햄프셔의 광산은 효율이 좋은 편이라서, 귀금속을 캐내는 데에 주력을 기울이는 편이었다.
그마저도 돈이 되지 않아 폐쇄되었다가 최근 아트밸리와의 계약 덕분에 다시 채굴이 시작된 것이지만 말이다.
나는 지난번에 했던 광물 계약에 모래 계약을 추가하고 싶다고 전했다.
주지사는 불순물 중 하나였던 화강암까지 처리할 수 있으니 무조건 좋다고 했다.
“이번에 지역 화폐 주 내 거래액이 100만 달러를 넘길 것 같습니다. 정말 큰 도움이 되고 있어요. 광물 계약을 맺은 것 말고 아무런 보상도 받지 않으셨는데, 모래 정도는 주 예산으로 도와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광물을 전달할 때 가공된 모래도 공짜로 주겠다는 것이었다.
거절하고 싶었지만, 그 정도는 받아줘야 주지사도 마음이 편할 것이었다.
“아, 그리고 둘러봤다고 하니 아시겠지만, 저희 지역 화폐가 거의 일반 화폐처럼 쓰이고 있는 거 보셨습니까?”
“네. 그걸 쓰면 혜택이 꽤 크다고.”
주지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동부 다른 지역에서도 현금처럼 쓰이고 있다는 말입니다.”
“네? 그게 가능해요? 주 외부에서는 그냥 비싼 상품일 뿐인데요.”
AI FEEL U의 시세를 고려해 현금처럼 쓴다는 뜻일까?
불가능했다.
시세가 바뀌면 수익 정산이 불가능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