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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제일 쉬움-214화 (214/241)

214화. 혼란 속에서 기준이 되는 것은? (2)

아이다는 ‘AI FEEL U’의 수많은 기능들 중에서도 우선 경매 프로그램을 구축하기 위한 작업에 돌입했다.

나는 상철에게 윤예준이 경매 프로그램을 다급히 런칭하고 베어건설의 작품 확보에 뛰어들었다는 기사를 써달라고 했다.

그 뒤 테레즈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테레즈 전화 받았습니다.

“테레즈 씨. 지금 제 전 재산이 얼마죠?”

대뜸 전 재산을 물었기 때문인지 테레즈는 당황했지만, 이내 빠르게 정산을 해보기 시작했다.

-우선 슈링클로 만든 굿즈 판매 수익이 연에 4억 5000만 달러꼴로 들어왔습니다. 가죽 액자는 6억 8000만 달러, 거기 윤예종이, YJ스탬프, 아트밸리에서 난 기타수익금들, ……거기다 이번에 보내주신 베어건설 관련 미술품 대여 수익금까지 합치면 80억 달러가 조금 안 됩니다.

80억 달러.

한화로 치면 9조 7000억 원 정도 된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십니까?

테레즈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흐음…… 경매장 하나를 인수할 생각인데 돈이 충분할지 모르겠네요.”

-경매장이요?

테레즈는 이것저것 클릭해 자료를 검토해보더니 말했다.

-크리스티나 소더비의 경우 전통이 있기도 하고 미래 가치도 커서 통째로 인수하려면 값을 꽤나 지불해야 합니다. 80억 달러는 꼭 필요해요.

인수는 불가능하다는 뜻이었다.

그렇다고 각지에서 들어오는 후원금을 융통할 수도 없고 말이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크리스티나 소더비를 인수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그들 노하우와 전술, 인력이 굉장히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다른 곳에서 돈을 더 끌어올 수는 없습니다. 금액적으로는 그렇지 않을지 몰라도, 일개 경매장보다는 화가님이 전 대륙에 구축하신 예술단지들이 훨씬 더 가치가 있는 곳이기에……

테레즈는 내가 부동산이라도 팔 생각인 줄 알았던지 불안하게 조언했다.

“걱정 마세요. 저는 전혀 그들을 인수할 마음이 없으니까요.”

데이비스 저택에서 만났던 크리스티와 소더비의 경매사들을 떠올려보았다.

또 발리와 함께 간 경매장에서 다급히 들여왔던 나의 ‘마네의 붓’도 말이다.

예술 작품도 당연히 거래가 되어야 하는 물건이었지만, 그들처럼 상업적으로만 다루는 건 별로 좋은 모양새도 아니었다.

그들과 같이 떼돈을 끌어모을 동기는 내게 없었다.

하지만 기존의 미술품 경매 흐름보다 훨씬 더 건강한 거래방식을 고안해야 한다는 건 깊이 절감하고 있었다.

-그럼요?

내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을 인수하는 게 아니라,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제가 평상시에 눈여겨 봐둔 곳이 하나 있으니까, 그곳을 일단 인수해놓는 걸로 해요.”

-조회해보겠습니다.

나의 의중을 알아챈 테레즈가 가뿐한 웃음을 흘리며 재무제표를 조회하기 시작했다.

남은 건 상철의 기사가 제 역할을 해주느냐, 마느냐였다.

하지만 상철의 글이 사람들을 얼마나 쉽게 주무를 수 있는지는 직접 겪어보아 알고 있었다.

곧 기사가 나올 테니, 크리스티와 소더비에서도 슬슬 몸을 풀고 있을 것이었다.

***

크리스티의 CEO는 그 훌륭한 정보력과 사업적 감각으로 일찍이 윤예준을 주시하고 있었다.

물론 기념 우표 원작 그림을 소더비에게 빼앗길까 봐서는 아니었다.

한 번에 명작 7점이 우르르 쏟아져나올 예정이었는데, 그 큰 건을 경쟁사에게 빼앗길 수는 없지 않은가?

윤예준이 인지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아트밸리에는 크리스티의 직원들이 상주하고 있었다.

러시아 베어건설의 작품 조기 반환 요구 때문이었다.

거의 백여 점에 이르는 유명한 걸작들을 일제히 러시아로 다시 불러들이고 있었다.

전 세계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러시아 아방가르드 작품들은 물론이고 유럽의 고전주의 작품까지도 거기 포함되어 있었다.

만약 백 점 중 최소한 40점 이상 확보하지 않으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크리스티와 소더비가 아니라 소더비와 크리스티라고 불리게 되는 것이었다.

‘윤예준……’

이때 베어건설의 조기 반환 요구에 영향을 받지 않은 걸출한 미술관 중 가장 유명한 곳은 윤예준의 솜니움 미술관이었다.

심지어 소장량도 많고 작품 퀄리티도 하나같이 높아서 그 모든 미술관에 작품을 빌려주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것으로 돈을 꽤나 벌어놓기도 했을 것이고 말이다.

‘어쩌면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는 윤예준이 베어건설의 작품을 직접 매입하려고 들지도 모른다.’

수년 전 가드너 미술품 도난 사건으로 IAA가 작품 확보 야욕을 드러냈을 때 윤예준은 굉장히 강하게 반발하고 든 적이 있었다.

누가 봐도 IAA의 갑질이었고, 예준이 아니었다면 IAA의 주장은 받아들여졌을 것이었다.

미국에 많은 협회를 두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IAA의 권위는 확실히 세를 떨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윤예준도 IAA만큼 미술품에 대한 욕심이 굉장히 강했다.

IAA의 그 야욕을 막아낸 걸 넘어 아예 가드너를 집어 삼켜버릴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때였다.

“큰일 났습니다!”

직원 하나가 대표실 문을 발칵 열고 들어와 외쳤다.

손에는 아트밸리의 사보가 들려 있는 상태였다.

“무슨 일이야?”

“아트밸리가 온라인 경매장을 차린답니다!”

“뭐?!”

온라인 경매장이라니.

대표는 직원이 들고 있던 사보를 빼앗아 관련 내용을 살폈다.

어플리케이션 개발은 확실시된 상황이고 오래 걸릴 일도 아니다.

아무리 빠르게 진행해야 하는 프로젝트라고 하더라도 경매장 사업을 허투루 시작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기 때문에 유명 경매사들을 한 명씩 불러모아 충분히 자문을 얻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혹시 우리 쪽 경매사들도 만난 거 아니야?”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이야기가 나오지 않은 걸 봐서는…… 윤예준이 산업스파이 같은 걸 쓸 리도 없고요.”

“그럼 작은 경매장에서 사람을 모으고 있는 건가?”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경매장 사업을 시작하면서 크리스티와 소더비를 신경 쓰지 않았을 리는 없었다.

조금 고민해본 끝에 크리스티는 윤예준의 생각을 제대로 파악해볼 수 있었다.

“그래…… 그거였군.”

대표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왜 그러십니까?”

“윤예준…… 예술에만 천재적인 게 아니라 사업 감각이 굉장히 뛰어난 인물이라더니, 그게 사실이었어. 그러고 보니 바로크를 성장시킨 주역이기도 했지.”

대표가 설명했다.

“아무리 경매장 설립과 프로그램 개발에 박차를 가해도 현재 베어건설의 작품 확보는 불가능해. 프로그램이 구축된 뒤엔 이미 우리와 소더비의 경쟁이 끝나고 승패가 갈린 이후겠지. 그런데 왜 굳이 이 시기에 어플을 런칭하고 이렇게 기사까지 냈겠어?”

직원은 아직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와 소더비 중 이긴 놈과 친구 먹겠다, 이거지.”

아마 윤예준은 처음부터 둘 중 한쪽의 편을 들어 파트너십을 만들 생각일 것이었다.

현재 크리스티와 소더비가 균형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반대편에서 윤예준이라는 뒷배를 가져가 버리면 큰 낭패였다.

업계 1위 규모라는 고결한 지위를 그 순간 잃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번 소더비와의 경쟁에서 지는 쪽은 보통 패배가 아니라 완전한 패배를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뜻이었다.

직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현재 어느 정도 확보된 상황인지 확인해보겠습니다.”

“그래. 일정이 안 되면 앞의 것들 다 경매 취소시켜버리라고. 그리고 너무 베어건설 쪽만 살피면 안 돼. 평상시에도 한 주에 걸작 한두 개씩은 꼭 매물로 나왔으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비싼 상품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거든.”

“이해했습니다.”

직원이 대표실을 뛰쳐나갔다.

전면전이었다.

대표는 의자에 앉아 숨을 조금 골랐다.

마음을 진정시키자 차가워진 머릿속으로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꼭 전면전으로 상대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

그랬다.

꼭 표면적인 성과로 보여주지 않아도 되었다.

직접 윤예준과 컨택을 해 그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크리스티가 소더비에 비해 얼마나 매력적인지를 확인시켜주면 될 일 아닌가.

대표는 지체없이 수화기를 들어 아트밸리 쪽으로 전화를 걸었다.

***

기사를 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크리스티와 소더비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역시 발상도 속도도 비슷하군.’

왜 여태 그 두 경매장이 비슷한 규모를 유지하고 있는지 알 만했다.

크리스티와 소더비는 각자 자신들의 매력에 대해 어필하고 들었다.

크리스티는 처음으로 회화가 아닌 것을 경매대에 올린 역사적 성과를 이야기하며 혁신의 가능성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소더비는 유명화가의 작품뿐만 아니라 아트밸리의 신진화가들 같은 무명 화가의 작품도 굉장히 많이 거래되고 있다는 장점을 들었다.

양쪽의 소개 모두 과장 없는 사실이었지만 결국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건 사실 아니던가?

그들의 작품 확보 영업을 조사하고 있는 상철에 의하면 확보량이 아직은 동률 수준인 듯하다고 했다.

그들의 소개를 고려는 하더라도 결국 이번 일의 결과까지는 봐야만 했다.

작품 확보를 도와줄 마음도 없고 말이다.

나는 잘 판단이 안 선다는 핑계를 대며 조금 더 고민해보겠다고만 대답해두었다.

나와 함께하고 싶으면 이번에 미술품을 많이 확보해두면 될 일이었다.

상철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그는 며칠 전 러시아로 출국한 것을 시작으로 거의 세계 방방곡곡을 떠돌며 크리스티와 소더비의 영업을 쫓고 있었다.

베어건설에 대한 영업은 대부분 협상으로 진행되고 있는 상태였고, 그들은 조금이라도 격차를 벌리기 위해 개인 VIP 영업에 전력을 쏟고 있었다.

우선순위를 선별하는 능력이 출중한 상철이기에 그 모든 걸 혼자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네, 윤예준 님.

상철이 전화를 받았다.

그러나 수화기 너머에선 소음이 굉장히 심했다.

윽박지르는 소리와 곡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는데, 언어가 한국어였다.

“지금 한국이세요?”

-네. 의외로 한국이 핵심 격전지가 됐네요. 아주 상황이 난리도 아닙니다. 멱살잡이에 고성방가에 폭행까지 아주 그냥…… <달마도>를 가지고 계신 한국 수집가분께서 돌아가시는 바람에.

김명국, <달마도>

<달마도>

아주 잠깐 사이 드러난 신성의 형상을 옮겨 그렸다는 작품으로, 그 속도감 있는 표현이 일품인 역사적 명작이었다.

그런 작품이라면 크리스티와 소더비가 목을 맬 만도 했다.

수집가 중 누군가가 죽으면 바로 경매사들이 찾아와 상품 판매를 요청한다고 했다.

사흘간밖에 치러지지 않는 장례식을 어떻게 알고 그새 찾아갔는지 신통할 따름이었다.

그걸 감지하고 쫓아간 조상철도 말이다.

-아마 이 작품을 확보하느냐 못하느냐가 승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 같은데요. 그래서인지.

소더비와 크리스티는 빈소 접객실 입구에서부터 몸싸움을 벌였고, 신발도 벗지 않은 채 분향소에 쳐들어가 명함을 내밀었다고 했다.

양측 경매장에서 결국 분향소 진입에 성공했고, 절도 올리지 않고 계속 거래 협상을 시도하려 했다.

-상주가 나가 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둘 다 들어먹지를 않은 모양입니다. 그러다 감정이 격해진 상주가 크리스티 쪽 거래사를 폭행했고, 기회라고 생각한 크리스티가 상주를 경찰에 신고했다더군요.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상주는 경찰서에 끌려가면서도 분향소를 비울 수 없다고 난동을 부렸죠.

“그래서 체포됐대요?”

-됐죠, 당연히. 아직 돌아오시지 않은 걸 봐서는 크리스티 쪽에서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작품을 내놓으라는 이야기겠죠, 뭐.

이 정도면 완전히 망조 아닌가.

남의 상갓집에서 그런 난동을 피우다니 말이다.

-그래서……

상철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주 멋지게 촬영해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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