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이 제일 쉬움-213화 (213/241)

213화. 혼란 속에서 기준이 되는 것은?

‘기념 우표를 발행하는 거야.’

일전에 뉴욕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1센트 마젠타’라는 희귀 우표가 비싼 가격에 올라왔던 기억이 났다.

나판과 협의해 그 작품을 우표의 심볼로 활용하면 좋을 것이었다.

1센트 마젠타는 굉장히 비쌌지만 원래 우표라는 건 헐값에도 살 수 있는 것 아닌가.

세리의 제안으로 만든 스탬프 하우스 사업에도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었다.

‘나판의 그림뿐만 아니라 각 지역의 랜드마크를 인쇄해서 팔면 홍보 효과가 굉장히 크겠어.’

나는 즉시 나판에게 전화를 걸어 아트밸리 사옥으로 불렀다.

에보리진 아트의 세계화라는 목표를 세운 뒤 아고라 센터 예술가들과 교류하고 있던 나판은 부른 지 30분도 되지 않아 도착했다.

“무슨 일이야?”

나는 나판의 그림과 랜드마크를 활용한 우표 제작에 대한 아이디어를 전했다.

그렇게 나판의 를 인쇄한 일반 우표와 각 지역의 랜드마크를 인쇄한 특별 우표 두 가지 버전을 동시에 제작하는 방향으로 계획이 구체화되었다.

“한국지역 특별 우표는 윤예준예술종합학교, 그리고 미국은 이곳 아트밸리의 솜니움 미술관을 인쇄하면 될 것 같아요.”

“그럼 호주는? 혹시 그 시계탑?”

“당연히 그걸로 해야죠.”

그 외에도 프랑스는 몽마르뜨 언덕, 사우디는 오아시스 예술광장, 모로코는 테너리 염색공장, 그리고 영국은 레딩 교도소로 결정되었다.

“좋네. 요즘 어른들이 우표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사진을 찍어서 프린트하는 거야?”

“아뇨, 그림을 그려야죠.”

“오우. 그림 일곱 점이나 그리려면 고생 좀 하겠는데?”

내가 다 그릴 생각은 아니었다.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그 지역 대표 화가들의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그렇게 허투루 쓸 순 없지 않은가.

“일반 우표는 그대로 가면 되니까 나판 씨는 호주 시계탑을 좀 멋지게 그려주세요. 그거 디자인할 때 썼던 디자인 수첩 드릴 테니까 참고하시고요. 우표용으로 바꿔주세요.”

“알겠어.”

나판은 내가 전송한 디자인 수첩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는 예술가들에게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부탁을 거절하는 화가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렇게 나는 프랑스의 게리, 한국의 이일섭, 사우디의 무함마드, 모로코의 디콘, 호주의 나판, 그리고 영국의 잭과 한에게 각각 우표 디자인을 맡겼다.

미국의 아트밸리는 내가 직접 디자인했다.

곧 완성된 우표 도안들은 인쇄소에 맡겨졌고, 상철은 그 즉시 기념 우표가 발행되었다는 소식을 미국 전역에 보도했다.

나와 여러 거장들이 합심해 만들었다는 소식에 사람들은 소비욕을 불태웠다.

모든 대륙의 총 7개국에서 발행되었는데, 어느 곳이 더하다고 할 것 없이 모든 판매점이 소비자들로 붐볐다.

가격은 저렴하고 디자인은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스탬프집에 우표를 모아 붙여 장식하는 유행도 생겼다.

예상대로 스탬프 이벤트와 기념 우표가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 것이었다.

기념 우표는 일반 우표와 특별 우표 모두 3천 원씩 총 300만 장을 발행했고 모두 팔렸다.

종 한화로 90억 원의 이익을 낸 것이었다.

특별 우표에 대한 원본 회화 작품도 경매장에 공개하겠다고 발표해 수집가들의 수집욕도 충분히 자극해둔 상태였다.

***

10주년 기념행사를 전후로 굉장히 소란스러웠던 아트밸리는 이제 다시 일상적 평화를 되찾았다.

곳곳에서 기념행사로 많은 걸 얻었을 것이었다.

나는 필요한 지원은 없는지, 문제 상황은 없는지 알아보기 위해 아트밸리 곳곳을 돌아보았다.

VR관을 방문했을 땐 이제 20대 후반이 된 아이다가 나를 맞이했다.

“어, 예준. 무슨 일이야?”

벌써 10년째 VR관 현장 관리를 도맡아왔고 미술앱 사업의 관리자도 겸임하고 있었다.

“그냥 차세대 아이필 업그레이드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해서요.”

초기 아이필은 AI와 O2O가 결합된 형태의 완성형 미술 전시 플랫폼이엇다.

AI큐레이팅을 통해 작가들의 작품 활동을 촉진시키기도 하고, 사람들은 미술을 조금 더 쉽고 재미있게 경험할 수 있다는 데에 의의를 둔 어플리케이션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기계적인 큐레이팅을 완전히 보완해 훨씬 자연스러운 큐레이팅이 가능해졌다.

굉장히 마이너한 신진화가의 정보와 사조 분석은 물론이고 아트밸리 지도, 전시 일정, 내 손 안의 미술관, 가상현실로 보는 그때 그 시대의 미술관, 아트 컨설팅까지.

현대 미술계에서 하고 있는 모든 서비스들을 집약시켜놓은 것이었다.

“업그레이드를 하는 것도 엄청 까다로운 문제지만, 이젠 사실 뭘 더 업그레이드해야 하느냐가 더 시급한 문제야. 이미 할 수 있는 건 다 구현해놓은 상태거든.”

없는 것 빼고 다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 거라면 이미 어플리케이션 사업은 대성공이었다.

하지만 예술에도 그렇듯 기술혁신에도 도착이란 없는 말 아니던가.

없는 것 빼고 다 있다면 이젠 없는 것도 있게 해야 할 것이었다.

“예술가들을 지원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어플은 어때요?”

“예술가들을 지원하는 어플? 지금 지원은 충분하지 않아?”

충분하지 않았다.

아무리 미국 정부에서 지원을 많이 한다고 해도 예술성을 자유롭게 나타내기에는 돈이 많이 드는 법이었다.

실제로 아무리 모네에게 돈을 많이 빌려줬어도 물감 몇 개 사고 나면 다시 무일푼이 되어버리지 않았던가.

현재 미국의 지원은 화가들을 계속 그릴 수 있게는 만들어줬지만, 더 발전할 수 있을 만큼 금액적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예술에 대한 지원은 많을수록 좋죠. 물론 이 이상 정부의 지원을 받기는 불가능하지만요.”

아트밸리에서 후원금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그걸 완전히 쪼개서 나눠주는 것도 그리 발전적인 방안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거야?”

“펀딩을 하는 플랫폼을 만드는 거예요.”

“펀딩……?”

예술가들과 후원자들이 모두 활용하는 플랫폼을 만들어 그곳에서 예술가들이 직접 작품에 필요한 펀딩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후원자들 입장에서는 일종의 투자 플랫폼인 것이었다.

그런 어플이 있다면 예술가는 직접 자금을 모으는 데에 용이해질 것이었고, 후원자들은 후원할 작품을 찾기 쉬워졌다.

“좋은 아이디어 같은데? 사실 예술이라는 것도 상업성을 안고 갈 수밖에 없는데, 그런 어플이 있다면 ‘팔리는 작품’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다는 장점도 있어 보여!”

나와 아이다는 새로 만들 어플에 대한 아이디어를 계속 나누며 의견을 주고받았다.

어플리케이션 이름은 ‘AI FEEL U’로 정해졌다.

그때 누군가 VR관 입구를 벌컥 열고 들이닥쳤다.

“아, 여기 계셨네. 왜 전화를 안 받으세요?”

나는 그제야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부재중 전화를 확인했다.

상철에게서 3건의 부재중 전화가 와 있는 상태였다.

“죄송해요. 지금 긴히 할 말이 있어서 못 받은 것 같네요. 그런데 무슨 일 있으세요?”

“지금 큰일 났습니다. 미술관 수십 군데에서 솜니움에 미술품 달라고 아주 성화예요, 성화.”

미술품을 달라니.

솜니움에 맡겨놓은 미술품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안 그래도 요즘 국제 정세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낀 참이었다.

무언가 대단히 큰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

상철이 말했다.

“러시아에 ‘베어건설’이라고 굉장히 큰 기업이 있는데, 이번에 빚을 져서 진행하고 있는 개발이 크게 실패했습니다.”

그들은 굉장히 비싼 지역을 무리하게 구입해 공사를 강행했다.

하지만 공사를 시작한 뒤 지반에 발견되지 않은 치명적 문제가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다급히 부동산 개발을 철회했지만, 때마침 지어 올리던 건물들이 모조리 붕괴되어 버렸고 투자자가 급속도로 빠져나갔다.

안 그래도 빚을 져서 진행하는 사업인데 투자자까지 빠져나가 버리니 일을 수습할 금전적인 능력을 상실해버린 것이었다.

주식 시장판 뱅크런이나 다름이 없었다.

베어건설 측은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소유하고 있던 부동산을 전부 매각하고 상황 수습에 힘썼지만, 여전히 돈은 부족했다.

남은 건 세계 각국에 빌려주었던 미술작품들을 가져오는 것뿐이었고, 아직 대여 기간이 남은 작품들을 조기 상환하라고 압박을 가한 것이었다.

전시관을 텅 비우게 생긴 미술관 측에서는 엄한 덤터기를 쓰게 되어 솜니움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었다.

“돌려주기 싫어도 어쩔 수 없네요. 소유자가 확실하니.”

“그렇죠. 오늘 돌려주느냐 내일 돌려주느냐, 그 차이만 있을 뿐이죠. ”

나는 상철에게 미술품 대여를 요구하는 미술관 수와 수요 총량을 정확히 전해 들었다.

솜니움에 대해 잘 아는 각 미술관 대표 큐레이터들이 자신의 기획 전시에 적합한 솜니움의 작품을 얻기 위해 요청서를 보내오고 있었다.

평상시 소장 작품의 다양화에 매진해왔던 성과로도 볼 수 있었다.

아부다비 루브르 별관, 오르세 미술관까지, 대여를 요구하는 미술관은 총 38군데나 되었다.

“일단 알겠어요. 위급한 상황이니 빌려줘야죠. 그러겠다고 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상철은 다시 휴대폰을 붙잡고 VR관을 빠져나갔다.

듣던 아이다가 말했다.

“완전 봉 잡았네. 방문객이 줄어드는 것보다 더 큰 대여료를 받으면 되니까.”

솜니움은 베어건설에서 대여해온 미술품이 없기 때문에 아이다의 말대로 이익이 되었으면 되었지 손해될 건 없었다.

하지만 내가 걱정하는 건 당장의 손익보다 더 큰 기회였다.

이렇게 전 세계 미술계를 뒤흔들어놓을 만큼 보유 미술품이 많은 기업이 있다는 게 말이다.

명작들 백수십 점을 가지고 있으려면 굉장히 큰돈이 필요할 텐데, 일정 액수 이상 상승하지 않는 그림을 왜 현금화하지 않았느냐는 것이었다.

명작들은 탈세 용도로 쓸 수 없고, 당장 개발에 투입할 돈 한 푼 한 푼이 소중한 게 기업 아니던가.

미술관 입장에서 그 작품들은 완전히 매입하기에 너무 비쌌다.

베어건설에서도 한 번에 작품을 팔지 않고 대여료를 받아내는 게 장기적으로 이익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이젠 현금을 마련하기 위해 작품들을 불러들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때 가장 바빠지는 건 단연 경매장.

특히 양대산맥인 크리스티와 소더비일 것이었다.

엄청난 양의 명작들이 매물로 올라오는 상황이라면, 지금의 경매장 양자구도를 변화시킬 만한 큰 사건이 될 만했다.

거래 성과를 이번 기회에 확 끌어올려 경쟁자보다 훨씬 우위에 서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내가 제안했다.

“빨리 미술품 경매 어플리케이션부터 만들죠.”

“경매 어플리케이션? ……설마.”

그랬다.

지금 크리스티는 소더비를 넘고 싶을 것이고, 소더비는 크리스티를 넘고 싶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양자구도는 바뀌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여태까지 계속 비슷한 규모를 유지해왔다면 지금이라고 달라질 변수는 없었다.

실제로 어떻게 될지는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 기회를 노려 새로운 강자가 등장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고착화된 그들의 경쟁 구도에 끼어 있지 않으면서도 좀 더 효율적으로 매물들을 확보할 수 있는 경매 업체.

나는 지금 그걸 만들어보고 싶은 것이었다.

“근데 그게 될까? 이미 크리스티와 소더비가 너무 유명하잖아. 나 같으면 신생 업체에 경매를 맡기지 못할 것 같은데? 아무리 급처라도 비싸게 팔고 싶을 테니까.”

“상관없어요. 그게 문제라면.”

거기까지 말했을 때 아이다가 지레 경악하며 말을 더듬었다.

“하지만, 예준아. 설마…… 너?”

“그래요. 제가 경매업체를 인수해버리면 될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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