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NO-riginality
“드로잉 쇼라면…… 음악에 맞춰 그림을 그리는 퍼포먼스를 하는 그걸 말하는 건가?”
“네, 맞아요.”
장피에르는 조금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알았다는 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예준이 네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 한 번 크게 화제가 된 적 있었지. 생각해보니까 멋질 것 같은데?’
몽마르뜨의 르콩슐라 앞에서 작업하는 영상이 SNS에 공유되어 한 번 크게 인기를 끈 적이 있었다.
나의 첫 예술 공동체를 조직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계기이기도 했다.
나의 그리는 모습이 드로잉 쇼와 비슷하다고는 생각해본 적 없었다.
하지만 그러고 보면 그날의 작업엔 드로잉 쇼로서의 요소가 충분했다.
결과물을 보기 전부터 관람객들을 감탄시킨다는 점에서 말이다.
“아아, 왜 이렇게 사람들이 붐비는가 했더니. 윤예준 화가님이 오셔서 그런 거였군요.”
옆에서 그림을 구경하던 아고라 센터의 예술가가 나를 보며 말을 걸어왔다.
그렇게 내가 아고라 센터에 왔다는 게 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고, 곧 계획해두었던 드로잉 쇼를 진행할 상황이 마련되었다.
나는 장피에르에게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말한 뒤 드로잉 쇼를 진행하기 위해 자리를 떴다.
‘역사적 한 획이어서는 결국 고이기 마련이지. 그 자체로 흐름일 수 있는 사조로 만들어야 해.’
이번 드로잉 쇼는 그 시도를 굳히는 절호의 계기가 될 것이었다.
-곧이어, 아트밸리 내 아고라 센터에서 윤예준과 신진화가들의 드로잉 쇼가 진행될 예정이오니 많은 관심 부탁드리겠습니다.
아트밸리 전체에 드로잉 쇼가 임박했음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그로부터 단 몇 분 기다렸을 뿐인데 아고라 센터의 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드로잉 쇼 무대 뒤에서 드로잉 쇼를 위한 특별 분장을 하고 시간을 기다리는데, 함께하기로 한 화가들이 소곤거렸다.
“왜 그러세요?”
내가 묻자 그들이 말했다.
“이 근처 교통 통제하는 경찰들이 집계한 건데, 오늘 개관식 때보다 1.5배 이상 많은 사람들이 모였대요.”
그들이 보여준 휴대폰 화면에는 솜니움 10주년 기념행사의 거행을 알리는 기사들이 한가득 표시되어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아직 20대 초반이고, 벌써부터 뒷걸음질치기엔 너무 젊었다.
시간이 되어 무대 위로 올라서자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오! 뭐야! 윤예준 맞아?”
“완전 연예인 같은데!”
“그림보다는 얼굴을 더 보고 싶은데……!”
사람들이 선뜻 놀라지도 못하고 당황했다.
드로잉 쇼를 위해 무대 메이크업을 했기 때문에 조금 더 인상이 훤해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평상시에 엉망으로 다닌 건 아닌데.
나는 마이크를 잡아 들고 말했다.
“이번에 제가 특별히 선보일 드로잉 쇼는, 저 혼자가 아니라 신진화가들과 함께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소통예술과 화합이 제가 생각하는 예술의 최고 가치여서이기도 하고, 신진화가의 이름을 더 널리 알리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나는 무대 뒤에 있는 신진화가들을 한 명씩 호명하며 입장시켜 소개했다.
“저희가 어떤 그림을 그리게 될지 궁금하시죠?”
“네!”
“저희도 그렇습니다. ……그림에 감정을 담거나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아도 좋고, 또 아름다움을 그대로 내어 보이는 것도 좋습니다. 어떤 표현법을 사용하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죠. 중요한 건 그 작품을 통해 어떤 소통을 할 수 있느냐 아니겠어요?”
이미 세리의 <소통의 사조>와 나의 TED 강연으로 하모니즘에 대한 건 잘 알려진 상태였다.
관객들은 어려움 없이 나의 말을 잘 받아들이고 있었다.
“저와 여기 계신 화가들, 그리고 저희와 여러분들이 어떤 소통을 해내느냐에 따라서 작품 결과물이 완전히 달라질 것 같습니다.”
나와 신진화가들은 병풍처럼 좌우로 길쭉한 캔버스를 회전시켰다.
캔버스 뒷면에선 긴 거울이 드러나 화가들과 관객들의 모습을 그대로 비쳤다.
관객들의 박수와 함께 드로잉 쇼 음악이 흘러나왔다.
전주가 흐르는 동안 화가들은 한 손에 붓 두어 개씩을 동시에 끼고 물감을 섞거니 묻히거니 했다.
인간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법이었다.
그 뒤 화가들은 거울에 비친 관객들의 모습을 음미했다.
그리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관객들의 모습을 밑그림 삼아 물감을 묻히고 있는 것이었다.
일렬로 길게 선 채 그리고 있었지만, 음악의 한 마디가 끝날 때마다 옆으로 한 걸음씩 이동해서 섰다.
방금까지 그 자리에 서 있던 화가가 관객들의 어떤 모습을 어떤 각도에서 보고 있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처음 그림을 그리기 위해 등을 돌렸을 때 아쉬워했던 관객들은 이제 캔버스에서 눈을 떼지도 못했다.
그렇게 거울은 물감으로 뒤덮이기 시작했고, 관객 참여형 드로잉 쇼 작품 가 완성되었다.
음악이 완전히 끝나자 관객들은 저마다 환호성을 터뜨렸다.
***
역시나 바로 술을 끊는 건 조금 어렵고, 일단 압생트보다 약한 술로 줄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래도 나판은 자신이 나름 금주에 성공해가고 있다고 믿었다.
지금은 미국 라거만으로 머리가 핑- 돌 정도로 취할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맥주는 누구나 그 정도 먹었다.
물론, 더 줄일 것이었다.
아고라 센터라는 곳 방향에서 얼마간 들려오던 신나는 음악 소리는 고막이 터질 듯한 함성 소리와 함께 막을 내렸다.
윤예준의 그 드로잉 쇼가 끝난 것이었다.
드로잉 쇼가 진행되는 동안 나판은 난생처음 에보리진 전통 복장을 입고 아트밸리 곳곳을 구경했다.
한쪽에 마련된 CEEA 이탈리아 지부 부스에서는 윤예준의 전기 <우회> 초판이 판매 중이었다.
솜니움 기념행사 판매용으로 넘겨진 것들이었는데, 벌써 1쇄가 완판되어 미국 출판 업계 1위에 올랐다고들 떠들었다.
한화로 83억 원쯤 벌었다고.
계속 출판할 계획이라고 하니 수익은 더더욱 올라갈 것이었다.
구경을 마치고 솜니움 미술관으로 들어왔다.
솜니움 신진화가전에 들어서니 비평가로 보이는 사람들이 진지하게 작품들을 살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중엔 나판의 도 포함되어 있었다.
호주 아치볼드에 출판해 그에게 첫 ‘비상한’ 작품선의 영광을 선물했던 바로 그 작품이었다.
윤예준 덕에 재심에 올랐던.
아치볼드는 에보리진들의 더 적극적인 홍보를 위해 당선작을 몇 년간 외부에 마음껏 공개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 덕에 솜니움에도 걸어둘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 작품은…… 굉장히 쿨한데다가 이미 완성되어 있군.”
“신인이라는 게 믿기지 않네요. 작품이 굉장히 위트있지 않습니까?”
을 그리던 당시 나판은 술에 잔뜩 취해 있었다.
그래서 작품의 점묘는 조금 비뚤빼뚤했다.
하지만 그 비뚤어진 분위기는 나판이 의도한 분위기였다.
여전히 초상화가 수상작 반열에 오르는 아치볼드의 유행을 의식하고 원주민 초상화를 그리기는 했지만, 그들에 대해 ‘오스트레일리아 사람이 아닌’이라는 제목을 붙인 역설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나판의 의도가 비평가들에게 제대로 전달된 걸 보면 영 운으로 수상한 것만은 아닌 듯했다.
기분이 좋아진 나판은 맥주를 한 병 더 땄다.
솜니움 미술관을 나와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켜려는데 수많은 기자들이 나판에게도 달려들어 마이크를 건넸다.
안 그래도 보리차처럼 심심한 술인데, 제대로 마시지도 못하게 하다니.
“나판 씨 아닙니까? 윤예준 씨와 함께 그림을 그려 화제를 모았던! 아치볼드 ‘비상한’ 작품선에 오른 작품을 솜니움에서 공개하신 의도가 뭡니까?”
“혹시 미국 원주민과 실향의 아픔을 공유하고 싶으셨던 겁니까?”
“지금 굉장히 편안해 보이시는데, 현대의 옷은 조금 입을 만하십니까?”
그러고 보니 아메리카 원주민들 사이에서 에보리진 아트가 굉장히 큰 화제라고 들었다.
심지어 미국에서 에보리진 아트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바로 나판이었다.
물론 오로지 실력 때문은 아니었고, 윤예준과 함께 취중 작업을 한 영상이 화제가 되면서 그렇게 된 것이었다.
‘No-strailian’이라는 명칭을 변형시켜 ‘No-merican’과 같은 이름도 생겼다고 했다.
“예, 뭐, 옷은 입을 만하고요.”
나판은 분명히 밝혔다.
“예술가로 성공할 기회를 준 건 윤예준이었습니다. 그 친구 덕분에 상도 탔고 이렇게 전시도 할 수 있었던 거죠. 저는 그 와이너리에서 윤예준이라는 화가를 만난 게 정말 인생의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친구가 아니었다면 제가 인터뷰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저처럼 다른 에보리진 아티스트들이 더 많이 알려지길 바랍니다. 다른 에보리진 예술가들에 비하면 저는 명함도 못 내미는 무명 화가일 뿐이에요. 이렇게 유명해진 게 부끄러울 정도로.”
나판은 앞으로도 쭉 자신만 유명해진다면 그건 에보리진이 아니라 윤예준에 대한 관심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자신보다 훌륭한 다른 에보리진 화가들이 유명해져야만 정말 미국인들이 에보리진 예술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자신보다도 훨씬 위대한 예술가가 에보리진에 더 많다고 했다.
나판의 그 인터뷰는 미국과 호주에 동시에 생중계되었다.
그 덕에 윤예준의 <우회>는 물론이고 아치볼드의 <아치볼드 최종회 수상 작품집> 도록의 판매량이 급격히 뛰었다.
나판이 말한 그 훌륭한 에보리진 예술가들의 작품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상황이 완전히 나판의 바람대로 진행된 건 아니었다.
에보리진 예술가들과 나판이 함께 인지도를 높였기 때문이었다.
미국 원주민들과 소외계층에 있던 사람들은 나판을 포함한 에보리진 예술가들과 예준의 솜니움에 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인종차별에 대해 행동하는 사람들이 후원금을 보내기도 했다.
솜니움은 계속 거대해졌고, 에보리진 미술가들이 주로 모여있기로 소문난 코지우스코 방문자도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그렇게 행사가 끝나고 며칠이 지난 뒤 예준은 나판의 그 인터뷰를 뒤늦게 접해볼 수 있었다.
상철과 함께 솜니움 기념행사의 수많은 이슈들을 정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솜니움 행사 입장료로만 750억 원을 벌어들인 걸 보니 경찰의 집계는 정확했었던 듯했다.
행사 준비 금액의 수십 배를 수익으로 거둬들인 것이었다.
솜니움 방문 사실을 SNS에 알려 체면치레를 하려는 연예인들의 계정도 대부분 검토했다.
배우들은 물론이고 가수부터 공연예술가까지.
특히 유명 우주비행사 ‘아르투아’도 슈퍼맨 복장을 하고 사진을 찍어 SNS에 게시했다.
메인 작품이었던 <생명의 해바라기>는 필립의 새로운 영화에 등장할 예정이었다.
필립의 차기작이 유명해지는 수단이 도면서 그림도 더욱 널리 알려질 것이었다.
그 사실을 홍보하는 데엔 아트밸리에서 관리하는 너튜브 채널의 공로가 컸다.
솜니움에 메인으로 전시해둔 <생명의 해바라기>에 대한 이야기를 인터넷에 게시해 수많은 구독자 수를 이끌었기 때문이었다.
조금 의외였던 건 나판의 이었다.
굉장히 훌륭한 그림이었지만 이미 그는 미국에서 유명했고, 또 아치볼드에서 검증도 한 터라 더는 알려질 이유가 없었다.
신진화가전 한쪽에 평범하게 전시되어 있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나판의 그 조금 건방진 듯하면서도 무덤덤한 인터뷰라 화제에 올라 이 미국 내 차별 반대의 심볼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초상화와 점묘의 패턴이 마크로 사용하기 좋은 디자인이기도 했고 말이다.
“그렇단 말이지……?”
이 기세를 몰아 미국 원주민과 에보리진의 완전한 연대를 가능하게 할 방법이 불현듯 예준의 머릿속을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