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생명의 해바라기 (4)
<물레방아를 돌리는 물살> 프로젝트는 대성해서 이젠 끝이 보이지 않는 밀밭을 이루었다고 했다.
지금은 그걸 수확할 시기인데, 무려 천 파운드 이상의 밀이 쏟아져나왔다.
잿가루만 날리던 코지우스코가 멋진 밀밭이 되어 있을 것을 상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가 굴려낸 건 작은 물레방아였지만 거기서 쏟아져나온 물이 수천만 평의 농지를 이루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이제 <제로 헝거를 위하여>라고, 세계 기아 종식을 위한 국제 아트쇼를 열게 되었습니다. 드넓은 밀밭 한가운데에 높은 랜드마크 시계탑이 우뚝 솟아있는 모습이 그려지십니까?
그는 그 국제 아트쇼가 코지우스코의 정기 지역축제가 될 것 같다고 했다.
물론 나의 <물레방아를 돌리는 물살>이 메인 작품으로, 기아와 기타 실향자들을 위한 전시회가 진행될 예정이었다.
현재는 그곳 시계탑 하단에 나의 그림 한 점만 더 걸면 딱 좋을 것 같다고 했다.
나는 내가 그린 <생명의 노랑>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좋아요. 마침 적당한 작품이 하나 있네요.”
나는 <생명의 노랑>을 보내주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제로 헝거를 위하여>는 월드피스에서 책임지고 잘 진행하겠다고 했다.
나는 솜니움 10주년 기념행사를 치러야 했다.
할로윈이기 때문이었다.
아트밸리 예술가들과 합심해서 기념행사를 완벽하게 준비해놓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할로윈이 되었다.
낮부터 곳곳을 돌아다니며 특별 조형물들을 구경하며 각자의 길을 걷던 사람들은 해 질 무렵이 되자 아트밸리 입구에 모여 행진을 시작했다.
상철은 거기서 번잡하게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드림캐쳐 애니메이션 중 <어서 오세요 행복 사진관>의 사진사 할아버지 코스프레를 하고 있었다.
카메라를 보다 자연스럽게 들고 다니기 위한 그만의 묘책이었다.
그는 특히나 유명인사나 셀럽들을 골라서 촬영하는 듯했는데, 나름 높은 기준을 가지고 모델을 골라도 밤새 다 찍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아, 미국엔 알고 지내는 기자가 환경 쪽으로밖엔 없어서. 내년부터는 미리미리 사진 기사들한테 연락을 해야겠네요.”
사보라고는 했지만 정기 간행물뿐만 아니라 주간신문도 발행했다.
아트밸리 예하에 있고 예술 전문지일 뿐 일반 신문사와 똑같은 것이었다.
이미 사보 소속 기자들 중에 사진기자들도 많은 상태였지만 그에게는 부족하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오지 말라고 해도 여기저기서 취재하러 와요. 편집장님도 경쟁하셔야죠.”
“그렇죠. 근데 올해 기념행사는 특별하잖아요?”
그랬다.
원래 코스프레가 드레스코드라는 기준만 있었지만, 지금은 조금 더 세부적인 테마를 정해놓았다.
솜니움은 개관식 이후로 쭉 할로윈 코스프레를 요구해왔는데, 그래서인지 대개 죽음과 관련된 코스프레를 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하지만 올해는 그래선 안 되었다.
상철이 코스프레를 한 <어서 오세요 행복 사진관>의 사진사 할아버지는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가족사진을 찍어주는 초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죽은 가족 구성원이 사진에 함께 나오도록 말이다.
그건 죽음이 아니라 생명에 관련된 능력이었다.
이곳에 모인 다른 사람들의 코스프레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10주년 개관식을 홍보할 때 ‘생명’을 테마로 한 코스프레를 할 계획임을 밝혔다.
호주 산불부터 음주운전 사망까지 세계의 수많은 죽음을 기리기 위해서 말이다.
솜니움 개관 이후 많은 사람들과의 화합을 추구해왔듯, 이번에도 그들의 아픔을 많은 이들에게 공감시키고 싶었다.
나의 발표가 있은 후 연예계 언론에서는 누가 어떤 코스프레를 하고 등장할지 여러 추측을 내놓기도 했다.
그동안 솜니움 할로윈 이벤트 때마다 베스트 드레서로 뽑힌 연예인부터 시작해 이번 컨셉과 딱 맞는 배역을 연기한 배우까지.
뜻밖에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연예인만 해도 손에 다 꼽기 어려울 정도였다.
솜니움 초입엔 원의 <생명의 해바라기>가 전시되어 있었다.
“오오, 정물인데 이렇게나 다채롭다니!”
“정말 화려한데요? 이 원이라는 사람, 저번에 윤예준 화가님과 함께 생명의 노랑 야광도료를 만들었다는 그 사람 이름 아니에요?”
할리우드 영화 속 식물형 외계인 코스프레를 한 원이 로비 한쪽 구석에 서서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의 불안한 표정을 보아하니 낯가림을 그만둔 건 아트밸리 예술가들에게만 한한 것인 듯했다.
사람들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어두운 나무껍질로 둘러싼 몸을 작게 흠칫거리곤 했다.
또한 이렇게 큰 행사에 메인 작품을 전시한 건 처음일 것이었다.
혹평을 받을 리는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두고 싶었지만, 그렇게 안심시켜준다고 해서 정말 안심이 되는 건 아니었다.
***
로비에서 <생명의 해바라기>와 마주 선 뒤 오른쪽으로 돌면 바로 ‘해외 교류전’ 전시장 입구가 나왔다.
나와 상철은 그곳으로 들어갔다.
솜니움 개관 10주년을 축하하는 전 세계 미술관에서 각 3작품씩 무료로 빌려주었다.
무료로 빌려주는 것이긴 하지만 미술관 중 최대 규모의 행사인 솜니움 기념행사 출품작이기도 했다.
미술관마다 가장 자랑할 만한 작품들을 엄선해서 보냈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도난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있었는지 미술관마다 경비 인력을 수십 명씩 보내왔다.
모든 인력을 다 활용한다면 전시장 내에 발 디딜 틈이 없어질 정도였다.
솜니움에서 임의로 교대근무 일정을 마련해 인력을 줄였지만, 그 덕에 해외 교류전 전시장 경비는 굉장히 삼엄해졌다.
그 정도 불안감을 감수하고 작품을 보내온 것이었다.
미술관 측의 그 마음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기 때문에 전시관 인테리어를 조금 특별하게 해놓았다.
루브르면 루브르, 오르세면 오르세 등 그 미술관이 떠오를 법한 인테리어로 구역을 구분해 작품을 모아서 전시해두었다.
그들도 나의 기념행사를 도왔으니 나도 그들 미술관의 홍보를 도와야 할 것이었다.
카메라를 들고 거의 초 단위로 셔터를 누르던 상철은 해외 교류전에 들어선 이후부터는 카메라에서 손을 떼었다.
각 미술관에서 어떤 작품을 보냈는지가 관전 포인트였기 때문에 촬영을 해 홍보하는 건 적절치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기념행사 기획을 함께 책임진 아트밸리 예술가들은 그곳 작품들이 나 윤예준에 대한 선물이기도 하다고 했다.
그래서 해외 교류전에 어떤 그림이 왔는지는 내게도 공개하지 않겠다고.
기념행사가 시작되면 각 미술관에서 내게 한 가지 이벤트를 할 테니 할로윈까지 기다려달라고 했다.
‘무슨 이벤트를 준비했다는 거지?’
셀럽들과 함께 들어가자 각 미술관 관계자들이 구역 앞에 서서 내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내게 작품을 공개하고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동선 따라 이동하면 미술관마다 가려놓았던 베일을 걷었고, 그렇게 그림이 공개되면 나를 따라 걷던 셀럽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오르세에서는 밀레의 <이삭줍기>와 모네의 <해돋이>, 내셔널 갤러리에서는 아르놀 피니의 <부부의 초상>과 조지프 말로드의 <터너 전함 테메레르의 마지막 항해>, 보티첼리의 <비너스와 마르소>를 전시해놓았다.
한 군데씩 살핀 끝에 루브르관에 도착했다.
“오랜만이구나 예준아.”
루브르엔 질긴 연이 있었다.
IAA 때도 그랬고, 또 비슷한 때에 진행한 코란 한지화 작업도 그렇고.
누군가와 관계를 텄어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었다.
하지만 그 관계자는 그런 것 치고도 굉장히 반가운 목소리로 말을 건네왔다.
“어? 장피에르 아저씨?”
환생한 뒤 아버지 다음으로 처음 대화를 나눴던 장피에르였다.
경매장 거래사로 일하는 바로 그 장피에르 말이다.
“어떻게 여기 계세요?”
장피에르는 자신이 경매장에서 일하면서 루브르와 연이 깊게 쌓이기도 했고, 미술품 운반에는 거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루브르의 솜니움 해외 교류전 대책팀 책임자를 맡게 되었다고.
원래 같아서는 일류 큐레이터를 고용해서 왔겠지만, 오래간만에 나와 만나보고 싶어서 직접 나섰다고 했다.
“저를 위해 와주시다니, 이렇게 감사할 수가. 경매사에게는 시간이 금이잖아요? 그래도 너무 반갑네요!”
“내가 언제 너에게 시간을 안 쓴 적 있었나? 하하하. 그리고 이제 너에 비하면 내 시간은 너무 헐값이 됐지.”
장피에르는 그렇게 말하고 웃으며 작품 공개를 시작했다.
“자, 그럼. 지금부터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저희 루브르에서는……”
“잠시만요. 제가 맞혀볼게요.”
격식을 차리며 베일을 걷어내려던 장피에르가 손을 멈췄다.
“음…… 일단 앵그르의 <터키탕>과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있을 것 같고…… 나머지 하나는.”
내가 작품을 하나씩 꼽자 장피에르가 놀랐다.
그들이 보낼 법한 작품을 예상한 것이기도 했지만 내가 원하는 작품이기도 했다.
“제가 누드화로도 이름을 알렸으니까, 또 앵그르의 <발팽송의 목욕하는 여인>?”
“아, 정답입니다.”
장피에르가 걷어낸 베일 너머에는 정말로 그 세 작품이 있었다.
“아, 다른 미술관에서는 놀래키는 재미를 가지고 가는 것 같던데. 그렇게 맞혀버리시니 아쉽네요.”
장피에르의 그 말에 이젠 셀럽들을 따라다니며 각자 어떤 작품을 선물했는지 경계하며 살피던 타 미술관 관계자들이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에이. 저와 루브르가 특별한 사이라는 증거죠. 편집장님, 이거 기사로 써주세요.”
“이미 다 받아적고 있습니다.”
조상철이 수첩을 끄적이며 대답했다.
그렇게 해외 교류전 작품 공개를 마친 뒤 전시장 바깥으로 나왔다.
상철은 아트밸리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을 몽땅 취재하러 이만 가보겠다고 했다.
나는 오랜만에 장피에르와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내가 여기를 가끔 와보기는 했는데, 올 때마다 네가 없더구나.”
“올 때 말씀하시지 그러셨어요. 제가 자리를 좀 자주 비워서.”
“에이, 무슨! 얼마나 귀한 손님이라고.”
장피에르가 손사래를 쳤다.
그는 내가 아프리카에 있는 동안에만 두 번이나 와보았다고 했다.
올 때마다 신진화가들의 작품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고.
항상 다른 화풍의 작품들이 소개되어서 단 몇 달만 자리를 비워도 흐름을 따라잡기가 어렵다고 했다.
말이 나온 김에 나와 장피에르는 아고라 센터에서 진행되고 있는 테마전을 보러 가기로 했다.
그곳에서 할 일도 있고 말이다.
아고라 센터에는 창의적인 코스프레를 한 예술가들이 거리에 나와 서로의 작품을 구경하고 있었다.
화가와 관람객의 구분이 없었다.
정말 누구나 작품을 가져와도 바로 전시를 시켜주는 곳이 바로 아고라 센터였으니까 말이다.
장피에르의 말대로 못 본 새 굉장히 많은 유형의 작품들이 생겨 있었다.
고전적인 작풍이든 현대적인 작풍이든, 저마다 작풍은 다채로웠지만 ‘하모니즘’ 미술로서 공통 분모를 이루고 있었다.
작풍으로 구분되지 않는 하모니즘의 특성상 사조가 자리 잡는 데에 오래 걸릴지도 몰랐는데, 이 정도면 제법 자리를 잡은 것 같았다.
“오, 여기 민제 그림도 있네.”
장피에르는 전시회를 즐기면서 아고라 센터의 곳곳을 누볐다.
“이 사조라는 게 미술적 상상력의 흐름을 이야기하는 거잖아. 그래서 사조의 등장과 퇴장은 빠르게 이루어질수록 좋아. 그런데 이 하모니즘이라는 건 그런 차원의 일반적인 사조로는 보이지 않는구나.”
처음 내가 원했던 건 내가 오랫동안 누릴 수 있는 나만의 사조였다.
내가 하고 싶은 작품을 마음대로 시도해도 사람들의 찬사를 받을 수 있도록 말이다.
하지만 어느 시점부터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미디어 아트는 동양화든 서양화든, 그리고 에보리진 아트든 항상 하고 싶은 대로 시도했고 찬사를 받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 덕에 사조에 대한 시각을 확 넓혀낼 수 있었다.
정체되어 또 신진화가들을 제한하는 전통이 되지 않는 사조를 구현하는 게 최종 목표가 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 목표는 목전에 있는 듯했다.
“응? 그런데 저건 뭐지?”
작품을 살피며 이야기를 하던 장피에르가 거리 정면 먼 곳을 가리켰다.
“뭐가요?”
나도 함께 내다보았다.
그가 가리키고 있는 건 현수막이었다.
현수막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윤예준과 신인 화가의 화려한 드로잉 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