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이 제일 쉬움-210화 (210/241)

210화. 생명의 해바라기 (3)

“엄청 놀랐네요! 조상철 기자님 맞으시죠? 어떻게 된 일이에요?”

조상철은 웃으며 근처 의자를 끌어와 두 캔버스 사이에 앉았다.

언뜻 당당해 보이는 듯도 했지만 제대로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서먹서먹해하는 티는 감추지 못했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 윤예준종합예술학교 입학식에서 대화를 나눴던 바가 있기 때문에 오히려 더 불편해하는 듯했다.

돈과 승진에 눈이 멀었던 상철은 굉장히 오랫동안 미국 곳곳을 떠돌며 방황했다고 했다.

“처음엔 한인타운에서 잡역을 하다가 좀 더 임금이 높다는 동부로 건너왔습니다. 거기서도 물론 생활은 크게 다르지 않았죠. 좀 더 많은 임금을 받고 싶다는 욕망은 이뤘지만요.”

계속 돈만을 좇는 삶은 기자로 살 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오히려 기자를 더 이상 할 수 없어 주먹구구식으로만 살아도 딱 이렇게 살고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정말 반성한 게 맞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나름 자리 잡은 일도 다 때려치우고 환경부에 취직했습니다. 티는 안 났겠지만 아트밸리에 도움되는 일도 조금 했어요.”

아트밸리를 담당하는 청소업체에 지원금을 주거나 로드아일랜드주에 해양 환경 관련 사업을 제안해 노스브라더에 이익이 되는 정책 마련에도 힘을 쓰는 식이었다.

그래도 막상 내 앞에 설 자신이 없어 모습을 드러내지는 못하고 겉돌기만 했다.

“빈센 조 씨가 한국에서 기자였다니. 정의를 쫓았나요?”

원이 묻자 상철은 폭소를 터뜨렸다.

“아, 그랬다면 지금 제 삶이 얼마나 행복했겠습니까. 평생 자랑스러워해도 모자란 업적이겠죠.”

상철은 자신이 기자 생활에 했던 부정적인 일을 중심으로 원에게 털어놓았다.

원은 한국을 떠날 정도의 잘못을 해온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사실 그랬다.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는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시대가 조금 더 빨라 군부 때 기자를 했으면 아마 부역자가 됐을 거예요. 그런 일은 하지 않았지만, 당시 제 천성은 그러고도 남았을 놈이었습니다.”

상철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렇게 말했다.

10년이나 지난 일이었지만 아직 그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불편한 모양이었다.

“에이, 너무 그러지 마세요. 죄인은 시대가 만든다는 말도 있잖아요? 그리고 반성이 충분했다면 과거는 과거일 뿐이에요. 이제 조상철 대표님은 미래로 나아가실 자격이 충분하잖아요?”

“그렇게 말씀하시니 마음이 한결 나은데, 이렇게 편해도 될지 모르겠네요.”

그렇게까지 채찍질을 하는 걸 보면 반성은 충분한 것 같았다.

“음. 과거를 과거에 묻어두는 게 솔직히 저한테도 좋아요. 저 헬멧을 들고 다가오시니 저를 위협하는 줄 알고 긴장했거든요.”

그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농담을 건네자 상철은 원이 정의를 좇았느냐고 물었을 때처럼 웃었다.

“아, 하하하! 오해하셨네요. 저건 그냥…… 윤예준 씨 소굴에 들어오면 돌이라도 맞게 될까 봐 투석형 대책으로 쓴 겁니다.”

그게 가능할 만큼 한국 언론계에서 굉장히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런 그라면 앞으로 무슨 일을 해도 내게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었다.

“빈센 조 대표님은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세요. 오토바이용 헬멧이잖아요?”

“아아, 그래서 이런 라이더 차림이셨군요.”

상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동차가 있기는 한데 연비 문제 때문에 보통은 오토바이를 타고 다닙니다. 배기량 차이가 압도적으로 많이 나더라고요. 이 재킷도…… 원래는 합성 고무도 좀 좋지 못한 것 같아 사용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테너리 천연가죽으로 나온 재킷이라기에 냉큼 샀어요.”

“와. 대단하시네요.”

“그래도 명색이 환경부 사람인데. 환경 생각해야죠. 그래도 오토바이를 탈 거면 멋지게라도 타자는 마음에서 이렇게 옷도 갖춰 입고 다닙니다.”

다시 보니 상철의 재킷은 정말로 테너리의 가죽이었다.

상철은 앉은 자리에서 본격적으로 나와 원의 그림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나는 생명의 노랑을 통해 간만에 풍경화를 그렸다.

캔버스 반대편에서 해가 기울고 있는 미국 동부 사막의 풍경이었다.

호주 화재민들에게 끝은 새로운 시작이라는 조언을 해준 바가 있는데, 해가 기울기 시작하는 때 내비치기 시작하는 색이 바로 생명의 노랑이라는 데에서 착안한 그림이었다.

그들과 같은 생각으로 좌절한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기 위한 작품이었다.

“그림이 굉장히 좋네요. 근데 저기 원 씨 그림에도 예준 님께서 손을 좀 댄 거 같은데요?”

“알아보시는군요.”

상철은 내가 새로운 그림을 그릴 때마다 전부 봐왔다고 했다.

그래서 나의 그림은 오토바이를 타고 가면서 봐도 알아볼 수 있다고.

“제가 문화부 기자이기는 했지만 사실 스캔들 위주였지 예술적으로는 아예 문외한이라서. 그런 방면으로는 어차피 <미,감>을 스크랩하면 되기도 했고…… 그래서 따로 공부를 안 했는데도 예준 님 작품이 대단한 줄은 알겠더군요.”

상철은 딱 이 그림이 특종감인지 아닌지만 구분할 줄 알았다고 했다.

영 모르는 건 아니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요즘 상철은 그림에서 프레임의 역할에 심취해 있다고 했다.

이 작품에 그려지지 않은 것과 그려진 것 사이의 관계에 골몰하는 게 굉장히 재미있더라고 했다.

“여기 예준 님께서 그린 <생명의 노랑>은 해가 살살 지고 있는데 그 뒤를 돌아보지 않잖아요? 해가 지는 것에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듯이. 실제로 사는 사람들이 하루 해에 그렇게 미련을 가지면서 살지는 않는데, 왜인지 이 그림에서는 그 미련이 굉장히 절절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상철이 제대로 보았다.

하루 해가 지는 이치와 화재민들의 상실을 동일 선상에 두고 비교하는 건 크나큰 실례일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해 질 녘의 노란 음역을 더욱 절절하게 표현해둔 것이었다.

그게 불타버린 코지우스코의 적절한 은유가 될 수 있도록 말이다.

대신 해가 지면 다시 뜨듯 새로운 삶이 시작될 것이라는 응원의 메시지도 함께 담아야 했다.

상철의 말대로 그걸 프레임이 해내고 있는 것이었다.

시선이 제법이었다.

자신은 문외한이라고 했지만 그래도 그림 볼 줄 아는 눈은 비평가 못지않았다.

거기다가 아트밸리에 대한 관심도 크고 말이다.

나는 상철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조상철 대표님도 궁금하시지 않으세요? 만약 지금 다시 기자가 되면 전처럼 돈과 승진만 좇게 될지 아닐지.”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확신은 없네요. 생각보다 기자는 힘이 없어서 독해질 수밖에 없거든요.”

상철은 자신이 이렇게 된 게 그 별것 아니어 보이는 ‘문화부장’에 목을 맸기 때문이라고 했다.

자신처럼 정신력이 약한 사람이 기자가 되면 그 사소한 직책에도 목숨을 걸게 된다고, 영혼을 팔게 된다고 했다.

“그럼 문화부장이 아니라 수석 편집장이 되면요?”

“수석 편집장……은 기자라기보다는 차라리 언론계 비평가라고 하는 게 맞죠. 현장 안 나가고 기사 직접 안 쓰고 진짜 편집만 하는걸요.”

기자 생활에 대해서는 굉장히 빠삭하지만 미련은 없어 보였다.

나는 확신을 가지고 제안했다.

“아트밸리에 <미,감>보다 훨씬 큰 규모의 사보를 만들고 싶은데, 그곳의 수석 편집장을 맡아주실 순 없을까요? 원하면 취재도 하시고요.”

“예? 저한테 다시 기자를 하라는 말씀이신가요?”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수석 편집장은 기자라기보다는 비평가라면서요?”

“비평가라면 더더욱 못합니다.”

상철은 웃음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이거 참, 너무 혹할 만한 제안이라서, 참. 이게……”

상철은 선뜻 거절도 수락도 못 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게 내게는 완곡한 수락 의사로 들렸다.

“같이 하시죠. 그러시는 걸로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좋은 기회를 주셔서.”

상철은 싱숭생숭한 표정으로 허공만 들여다보며 ‘다시 기자…… 기자라……’ 중얼거렸다.

그리고 문득 눈빛이 빛나기도 했다.

기자 시절을 떠올리며 잠시 그 당시의 마음가짐을 떠올렸기 때문인 모양이었다.

그 눈빛만 봐도 상철에게 어울리는 역할이 무엇인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내게 꼭 필요하기도 했다.

활동을 할 때마다 기자들을 모집하고, 상대하고, 너튜브에 게시하고, 또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시간을 잡아먹는 등 그동안 홍보에만 시간 낭비가 굉장히 컸다.

아트밸리 사보를 만들어 거기 조상철처럼 끈질긴 기자를 편집장으로 앉혀놓는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

[로드아일랜드 북부에 위치한 악마의 고속도로 ‘번트 스왐프 에비뉴 하이웨이’, 지난달 교통사고 사망 사고 ‘0건’]

[각종 운송회사 탑차, 스쿨버스, 가드레일 등에 도입된 윤예준의 ‘생명의 노랑’, 그 성과는?]

[생명의 노랑 활용한 윤예준의 작품 <생명의 노랑>, 솜니움 해외 교류전에서 공개될 예정]

[윤예준의 야광도료 효과 대단, 졸음운전 사고 옛말 되나]

한편, ‘생명의 노랑’ 도료 여파로 인터넷과 텔레비전은 한참 시끄러웠다.

예술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미국인들이 겪은 것이었다.

원래 미국은 연간 교통사고 건수가 늘고 있었는데, 생명의 노랑 덕분에 갑자기 오히려 줄기 시작한 것이었다.

생명의 노랑 야광도료는 특히나 해바라기 고속도로에서 더 효용이 컸지만, 제작에 그리 큰 비용이 드는 것도 아니라 미국 전역의 모든 주에서 그 도료를 구입해다가 노면에 바르기 시작했다.

눈을 부시게 하지도 않으면서 졸음을 쫓을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기 때문이었다.

거의 졸음운전을 완전히 잡았다고 해도 무방할 만큼의 성과가 났다.

이 일로 나와 원은 로드아일랜드주에서 모범행정 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공로상 수상과 사진 촬영이 끝나자 주지사 찰리가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로드아일랜드를 예술의 도시로 만들어주신 것도 모자라 이런 대단한 업적까지 세우시다니. 이거 안 되겠습니다. 아트밸리에 지원금을 드려야겠어요. 세제 혜택도 드리고요.”

여러 가지 형태로 내게 돈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CEEA 때에나 지금이나 돈은 내게 더 이상 필요가 없었다.

돈은 언제나 없는 사람들에게나 필요한 것이었다.

“예술로 사람의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걸 다들 잘 알았을 테니 저 많은 사람들이 아트밸리를 찾아올 거예요.”

“그럼요. 당연히 그럴 겁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겠죠. 너무 멀리 살거나 하는 사람들은 말이에요.”

나는 찰리에게 아트밸리 바깥에 있는 예술가들을 지원해달라고 했다.

다른 주와 합동해서 지원 기관 같은 걸 지음으로써 말이다.

그렇게 해야만 더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문화 예술을 누릴 수 있는 동등한 기회를 제공받을 수 있었다.

기관만 마련해주면 아트밸리에서 자문위원을 보내주겠다고 했다.

“굉장히 뜻깊은 일입니다! 차 사고로 항상 많은 주지사들이 골머리를 썩이는데, 저희 주가 이런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아마 적극적으로 협조해줄 겁니다.”

그렇게 미국 곳곳에 예술지원기관(AFTA)이 설립되었다.

그 예하에는 주정부예술지원기구와 시/카운티 지역예술지원기가 등이 생겨났다.

각 지역의 기관 간 파트너십을 기반으로 다층적인 차원에서 예술 지원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개인 화가에 대한 지원뿐만 아니라 공모전 개최, 창의성을 높이는 시스템 노하우 교류 등을 통해서 말이다.

AFTA의 인지도가 늘어남에 따라 일반 민간 예술 단체도 그들의 지원을 받으면 펀드레이징이 훨씬 수월해지는 성과도 있었다.

미국 방송사 ABC에서는 아트밸리와 AFTA를 중심으로 예술의 긍정적인 면을 알리는 데에 편성을 투자했다.

물론 내가 주지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 덕분에 그게 가능했다는 소식도 함께 퍼져나갔다.

그리고 호주 코지우스코 산불이 발생한 지 2년 가까이 흘러 시계탑이 완공되었다는 뉴스도 적절한 때에 보도되었다.

랜드마크는 일부러 만드는 게 아니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방문자들이 결정해주는, 그야말로 선출직이었다.

하지만 나와 현재가 함께 건축한 그 시계탑은 의심할 여지 없는 코지우스코 랜드마크가 되어 관광업계에 퍼져나갔다.

-와. 시계탑 엄청 크다. 몇 층 높이야?

-저기 시계알이 스펙터클라크 시계라며? 준블루 때깔 봐. 건축사가 감각건축이라는 곳이래.

-저 시계알만 해도 우리 집만 할 듯. 안에 장식된 황금이 진짜 하나하나가 엄청 크다던데.

-저기 시간 부분마다 있는 별자리 동물 모양들 말하는 거임? 저 부속 하나하나가 지름이 2m라던데 당연히 비싸겠지.

나는 그 인터넷 반응을 확인하자마자 현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건 지 1초도 지나지 않아 전화가 연결되었다.

-윤 화가님! 뉴스 보셨습니까?

“네! 아,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그동안 굉장히 힘드셨을 텐데요.”

-제가요? 제가 왜 힘듭니까?

현재의 반응이 이상했다.

당연히 여태 계속 건축을 진행했으니까 힘들지 않았겠는가.

아무래도 현재와 나는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했다.

“랜드마크 시계탑 이야기 아니었어요?”

-아아, 그렇죠. 시계탑도 반응이 뜨겁긴 한데 그건 지금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라뇨?”

내가 묻자 현재가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시계탑 앞에 윤예준 화가님이 제작해놓은 <물레방아를 돌리는 물살> 있잖습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