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이 제일 쉬움-209화 (209/241)

209화. 생명의 해바라기 (2)

나는 원과 함께 압둘라의 연구소를 방문했다.

원이 운전대를 탐내는 것 같아 갈 땐 원에게 운전을 맡겼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고속도로로 나올 때보다도 훨씬 긴 운행이 되었다.

도착 예정시간에 맞춰 마중을 나온 압둘라는 굉장히 반가워했다.

“정말 오랜만입니다! 아프리카로 떠나신 뒤에 직접 뵙는 건 이번이 처음 같네요!”

“그러게요. 한창 바쁘실 텐데 찾아온 건 아닐지 모르겠어요.”

“절대 아닙니다.”

압둘라는 솔로몬의 원인 질병인 HHC를 치료하기 위한 연구가 지금 임상 단계에 돌입했다고 했다.

“치료의 첫 시작은 증상 억제겠죠. 세계도시예술가연대 사람들과 함께 연구한 끝에 지금 거의 개발 성공 단계에 있습니다. 기다리는 것 말고는 일이 없죠. 다른 일을 찾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HHC는 증상 자체가 문제였다.

원인을 알 수가 없으니까 말이다.

그 증상을 잡아낼 수 있다면 HHC 자체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나 다름이 없었다.

물론 완전한 치료는 아니었다.

계속 약을 먹어야만 이상증식을 막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 정도만 되어도 혁신이었다.

나와 원은 압둘라의 연구실로 들어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역시나 낯선 사람이 있기 때문인지 원의 말수는 급격히 적어졌다.

“유전공학자라고 하셨는데 EEG뇌파 측정기를 개발하신 걸로도 유명하시잖아요? 그래서 혹시 졸음을 쫓을 수 있는 뇌파도 가능하신지 궁금해서요.”

압둘라는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했다.

물론 며칠 잠을 설친 사람의 졸음을 쫓는 건 어렵지만, 낮잠과 같이 규칙적이지 않은 졸음은 갑자기 뇌가 휴식기에 들었기 때문일 확률이 높아서 말이다.

“졸음을 쫓는 뇌파라고 할 만한 건 없고요. 그냥 뇌를 활성화시키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우리는 깜짝 놀라도 잠이 깨고 꼬집어도 깨잖아요? 어떻게든 교감 신경이 활성화가 된다면 졸음은 달아나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운전자를 깜짝 놀라게 할 순 없었다.

나는 압둘라에게 해바라기 고속도로에 대해 이야기했다.

밤에도 야광처럼 빛이 나 눈에 띄고, 그것이 운전자의 졸음을 깨운다면 밤길 졸음운전을 막을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그러니까 신경을 깨울 수 있는 색을 개발하고 싶어요.”

“신경을 깨울 수 있는 색이라……”

압둘라는 컴퓨터를 만지작거리더니 여러 자극에 대한 파형들을 확인해보기 시작했다.

그리곤 흥미롭다는 듯 이야기했다.

“활성화된 뇌의 파형을 유도하는 시각 정보 중 색깔만으로 표현했을 때 가장 유사한 결과를 내는 색이 무엇인지만 알면 되겠네요. 졸음을 쫓는 색을 도로에 활용하다니…… 이런 색을 만들자는 생각은 여태 아무도 하지 못했습니다. 발견에 성공하면 말 그대로 최초예요.”

압둘라는 지금 당장 바로크 물감으로 뇌파를 측정해보자고 했다.

마침 장시간 운전에 지친 원이 옆에 있었다.

압둘라와 나는 그를 실험실로 안내했다.

원이 안내받은 곳은 육면이 스크린으로 둘러싸인 채 뇌파조영장치와 의자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는 곳이었다.

측정 패드를 머리 이곳저곳에 붙여준 뒤 나와 검사실로 들어왔다.

벽 4면과 천장, 바닥이 바로크 물감에 있는 것들과 동일한 색으로 일제히 바뀌면 그때의 뇌 반응을 확인하는 방식이었다.

역시나 옐로우 색상, 그중에서도 밝은 퍼머넌트 옐로우가 원의 잠을 효율적으로 깨워주고 있었다.

출력된 뇌파 정보를 분석하던 압둘라가 말했다.

“지금으로서는 이 퍼머넌트 옐로우가 가장 가까워 보이네요. 이 색상을 살리는 방식으로 야광 도료를 만들어 노면에 바르면 됩니다. 그리고 그 야광 도료를 개발하는 건 아마 저의 역할이 아니겠죠.”

물론 야광 도료는 아트밸리 연구소와 공장에서 만들어야 할 것이었다.

마침 도로 중앙선을 주황색으로 칠하기도 하고 있으니 잘되었다.

심지어 노란색은 중앙선 말고도 스쿨버스나 공사장 같은 곳에서 많이 쓰는 색 아니던가.

나는 퍼머넌트 옐로우 중에서도 톤이 더 밝거나 어두운 것들, 투명하거나 그렇지 않은 것들을 조절해 뇌파를 더 분석해본 뒤 가장 활성화 기능이 뛰어난 것을 수집해 연구소로 보내주었다.

졸음을 쫓는 야광 도료 개발 프로젝트였다.

이름은 ‘생명의 노랑’인데, 이 생명의 노랑을 뒤집어쓴 차량이나 고속도로 구조물, 야광 중앙선은 곳곳의 운전자들의 잠을 깨우며 수많은 생명을 살려낼 것이었다.

그렇게 아트밸리 연구원들이 생명의 노랑을 야광빛으로 구현하는 작업에 들어간 사이 CEEA에서 나의 전기 시안이 전달되어 왔다.

책 제목은 였다.

리틀마네로 처음 이름을 알린 시점부터 마지막 베니스 복원작업까지 이르는 자세한 설명이 적혀 있었다.

100페이지짜리의 얇은 책이었다.

나의 행적을 알리는 사진 자료를 포함해 나의 작품들을 전부 수집해 삽입해둔 상태였다.

수많은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엮을 수 있었다고 했다.

인터뷰에 참여한 사람들은 대부분 아트밸리 예술가들이었다.

몰랐는데, 그 중엔 원도 포함돼 있었다.

“이번 생명의 노랑 개발은 빠져 있는데요?”

야광화 작업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생명의 노랑이라는 색은 이미 만들었다.

여러 산업계에 그 색을 제안해놓은 상태로, 내가 염두에 두었던 스쿨버스나 공사장 차단바에서 그 색을 사용하기로 결정이 되기도 했다.

이미 사용되고 있던 노란색은 너무 진하거나 흐려서 기능이 많이 줄어들어 있었다.

졸음을 쫓기 위해 사용된 색도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생명의 노랑을 사용하면 주변 운전자들의 잠을 깨울 수 있을 것이라는 평가가 있었다.

“마지막 활동에 이 내용을 추가해야죠.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데요.”

나는 원에게 <우회> 검토 작업을 일임했다.

그가 큰 열정을 가지고 출간을 책임져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럼 윤예준 화가님은 뭐 하시게요?”

전기 출간 제안을 수락한 뒤 원이 물었다.

“저는 곧 솜니움 10주년을 기념해서 미술관 해외 사업부와 함께 해외 교류전을 기획할 예정이에요. 그때가 되면 경매 예상가가 1000억은 가뿐히 넘는 국보급 작품들이 솜니움 미술관에 모일 텐데, 거기 기세를 꺾이지 않으려면 저도 지금부터 좀 그려봐야죠.”

“아, 그거 좋네요! 그럼 이번에 더 그리시는 것도 추가하면 되겠어요.”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다.

또 준블루처럼 생명의 노랑에 해당하는 유명한 작품도 만들어두어야 수요가 더 늘어날 것이었다.

준블루의 경우 그저 아름다운 색에 지나지 않았지만, 생명의 노랑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색이지 않은가.

준블루보다도 훨씬 중요한 색이었다.

“같이 하실래요?”

“1000억 원짜리 작품들이 모이는 교류전에 제가요?”

농담하지 말라는 듯 원은 웃기 시작했다.

내가 계속 아무 말도 않자 원은 웃음을 멈추고 관자놀이를 짚었다.

“아, 어지러.”

***

결국 연구소에서도 생명의 노랑 야광 도료 개발을 성공했다.

생명의 노랑을 야광화하는 과정에서 검은 산화물질이 발생하는 문제점 때문에 얼마간 애를 먹긴 했지만, 그걸 해결하고 나니 개발은 바로 성공되었다.

나와 원은 야광 도료를 고속도로 근처 창고에 함께 가져다 놓은 뒤 작업실로 들어왔다.

함께 작업하기로 한 뒤 처음으로 시작하는 협작이었다.

원은 캔버스를 펼쳐두고 계속 어수선하게 곳곳을 돌아다니며 어딘가 전화를 걸거니 받거니 했다.

“뭘 그렇게 바쁘게 하시는 거예요?”

내가 묻자 원이 놀라서 돌아보았다.

“아, 그게. 죄송…… 자랑할 곳이 많아서요.”

한지 테마파크에서 봤던 그의 작품은 대부분 조형예술이었다.

회화 작품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을 보고 싶은 마음이 큰 것도 있었다.

마음을 추스른 원은 돌아와 캔버스 앞에 앉았다.

그리고 곧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스케치하는 모습을 보니 해바라기를 그리고 있는 듯했다.

“역시. 이번 일이 의미가 크긴 크셨나 보네요. 해바라기를 그리시는 걸 보니.”

나의 말에 원은 웃으며 말했다.

손은 계속 캔버스 위를 움직이는 상태였다.

“그 순간에 해바라기를 떠올린 건 제 인생 최대의 업적이에요. 앞으로 또 그런 활약이 가능할지, 참…… 그런데 사실 그건 제가 뭐 천재적이거나 그래서 떠올릴 수 있었던 게 아니에요.”

“그럼요?”

그는 한참 종이접기를 하던 시절 반 고흐의 <해바라기>를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그래서 종이 수십 장을 동원에 반 고흐의 <해바라기>를 구현하고 싶었지만,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그 느낌은 살릴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건 반 고흐의 회화적인 매력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원은 꼭 그 작품을 모작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처음 붓을 들기 시작했고, 결국은 얼추 비슷하게 그리는 데에 성공했다고.

그 뒤로 회화에 재미를 붙여 여러 작품들을 그려보곤 했는데, 유독 잠이 쏟아져 <해바라기>를 모작할 때처럼 철야 작업이 불가능했다.

처음엔 자신의 열정이 적어졌다고 믿었다.

하지만 또 그 졸음이라는 게 작품마다 정도가 달라지는 것이었다.

결국 노란색이 졸음을 쫓는 기능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된 건 그 때문이었다고 했다.

“그 기억을 잊지 못한 거죠. 제가 해바라기를 굉장히 좋아하거든요. 너무 커서 무섭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은데, 전혀 동의할 수 없어요.”

마네였던 시절, 나는 모란에 굉장히 큰 집착을 했다.

아직도 모란의 매력에 대해 설명하라고 하면 사흘 밤낮을 지새울 수 있었다.

아마 그건 원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나는 원의 옆에 붙어 서서 그가 표현하는 해바라기의 매력이 무엇인지 확인해보았다.

말로는 사흘 밤낮을 새워야 하는 것도 그림으로는 단번에 이해하는 게 가능했다.

해바라기의 개화 시기는 그리 길지 않은데, 그걸 표현하기 위해서인지 시든 것과 활짝 핀 것을 한꺼번에 표현하고 있었다.

나는 그가 그린 해바라기 근처에 작은 해바라기 꽃들을 섞어 그려 넣어 주었다.

그렇게 <생명의 해바라기> 그림이 완성되었다.

“와. 구도를 진짜 절묘하게 끼워 넣으시네요. 엄청난 합작이었어요.”

원은 과장되게 감탄했다.

그리고는 내가 그린 해바라기를 자세히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반적인 해바라기 같으면서도 느낌이 미묘한데요?”

“그래요?”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나는 이곳에 해바라기를 통해 모란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니까 말이다.

원이 해바라기의 다양한 아름다움을 선보였다면 나는 해바라기의 한결같은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그게 내가 그린 해바라기의 ‘모란스러움’이었다.

“계십니까?”

그때 누군가 작업실 문을 두드렸다.

내가 나가려는 찰나 원이 말했다.

“빈센 조 씨가 오셨나 보네요.”

“빈센 조요?”

“네. 제가 불렀어요.”

그렇다면 내가 아니라 원의 손님인 것이었다.

내가 발걸음을 멈추자 원이 말했다.

“해바라기 고속도로 만들 때 엄청난 도움을 주신 분이에요. 그때 말씀드렸죠? 비용 지원부터 종자 확보까지 싹 알아서 해주셨다고. 미국 환경미화원 대표님께서.”

“아, 그랬죠. 굉장히 고마우신 분이네요.”

미국 환경미화원의 대표라면 그런 문제에 대해 굉장히 적극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일 것이었다.

황량한 사막도 해바라기밭으로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원은 문을 열고 나가 빈센 조라는 남자와 얼마간 대화를 나눴다.

해바라기의 생명력이 생각보다 뛰어나서 비료 양을 줄여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근처 토지도 덩달아 비옥해지고 있다고 말이다.

“중요한 건 그곳에서 회전초가 자라지 않게 만드는 것밖에 없는데요.”

“그렇죠. 그 대책을 지금부터 잘 고려를 해야 하는데…… 그나저나 그림은 언제 보여주시게요?”

원이 문을 완전히 열어젖히며 빈센 조를 안으로 안내했다.

나는 다시 내 그림에 집중하고 있는 상태였다.

“윤예준 화가님! 여기 빈센 조 씨 오셨어요. 인사 나누세요.”

“아. 그래요.”

나는 돌아서서 빈센 조의 얼굴을 확인했다.

라이더 복장의 사내였는데 굉장히 익숙한 얼굴이었다.

항상 이렇게 갑작스럽게, 의외의 장소에서 얼굴을 비추는 그,

조상철이었다.

그는 한 손에 든 헬멧을 책상 위에 소리 나게 올려두며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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