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이 제일 쉬움-206화 (206/241)

206화. 비엔날레에서 생긴 일

예준의 TED 강연이 예정된 장소는 베니스의 카포스카리베네치아 대학교의 강연홀이었다.

전날부터 쏟아진 비는 강연 당일까지도 추적추적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우천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시민들이 예준의 강연을 듣기 위해 베네치아 대학을 찾았다.

조세핀은 TED 관련자는 아니었지만, 강연 준비를 열심히 도왔다.

아마 이번 강연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TED 감독보다 더 클 것이었다.

사실 그는 이번에 밝혀진 노골적인 수상자 배제 소식에 큰 모욕감을 느꼈다.

그도 사람인지라 작년 2관왕이 굉장히 영광된 일로 느껴졌다.

하지만 이번에 에보리진 예술가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그 자신의 2관왕 업적이 위태로워졌다.

가짜 상은 상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치볼드의 차별주의자들 때문에 큰 손해를 보게 된 것이었다.

“슬슬 윤예준 화가가 올 시간 됐으니까 속도 좀 냅시다!”

“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대학 강연장으로 사용되던 곳이었다.

굉장히 큰 강연홀이었지만 그랬던 만큼 주변의 수많은 대학들로부터 대관 신청이 줄을 잇는 장소였다.

오늘에 이르러서야 TED 로고와 소품을 설치할 수 있게 되었는데, 시간이 좀 빠듯했다.

“기자들 좀 뒤로 빠집시다! 제대로 준비를 할 수가 없잖아요!”

촬영실에 앉아서 장비 세팅을 지시하던 감독이 객석 통로마다 틀어막고 있는 기자들에게 호통을 쳤다.

기자석을 따로 마련해두기는 했지만 워낙에 세계적인 관심을 받게 된 강연이었다.

특히 호주 기자들로부터 말이다.

윤예준이 오늘 호주 아치볼드에 대한 언급을 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예술계부터 경제계까지 수만 명의 운명이 좌우될 것이었다.

관객들이 무사히 착석을 한 뒤 무대 뒤에서 누군가 외쳤다.

“윤예준 화가님 스탠바이했습니다!”

강연회는 지체할 것 없이 바로 시작되었다.

TED의 로고송이 재생되고 무대 후방으로 ‘오늘의 강연자, 윤예준’이라는 문구가 프로젝터로 표시되었다.

우선 진행자가 나와 윤예준의 약력에 대해 간단히 소개를 했다.

원래 TED는 미국에서 진행되어야 했지만, 이탈리아에 있는 예준의 전화를 받고 다급히 일정을 변경하느라고 이탈리아에서 촬영을 하게 되었다.

대관을 긴급하게 처리하고 윤예준의 모든 사정을 맞춰주었다.

TED 감독도 지금 윤예준의 강연이 얼마나 큰 주목을 받을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 윤예준 화가님께서는 리틀마네로 시작해 그 별명을 벗고 자신만의 사조를 만들어낸 과정에 대해서 여러분들께 공유해드린다고 하십니다. 그럼, 윤예준 화가님 모셔보겠습니다!”

객석에서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왔다.

물론 기자들의 플래시도.

거의 무대 전체가 희끗희끗해질 정도의 규모였지만 예준은 아랑곳도 하지 않고 웃으며 연단 위로 올라섰다.

“제가 그래도 눈이 생명인데. 안구 보험이라도 들어놔야겠네요. 너무 눈이 부셔서.”

예준은 간단한 농담으로 강연의 운을 떼었다.

20분간 진행되는 강연이었다.

“그러고 보면 오늘 제가 할 이야기는 이 눈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예준이 프로젝터 리모컨을 누르자 무대 뒤 화면이 넘어가 예준의 <예술가의 눈> 작품이 표시되었다.

예준은 리틀마네였던 자신이 그 <예술가의 눈>을 제작하게 된 계기를 이야기해주었다.

그 뒤 대중 예술, 동양화, 아랍 예술, 아프리카 예술, 국제 살롱전, 레딩 누드화, 그리고 호주의 참여 예술까지.

관람객들은 그가 아프리카에서 경험한 놀라운 모험담과 알려지지 않은 성공담에 크게 놀랐다.

“저는 무엇을 그리든 그 본질을 그리고 싶었고, 그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습니다. 제 눈엔 그것이 명백히 보였으니까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찾겠다고 희한한 그림을 그리거나 헛심을 빼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여기기도 했죠. 하지만 계속 눈에 보이는 것만 좇았다면 아마 아프리카에 갈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럼 프랑스도, 영국도, 호주도 올 일이 없었겠죠.”

화면은 다시 <예술가의 눈>으로 돌아왔고, 영상은 역재생되어 살며시 눈이 감겼다.

“세상은 너무 넓어서 우리의 눈은 항상 근시안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와 가족, 친구들의 고통은 너무도 선명하게 보이지만 먼 지구 대척점에 사는 사람들의 고통은 제게 아무 일도 아닙니다. 그렇잖아요?”

관객들이 힘차게 대답했다.

“그럴 때 저는 저의 이 근시안을 감습니다. 그리고, 그냥 공감합니다. 내가 그리고 싶은 건 오히려 내 시야 바깥에 훨씬 더 많을 테니까요.”

예준은 무작정 가봄으로써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아프리카를 방문할 때 그는 이집션 블루 트라하를 디자인할 계획도, 만년지를 발견할 생각도 없었다.

영국을 방문할 때에도 6점의 누드화 같은 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는 가서 찾은 것이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앞으로 무슨 그림을 그리게 될지 아무것도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예술에 차별은 있을 수 없다는 것. 오히려 예술은 서로 볼 수 없는 우리를 소통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제가 생각하는 하모니즘이고, 예술의 다른 이름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화면에는 ‘하모니즘’이라는 단어가 표시되었다.

예준이 강연 종료를 선언하자 감독과 촬영진, 기자를 포함한 관객들 전체가 기립박수를 쳤다.

실시간으로 TED를 보고 있던 너튜브 시청자들의 반응도 뜨거웠다.

0명으로 시작했을 시청자 수는 강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100만 명을 넘어섰다.

그중엔 세계적인 미술계 거장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

강연을 끝내고 내려오자 조세핀이 감동 받은 얼굴로 꽃다발을 건넸다.

하고 싶었던 말들은 놓치지 않고 다 했다.

TED 강연도 최대한 활용한 것 같았다.

인터넷으로 중계도 한다고 했으니 효과는 더 좋을 것 같았다.

“인터넷 반응은 어떤가요?”

“말할 것도 없죠. 100만 명이 넘었습니다. 역대급이라던데요.”

조세핀이 아직 라이브가 중지되지 않은 너튜브 방송 영상을 보여주었다.

무대는 비어있고 관객들이 빠져나가는 모습만 보일 뿐인데 댓글을 계속 이어지고 정체불명의 회색 하트가 화면 한쪽에서 빠르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와, 아치볼드 목숨 건졌네 ㅋㅋㅋㅋㅋ

-윤 선생님, 구독할 곳이 없습니다. 채널 좀 만들어 주십쇼.

-너튜브할 시간이 어디 있음 ㅋㅋ

그렇게 반응을 살피려는데 돌연 전화 수신을 알리는 화면이 너튜브 화면을 까맣게 가렸다.

조세핀은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았다.

“예, 선생님. 조세핀입니다.”

누군가와 통화를 주고받던 조세핀은 내 쪽을 힐끗거리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아, 예. 아뇨. 아닙니다. 글쎄요…… 통화할 생각 없으실 것 같습니다. 오늘 강연 보셨으면 알겠지만, 그냥 눈감아주시기로 한 것 같으니 안심하시죠.”

통화하는 내용만 들어봐도 상대방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조세핀 화가님. 아치볼드인가요?”

조세핀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바꿔 달라고 하는 것 같은데 바꿔주세요. 어차피 연락 한 번은 해야 했어요.”

조세핀으로부터 휴대폰을 건네받았다.

“윤예준입니다.”

-아치볼드에서 전화 드렸습니다! 오늘 TED 강연 반응이 굉장히 뜨거웠다던데, 우선 정말 축하드립니다.

관계자는 나의 이번 강연에 대해 찬사를 얼마간 늘어놓았다.

호주에서 꽤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던데, 그래서 태도가 꽤 돌변한 것 같았다.

-저희 호주 기사를 챙겨 보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인터넷에서 제기되고 있는 의혹은 전부 사실입니다. 윤예준 화가님의 작품을 불공평하게 심사에서 제외한 것도 사실이고요. 그 부분에 대해 큰 사과의 말씀 드리고 싶어 실례 무릅쓰고 전화 드렸습니다.

그는 진작에 사과를 하고 싶었지만, 나의 TED 강연에 영향이 있을까 싶어 그 역풍까지 감수한 뒤 사과하기 위해 기다렸다고 했다.

좋은 마음가짐이었다.

심지어 이번 일이 끝나고 아치볼드의 다음 주역들이 완전히 구성되고 나면 지금 자리를 잡고 있는 아치볼드 권위자들이 전원 사퇴하기로 했다고 했다.

아치볼드의 도태를 막기 위한 극약 처방이라고.

“그럼 전화 주신 분께서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음…… 뭐, 글쎄요.

이후 그의 직장이나 작품활동에 대해 묻는 말이었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전보다 더 올바르게 되는 거죠.

내가 강연을 준비하는 동안 그들은 심사위원을 재소집해 작품을 전량 재검토했다고 했다.

나의 <비상>은 세 가지 부문에서 모두 상을 타서 역사상 첫 3관왕이 되었다.

그리고 ‘비상한’ 기준에서도 에보리진 화가 작품이 꽤 나왔는데, 그중에 나판이 새롭게 포함되었다는 좋은 소식도 있었다.

-혹시 상은 받으시는 겁니까?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 그럼 받아야죠. 하지만 상금은 아치볼드 기금으로 사용해주세요. 호주에서는 최고 권위 상이라고 하던데. 그곳 쇄신이 빨라야 에보리진 예술가들에게도 좋은 일일 테니까요.”

그는 알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그들에겐 내가 첫 3관왕을 달성했다는 기록이 더 의미가 클 것이었다.

강연이 끝나자마자 사과를 하고 사퇴까지 불사하겠다고 하니 그들의 다짐이 얼마나 큰지는 알 수 있었다.

레딩에서도 잭과 한에게 맡겼듯, 이번엔 그들의 후임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맡겨보아야 하는 것이었다.

강연홀을 빠져나가자 대학 본관 로비에는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중엔 낯이 익은 얼굴들도 보였다.

아트밸리와 레딩, 그리고 몽마르뜨 출신의 신진 예술가들이었다.

그들은 웃으며 내게 다가와 꽃다발을 건네주었다.

“이번 영상으로 완전히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으신 거 같아요! 저도 잘 들었고요.”

“맞아. 팬 아닌데 저장한다고 막 그러던데.”

“너튜브 채널 만들어야 할 것 같아요. 예준TV 같은 거.”

나만의 너튜브 채널을 만들어달라는 요구가 있다는 건 아까 언뜻 보기는 했다.

인터넷 홍보가 꽤 괜찮은 수단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파급력이 어마어마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인터넷을 통해 홍보할 수 있는 곳엔 이미 다 한 상태였다.

더 이상 나를 홍보할 필요도 없고 말이다.

“채널은 저희가 관리할 테니까 가끔 출연만 좀 해주세요.”

그들도 그걸 원한다는 듯이 제안했다.

이번 영상이 상당히 인기를 많이 끌었으니 ‘하모니즘’이라는 사조도 인지도를 얻게 되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리 일반적이고 전형성을 갖춘 사조는 아니기 때문에 지속적인 관심이 없다면 오래 갈 수 없는 인지도인지도 몰랐다.

‘너튜브로 사조 배경의 소통을 계속 하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어.’

똑같은 일상 속에서 지루함을 느끼는 이들은 내가 하는 시도에 관심을 가져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다.

마네로 살 때 친구 안토닌 프루스트의 부하 공무원들도 그랬다.

외부인이 들어간 처음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아 하다가도 그 사람이 새로운 일을 하기 시작했을 땐 반응이 유별나게 좋았다.

한 마디로 관심을 계속 모으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알겠어요. 한번 해보죠. 그래도 예준TV는 과학 채널 같아 보이니까……”

‘Artist YJ’라는 이름으로 채널을 만들어달라고 요청했다.

그렇게 채널 개설을 다짐하고 건물을 빠져나가려는데, 홀 안에 빽빽이 모인 사람들이 어어, 하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이윽고 문이 활짝 열렸고, 거센 빗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뒤엉켰다.

“윤 화가님, 피하십시오!”

아까까지만 해도 강연을 듣던 관객들이 나를 발견하곤 달려들며 그렇게 외쳤다.

-와장창!

그 순간 엄청난 양의 물이 유리문을 깨뜨리고 건물 안으로 넘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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