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이 제일 쉬움-204화 (204/241)

204화. 비상하지 않은가

관장이 말했다.

-이번에 ‘아치볼드’라는 호주 미술상에 윤예준 화가님의 작품을 추천했는데, 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호주 최고권위 상으로, 원래는 초상화에 중점적으로 상을 주었다가 분야를 넓혀 무제한으로 시상하게 되었다고 했다.

“네? 어떤 작품이요?”

-레딩에서 그리셨던 누드화 연작 중 올랭피아 말입니다.

타 미술관에 빌려줄 적에 <문신;올랭피아>라는 제목을 달아뒀던 그림이었다.

그게 이번에 상을 받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번 화가님의 활동으로 에보리진 문제에 관심이 많아진 덕에 굉장히 많은 수의 에보리진들이 수상자 명단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전례가 없던 일이에요. 평상시에는 한 명의 에보리진이 수상해도 뉴스감이었으니 말입니다. 지금과 같은 성과는 감히 엄두도 못 냈죠.

그건 정말 뜻밖에도 잘된 일이었다.

최고권위 상이라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호소할 수 있는 기회라는 뜻이었으니까 말이다.

다음 아치볼드에도, 또 그다음 아치볼드 때에도 많은 에보리진이 수상할 기회가 된다면 벌써 에보리진 차별에 균열은 생긴 상태였다.

“와. 그거 정말 잘됐네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호재는 겹친다고 했던가.

관장은 또 덧붙였다.

-아치볼드는 ‘논란이 될 만한(controversial)’, ‘도발적인(provocative)’, ‘비상한(unconventional)’의 기준으로 작품을 평가합니다. 그중 하나의 기준만 충족해도 상을 받게 되는 거죠. 하나만 충족하더라도 대단한 일을 윤예준 화가님은 두 개나 동시에 충족해서 이번 시상식에 초청받으신 겁니다.

“네? 그래요?”

-네. 이번에 수상작 전시회가 진행되는데, 그동안 수상자들이 다른 작품을 한두 점 정도 더 내볼 수 있습니다. 혹시 시간이 되시겠습니까?

예술과 관련한 일인데, 시간이야 필요하면 쪼개서라도 낼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어떤 기준을 충족했는지는 알고서 다른 그림을 그리든 해볼 것이었다.

“제가 이번에 충족했다는 기준이 뭔가요?”

-논란이 될 만한, 도발적인 작품이 되신 거지요. 정말 축하드립니다.

굉장히 감사한 일이지만, 조금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있었다.

그러니까 ‘비상한’이라는 기준에는 충족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기준을 무시하는 건 익숙했다.

솔직히 그 기준을 만족시킬 이유도 없고 말이다.

시상 주체마다 비상하다고 여기는 기준은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문득 아치볼드에서 생각하는 비상함이라는 게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또 그 기준이 얼마나 많은 ‘비상한’ 작품들을 탈락시켜왔는지도 말이다.

나는 관장과의 전화를 끊자마자 호주 국립 미술관으로 향했다.

***

캔버라에 있는 호주 국립 미술관은 굉장히 거대하면서도 부지가 넓었다.

개관한 지 60년이 넘었다기에 굉장히 낡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건물 외관은 깔끔하고 주변도 탁 트인 데다가 군데군데 야외 조형이 매력적이었다.

이번에 에보리진의 작품들이 이례적으로 많이 수상하게 되었다는데, 이곳저곳 에보리진의 전통 미술의 흔적이 남아있기도 했다.

소장 작품들을 감상하며 시간을 보내다 역대 아치볼드 수상작품 특별전이라는 전시관이 눈에 들어왔다.

들어가 보니 다시 외부로 반출된 것을 제외한 몇몇 작품들이 보관 중이었다.

인상주의풍으로 그려진 연못과 오두막 그림들도 있었고 누드화도 몇 점 되었다.

그야말로 도발적이고 논란이 될 만한 작품 말이다.

‘비상한’의 기준을 충족했다는 작품 중엔 고전적인 것들도 있었지만 굉장히 신성한 것들도 많았다.

그렇다고 전형적이라고 할 만한 공통점은 보이지 않았지만 누드화는 한 점도 없었다.

“오호……! 저 작품도 굉장히 훌륭하긴 한데 아까 그 윤예준의 <비상>에 비하면……”

“그러게나 말이야. 괜히 비교만 당하고. 저 화가들만 불쌍하게 됐군.”

“왜 윤예준이 비상한 후보에 들지 못한 거지?”

옛날부터 누드화라고 한다면 논란거리나 도발쯤으로만 생각했다.

내 작품도 문신을 그려 넣은, 그저 누드화로만 치부되었을 것이었다.

단순 도발보다도 많은 의미를 담은 작품인데도 말이다.

그렇다고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 상을 달라고 우겨볼 순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지원한 상도 아니었지만, 감사히 받으면 될 것이다.

대신 관장은 한두 작품쯤 더 그려서 내도 좋다고 했다.

‘비상한 작품을 그려달라고? 후회하게 해주지.’

관람을 끝내고 나온 뒤 작업실을 하나 빌려 바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전생에서 조금 알고 지낸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진리는 인정받게 전에 세 단계를 거친다.

첫째로 조롱받고, 둘째로 반대에 부딪히고, 마침내 자명한 진실로 간주된다고.

조롱과 반대는 쉽지만 진실로 인정하기는 어려운 법이었다.

쇼펜하우어 그도 당대 독일 최고지성과의 끊임없는 논쟁으로 출세가 많이 늦었다.

그 삶을 생각하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공감하는 게 가능했다.

그도 나처럼 세 번째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비난과 조롱만을 반복해서 들어온 시절이 있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도 나도 결국엔 인정받는 데에 성공했다.

일단 조롱과 반대의 단계를 밟았다면, 오래 걸리더라도 결국 세 번째 단계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이 반영된 말인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낙관적인 것만은 아니야. 나도 자칫하면 인정받기 전에 죽어버릴 뻔했으니.’

조롱과 반대가 수명 이상으로 늘어질 만큼 기성 화가들이 보수적이라면 인정의 세 단계는 절대 끝맺어지지 못했다.

마치 ‘펜로즈의 삼각형’처럼 말이다.

‘펜로즈의 삼각형’

나는 마렐블루, 이집션블루, 준블루, 세 파란색의 톤 차이를 이용해 푸는 펜로즈의 삼각형을 완성했다.

사각기둥으로 만들어진 입체적 삼각형이지만 3차원상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구도에 놓여 있었다.

원근 상 가장 먼 곳과 가까운 곳이 맞닿았다.

입체감을 통해 평면성을 더욱 극대화시킨 것이었다.

물론 평면성의 활용은 솔로몬의 <노스텔지아>와 완전히 달랐다.

그녀의 평면성은 그림 속 연인에게 그리움을 선사했지만, 나의 푸른 펜로즈의 삼각형은 입체적인 사물을 평면성 안에 폭력적으로 가둬놓고 있었다.

입체적인 발전 가능성을 2차원적인 사고방식으로 제한하고 있는 아치볼드 심사 측에 대한 비판 의식을 담았다.

내가 ‘비상한’ 기준에 충족되지 못했다는 데에 대한 불만 표출은 아니었다.

전시관 곳곳을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비상한’에 충족해 상을 탄 에보리진 화가 작품이 단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진짜 전통에 대한 그들의 근시안적인 편견을 비상하게 지적해줄 생각이었다.

나는 작품에 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출품했다.

***

시간이 지나 아치볼드 시상식 날이 되었다.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국립 미술관 광장에 모여 시상식에 참여했다.

원주민으로 보이는 화가들도 다수 참여한 상태였다.

시상식은 이미 수상이 결정되었던 작품들에 대해서 우선적으로 진행되었다.

에보리진 수상자가 많다는 소식을 들은 기자들이 굉장히 많이 찾아온 상태였다.

시상자로 나선 유명 화가 조세핀이 에보리진 예술의 가치에 대해 연설했다.

하지만 에보리진이 상을 받으러 나설 때만 유독 박수 소리가 작았다.

관람객 중 에보리진의 수가 적기 때문이었을까.

위치 윌튼이라는 화가의 팬시 디자인을 이용한 작품 , 알린 위고의 <런던의 달> 등 여러 작품에 대한 수상 끝에 나의 <문신;올랭피아>가 두 가지 기준에 부합했다는 진행자의 멘트에 사람들의 감탄과 박수 소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스테이트 모던 관장의 말대로 흔치 않은 일이긴 한 모양이었다.

시상식이 끝나고 사후 출품작에 대한 시상도 진행되었다.

스크린에 표시된 나의 작품 <비상>을 본 사람들이 박수를 쳐대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두 가지 기준에 대한 심의를 충족시켰다는 하단의 메시지 때문이었다.

하지만 막상 수상이 시작되고 그 기준이 무엇인지에 대한 안내가 정확히 나온 뒤에는 일대가 조용해졌다.

이번에도 도발적인과 논란이 될 만한이었기 때문이었다.

조금 웅성거리던 사람들은 조금씩 야유하기 시작했다.

“이제 알았다! 비상한 기준을 제외하면 그냥 먹고 떨어지라는 뜻이었잖아?!”

“만만하면 도발적인이고 만만하면 논란이 될 만한이냐?”

“이럴 거면 비상한만 빼고 다 없애라!”

곳곳에서 비난이 쏟아져나왔지만, 시상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진행했다.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그런 게 아닙니다. 이번엔 우연이 겹쳤을 뿐이지 윤예준 화가의 기준은 엄밀한 검토 끝에……”

“오해는 무슨 오해! 이번에 수상작으로 선정된 에보리진 아홉 명 다 ‘비상한’에는 이름이 없는데 이것도 우연이냐!”

“이번뿐만이 아니라 역대 한 명도 없었다!”

비난하는 이들의 대부분이 에보리진이었지만, 이 정도면 그들의 여론을 파악하기엔 충분했다.

심지어는 비상한 부문에서 상을 탄 몇몇 백인 화가들마저 일어나서 따지기도 했다.

“평가 자료를 공개해라!”

진행자는 평가 자료 같은 건 남겨두지 않았다고 둘러댔다.

“그냥 올해 아치볼드는 보이콧합시다.”

한 명의 화가가 외치자 많은 사람들이 동의했다.

“윤예준 화가님. 이곳 말고, 곧 열리는 베니스 비엔날레에 같은 작품을 출품하시죠. 그리고 아치볼드의 기준이 얼마나 부조리한지 증명해주세요!”

예술가들은 내게 베니스 비엔날레라는 곳에 작품을 내라고 설득하고 들었다.

비엔날레 같은 곳엔 출품할 생각이 없었지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연단 위에 올랐다.

곤욕을 치르던 진행자는 내가 등장하니 화색이 되어서는 마이크를 건넸다.

큰 소리를 진행자를 비난하던 에보리진들은 일시에 조용해졌다.

“다들 저를 생각해서 이렇게 나서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저도 비상한 에보리진이 한 명도 없다는 게 속상할 따름이에요.”

수상한 두 작품에 대한 상금은 4만 800백 호주 달러로, 한화로는 약 3670만 원 정도 되었다.

“알겠습니다. 저도 보이콧에 동참하고 베니스 비엔날레로 가겠습니다.”

“예?”

옆에서 듣던 진행자가 놀라서 물었다.

듣던 관객들도 마찬가지였다.

“이곳에서의 3관왕만큼 유의미한 상도 없을 것 같아서, 만약 그렇게 되면 그곳 수상을 포기하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죠. 저는 베니스 비엔날레의 황금 사자상을 위해 이곳 상을 포기하겠습니다.”

발언을 마치자 곳곳의 기자들이 플래시를 터뜨렸다.

멀리 수상 후보자로 참여했던 나판이 벌떡 일어나 이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외쳤다.

“기준으로 장난치더니 꼴좋다! 괜한 텃세 부리다가 아까운 인재 하나 이탈리아에 빼앗기게 생겼네!”

“맞다, 맞아!”

나는 단상에 상과 상금 증서를 그대로 내려두고 다시 연단을 걸어 내려왔다.

그동안 수많은 야유가 무대 위로 내던져졌다.

애꿎은 진행자만 온갖 독박을 쓰고 있는 상황이지만 어쩌겠는가.

그도 이번 회차 아치볼드에서만큼은 시상 주체의 일원인 것을 말이다.

-은혜를 원수로 갚네. 나라 망신이다.

-이제 와서 붙잡을 생각하지 마라. 아치볼드보다 베니스 비엔날레가 훨씬 더 세다!

-윤예준이 코지우스코에 얼마를 썼는데. 너무했다.

비난은 인터넷에서도 불거졌다.

나는 정말로 지체하지 않고 이탈리아행 비행기에 올랐다.

정말로 떠난 듯 보였던 것이었다.

재미있는 건 베니스 비엔날레의 반응이었다.

베니스 비엔날레뿐 아니라 그곳과 함께 세계 3대 비엔날레 반열에 있는 미술계에서 아치우드를 함께 비난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베니스 비엔날레에서는 최고상을 받은 <비상>이 아치우드에서는 비상한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다고 한다면, 베니스 비엔날레와 아치우드 둘 중 한쪽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

만약 이번 나의 수상 거부가 아치우드의 실책이 아니게 되면 괜히 아치우드보다 위상이 낮아 보이는 효과만 생길 따름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베니스에 도착해 비엔날레 전시장으로 향했다.

사실 누군가 주는 상으로 우쭐댈 생각이 전혀 없어 비엔날레는 쳐다본 적도 없었다.

지금과 같은 여론 상황을 만들어 에보리진과 같은 비주류 화가들을 돕기 위해 한 일이었다.

물론 도뇌르 훈장을 선뜻 받았던 때와 같은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이런 저명한 수상 이력 한둘 정도는 있어야 나의 미술 사조를 따르는 후세들에게 좋은 영향이 있을 것이었다.

또 요즘 비엔날레에는 어떤 작품들이 수상을 하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말이다.

그렇게 전시관 내 행사장으로 들어가려는데 누군가 나의 어깨를 거칠게 붙잡았다.

“누구십니……”

돌아보며 묻다 말문이 막혔다.

설마 이런 곳에서 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내게 악의를 품고 있을 가능성이 높은 위인이기도 했다.

나는 황급히 물러나 그의 기색을 살폈다.

“설마 호주에서 이곳까지 쫓아오신 겁니까?”

그는 가느다란 미소를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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