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혹시 음악이 들리시나요? (2)
누군가는 그게 너무나도 당연하고 쉬운 일이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들리는 미술’ 이전에 ‘보이는 미술’을 성사시키는 것이 첫 번째 달성 과제였다.
눈에 보이는 물감으로 형상을 그려냈다고 해서 그게 ‘보였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내가 원하는 보임은 빛 반사를 통해 시신경을 통과한 일종의 전기 신호가 뇌에까지 가 닿는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관람객의 경험을 빌려 당장 눈앞에 없는 풍경을 예술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진짜 미술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는 그걸 ‘인상주의’라는 사조로서 달성해냈다.
대부분은 시각적인 인상을 작품에 담아냈지만, 봄 풍경을 그릴 땐 그 햇살의 따뜻한 촉감이 느껴지도록 했다.
<롱샴에서의 경주>를 그릴 땐 그 경주마들의 말굽 소리가 들리도록 했다.
그 경지는 인상주의를 굳히는 데에 사용된 기법이었다.
이제는 로버트슨이 말하는 더욱 적극적인 ‘융합’의 단서로 충분히 활용될 수 있는 소양이 되어 있고 말이다.
나는 전시장에서 나오자마자 근처 센테니얼 공원에 있는 버스비스 연못가에 나왔다.
공원은 튈르리 정원의 모습과 비슷했다.
음악에 한껏 취해 있는 상황도 그때와 같았다.
‘<캉캉>과 같이 경쾌한 음악을 그려봐야겠어.’
나는 꺼내온 캔버스를 세우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그림은 전에 없던 그림이어야만 했다.
대상의 구체성에서 벗어나 점, 선, 면만의 배치여야 했다.
일반적인 고전 화풍의 그림이든 난해한 현대 미술이든 음악을 떠올리기는 어렵기 때문이었다.
감정선도 단순해서는 안 됐다.
경쾌하게 표현하지만, 그 경쾌함으로 인해서 결국엔 평화롭고 한가로운 센테리얼 공원의 분위기가 느껴져야 했기 때문이었다.
보라색 물감을 진하게 섞어 가느다란 선으로 그림을 그려냈다.
보기에도 경쾌하고 들려오는 음악도 경쾌하도록 붓을 빠르게 움직였다.
그렇게 작품이 완성되었다.
작업엔 얼마 걸리지 않았다.
10분.
하나의 악장을 연주하는 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
며칠 뒤 예준은 자신의 ‘들리는 미술’을 보여주겠다며 전시관을 찾아왔다.
“벌써 다 그리신 겁니까? 정말 빠르네요.”
“말리는 데에 시간이 좀 들었어요.”
“윤예준 화가님이시니까 완벽하게 그렸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만 그래도 궁금하더군요. 전에 없던 그림일 테니까 말이에요.”
예준은 로버트슨에게 을 건넸다.
양팔을 벌려도 끝이 닿지 않을 정도로 긴 그림이었다.
‘음? 추상화인가?’
로버트슨은 예준의 작품을 받자마자 전시관 한쪽에 적당히 걸어보았다.
몇 걸음 떨어져서 보니 그림이 한눈에 들어왔다.
구체적인 형상이 없는 추상화의 형태였지만 위아래를 구분할 수 있었다.
‘들리는 음악이라더니. 정말 음악이 들려오는 듯하다.’
보라색 하나만으로 이어지는 그림은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신비로우면서 과하지 않았다.
가느다란 선은 플루트의 음색을 완벽하게 표현하는 듯했고, 클라리넷처럼 가볍게 움직였다.
보라색 색채는 바순과 호른의 무게감과 깊이를 반영하고 있었다.
놀라운 건 건의 가늘기는 플루트, 움직임은 클라리넷, 바랫빛은 바순, 물감이 뭉개어져 표현된 부분은 호른으로 정확히 1대 1 대응을 하고 있는 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 연상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로버트슨의 머릿속에서는 완성된 하나의 관현악이 떠올랐다.
대략 10분짜리의 음악이, 그림을 감상하는 1분 만에 돌연 말이다.
“어때요?”
예준이 로버트슨에게 감상할 시간을 충분히 준 뒤 물었다.
“그야말로 들리는군요. 정말 대단합니다. 윤예준 화가님은 정말…… 진짜 예술가군요.”
예준이 그림을 그리는 동안 로버트슨은 자신의 전시회가 반쪽짜리일 수밖에 없었던 다른 이유를 골몰해보았다.
왜 보이는 음악은 성공했는데 들리는 미술은 성공하지 못했나.
왜 그 둘 모두가 이루어져야만 진정한 융합을 해낼 수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나.
로버트슨은 일상 속엔 청각 정보보다는 시각 정보가 훨씬 더 많다고 생각했다.
하나의 꼴을 가지는 음악을 계속 듣기는 힘들었지만, 그림에 자주 사용되는 나무, 하늘, 바다, 꽃, 집 등은 여기저기서 볼 수 있지 않은가.
처음에 음악은 낯선 것이어서 다른 풍경을 결부시킨 채 관객에게 선사하는 게 쉬웠다.
하지만 풍경화를 그리더라도 관람객들은 무조건 기시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었다.
애초에 미술을 통해 음악적인 감상을 끌어낼 수 있다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로버트슨의 미술적 상상력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예준과 같은 천재들에겐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닌 것이었다.
“......전에 뭐라고 하셨죠? 미술가를 소개해주시면 에보리진 차별과 코지우스코 문제에 도움을 달라고 했던가요?”
“네, 맞아요.”
에보리진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은 호주인이 있을까?
로버트슨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는 생각에 금방 고민하기를 그만두게 될 뿐인 것이었다.
각자가 아무리 노력해도 에보리진 차별은 계속될 것이었고, 그렇다고 인생의 전부를 그들을 위한 활동만으로 채워 넣을 힘이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이주민과 원주민 간 갈등의 역사보다도 더 오래된 미술과 음악의 예술적 분장을 윤예준이 화합시켰다.
더는 불가능해 보인다는 이유로 그 문제를 외면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오히려 로버트슨으로서는 그 사실이 기쁘기도 했다.
“우선 이 작품이 들어가기 적절한 곡을 작곡해야겠습니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코지우스코와 에보리진 차별 문제의 전면에 나서겠습니다.”
“당연히 그렇게 하게 해드려야죠. 약속한 얘기니까요.”
작품은 다음 음악회가 끝날 때까지 로버트슨이 대여하기로 했다.
그 뒤엔 아트밸리에 돌려주어야 했다.
을 다시 돌려준다고 생각하니 예준이 그의 영원한 협력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실감이 났다.
앞으로 예준의 역할을 해줄 다른 미술가를 잘 알아봐야겠지만, 누굴 찾더라도 예준만큼 대단한 작품을 만들어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혹시, 방금 약속한 것과 별개로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물론이죠.”
로버트슨은 조금 고민해보았다가 말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화가와 연주자는 오랜 수련이 필요하지만 음악가에게는 오랜 경험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연주를 못하는 음악가는 없으니, 뭐, 별로 유의미한 분류는 아니지만요. 하지만 이 음악-미술 융합 작업에서는 중요한 문제로 올라서는 것 같습니다.”
예준은 미술가로서는 천재가 맞지만, 음악가로서는 그렇지 않았다.
아무런 업적도 없지 않은가.
음악과 미술, 둘 모두에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을 찾는 건 불가능했지만, 미술에 큰 능력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음악가로서의 소양이 있는 사람을 찾는 건 가능했다.
오랜 시간 음악을 들어왔다면 충분히 음악가가 될 자질이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 사람이라면 음악적 감각을 가지고 그림을 그려줄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 음악적 감각을 가지려면 꽤 나이가 되어야만 했다.
그야말로 오랜 시간 음악을 들어왔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예준은 그렇지 않지 않은가?
그는 이제 겨우 스물을 넘겼을 뿐이었다.
20년 평생을 음악만 들어왔다고 하더라도 이 그림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단순히 청자로서의 시간을 쌓는 것 이외 윤예준 화가님의 방법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혹시 그 요령을 좀 교육해주실 수 없겠습니까?”
로버트슨의 말을 들은 예준은 곤란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하긴, 잠시 머리를 식히러 음악회에 왔을 텐데 갑작스럽게 그림까지 그리게 되었으니.
“네, 좋아요.”
“그래도 되시겠습니까? 바쁘실 텐데.”
“이런 일들로 바빠지는 거죠, 뭐. 오히려 좋아요. 직접 작품을 하는 것도 좋지만 예술을 가르치고 전파하는 것도 제 전문이거든요.”
예준은 미술로 발전할 수 있는 음악, 음악으로 발전할 수 있는 미술에 대한 공감대를 충분히 공유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연락드리죠. 큰 도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나는 오페라하우스에서 전생에 즐겨듣던 음악들에 대한 회화적인 표현을 얼마간 정리해주는 시간을 보냈다.
사례가 쌓이면 후임자가 충분히 연구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역시나 미술이 되기 쉬운 음악은 인상주의 미술에 영향을 받은 드뷔시의 인상주의 음악들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순수한 감정이나 스토리에만 중심을 두지 않고 작품 외적인 대상을 선정해 그 인상을 담아내는 음악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작품 아이디어를 얻는 방식은 인상주의 화가들과 동일했지만 구상과 표현법만이 음악으로 다른 것이었다.
그동안 로버트슨은 에보리진의 전통춤과 음악, 미술을 활용한 종합 대중공연을 준비했다.
사람들의 눈앞에 놓이는 데에 익숙한 에보리진들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조금 달랐다.
로버트슨이 마련해준 무대는 매대나 전시대가 아니라 에보리진의 연단이 될 계획이기 때문이었다.
혹시 알고 지내는 에보리진 예술가가 있느냐는 물음에 나판을 소개해주었다.
에보리진 아트에 능통한 사람이라고 말이다.
실제로 그를 만나본 로버트슨은 미술뿐만 아니라 전통춤과 악기 연주에도 비슷한 실력을 보이고 있다고 했다.
굉장히 놀라운 일이었다.
어쨌든 공연을 기획하는 동안 미리 로버트슨의 특별 극단에 소속되게 된 에보리진들은 여러 방송 프로그램에도 나가면서 에보리진 문제에 대해 한목소리를 내었다.
로버트슨은 나의 특별한 부탁으로 인해 이런 기획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 덕에 또 나와 인터뷰하기 위해 찾아온 기자들을 상대해줘야만 했다.
그동안 아무도 에보리진들에게 마이크를 들이밀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마냥 귀찮아만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코지우스코에 대해서는 복원작업이 끝나는 일정에 맞춰 몇 회의 무료 공연을 진행했다.
복원 작업을 끝내고 지친 이들에게 음악을 선물하기 위해서였다.
굉장히 큰 액수의 기금도 선뜻 국립공원 측에 기부해주기도 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오페라하우스의 행보였기 때문에 많은 음악가들이 코지우스코 산불 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얼마 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월드피스는 오히려 오래 지날수록 더 증가하는 관심에 큰 당혹감을 느꼈다.
특히 일전에 세리가 제작했던 <소통의 사조> 다큐 덕분에 윤예종, 아트밸리, 사우디의 예술광장, 모로코의 테너리 공장, 영국의 YJ레딩, 그리고 호주 코지우스코를 하나의 묶음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나의 예술 공동체가 벌써 다섯 개의 대륙을 묶어냈다고 찬사를 보내주었다.
가장 고무적인 건 역시 나에 대한 음악가들의 이례적인 관심들이었다.
그 관심을 놓치면 안 됐다.
예전 민수가 ‘백팔나한진’이라고 표현한 바 있듯이 예술가들은 모였을 때 굉장히 큰 힘을 발휘하지 않던가.
모처럼 모인 그들을 흩어지게 둘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곧 지난 1회 예술 올림픽이 끝나고 벌써 4년이 되었다.
6개월 뒤엔 노스브라더 예술의 섬에서 2회 예술 올림픽이 올릴 예정이었다.
전보다 더 많은 종목으로 말이다.
그 올림픽이 열리기 전 예술의 섬에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와 같은 예술의 전당을 지어놓고 싶었다.
예술의 전당이 있다면 아트밸리에 있는 음악가 커뮤니티가 더 거대해질 수 있을 것이었다.
올림픽을 계기로 그곳을 방문한 이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줄 수도 있을 것이고 말이다.
나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예술의 전당을 건설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아버지는 아트밸리의 각계 거장들과 함께 진행해보겠다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그렇게 전화를 끊자마자 또 다른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네, 윤예준입니다.”
-아, 화가님! 반갑습니다. 저는 일전에 IAA에서 큰 신세를 졌던 스테이트 모던의……
호주 대학을 모두 거절당하고 프랑스를 떠났던 스테이트 모던의 관장이었다.
“아, 네. 반갑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전에 윤예준 화가님께 졌던 신세를 완벽히 갚을 기회가 생겨서 전화 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