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물레방아를 돌리는 물살 (2)
시커먼 사일로 너머에는 푸른 녹지가 우거지게 발달해 있었다.
멀리 다트머스 댐이 있는 큰 강은 정신을 아찔하게 할 만큼 시원하게 뻗어 흘렀다.
그리고 그보다 더 먼 곳에는 해발고도 2000m가 넘는다는 코지우스코 산이 장엄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 거대한 사일로 터가 최후 차단선 역할을 한 건가?’
사일로를 기준으로 회색 지대와 녹음이 우거진 숲이 정확히 나뉘어 있었다.
아마 이 사일로가 아니었다면 저 먼 곳의 강에 이르기까지의 이 모든 자연이 완전히 불타 사라져버렸을 것이었다.
잿더미만 남은 풍경만으로도 이게 얼마나 큰일인지 완전히 실감했다고 생각했는데, 사일로 건너편 풍경을 보니 그렇지만도 않았던 것 같았다.
‘생각보다도 훨씬 귀한 걸 잃었구나.’
그렇게 얼마간 살아남은 국립공원 풍경을 내다보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왔다.
“누구십니까?”
국립공원 관리자 복장을 입은 남성이었다.
“산불피해 지원하러 온 윤예준이라고 합니다.”
“아, 그 외국에서 오신다는 유명하신 분. 반갑습니다.”
그는 자신이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이곳 사일로의 관리자였다고 했다.
유니폼은 군데군데 찢겨 있었고, 남자의 얼굴엔 아직 새빨간 잔상처가 여럿 남아 있었다.
차단선을 구축하느라고 몸 좀 쓴 모양이었다.
“고생이 많으셨겠네요.”
“고생…… 그렇죠. 마음고생이 심했죠. 산불피해도 피해지만 제 손에 잘려나간 나무만 해도 족히 500그루는 넘을 겁니다. 다 무의미했지만.”
“필요해서 한 일이잖아요? 존경합니다.”
내가 위로하자 그는 기분 좋은 웃음을 보였다.
그는 근처에 있는 농가에서부터 저 너머 2차선 도로에 이르기까지의 일대의 산불 확산을 막는 책임자이기도 했다.
멀리 보이는 다트머스 댐에서 물을 끌어와 겨우겨우 불길을 잡을 수 있었다고 했다.
“그나마 다행이네요. 그래도 근처에 강이 있어서.”
“그렇죠. 만약 없었다면……”
그는 코지우스코 산을 내다보더니 몸서리를 쳤다.
다트머스 댐에 고인 물은 굉장히 투명하면서도 깊은 색을 가지고 있었다.
울트라마린보다 조금 밝은 정도였다.
하지만 그 색이 가진 특유의 생명력이 매력적이었다.
말하자면 밝은 인디고 색에 가까웠다.
“이 사일로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철거하나요?”
“최근까지 시설 검토를 해보았는데,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이놈들 다 멀쩡하답니다. 비록 겉은 저렇게 작살이 나버렸지만.”
사일로 근처를 돌며 설명하던 그는 바닥에 놓여 있던 호스를 들었다.
그리고 사일로 표면에 물을 뿌리기 시작했는데, 그을린 잿가루들이 물길을 타고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근처 몇 개가 그나마 깔끔해져 있는 걸로 보아 내가 오기 전까지 이 작업을 하고 있었던 듯했다.
“시계탑을 짓는다고 하시던데, 여기까지는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제가 화가잖아요. 그림 그릴 곳 어디 없나 둘러보다 보니까……”
나는 사일로를 계속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런데 그릴 곳을 찾은 것 같네요.”
***
나는 국립공원 측에 사일로 표면에 그림을 그리겠다고 통보했다.
이미 내게 모든 걸 맡겨놓은 상태라 그냥 절차상의 허가일 뿐이었다.
전문 청소부들을 불러 사일로 표면을 깨끗이 지웠다.
그래도 군데군데 녹아 있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
“거참. 혼자 몇 주는 청소에 쏟을 뻔했는데. 하루 만에 끝나버리다니.”
청소부들이 한바탕 일을 치르고 간 사일로를 보며 담당자가 중얼거렸다.
“그런데 청소보다도 그림이 더 오래 걸릴 거 같은데. 가능하겠어요?”
“그럼요. 크레인까지 다 가져왔는데요 뭐.”
나는 일단 대야에 받아놓은 파란 물감을 휘저으며 대답했다.
내게 큰 영감을 주었던 사일로의 차단선과 다트머스 댐이었다.
다트머스 댐이 품고 있는 색채를 이용한 그림을 이 사일로에 그려 넣을 것이었다.
기본 파란 물감에 테너리의 검은 안료, 바로크의 흰색 물감 조금, 그리고 다시 테너리의 녹색 안료 소량을 섞어 다트머스 댐과 같은 색의 물감을 만들었다.
“거 색깔 예쁘군요. 이 파란색은 뭐라고 부르나요? 코발트, 뭐, 그런 거 있다던데.”
“코발트 블루요? 그런 색도 아시네요? 미술에 관심 없는 사람들은 잘 모르잖아요, 원래.”
내가 가볍게 칭찬하자 담당자는 별거 아니라는 듯 턱을 긁적였다.
“뭐, 딸내미 염색 좀 해주다 보니까…… 아무튼 아니에요?”
“조금 비슷하긴 한데 코발트 블루보다는 조금 어둡죠.”
방금 다트머스 댐을 보면서 만든 색이라 명칭은 따로 없었다.
“이름은 준블루쯤 될 것 같아요.”
“으음. 준블루. 들어본 것 같네요.”
내가 방금 만든 색인데.
그럴 리가 있겠는가.
아무튼 나는 준블루를 크레인에 싣고 올라가 사일로 표면을 마주 보았다.
평상시에는 수많은 생명을 안에 품고 있다가, 산불이 났을 땐 생명의 방어선 역할을 해냈다.
이 거대한 사일로가 수천수만 그루의 나무를 살린 것이었다.
‘명작 하나를 오마주해서 그려야겠어.’
나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생명의 나무>를 떠올려보았다.
구스타프 클림트, <생명의 나무>
단정한 색채의 나무껍질을 연상시키는 아르누보 명작이었다.
가지마다 힘차게 소용돌이치는 모습이 인상 깊은 작품이었는데, 사일로에 그려내기 알맞은 그림인 듯했다.
물론 나는 이 준블루를 통해 톤을 완전히 바꿀 생각이지만 말이다.
벽화용 붓을 들어 거침없이 그림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크레인 조작은 담당자가 맡아주었다.
거대한 그림을 효율적으로 그리려면 한 가지 색깔을 단번에 칠해두는 게 좋았다.
그렇게 준블루로 나무 윤곽을 완전히 그려낸 뒤 흰 물감 바탕에 준블루를 조금 섞어 배경 칠을 했다.
“와! 가슴이 아주 뻥 뚫리는구나! 괜히 유명 화가가 아니지. 그리는 거 찍어도 돼요?”
“네. 크레인만 잘 만져주시면.”
“그거야 당연한 거고.”
담당자는 휴대폰 녹화 버튼을 누른 채 크레인 앞에 세워두고 다시 나의 작업을 구경했다.
그렇게 한두 시간이 더 흐른 뒤 작품이 완성되었다.
전체적으로 나무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조금 시각을 달리해서 보면 강하게 솟아오르는 용천수처럼 보였다.
얼마 전 거대한 산불을 막았고, 이젠 묘목과 밀밭을 키워낼 생명의 물이었다.
“아, 잠깐 잠깐!”
담당자는 완성된 <생명의 나무>를 감상하다 말고 갑자기 어딘가로 달려갔다.
그리고 얼마 뒤 드론을 한 대 들고 왔다.
“갑자기 웬 드론이에요?”
“좋은 구경 나만 할 순 없잖아요?”
담당자는 드론에 자신의 휴대폰을 매달아 날렸다.
드론은 사일로 인근을 날아다니며 그림과 근처 풍경을 알차게 영상에 담았다.
***
담당자는 그 영상을 코지우스코 국립공원 홈페이지에 게시했다.
그런데 그게 SNS에서 굉장히 큰 유명세를 탔다.
영상은 상당히 드라마틱했다.
나와 담당자가 대화를 주고받으며 그림을 그리는 장면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제대로 자극했다.
영상 속 나는 하늘보다는 탁하고 물보다는 맑은 묘한 파란색을 붓에 묻혔다.
사일로 하단부에 찍히기 시작한 점은 크기를 키워 나무 밑동을 만들어냈다.
밑동에서 시작해 꼭대기에 이르기까지의 순서로 완성되는 과정이 정말로 물이 뿜어져 나오는 광경처럼 보였다.
그리고 마지막 드론을 띄웠을 땐 산불이 뒤집어 엎어놓고 간 허망한 풍경이 하나의 반전 요소로 작용했다.
황무지와 자연의 선명한 구분이 또 절묘하기도 했고 말이다.
잿더미만 남은 코지우스코와 아직 경관을 유지하고 있는 코지우스코의 사이에 작게 비친 나와 관계자는 물을 마시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와 진짜 그림 엄청나다. 작업 속도도 미쳤는데 완성도 보소.
-마지막 풍경 합성임? 어떻게 저렇게 환경이 극단적으로 나뉘냐.
-호주에 산불 났다는 얘기 듣기는 했는데 저 정도였음? 드론으로 봐도 끝이 안 보이는데?
-윤예준 이름을 딴 준블루라는 색으로 그린 그림이래.
영상이 확산된 후 전문 촬영팀이 연일 사일로를 찾았다.
이곳 풍경을 더 멋지게 찍기 위해서였다.
그림에 대한 관심도 대단했다.
한 시민 단체에서는 나의 <생명의 나무>를 환경 보전 캠페인 로고로 사용하고 싶다고 했다.
지속적인 관심은 <생명의 나무>와 호주 화재에 유명세를 부여해주었다.
그리고 그 유명세는 다시 새로운 관심을 낳았다.
호주 산불이 알려지지 않았던 만큼 오히려 소식 확산이 빠른 것이었다.
“윤예준 씨!”
수많은 기자들로 붐비는 사일로 부지에 섞여 그림에 대한 인터뷰를 하고 있었는데, 멀리서 한 여자가 나를 큰 소리로 불렀다.
미국에서 아트밸리를 종종 취재했던 특파원 ‘세리’였다.
“어? 세리님! 호주엔 웬일이세요? 특보하러 오신 거예요?”
방송사 사람들 중에서는 가장 큰 관심을 보여주었던 기자였기 때문에 얼굴을 기억할 수 있었다.
“아니요. 저 이제 다큐멘터리 CP 됐어요.”
“아, 그래요? 더 좋은 거죠?”
“그럼요! 우리 프로그램에서는 내가 대빵인데. 아트밸리 취재가 잘돼서 승진한 거예요.”
세리가 소속된 ABC 방송국은 미국에서 굉장히 유명한 곳이었다.
그곳 프로그램이 전 세계에 전파를 타는 건 아니었지만, 그곳에서 보도하는 것들은 웬만해서는 다른 나라에도 알려질 정도였으니.
그런 ABC에서 단독 프로그램을 맡게 되었는데, 단순 방송 프로그램이 아니라 아트밸리의 세계적인 시도에 큰 기여를 해주고 싶다고 했다.
“저의 다큐멘터리를 만드시겠다고요?”
“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에요. 들어보세요. 괜찮은 아이디어거든요.”
세리가 설명했다.
“가끔 카페에 가면 쿠폰 찍어주는 곳 있잖아요? 제가 윤예준 화가님 다큐멘터리를 찍기 위해 세계 곳곳을 다녀보니까 족적을 굉장히 많이 남기셨더라고요. 예술적으로 의미가 큰 공동체도 여럿 만드셨고.”
세리는 그곳에 각각 스탬프 하우스를 만들어 찍어주고, 도장을 다 모은 사람에게 혜택을 줄 수 있다면 그게 YJ멤버십이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괜찮네요. 저의 행적을 쫓는 다큐멘터리를 보면 그곳에 직접 가보고 싶을 텐데, 아트밸리에서도 그런 방문자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어놓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맞아요. 그렇게 하면 이번 산불 사태도 꽤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질걸요? 이미 화가님 덕분에 꽤나 알려졌지만요. 산불의 사연과 복원 진행 상황까지 자세히 알려진 편은 아니니까요.”
세리의 계획은 이랬다.
내가 워낙 세계적으로, 또 돌발적으로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나의 활동을 한 번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한국, 미국, 사우디, 아프리카, 프랑스, 영국, 그리고 호주까지.
내 행적 순으로 그 지역을 방문한 뒤 스탬프 하우스를 건설하는 게 다큐멘터리의 주요 스토리라인이었다.
내가 그동안 해왔던 활동들을 집중적으로 소개한 뒤 마지막엔 호주 사태를 진행형으로 다루고 마무리하겠다는 것이었다.
나의 활동도 소개하고 호주 산불도 홍보하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기회라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아트밸리에 그런 이벤트를 바라고 있다고.
“아, 그거 정말 감사한 일인데요?”
“뭘요. 저희 좋자고 하는 일인걸요. 그럼 만난 김에 스탬프하우스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나눠볼 수 있을까요?”
“그럼요.”
한국의 윤예종, 프랑스의 몽마르뜨, 미국의 아트밸리, 사우디의 예술 광장, 모로코의 테너리 공장, 영국의 YJ레딩, 그리고 호주의 코지우스코까지.
곳곳에 스탬프하우스를 설치하고, 그곳 어디를 방문하든 ‘YJ예술스탬프집’이라는 책자를 나누어주기로 했다.
그곳에 지역별로 도장을 찍어주는 것이었다.
도장 디자인은 내가 직접 하기로 했다.
그 지역의 특색을 살리면서 위조가 불가능한 도장을 만드는 게 중요했다.
그렇게 도장을 다 모으면 유효기간 5년짜리의 특전을 나눠주는데, 해당 특전이 있으면 일곱 지역을 여행한 사람들에게 예술여행 경비 지원 명목으로 교통비 사후 지원을 해주는 것이었다.
지출 증명만 제대로 한다면 저렴하게 다녀올 수 있도록 말이다.
“이렇게 하는 게 좋겠네요. 예술 공동체가 곳곳에 흩어져 있어서 생기는 단점이 그거였거든요. 저렴하게 오갈 수 없다는 것 말이에요.”
나는 스탬프하우스를 짓는 방송사의 사업 비용도 지원해주기로 했다.
한 번 지을 때 제대로 지어줘야 할 것 아닌가.
스탬프하우스에 대한 대화를 마친 세리는 내가 예술을 통해 얻은 수익을 요즘 대부분 사회에 환원하고 있다는 점을 언급했다.
스탬프하우스 건설 비용을 지원해준다는 말에 감명을 받은 듯했다.
세리는 그 의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물었다.
돈을 버는 족족 재투자한 끝에 모은 돈을 모두 세계 곳곳에 예술 공동체를 만드는 데에 썼으니 궁금할 만도 했다.
가죽 액자 관련해서 테레즈도 비슷한 의문을 품었었고 말이다.
“저는 소통하는 예술이 가능해지기를 바라거든요. 스탬프 하우스는 그 시작이잖아요? 몽마르뜨부터 시작해서…… 윤예종도 그렇고, YJ아트밸리, 사우디 예술광장, 테너리 가죽공방, 그리고 YJ레딩까지. 말하자면 군데군데 흩어져 있는 카페 게르부아를 연결하는 거죠.”
세리는 그럼 호주에도 비슷한 공동체를 만들 생각이느냐고 물었다.
당연히 그랬다.
하지만 산불 사태는 조금 달랐다.
지금 이들에게는 예술보다는 생계가 더 중요했다.
그들의 생계 앞에 예술은 일단 수단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소통이라는 것도 우리들 개인적인 여유가 일단 충족되어야만 가능해지는 거잖아요? 시민들에게 다시 여유를 돌려주기 위해서 여러 작품을 만들고 있기는 한데, 아직 달성하기에는 사람들 관심이 부족한 실정이에요. 다시 여유를 찾고 예술 활동이 가능해지도록 많은 분들이 도와주시면 정말 좋겠어요.”
세리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꼭 성공하시기를 응원합니다.”
“저도요. 다큐멘터리 꼭 성공시켜주세요.”
산불 피해를 입은 국립공원을 조금 더 취재한 뒤 세리는 미국으로 돌아갔다.
바로 다큐 제작에 들어간다고 했다.
그녀가 그러는 동안에도 <생명의 나무>에 대한 관심은 계속 커져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