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헤이스팅스 게이트의 전말 (4)
짐은 기자들이 등장하자 눈에 띄게 당황했다.
“윤예준 씨! 방금 나눈 이야기는 뭡니까?”
“워렌 의원의 아드님과 친분이 있으신 겁니까?”
“직원과 아드님은 무슨 관계입니까!”
확신을 주는 데엔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만, 의심은 작은 단서로부터도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법이었다.
나와 잭, 한의 예상대로 기자들은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글쎄요. 무슨 관계인지 한번 들어보죠.”
“아니, 난 이런 전과자들과 아무런 관계도 없어요! 같은 학교를 다녔다는 것밖엔.”
짐이 다급하게 항변해 보았지만, 전과자라는 지칭은 기자들을 더 즐겁게 해줄 뿐이었다.
또한 잭과 한을 노려보며 아무것도 말하지 말라는 듯 위협적인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솔직히 지금으로서는 어떠한 위협도 되지 않았다.
뒷골목에서 힘없이 구타당하던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아무런 관계도 없긴 왜 없어! 저는 이 짐 헤이스팅스가 강제로 마약을 옮기게 시켜서 감옥에 갔다 왔어요!”
“저희 동생은 짐이 강제로 주입한 마약 때문에 지금 불구가 되었죠. 저희 말고도 여태 나서지 못한 피해자가 굉장히 많아요!”
기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헛소리하지 마! 야당에서 돈 받았냐? 아무런 증거도 없잖아!”
“헤이스팅스 씨! 저분들이 하는 말이 다 맞습니까? 왜 그러셨습니까!”
“마약을 하고 있다는 게 사실입니까? 어디서 구하신 겁니까?”
짐을 조금 추궁해보던 기자들은 성과가 없자 잭과 한에게 마이크를 돌렸다.
이제야 잭과 한은 죽어라 목놓아 외쳐도 누구도 들어주지 않았던 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한의 동생에 대해.
그리고 갑자기 마약사범 아들을 두게 된 잭의 홀어머니에 대해.
그리고 짐 헤이스팅스의 수많은 악행에 대해 말이다.
[레딩시 하원 워렌 의원 아들 파문! 현실판 유력가 망나니 막내아들?]
[마약부터 인종차별까지…… 워렌 의원 아들 성 비위 의혹 불거져]
[레딩 교도소와 워렌 의원의 진실 공방, 법원은?]
짐은 허튼 소문을 냈다간 고소하겠다고 했지만, 잭과 한은 주눅 들지 않았다.
법적으로는 아주 불리한 상황이었다.
이미 잭과 한은 법적으로 전과자고.
법원과 경찰이 쉽게 자신들의 부정을 인정할 리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잭과 한의 반격은 여태까지 있어 왔던 짐에 대한 어떤 다툼보다도 의미가 깊었다.
굉장히 많은 사람들에게 의심의 씨앗을 심어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그동안 짐에게 괴롭힘을 당했거나 잭과 한처럼 큰 피해를 본 학생들이 나서서 폭로전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찌라시로만 치부하기엔 너무 많은 양의 제보였다.
짐은 잭과 한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범행을 저지르고 다닌 듯했다.
솔직히 애꿎은 하급생에게 강제로 다량의 마약을 주사한 것만 봐도 예상이 되었다.
그가 사람을 얼마나 물건 취급하고 있는지 말이다.
같은 수법으로 형사재판에 맡겨진 학생들이 무죄 선고를 받기 시작했다.
여론의 압박으로 인해 더 이상 워렌을 보호해줄 수 없게 된 경찰이 그의 집으로 들이닥친 것이었다.
짐의 방엔 마약부터 개조된 사제 권총까지, 불법적인 물건들이 버젓이 있었다.
누구도 절대 자신의 방에 침입해 들어올 수 없다고 생각한 듯했다.
영국 국민들의 관심과 비난이 거세어졌다.
짐에 대한 수사는 빠르게 진행되었고, 선고까지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그렇게 짐은 소년범이 되었다.
형량을 채우는 동안 성인이 되면 일반 교도소로 옮겨질 것이라고 했다.
워렌은 의원직을 사퇴하고 잠적을 했지만 이미 고발을 당한 상태였다.
피해자들 중에 백인은 없었고, 공범 중 유색인은 없었다.
기자들은 왜 짐이 그렇게 노골적인 인종차별을 해왔는지 궁금했다.
“피해자에게 하고 싶으신 말은 없습니까?”
“최근에 워렌 의원이 의원직을 사퇴했는데, 그게 이번 재판에 영향을 미친 것 같으십니까?”
“왜 유독 그렇게 흑인과 동양인만 괴롭힌 겁니까?”
최종심을 마치고 나오는 짐에게 기자들이 마이크를 내밀며 질문을 퍼부었다.
하루아침에 유력가 아들에서 전과자가 되어버린 짐은 망연히 허공만 쳐다보다 대답했다.
그들에겐 그렇게 해도 별일 없을 줄 알았다고.
영화에서도 일개 하인과 노예의 죽음에 슬퍼하는 주인공은 없지 않느냐고.
***
짐의 잘못이 세상에 알려졌지만, 잭과 한은 별로 홀가분해 보이지 않았다.
겪어본 적은 없지만, 그 기분은 잘 알 것 같았다.
그들에겐 그동안 자신들이 얼마나 소외되어 있었는지를 실감할 기회일 뿐이었다.
그들의 씁쓸함이 더해져 한잔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불행히도 둘은 미성년자였다.
“그래도 두 분이 원하셨던 대로 짐을 벌줄 수 있었잖아요. 같은 피해자는 더 안 생기겠죠.”
“그래. 놈은 교도소에 갔지. 인종차별 문제에 관심이 더 뜨거워지기도 했고.”
나는 잭과 한을 근처 레스토랑으로 데려와 저녁을 샀다.
재심 결정을 축하하기 위해서였다.
짐의 죄가 드러남에 따라 잭, 한, 그리고 한의 여동생의 재판이 다시 진행될 수 있었다.
짐에 대한 선고를 뒤집을 리는 없으므로 아마 무죄 판결이 날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정말 인종차별에 대한 경각심이 지속적으로 커지고 있어. 반신반의했는데, 이 정도로 큰 성과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그러니까 말이야. 솔직히 그때는 괜한 허풍을 떤다고 생각했지.”
짐 헤이스팅스는 인종차별의 좋은 사례가 되어 전 세계에 알려졌다.
정부 차원에서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만 하는 상황인 것이었다.
정부는 더 이상 이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전국에 있는 학교에 인종차별과 관련된 내용을 교육하고 특별 상담소를 설치하겠다고 했다.
또한 어떤 범죄에 인종차별적인 동기가 확인될 경우 무관용의 원칙을 적용해 해당 범죄자를 엄벌하겠다고 발표했다.
유색인종이 살기 좋은 영국을 만드는 데에 한 발자국 더 다가간 것이었다.
“이제 다시 YJ레딩으로 돌아가야겠네. 해야 할 일이 많으니까.”
“맞아. 이번에 화가들도 굉장히 많이 지원해줬어. 클래스를 만들 수 있을 거 같은데.”
안 그래도 화가들에게 수많은 메일이 도착한 걸 확인했다.
전과자뿐만 아니라 외면받던 화가들, 음지에서 장르를 구축하고 있던 예술가들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클래스를 신청했다.
그 모든 걸 검토했다.
화가들이 보내온 메일 틈에는 세계환경구호단체 ‘월드피스’에서 보내온 것도 있었다.
월드피스는 내게 호주에 있는 코지우스코 국립공원에서 발생한 산불에 대해 알려왔다.
코지우스코 국립공원은 호주에서 가장 큰 국립공원인데, 굉장히 큰 산불이 나 그 일대가 완전히 전소되어버렸다고 했다.
페즈 테너리 공장에서 일한 이후로 나를 친환경 예술가라고 인식하는 사람이 많아졌는데, 월드피스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들은 내게 산불 피해민을 돕기 위한 구호 물품을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이제 슬슬 두 분한테 맡겨야 할 때가 온 것 같아요.”
“뭐? 그게 무슨 소리야?”
하지만 나는 구호 물품만 달랑 보내주고 손 털고 싶지는 않았다.
영국에서 그랬듯이 그들에게도 지속적인 산불 피해 복구를 위한 수단을 마련해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참여 예술을 통해 기부금을 모으는 게 효과적일 것이라는 뜻이었다.
아프리카도 다녀왔으니 호주가 있는 오세아니아에서도 이름을 알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제가 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계속 영국에만 있을 수도 없죠. 두 분을 믿기도 하고.”
나는 잭과 한에게 부회장직을 제안했다.
그들은 한창 일이 잘 진행되고 있을 때 내가 떠나버리면 관심이 흐지부지될 수도 있다고 말렸다.
하지만 이제 YJ레딩에 대한 관심은 나에 대한 관심이 아니었다.
인종차별에 대한 관심은 계속해서 YJ레딩을 성장시켜줄 것이었다.
잭과 한이 지금까지처럼만 해준다면 말이다.
“아. 일이 진행되다가 혹시 나이가 되시면 국회의원도 출마해보세요.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 하니까.”
아직 영국 의회와 왕실엔 워렌과 네빌 같은 인물들이 많았다.
워렌과 함께 꼽는 데 네빌에겐 조금 미안한 일이었지만 말이다.
새로운 의식을 가진 사람이 정치인 자리에 앉는다면 지금보다 더 저돌적으로 인종차별과 싸워나갈 수 있을 것이었다.
나는 그 밖에도 몇 가지 다른 조언을 해주었다.
그리고 그들과 YJ레딩 사람들의 각별한 배웅을 받은 뒤 공항으로 향했다.
***
월드피스에는 직접 호주에 방문해보겠다고 전했다.
그랬더니 월드피스의 회장이 멜버른 공항 앞으로 마중을 나와줬다.
영국에서는 조금 선선했는데 호주는 정반대로 맑은 풍경이 이어졌다.
미리 알고 얇은 옷을 챙겨오길 잘한 것 같았다.
“오오……! 윤예준 화가님!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전화 드렸던 그린 무어입니다.”
까맣게 태닝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정돈된 머리가 눈에 띄는 남성이었다.
번쩍번쩍한 양복 차림이었지만 형광색 운동화를 신고 있어서 전체적으로 단정해보지는 않았다.
산불이 난 곳을 계속 뛰어다녀야 했으니 그로서도 어쩔 수 없을 것이었다.
방문 계획을 전했을 때 그는 굉장히 기뻐했다.
기뻐하는 목소리만 들어보아도 그가 이번 산불 지원에 얼마나 진심인지 알 수 있었다.
젊었을 땐 환경운동가로 활동하다가 지금은 월드피스 회장과 호주 산업 컨설턴트를 겸하고 있다고 했다.
“구호 물품만 지원해주셔도 굉장히 감지덕지했을 텐데. 이렇게 아예 와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뭘요. 무어 회장님도 똑같이 노력하고 계신데요.”
무어는 나를 코지우스코 국립공원으로 안내했다.
국립공원 안에 있는 주차장에 차를 세웠는데, 월드피스에서 세워둔 케노피가 주차장을 완전히 둘러싸고 있었다.
그곳에 서면 국립공원의 모습을 팔방으로 돌아볼 수 있었는데, 풀 한 포기 남지 않고 모조리 잿가루가 되어 있었다.
끝도 없이 늘어선 검은 숲이 지옥처럼 보였다.
“첫 산불 신고 이후 한 달이 지나서야 산불 진압에 성공했습니다. 더 태울 것도 남아 있지 않은 수준이지만 다른 민가까지 옮겨붙지 않은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죠.”
산불은 8만 6500에이커 정도의 토지를 태우고 1500호의 주택을 파괴했다.
상황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심각했다.
“주민들은요?”
“근처에 임시 생활 시설을 마련해 그곳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실종자도 굉장히 많고…… 말도 안 나오는 상황입니다, 아주.”
세계 곳곳에서 구호 물품을 보내주고 있다고 했다.
기부금도 받고 있었다.
하지만 많아도 부족한 게 바로 구호와 기부였다.
“굉장히 감사하게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주고 있지만… 솔직히 피해 규모에 비해 참여가 그리 많은 편은 아닙니다. 저희가 생각한 것처럼 잘 알려지지 않더라고요.”
그랬다.
나도 영국에서 있는 동안 코지우스코 산불에 대한 건 들어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현재까지 어떻게 구호를 받아왔는지 이상할 정도였다.
나는 무어와 함께 화재민이 묵고 있는 임시 생활 시설을 방문했다.
굉장히 넓게 늘어선 잿더미들을 오래 지나야 다시 사람들이 생활하고 있는 구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소방관들은 산불피해 지역을 둘러싸고 계속 잔불 제거에 여념이 없었다.
무어가 안내한 곳은 거대한 실내 체육관이었다.
그곳엔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천막을 쳐놓고 숨죽여 생활하고 있었다.
재산을 잃은 건 당연한 이야기고, 그들 중엔 가족을 잃은 사람들도 많아 이곳 전체가 초상집이나 다름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다 있나요.”
“그러니까 말입니다. 날도 건조하고 바람도 많이 불어서……”
화재민 중엔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몇 명 있는 듯했다.
하지만 기운이 없는지 알은 척을 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유명인사 봤다고 신나서 떠들 상황은 아니었다.
“그럼 이 일을 일단 전 세계에 더 확실히 알리는 게 우선이겠네요.”
“그렇죠. YJ레딩 일은 세계적으로도 엄청 유명하던데. 그래도 이걸 단기간 내에 홍보하는 게 가능할지……”
“가능할 거예요. 우리를 도와줄 만한 기업이 떠올랐거든요. 협회장님도 아실 만한.”
무어는 그게 누구냐고 물었다.
하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고 임시 생활 시설을 나왔다.
이미 그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