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이 제일 쉬움-196화 (196/241)

196화. 헤이스팅스 게이트의 전말 (3)

“내가 누누이 말했지. 돈, 약, 그리고 여자. 그 세 가지만 조심하라고. 근데 너는 그 셋 다 멀리하지 않는구나. 사람이기만 하면 좋은 자리 앉혀준다는데 그게 그렇게 어려운 요구였더냐?”

간만에 레딩 본가를 찾은 워렌 하원의원은 망나니 아들 짐을 불러놓고 맹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레딩 본가로 돌아오자마자 그가 처음 본 건 약에 완전히 취한 채 저택 내원 풀장에 널브러진 남녀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저택 울타리가 높았으니 망정이지.

보통 같았으면 이미 다 경찰서행이었다.

벌써 점심 식사 시간이었지만 아직 짐도 약에서 다 깨지 못했다.

그래서 워렌이 하는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그가 지금 주시하고 있는 프로젝트 때문에 유난을 떨고 있다는 것쯤은 알았다.

솔직히 울타리가 낮아 주민 신고가 들어갔어도 경찰은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었다.

워렌 헤이스팅스의 집이라는 걸 뻔히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짐이 사람을 죽이지 않는 이상 워렌은 짐의 잘못을 최대한 묻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5년쯤 전 워렌이 발의해 상원을 통과한 예술 단지 조성 사업 정부 지원안이 이제 와 뒤늦게 추진되기 시작했다.

여왕과 윤예준 덕분에 가만히 손만 놓고 있어도 떡고물이 떨어질 상황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들이 마약 중독자에 여자들에게 폭행을 일삼고 다닌다는 게 알려졌다간 큰일이었다.

‘정장쟁이로 몇십 년 살더니 쫄보 다 됐네.’

짐은 워렌이 보지 못하도록 입을 가리고 웃었다.

별로 존경심도 안 생기는 아버지였지만 거슬러서 좋을 건 하나도 없었다.

이렇게 즐거운 삶을 살 수 있었던 것도 다 아버지 워렌의 권력 덕분이었다.

“조금만 기다려라. 교도소 부지 매각하고 정부가 완전히 손 털면 그땐 내 성과가 결정되니까.”

“예에.”

“...... 뭐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아 보이지만.”

워렌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창밖 풀장을 내다보았다.

희끄무레한 살덩어리들이 꿈틀대며 한두 명씩 풀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나체화라……’

전시회 에서 화제가 되었던 종교화 패러디들이 떠올랐다.

평론가들은 그걸 가지고 범인류 나체화라는 말로 포장하기 바빴다.

누구나 벗은 몸은 똑같이 추하다는 뜻이었다.

‘똑같기는 무슨. 색깔이 다르지 않은가.’

워렌은 피식 비웃으며 식기를 내려놓았다.

동양이나 아프리카에는 유럽과 같은 유구한 역사가 없었다.

그러니까 서양의 명작들을 빌려다 그렇게 패러디할 수밖엔 없었던 것이었다.

‘뭐, 잘되면 나야 땡큐지.’

***

사업본부장 패트릭은 앉은 자리에서 부지 매각과 법인 등록까지 완료해주었다.

물론 그게 끝은 아니었다.

예술 단지가 완전히 갈라서게 되면서 안정적인 사업 구상이 가능해졌다.

계약이 끝나자마자 패트릭은 전국 교도소에 예술 단지 프로그램을 제공해달라고 부탁했다.

타투 교육부터 판매까지, 예술 단지의 활동을 소형화해서 교화 프로그램을 발전시키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의 제안을 받고 수감자 견학까지 약속해주었다.

해당 프로그램으로 나오는 수익을 모두 재범 방지 목적의 비용으로 사용해달라는 조건을 달고 말이다.

“야. 그래도 기업화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몇 년 안에 타투 자격증 발급량이 운전면허 발급량보다 많아지겠는데?”

잭은 기분 좋았으면서도 비관적인 스탠스를 바꾸지 않았다.

그런 잭의 성격은 이미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기업화하면 타투 말고 다른 클래스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어요. 어쩌면 음악 관련한 클래스도 가능해지겠죠. 그러려면 지금 상태로는 좀 힘들어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을까? 벌써 수감자들이 얌전해지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돌던데.”

“얌전해진다고 출소하는 줄 아냐. 교도소에서 상점을 쌓아야 이리로 보내준다더라. 그래서 그런 거지.”

듣던 한이 덧붙였다.

하지만 잭의 의견이 영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었다.

범죄율이 떨어지면 더 이상 수강을 원하는 사람이 생기지 않을 것이었다.

물론 전과가 없는 사람들도 수강은 가능했지만 소수에 불과했고, 그렇게 되면 특수한 목적이 없는 일반 예술 학원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뭐…… 그럼 예술 단지는 없어져야죠. 우리의 목적은 처음부터 그거였잖아요. 범죄와 함께 없어져 주는 것.”

“오, 말 멋진데? 범죄와 함께 사라지다.”

“아직 안 사라졌잖아요. 범죄와 함께 사라질 것이다라고 해야죠.”

역설적이게도 그 ‘사라진다’라는 목적을 공고히 한 이후로 레딩 교도소 뒤로는 고층 빌딩이 하나 세워지기 시작했다.

레딩 교도소 건물과 부지는 도합 70억 원에 매입했고, 거기 돈을 더 투자해 수강생들이 묵을 숙소를 지은 것이었다.

처음에는 수감동 하나를 내어 숙소로 개조해보았다.

하지만 이미 교도소 경험이 있는 수강생들은 그곳에서 묵는 걸 끔찍이도 싫어했다.

자신들이 교도소 안 가려고 이곳을 왔지 교도소에서 자려고 온 줄 아느냐는 것이었다.

잭은 배부른 소리 말라며 성질을 냈지만 나는 그들을 이해했다.

범죄 재발은 그들이 ‘여전히’ 범죄를 저지를 만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한 번 교도소에 다녀온 사람이라는 걸 깊이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교도소는 그들을 범죄자로 확정지어 준 곳이었다.

그들의 이후 삶을 바꿔놓을 만큼 가혹한 곳이라는 뜻이었다.

교화만큼 중요한 교도소의 기능이 바로 형벌이었기 때문에 굉장히 복잡한 문제였다.

나와 예술가들은 그 ‘교화’에 힘을 쏟아볼 뿐이었다.

숙소는 짓되 전시관의 교도소 콘셉트는 유지했다.

그게 레딩 예술 단지의 시그니처 컨셉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건물 보수공사는 해야만 했다.

안전이 제일 중요하지 않겠는가.

“이거 보라고. 내가 뭐랬어? 한자리 차지하게 될 거라고 했지?”

법인 이름은 ‘YJ레딩’이었다.

한이 양복을 매만지며 잭에게 으스댔다.

그들도 자신이 설마하니 기업의 간부가 될 거라는 생각은 못 했을 것이었다.

수감자들에 대해 잘 아는 그들은 클래스 분반부터 전체적인 관리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임무를 맡게 되었다.

지금부터 YJ레딩에 자리를 잡게 해둘 필요가 있었다.

수감 6동 보수공사를 지켜보던 잭과 한은 교도소 부지를 배회하는 관람객 중 한 사람을 발견하곤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빙글거리며 웃던 것과는 판이한 모습이었다.

마치 처음 작당 모의를 하던 모습을 다시 보는 것만 같았다.

“다들 왜 그러세요?”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지만 나는 그들이 누구를 보는지 확인했다.

부스스한 금발 머리에 후드티, 청바지 차림의 한 소년이었다.

질질 슬리퍼 끄는 소리가 공사소음을 뚫고 들려올 만큼 껄렁했다.

굉장히 키가 크고 몸이 다부진 소년이었는데, 눈만은 힘없이 풀려 있었다.

“대충 알겠네요. 저 사람이 그 짐인가 뭔가 하는 그 사람이죠?”

잭과 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 위세를 빌려 힘자랑한다는 그 ‘짐 헤이스팅스’였다.

한의 여동생을 불구로 만들어놓고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지.

힘자랑하는 아들이나 그걸 봐주는 아버지나 똑같은 사람이었다.

“전에 제가 복수하지 말고 벌을 주라고 했죠? 합법적으로.”

“응.”

벌줄 권한은 내게 없었다.

오직 경찰과 법원만이 국민을 벌줄 수 있었다.

“그 벌 지금 주죠. 기자들 좀 불러주세요.”

***

올해만 지나면 슬슬 지겨운 학교도 졸업이었다.

짐은 그냥 살던 대로 친구들이랑 어울려 다니기만 할 생각이었다.

괜히 워렌이 레딩으로 내려와 버린 탓에 친구들과 마지막 추억을 쌓기도 힘들게 되었다.

‘제길. 하던 대로 런던에서 죽치고 계시지.’

처음 짐은 정치인 누구에게도 빌붙지 않는 아버지를 존경했다.

하지만 정치인은 어디까지나 정치인이었다.

지금은 이렇게 여론 눈치만 보며 지내고 있지 않은가?

권력은 중요했지만 언제나 체면을 잃지 않는 게 더욱 중요했다.

생각해보면 이게 다 윤예준인가 하는 화가와 여왕 때문이었다.

법안 통과만 되고 행정 단계에서 거의 버려지다시피 한 예술 단지를 굳이 끌어내서 워렌이 이 난리를 피워대는 것 아닌가.

듣기로 부지를 팔아 국고를 채웠댔고, 그래도 윤예준이 사업 머리는 좋은 것 같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워렌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 듯했다.

“이제 내 존재감만 채우면 된다. 방송사 기자들 준비시킬 테니 가서 얼굴 좀 비추고 와.”

레딩 예술 단지로 가서 기자들에게 티를 좀 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전과자도 아닌 짐이 가서 ‘아버지가 추진한 사업 잘 돼가고 있는지 보러 왔어요.’라고 말하는 건 너무 티 나는 쇼 아닌가?

‘뭐 어때. 그냥 대충하라는 대로 구색만 맞춰주면 되겠지.’

별로 국민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도 없었던 짐은 대충 슬리퍼만 끌고 레딩 교도소로 향했다.

전시회 때도 와본 적 없는 레딩 교도소였다.

뭐, 가방도 만들고 재미있는 그림도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정말이었다.

쿨한 타투 도안들이 곳곳에 전시된 상태였다.

타투도 이렇게 미술관에 전시될 수 있는 장르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애초에 교도소를 미술관으로 쓰는 것부터가 별나지 않은가.

멋진 타투 구경이나 할 수 있으면 되었다.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사진으로 찍어다가 불법 시술소에 다녀올 수도 있고 말이다.

“어? 워렌 의원님 자제분 아니십니까?”

수감동 입구에 걸린 캔맥주를 먹고 있는 모나리자 그림을 보고 있던 때였다.

한 청년이 짐에게 말을 걸어왔다.

돌아보니 이 레딩 교도소를 책임지고 있다던 윤예준이었다.

유명인사를 보니 신기했지만 빨리 기자들이나 만나 일 끝내고 돌아가려고 했던 짐으로서는 조금 짜증이 났다.

“예 그런데요.”

“이렇게 갑작스럽게 방문해주실 줄은 몰랐는데. 말씀을 하고 와주셨으면 진작에 저희가 안내를 해드렸을 텐데요.”

세계적인 예술가라기에 고귀한 척 재수 없게 굴 줄 알았는데 제법 넉살도 좋았다.

그러고 보면 개인적으로 레딩 교도소에 들렀다가 우연히 기자에게 발견된 느낌으로 보도하면 된다고 했는데, 설마 미술관 관장이나 다름없는 윤예준에게까지도 통보를 안 했을 줄은 몰랐다.

“그냥 그림 구경하러 온 건데. 무슨 말씀씩이나…….”

“에이. 당연히 알아서 모셔야죠.”

사람 기분 좋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지금의 윤예준처럼 굽신거리는 친구는 짐의 근처에 널리고 널렸지만 윤예준은 어딘가 달랐다.

잠시 기자들 기다릴 겸 윤예준과 대화를 나누려는데, 어디선가 정장을 입은 두 남자가 예준에게 회장님을 운운하며 다가와 섰다.

누가 동양인 사업가 아니랄까 봐 그 따까리들도 동양인에 흑인이었다.

“......어?”

어딘가 낯이 익다 했더니 중학교 시절 퇴학을 당하고 교도소에 갔던 잭과 한이었다.

잭은 옮기라고 시켰던 마약을 들고 경찰서로 가려다 잡혀 짐의 무리가 흠씬 두들겨주었다.

종종 그렇게 힘이 약한 흑인 친구들을 운반책으로 쓰던 짐이었다.

앞에서는 그렇게 굽신거리는 척을 하더니 경찰에 신고할 생각을 하다니.

겉과 속이 다르기 때문에 이렇게 정장이나 입고 있는 것이었다.

“어! 깜둥이! 그리고 내 친구 한! 오랜만인데? 안에서 반성 좀 많이 했어?”

국회의원 아버지 믿고 여전히 당당한 짐이었다.

잭과 한은 분노가 치밀었지만, 윤예준을 봐서 꾹 눌러 담았다.

“저희 직원들이랑 친분이 있으신가 보네요.”

“네. 한 이 친구는 갑자기 제게 무슨 악감정이 있는지 파이프를 들고 달려든 바람에 폭행죄로 기소가 됐고, 잭은 어디 흑인 갱들 대신 마약을 나르다 걸렸는지 갑자기 안 보이더라구요.”

다 추억이죠.

짐이 포장하자 참다못한 한이 윽박질렀다.

“뭐?! 악감정! 네가 내 동생한테 무슨 짓을 했는데!”

“이봐, 진정해. 내가 네 동생이 누군지 어떻게 알아?”

“법정에서 증명하지 못했다고 사실이 바뀌는 건 아냐! 내가 폭로하면 넌 끝이라고!”

정장 좀 입었다고 기세등등해진 모습을 보니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잭이나 한이나 다 워렌과 같은 아첨꾼이었다.

윤예준이라는 뒷배를 얻었다고 이제야 목에 힘을 주고 있지 않은가.

그러고 보면 윤예준이 왜 짐에게 그렇게 굽히고 들었는지도 알 만했다.

이 사업이 다 워렌 덕분에 이루어지고 있는 사업이라서였다.

결과적으로 다 워렌의 아랫사람이라는 것이었다.

“폭로? 그래. 해볼 수 있을 테면 해보시지! 과연 사람들이 너 같은 거렁뱅이 동양인 이야기를 믿어줄지, 아니면 국회의원인 우리 아버지 말을 믿어줄지 궁금한데?”

듣던 예준이 손짓을 하자 수감동 건너편에서 기자들이 우르르 뛰어나오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불렀다던 방송사 보도국 직원들도 섞여 있었다.

“뭐야?”

“그러게요. 저도 궁금하네요. 워렌 의원님과 저 같은 동양인 중 누구의 말이 국민들에게 더 신뢰를 줄 수 있을지.”

바로 방금 전까지만 해도 굽신거리던 예준이 태도를 바꾸고 낮은 목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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