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헤이스팅스 게이트의 전말 (2)
작업이 끝날 때까지 수강생들은 그림을 숨죽여 구경했다.
검은 염색약으로 밑그림을 그리고 두 가지 톤의 푸른색으로 형태를 잡아나가자 나비 그림이 완성되었다.
이번 예술 단지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잭과 한을 통해 젊은이들에게 먹히는 타투의 감성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걸 응용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자. 이렇게 그리면 되는 겁니다.”
내가 말하자 수강생들은 자리를 이탈하고 내가 그린 도안 앞으로 모여들었다.
“와. 저렇게 빨리 그렸는데 완전히 프린트기로 뽑아낸 것처럼 정확하잖아?”
“나 해골 지우고 이걸로 할래.”
동기를 부여하는 데에는 성공한 듯했다.
“영국에서 타투로 사업을 하려면 타투협회에서 주는 자격증이 필요하다고 하더라고요. 저희 예술 단지에서는 여러분들이 가장 좋아하시는 타투부터 배우고 그 뒤에 완전히 전문가가 될지 아니면 일반 화가나 조각가가 될지, 아예 다른 걸 할지 결정할 수 있습니다.”
수강생은 도안에서 눈을 떼지 않고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첫 단추는 잘 끼웠다.
스스로 재능이 없다고 주장하는 잭과 한은 자신이 생각했을 때 가장 배우기 편한 방식으로 그들을 가르쳤다.
단순 작대기부터 꺾쇠, 리본형 나선, 원형, 귀퉁이가 잘린 원형 등 타투 도안에서 자주 쓰이는 패턴을 하나씩 가르쳐 나가는 식이었다.
그릴 줄 아는 패턴이 많이 쌓이면 나중에 그것들을 조합해 원하는 형태의 도안을 창안해낼 수 있다는데, 굉장히 유용한 교육법이었다.
나도 그 ‘퍼즐 조각 수집하기’ 방식의 교육법에 호응해주었다.
내가 맡은 역할은 전체적인 도안 디자인이었는데, 잭과 한에게 배운 퍼즐 조각이 부족한 경우 그들은 조금 괴상한 패턴의 디자인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내 눈엔 그들이 어떤 패턴이 부족해서 그런 어려움을 겪는지 보였다.
그럼 조각을 추가적으로 주문해 양질의 도안을 만드는 데에 도움을 줬다.
교육 기간이 쌓일수록 수강생들에게 각자 선호하는 패턴과 도안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때부터는 작품을 전시할 준비가 된 것이었다.
“아, 이거 갑자기 다른 가죽으로 하려니까 영 기계가 안 드는데.”
“비싼 가죽이라고 긴장해서 그래요. 여분 많으니까 자유롭게 하세요.”
페즈의 천연 가죽을 두고 수강생들은 잠시 주춤했다.
그래서 실패해 버려진 천연 가죽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연습용 가죽에 아무리 그려봐야 전시를 해놓을 수는 없었다.
천연 가죽 몇 장을 그들 보는 앞에서 아무렇게나 찢어버리는 퍼포먼스가 가장 잘 먹혔다.
너무 난해한 요즘의 미술 유행 때문에 현대 예술을 하는 줄 착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 애를 먹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부족해진 천연 가죽은 나의 사비로 메웠다.
덕분에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었으니 된 일이었다.
수강생과 예술가들이 그린 가죽 도안은 우선 페즈 가죽공장으로 보내져 남은 무두질부터 아르간 오일 처리까지 끝마쳐진 뒤 다시 레딩 교도소로 돌아왔다.
수강생들은 완성된 자신의 작품을 보고 굉장히 좋아했는데, 놀라움을 표현한 건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화가님! 보낸 디자인들 다 뭐예요?
첫 작품을 받아보자마자 연락했는지 나딘은 굉장히 흥분한 목소리였다.
-이 그림들 엄청 대단한데요! 다 화가님이 그리신 거예요?
“아뇨, 여기 수강생들 작품이죠.”
-이거 물감으로 칠한 거 아니죠? 표면을 갈아도 안 지워지던데!
나딘에게 타투라는 것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원래는 산 사람의 피부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는데, 가죽 손질 중간 공정에 똑같은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면 완성했을 때 색이 잘 먹는다고 말이다.
나딘은 같은 방식으로 페즈의 염색 공정을 변경하고 싶다고 했지만,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었다.
타투 기계로 그려야 발색이 더 좋아지는 건 맞았지만, 그러려면 가죽 표면 전체를 완전히 후벼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아…… 그거 아쉽네요.
“이미 페즈 염색 공장은 오랜 노하우가 있잖아요? 아쉬워하실 거 없어요.”
나딘은 가죽 공예 예술가들의 한계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들은 가죽 가공이 끝난 뒤, 염색을 마치고, 말린 후에야 조각칼을 들든 붓을 들든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참여할 수 있는 단계는 염색부터 사후 공예뿐이었다.
하지만 레딩의 예술가들처럼 가죽 공정 중간에도 관여를 할 수 있다면 더 멋진 가죽 예술이 가능할 거라고 했다.
-가능하면 그쪽 예술가분들을 이곳으로 모시고 싶은데. 영국과 모로코는 너무 멀어서…… 그럴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네요.
어쩌면 그럴 기회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다독여주었다.
기회는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
처음 전시회 를 열 때까지만 해도 타투를 할 줄 아는 예술가들이 붓을 통해 캔버스에 타투 도안을 옮겨 그리는 방식이었다.
디자인이 어떻든 결국은 그냥 그림이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후부터는 가죽에 그려진 타투 도안이 공개되기 시작하면서 세간의 큰 화제를 모았다.
그 비밀은 가죽을 완전히 가공하기 전에 그곳에 타투를 하는 것이며, 이 가죽 또한 유명 브랜드 아르메스가 이용하는 고급 가죽이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졌다.
그 덕에 아르메스로부터 연락이 온 것이었다.
그때부터는 레딩 예술 단지의 완전한 성공이라고 할 만한 성과가 생기기 시작했다.
아르메스에서는 자신들의 완제품에 레딩의 디자인이 들어가기를 원했다.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아르메스와의 협업이라면 레딩의 유지에 결정적인 도움이 될 것이었다.
그렇게 레딩 예술가들의 도안이 들어간 아르메스의 캔버스백이 출시되었다.
도안을 따라 페즈의 가죽 공예 예술가들의 작업이 곁들어져 굉장히 멋진 디자인이 탄생했다.
반항적이면서도 캐주얼한 디자인이 소비자들의 소유욕을 자극했고, 기존의 단정하기만 한 가방에 질린 사람들을 중심으로 아르메스 유행이 새롭게 시작되었다.
아르메스라는 브랜드의 이미지가 완전히 달라져 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레딩과 아르메스는 장기적인 파트너십을 맺게 되었다.
그리고 곧이어, 이번엔 영국 정부로부터 직접 연락이 왔다.
***
[아르메스, 가격과 판매량 반비례 공식 깨고 캔버스백 보름 만에 완판!]
[레딩에서 쏟아져 나온 타투이스트들의 삶 들여다보기]
[윤예준의 레딩 예술 단지, 정부 관계자 조사 결과 일반 기업 수준의 매출 내고 있는 걸로 밝혀져]
정부 예하에 설립된 레딩 예술 단지 조성 사업본부는 크나큰 고민에 빠졌다.
예술 단지 조성을 조속히 처리해달라는 여왕의 요청이 있자마자 급하게 꾸려진 팀이었다.
지금까지는 예준이 요청하는 요구들을 단순히 들어주는 방식으로 예술 단지를 지원해왔다.
하지만 이젠 그렇게 수동적으로 두고만 볼 수 없게 되었다.
“레딩 예술 단지의 목표가 뭐죠?”
“뭐긴요. 인종차별 철폐와 전과자 교화죠.”
인종차별 철폐는 확실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인종차별이란 무엇인가], [현대 오리엔탈리즘의 심리학적 연구], [스킨 트러블] 등 인종차별을 비판하는 수많은 저서가 쏟아져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윤예준의 첫 전시회 가 성공한 시점부터 말이다.
단순히 출판 업계가 유행을 타고 있는 양상도 아니었다.
저명 학자들이 이미 학계 발표가 완료된 자신의 연구 논문을 편집해 단행본을 출판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윤예준의 움직임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었다.
인종차별은 그 움직임에 맡겨놓아도 무리는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전과자 교화였다.
전과자 교화란 교화 ‘시스템’이 갖추어져야 하는 법인데, 지금은 윤예준의 개인적인 호소에만 의존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제 발로 레딩까지 와주도록 말이다.
“과거에 비해서 많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아직 영국의 수감자 비율은 서유럽 1위예요. 여태까지 교화프로그램이 제 기능을 못하고 있었다는 뜻 아닙니까?”
“그렇긴 한데 지금 윤예준이가 판도를 완전히 뒤엎어놓고 있잖아요. 곧 재범률이 떨어지겠죠.”
“윤예준에게만 떠넘겨서야 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었잖아요? 작은 도움이라도 될 수 있으면 해야죠.”
사업본부장 패트릭이 말했다.
그의 말대로였다.
현재 있는 교화프로그램을 완전히 폐기하고 레딩 교도소의 교육 시스템을 적용하는 것도 그중 하나의 방법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도움이 될지 방해가 될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윤예준의 역량이 뛰어나기는 하지만 현재는 일개 사업 수준의 행정이었다.
어쭙잖게 끼어들었다가는 어떤 나비효과가 발생할지 모르지 않는가.
“그럼 레딩 예술 단지를 기업화하면 어떻습니까?”
“기업화라니?”
“그러니까, 레딩 교도소를 회사로 만들자는 겁니다. 윤예준에게 팔면 그가 CEO 자리를 맡게 되겠죠. 들어보니 레딩 교도소에 수강생을 수용할 시설도 별로 없다던데.”
그렇게 한다면 정부와 레딩 간의 사업 제안에 체계가 생길 수 있을 터였다.
만에 하나라도 나중에 윤예준이 영국을 떠나더라도 레딩 예술 단지만은 계속 작동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거 좋은 방법이네요. 상부에 보고한 뒤 레딩에 제안해보죠.”
패트릭은 수익도 내고 범죄 재발 방지에도 효과를 발휘하는 레딩 예술 기업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계적으로 전례가 없는 교정시설이 될 듯했다.
***
아르메스로부터 캔버스백 디자인료가 들어왔다.
모든 수익은 예술 단지 발전에 공적으로 사용하고 싶었지만, 디자인이 채택된 예술가들에게 개런티는 있어야 할 것이었다.
개런티만 해도 굉장히 큰 액수였다.
디자이너들이 왜 비싼 브랜드와만 협업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요즘 표정이 많이 좋아지셨네요, 한 씨.”
“응, 그런가?”
한이 송금받은 돈을 확인하며 웃었다.
“대출금도 다 갚았고, 앞으로 여동생 치료비는 걱정 없을 정도로 돈을 모았어. 그래서 표정이 좋아 보였나?”
여동생 이야기는 잭에게 전해 들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안 했지만, 한 인종차별주의자 때문에 위중한 상태에 놓여 있다고.
“꼭 복수를 해야지만 나의 억울함이 풀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여동생 치료비 모은 것만으로도 이렇게 행복해지다니. 샌님 예술가랑 어울리다 보니까 나도 호구 다 된 거지 뭐.”
“한국에선 그걸 호구가 아니라 군자라고 해요.”
“참나, 그래. 군자. 한 마디를 안 져주는구나.”
한이 웃으며 인정했다.
“그래도 저는 복수를 하지 말라고 했지, 벌주지 말라는 이야기는 아니었어요.”
“응? 복수는 안 되는데 벌은 줘도 된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때 한 양복 차림의 남성이 레딩 교도소 안으로 들어왔다.
“아, 윤예준 씨군요. 반갑습니다. 예술 단지 사업본부장 패트릭입니다.”
예술 단지 사업본부장이라면, 지금 이 레딩 예술 단지의 행정상 책임자라는 뜻이었다.
전시회 홍보를 요청했을 때에도 그렇고 페즈 가죽 계약을 요청했을 때에도 그렇고, 나의 요구를 군말 없이 다 들어줬기에 그들에겐 악감정이 없었다.
일이 시작된 뒤로 얼굴 한 번 안 비친 건 결코 좋게 보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왜 여태 예술 단지 조성 사업이 흐지부지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곧 패트릭에게서 영국 정부의 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예술 단지 사업본부 구성원은 모두 각자의 부서에서 멀쩡히 잘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예술 단지 사업본부가 생기면서 경질되어 왔다고 했다.
그뿐이라면 괜찮았겠지만, 사업이 흐지부지 끝나면 다시 원래 위치로 복귀될 사람들이라 기존 일을 그대로 하고 있어야만 했다고.
일이 두 배가 된 것이었다.
“그래서 아예 윤예준 담당자님께 최대한의 권한을 실어드리려고 합니다. 지금은 뭔가를 추진하려고 해도 정부에 보고하고, 승인받고…… 또 수익이 들어오면 사용할 때마다 비용 처리하고 골치가 아프셨잖아요?”
“아뇨, 그 정도는 아니고. 조금 번거로운 정도였죠.”
“그래서 아예 예술 단지를 기업화하기로 했습니다.”
기업화.
정부의 참견을 받지 않고 일할 수 있다면야 굉장히 좋은 일이었다.
지금이야 내게 호의적이지만 몇 번의 선거를 거치면서 예술 단지에 불만을 가진 자들이 정부 자리를 꿰차게 되면 예술 단지는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기업이라면 정부와 수평한 관계를 맺을 수 있으니 적어도 그런 위험으로부터는 벗어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기업화라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이죠?”
“그걸 상의해보러 왔습니다. 처음엔 국영기업을 생각하기는 했는데, 그럼 회장직에 있는 사람의 위치가 조금 불안정해집니다. 윤예준 담당자님이 회장직에 앉기도 어려울 테고요. 그렇다고 아예 땅을 매각하기는 너무 비싸기도 하고…… 솔직히 담당자님이 이 땅을 어떻게 바꿔 쓰실지 알 수 없는 문제이기에.”
나의 소유로 바뀌자마자 사업을 완전히 접고 부당하게 이윤을 추구할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괜한 걱정이었다.
그럴 일은 없으니까.
“땅값은 마련해놓을 테니 걱정 마세요. 그렇게 해요.”
“확실히 사업은 계속해 주실 거죠?”
본부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연하죠. 무서운 사람들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감시하고 있어서, 어차피 마음대로 바꾸지도 못해요.”
내 뒤에 서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잭과 한을 가리키며 말하자 담당자는 그제야 안심이 된다는 듯 서류를 꺼내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