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이 제일 쉬움-194화 (194/241)

194화. 헤이스팅스 게이트의 전말

[불후의 역작과 타투의 결합. 레딩 미술관 전시회 에서 드러난 윤예준의 작품세계]

[전시회 , 입장료 수익 1300만 파운드 돌파!]

[윤예준 패러디 누드화, 우피치, 오르세, 바티칸 등 세계 유명 미술관에 대여. 대여금액 매달 100만 파운드로 예상돼]

별다른 홍보가 없어도 는 큰 호응을 받았다.

레딩 시내 맥줏집에서 이루어진 예술가들의 뒤풀이 자리도 있었다.

그곳에 모인 한 예술가는 그들이 인종차별이라는 큰 바위에 균열을 내는 데에 성공했다고 평가했다.

“이 균열이라는 게 생기지 않으면 망치로 아무리 내려찍어도 절대 깨지지가 않는 거거든. 그런데 아주 작은 균열이라도 생겼다? 그때부터는 꾸준히 두드리기만 하면 돼.”

‘나는 변하지 않았지만, 인정은 하게 되었다.’라던 네빌의 말을 떠올리면 그 예술가의 말이 더더욱 와닿았다.

영국 국민들은 이번 전시회를 통해 유색인종이 범죄집단 같은 게 아니라 그들의 주민이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하루 8만 명씩이나 되는 관람객이 찾아올 리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8만 명이 그렇게 많은 숫자야? 보기엔 엄청 많아 보이긴 하던데.”

“당연하지. 루브르가 주말 평일 국경일 상관 없이 매년 일 평균 4만 명씩 방문한다는데.”

“뭐?! 루브르면 거기 엄청난 곳이잖아! 거기보다 많이 왔다고?”

예술가들은 마치 고흐, 피카소가 된 것 같은 기쁨에 맥주를 계속 들이켰다.

맥주를 마시던 잭이 물었다.

“그런데 솔직히 우리 전시회에서 알짜배기는 윤예준의 누드화 여섯 점이었던 것 같은데. 그거 빌려줘도 됐던 거야?”

“네. 그거 없어도 방문객은 많잖아요? 아, 맞다. 그리고.”

나는 안주머니에 넣어뒀던 돈 봉투를 꺼내 한에게 건넸다.

“한…… 아니, 국 작가님. 이거 받으세요.”

“뭔데?”

작품 사용료였다.

“국이라는 이름 달아서 걸어놓은 작품 있잖아요? 그거 찍어서 SNS에 올려봤는데 엄청 인기가 많더라고요. 영국에 있는 타투샵에서 도안 좀 사용하게 해달라고 그래서 제가 임의로 팔았어요.”

“뭐?! 몇 군데나?”

“너무 여기저기 팔면 희소성 없을까 봐 다섯 군데 선정해서요. 이건 한 달 치 사용료 합친 거.”

나는 한이 봉투 속 액수를 확인할 동안 계약서도 꺼내 함께 건넸다.

“3000파운드?! 이럴 수가! 타투샵 이름이 뭔데?”

“거기 계약서 있어요. 킹스로드 스킨아트인가……”

그 말을 들은 예술가들이 모두 놀랐다.

굉장히 유명한 타투샵이라고 했다.

그밖에도 다른 네 군데도 있었는데, 한은 그곳에서 자신의 도안을 샀다는 소식에 굉장히 감동했다.

“국 작가 작품이 하나밖에 없다고 하니까 다들 아쉬워하던데. 그러게 제가 뭐랬어요? 잘될지 안될지는 공개해본 뒤에나 알 수 있는 거예요.”

그들은 타투를 많이 하는 이들은 범죄와 가깝다는 편견에는 치를 떨었지만, 솔직히 재소자들 사이에서 유명한 타투이스트를 공유하는 문화가 특별히 있다는 점은 부정하지 않았다.

명작 누드화 세 점에 남긴 타투부터 ‘국’ 작가의 데뷔전까지.

인종차별에 대한 문제의식에 전국 타투이스트들의 관심이 부차적으로 얻어졌다.

그들이 여러 인터뷰에서 소년범 출신이라는 점을 밝힌 덕분에 같은 소년범들이 레딩 교도소로 몰려들 것이라는 예상도 내놓았다.

“몰려들어서 뭐 하게?”

“우리처럼 예술가로 발돋움해보고 싶은 거지. 그런데 어쩌지? 우리는 선발 같은 걸 거친 것도 아니잖아.”

윤예종 때와 같은 문제점이 또 발생했다.

그렇다면 윤예종 때와 같은 방식으로 해결하면 될 것이었다.

“이렇게 된 거 타투 아트로 저희 정체성을 잡죠. 타투 자격 있으신 분들 있으세요?”

한두 사람의 예술가가 손을 들었다.

잭과 한은 거기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알겠어요. 그럼 타투를 할 줄 아시는 분들은요?”

예술가들 과반이 그제야 손을 들었다.

“그럼 됐네요. 없으신 분들은 활동에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저랑 같이 따도록 하고요, 일단 자격증 있는 두 분 중심으로 클래스를 열죠.”

“알겠어. 그런데 그렇다고 여기를 타투숍으로 만들 순 없잖아? 지금은 작품이 가득 차 있지만 결국은 그림을 그려야 하는데, 생각보다 타투랑 그림이 달라서 애 좀 먹었다고.”

내가 타투를 정체성으로 삼자고 했을 땐 단순히 캔버스에 타투 도안을 그리자는 의도였던 게 아니었다.

윤예종은 내가 지속적으로 투자를 하고 있기 때문에 교육만으로 유지가 가능했지만, 현재의 예술 단지는 그럴 수 없었다.

영국에서 언제까지 이 사업을 밀어줄지도 몰랐고, 그렇다고 내가 계속 여기 남을 수는 없었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곳 사업은 진짜 ‘예술 시장’에 뛰어들 수 있는 사업이 되어야만 했다.

“사람 피부에만 타투를 해서는 판매하는 데에 한계가 있죠.”

“그러니까.”

“그럼 가죽(Leather)에 하면 되잖아요.”

내가 가죽을 언급하자 그들은 잠시 말을 잃었다.

“무슨 가죽?”

“모로코 페즈의 천연 가죽이요. 아르메스가 사용하는.”

***

우리 예상대로 전국 각지에서 부랑자 생활을 하던 전과 소년들이 레딩 교도소로 몰려들었다.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기사화가 되었다.

내가 그들을 어떻게 대처할지가 영국의 국민적 관심사가 되었다.

유색인종 개인의 선행은 개인의 선행이지만, 개인의 범죄는 유색인종의 범죄가 되었다.

첫 전시회 가 큰 성공을 거두기는 했어도 지금의 이 사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 사람들의 관심은 다시 돌아설지도 몰랐다.

나는 우선 나딘에게 전화를 걸어 아르메스와의 계약 건에 대해 물었다.

솜니움 액자 제작이 끝난 후 가죽공예 예술가들은 밀린 아르메스의 상품 기획을 진행하는 데에 또 큰 노력을 들여야 했다.

“남는 가죽이 없나요?”

-아니요. 더 필요하면 좀 더 만들어서 쓰면 되죠.

그럼 되었다.

예술가 구하기가 힘들지 어디 재료 구하는 게 힘들겠는가.

“알겠어요. 곧 영국 정부 예술 단지 조성 사업 담당과에서 계약 요청이 갈 거예요. 그리 많은 재료를 요구하는 건 아닐 테니 검토해보시고 진행하시면 될 것 같아요.”

-넵, 알겠습니다!

캔버스에 붓으로 그리는 게 불편했다면, 가죽에 타투 용품으로 그리게 해주면 됐다.

모로코 가죽을 거덜 낼 수는 없으므로 연습용 인조가죽 납품 계약도 마쳤다.

사람들이 아무리 많이 찾아오더라도 여유가 없어 받지 못할 이유는 없게 되었다.

클래스 하나가 채워지기 전에 나와 타투 예술가들은 타투협회에 가서 자격증을 취득하고 업체 등록까지 마쳤다.

그렇게 타투를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나를 포함해 서른 명이 넘게 되었는데, 그 정도면 클래스 30개를 운영해도 거뜬했다.

“참나. 죄다 뺀질거리는 놈들밖에 안 오는구나.”

클래스에 들기 위해 찾아온 이들을 보며 잭이 중얼거렸다.

얼굴에 역십자 문신을 했거나 귀에 피어싱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미성년자들이 관람객들 틈에 섞여 있었다.

보통의 전시관이라면 생각도 할 수 없는 광경이었지만, 애당초 작품부터가 충격적이었기 때문인지 관람객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사람 하나 때려눕히겠다고 밤마다 작전 짜던 사람만 하겠어요?”

“놈은 사람이 아니잖아.”

잭과 한의 분노는 여전했다.

그 분노를 다스리게 된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현재 잭의 목표는 빨리 한처럼 유명해져서 ‘짐 헤이스팅스’의 죄를 폭로해주는 거라고 했다.

어떤 감정이든 예술적 표현의 동기가 된다면 매력적인 모습을 가지게 되는 것 같았다.

관람객이 한산해졌을 때쯤 나와 예술가들은 수강생들을 운동장에 모았다.

다들 감방 생활 이력이 있기 때문인지 자연스럽게 줄을 맞춰 섰다.

“분위기 때문에 그러세요? 왜 다들 오와 열을 맞춰서 서시는 거예요?”

“응? 오, 이런 젠장. 소름끼쳐. 야, 다들 흩어져!”

그들은 이젠 일부러 열을 헤쳐 섰다.

“저희가 타투 클래스를 만들었는데, 학제를 완전히 세운 건 아니지만 여러분들이 1기 수강생이십니다. 그래서 이곳에 온 목적을 서로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지고 싶은데. 말하고 싶으신 분들 있으세요?”

그들은 주저 않고 손을 들었다.

그들 중에는 완전히 누명을 쓰고 들어가 감옥에서 나쁜 물이 든 이들도 있었고, 잭과 한처럼 특별한 동기가 있어서 실수를 범한 이들도 있었다.

물론 ‘그냥’ 죄를 저질러본 이들도 더러는 있었다.

반성한 사람도, 아직 죄를 뉘우치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상관없었다.

처음부터 죄짓지 않은 사람만 모으려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앞으로 죄를 지을지 모르는 사람에게 새로운 인생을 선물하는 게 중요했다.

“저는 인종차별이 싫어서 이 예술 단지를 계획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오직 인종차별 해소만이 유일한 목적인 건 아닌 듯해요. 애초에 동양인과 흑인이 항상 같은 인종차별을 겪는 것도 아니니까요.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잖아요?”

“그렇지.”

“예술 단지에는 목적이 없어요. 목적은 여러분들이 가지고 계시죠. 이곳에서는 그 목적을 각자 이뤄 나가시면 될 것 같아요. 저희는 빈 캔버스만 드릴 테니까요.”

하나의 목표를 세우지 않는 게 인종차별을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수강생 중에는 백인도 많았고, 아예 전과자가 아닌 사람도 있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가치가 있는 듯했다.

이곳은 가장 예술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이 모인 대안 공간이었다.

그들에게마저 자격을 제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의 발언이 끝나자 수강생들은 모두 박수를 쳐주기 시작했다.

“야, 이거 동영상 다 찍었다! 인터넷에 올려도 돼?”

머리를 빨갛게 물들인 한 여자가 외쳐 물었다.

“멋지게 나왔으면 올리시고 아니면 지우세요.”

“혹시 몰라서 집에서 조립한 피규어 가져왔는데 어디 놓으면 돼?”

“우리 영광의 1기 수강생인데 그림 그리는 거 안 보여줄 거야?”

발언이 끝났다고 선언하자마자 쓸데없는 질문들이 마구 쏟아져나왔다.

나는 잭에게 눈짓을 보냈고, 그는 내게 타투 용품과 기초 무두질만 되어 있는 연습용 가죽을 가져다주었다.

“없기를 바라지만 이중엔 그냥 놀러 오신 분들도 계신 것 같으니까 동기부여 한번 시켜드릴게요.”

“뭐야. 그 윤예준이 타투도 할 줄 알아?”

“예, 뭐. 다행히도.”

처음 그래피티를 배웠을 때 낯선 도구를 일찍 터득하는 법을 배웠다.

타투 용품도 충분히 까다로웠지만, 그래피티 라카보다는 붓에 가까웠다.

그래서 며칠만 준비해도 자격증을 따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었다.

자격증은 다른 예술가들을 격려하는 차원에서 땄다.

문제는 자격증이 아니라 작품이 될 만한 타투 예술을 해내는 것이었다.

“좋은 구경시켜드릴 테니까 집중하세요.”

내가 가죽을 캔버스에 올려놓자 어수선했던 일대가 일순 조용해졌다.

분위기를 살피며 관람을 계속하던 관람객들도 운동장으로 모여들었다.

나는 빈 가죽을 보며 무엇을 그릴지 생각해보았다.

이 작품은 나의 첫 타투 작품이 되겠지만, 1기 수강생들의 반항적인 마음에 ‘균열’을 일으킬 수 있어야 했다.

구상은 끝났다.

나는 타투머신을 작동시키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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