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레딩 감옥의 노래 (4)
며칠 사이 아이디어는 차고 넘치게 쌓였다.
미리 그려놓았던 세 개의 누드화에는 잭과 한이 문신을 새겨주기로 했다.
그것만으로도 굉장한 화제가 될 것이었다.
누드화는 일부러 역작 평가를 받는 작품으로만 간추려 선택했다.
거기에 문신을 넣는 것인데, 얼마나 충격적이겠는가.
“와. 근데 이거 원작자들이 무덤에서 난리나 안 치려나 몰라. 나는 프로 화가도 아닌데.”
그리던 한이 말했다.
적어도 <올랭피아>의 원작자인 나는 난리 칠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원작도 아니지 않은가?
잭과 한의 수월한 작업을 위해 작품을 만들 때부터 인물의 몸 굴곡을 분명히 표시해두었다.
그들의 몸에 문신을 새기는 것이지만 어디까지나 진짜 문신이 아니라 평면 그림이기 때문이었다.
또 그들은 자신의 작업 속도에 대한 걱정이 컸다.
자신들은 그림에 소질이 없어 나처럼 붓으로 휙 휙 그릴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좀 느려도 잘 그리시잖아요?”
“이렇게 한 땀 한 땀 천천히 그려서 못 그리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들은 아무래도 그게 얼마나 큰 재능인지 모르는 듯했다.
그래도 그게 그들의 고충이었기 때문에 일단 도움은 주었다.
진짜 문신 기계를 쓰면 캔버스가 다 찢어져 버리기 때문에 문신 기계와 비슷한 그립감의 세필붓을 따로 만들어 쥐여 주었다.
처음엔 여전히 느렸지만, 작업을 거듭할수록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그걸로도 부족해 그들은 교도소 내 교화프로그램에 함께 참여했던 동료 수감자들을 불렀다.
석방된 뒤 오랫동안 그림을 안 그려보았다고들 했지만, 막상 붓을 잡으면 제법 봐줄 만한 도안을 만들어냈다.
그중에서 나의 누드화에 어울리는 도안이 있으면, 그 도안을 그린 화가가 나의 작품에 타투를 그려 넣었다.
그렇게 예술 단지 조성 사업은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그들이 불러모은 예술가 중 한 사람은 정의 구현(Justice has been done)이라는 문구를 누드와 관련된 문구로 변형하고 있었다.
처음 세 점의 누드화를 먼저 걸어둔 탓에 누드화 표현에 중점을 두고 있는 듯했다.
지금 정도만 되어도 예술 단지 활성화에는 성공할 듯했다.
하지만 인종차별에 대한 메시지도 희석되어서는 안 되었다.
나는 거대한 캔버스를 하나 가져와 다른 버전의 누드화를 그려보기로 했다.
이번엔 남성이었다.
‘남성 누드화로 유명한 게 뭐가 있을까……’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알브레히트 뒤러의 <아담과 이브>, 그리고 자크 루이 다비드의 <파트로클로스>가 좋을 듯했다.
<천지창조>, <아담과 이브>, <파트로클로스>
중요한 건 원작의 느낌을 최대한 살려두는 것이었다.
<천지창조>는 남성을 둘러싼 풍경, <아담과 이브>는 두 남녀의 배치, <파트로클로스>는 등 근육 표현과 남성의 자세만으로도 원작을 연상시키기 충분했다.
“오우! 이번엔 남자인가?”
“진짜 그림 빨리 그리네. 게다가 엄청 입체적이잖아? 괜히 유명한 게 아니야.”
구경하던 이들이 과연 천재는 다르다며 나를 우러러보았다.
큰 그림을 빠르게 그리는 게 중요했다.
집중력을 잘만 발휘한다면 하루 세 작품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다.
속도 면에서는 미들타운에서의 <화합> 작업이 큰 도움이 되었다.
“이봐! 그런데 아담 머리가 지나치게 꼬불거리는 거 아니야?”
지나치게 꼬불거리기는 했지만 실수는 아니었다.
나는 아담을 흑인의 모습으로 그렸다.
다른 작품도 예외는 아니었다.
<천지창조>는 아메리칸 원주민의 모습으로, <파트로클로스>는 동양인의 모습으로 그렸다.
작업은 해가 지기 전에 끝났다.
그림 속 인종을 바꾼 만큼 작품 제목도 바꿔 달기로 했다.
<천지창조>는 그대로 두었고, <아담과 이브> 하단에는 남아프리카 신화에 등장하는 ‘카무누’라는 이름을 적어 제목으로 삼았다.
<파트로클로스>는 <청년 다리우스>로 바꿨다.
“그림이 굉장히 훌륭한 건 알겠는데 공연히 욕만 먹는 건 아닌가 몰라.”
“그러게. 모처럼 제대로 할 일이 생겼나 싶었는데. 이거 실패하면 좀 서운할 것 같은데.”
잭과 한이 걱정스러워하며 말했다.
사업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별로 탐탁지 않아 하던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작업을 하는 동안 그들의 표정은 조금 누그러들어 있는 상태였다.
인종차별을 없애기 위해 더 적극적으로 싸워야만 한다는 왜곡된 사명감을 지금은 조금 내려놓은 듯했다.
그들이 그럴 수 있었던 건, 절반은 예술의 힘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나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예술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는 잘 느꼈으리라.
남은 건 그들의 기대감을 충족시켜주는 일뿐이었다.
나는 여태까지 제작이 완료된 작품들의 사진을 찍어 페즈 가죽공장의 나딘에게 전송했다.
문자가 전송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가 걸려왔다.
-윤 화가님! 이게 다 뭐예요?
“작품 사이즈도 적어서 다시 보내드릴게요. 그 작품에 어울리는 액자를 만들어서 영국 레딩 교도소로 좀 보내주세요.”
-아…… 네 알겠어요.
나딘은 미심쩍어하면서도 그렇게만 대답했다.
아마 사진 귀퉁이마다 자리 잡은 ‘정의 구현’이라는 문구와 교도소 분위기 때문에 의구심이 들었을 것이었다.
작품 사이즈를 재 나딘에게 전송하자 다음과 같은 답장이 전달되어 왔다.
-사이즈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영치금은 필요 없으세요……?
***
레딩 교도소는 연일 작업자와 예술가들로 붐볐다.
예준은 레딩 교도소의 예술 단지 첫 전시회 제목을 로 선정했다.
이번 전시회의 목표가 ‘당신을 위한 예술’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의 첫 전시회 제목이 였던 것과는 확실히 대조되는 구석이었다.
그때는 예준이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그림을 그렸지만, 이제는 다른 사람들까지 그림으로 포용할 수 있는 힘이 생긴 것이었다.
전시회가 시작되기 전날까지도 계속 작품이 출품되었다.
잭은 예준이 선물한 타투이스트용 붓으로 그림을 총 두 점 그렸고, 그 이후로는 목공예를 시도했다.
그림보다도 더 오래 걸리는 작업이었지만 전시회가 시작되기 전에 한 작품을 다 완성할 수 있었다.
한은 잭이 나무를 깎는 동안 계속 그림에만 열중했다.
잭에게 티는 안 냈지만, 사실 예준이 처음 교도소 담장에 남긴 작품은 한에게 굉장히 인상 깊었더랬다.
예준의 작품에서 발견했던 동화적인 문제의식을 흉내 내고 싶었다.
작업 속도는 잭과 같았고, 잭이 조각하는 동안 한은 두 작품을 더 그려 총 네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다.
처음 타투로 그림을 배운 탓에 난해한 무늬가 자주 등장했다.
“그림 좋은데요?”
예준이 다가와 말했다.
“좋긴 뭐가 좋다는 거야? 완전 조잡하기 짝이 없는데. ……안 되겠어. 이건 별로야. 다시 그려야지.”
한은 제1 수감동 복도에 잠시 걸어둔 자신의 그림을 다시 빼내려 했다.
하지만 예준이 그의 팔을 붙잡아 말렸다.
“좋은 작품 만들어놓고 이제 와서 왜 그래요? 훌륭하니까 내버려 두세요.”
“여기 이 해골 부분을 봐. 여자애들 등짝에 헤나 그려줄 때 자주 쓰는 패턴이라고. 그 패턴만 대충 활용해서 해골 모양으로 퍼즐 맞추기 한 것 같지 않아? 이거 완전 예술가인 척하는 양아치잖아.”
한은 아무래도 창피해서 그 작품을 걸어두고 싶지 않았다.
“알겠어요. 그래도 열심히 그렸는데 떼기는 좀 그렇고, 이 작품 작가 이름만 다르게 적어서 내죠. 음…… ‘국’은 어때요?”
“국? 한…… 국? 야, 장난해? 그거 완전 나잖아!”
곱씹어보던 한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됐다.
“한국이 왜요? 설마 한씨가 한국을 대표한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이거 뭐, 벌써 거장 다 되셨네.”
“그런 게 아니고…… 알겠어. 국으로 해, 국으로.”
그제야 한은 수락했다.
이미 작품은 많았고, 그의 작품 중 하나를 떼더라도 전시회에 큰 지장은 없을 것이었다.
또 한의 눈에 조잡해 보이는 그림이 예준의 눈에라고 안 그럴 리도 없었다.
예준은 그렇게 대단한 누드화를 하루아침에 뚝딱뚝딱 그릴 수 있는 천재 아닌가.
왜 굳이 한의 이 작품을 전시하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마 국으로 이름 바꿔서 낸 거 후회하게 되실 거예요.”
생각보다도 이 작품이 잘될 거라는 뜻인 듯한데, 그럴 리는 없었다.
그렇게 전시회가 시작되었다.
전과자에 대한 영국 시민들의 적대감을 한껏 겪어본 참여 예술가들은 주머니마다 짱돌 하나씩을 숨겨놓고 다녔지만 그걸 꺼내 사용할 일은 없었다.
시민들이 작품을 훼손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건 그들뿐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전시회가 열리자마자 버킹엄에나 있어야 할 근위대원들이 교도소 안으로 들이닥쳤다.
예준은 근위대를 뒤따라온 네빌에게 물었다.
“이 위압감이 생기는데요?”
“위압감이라뇨. 버킹엄 근위대가 시민들에게 얼마나 친숙한 존재인데요. 그리고 최소한의 인원만 왔으니 걱정은 마세요.”
딱히 싫다는 건 아니었다.
교도소엔 교도관이 있기 마련이지 않은가.
계속 누군가의 감시하는 시선 속에 놓여 있던 유색인종의 삶을 관람객에게 보여주는 효과가 있을 듯했다.
전시회가 진행되는 동안 경찰도 곳곳에 상주하기로 했다.
무언가 사건이 벌어졌을 땐 근위대가 도와 경찰 인계를 돕기로 이미 말을 맞춰놓았다고 했다.
담장 벼락, 그리고 교도소 내 수감동 복도와 개조된 수감시설까지 모두 하나의 전시관처럼 활용했다.
시민들은 15파운드의 입장료를 내고 일반 전시관을 관람하듯 교도소 곳곳을 오갔다.
교도소를 배경으로 예술 작품 전시회를 연다는 소식도 굉장히 충격적이었지만, 거기 들어찬 충격적인 작품들도 관람객에게 큰 인상을 심어줄 수 있었다.
-레딩교도소 가본 사람? 분위기 장난 아니다. 거기 있으면 반항심 같은 게 막 들끓음. 나체화 있고 해골 있고……
-진짜 담장에 그린 은 약과였네. 안 가본 사람 꼭 가보세요.
-윤예준 작품은 뭐뭐 있음?
물심양면으로 도와준다던 여왕 덕분에 첫날부터 많은 관람객이 찾았지만, SNS상에서 입소문을 타면서부터는 레딩시 전체가 붐빌 정도가 되었다.
네빌은 근위대 출장 신고를 담당하느라고 잠시 레딩 교도소 전시회에 들렀다 바로 버킹엄으로 돌아가 봐야 했다.
하지만 궁에서의 업무를 다 마친 뒤 다시 교도소를 방문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 교도소를 떠나지 않고 남아 있었다.
‘저건 뭐지?’
담장 한쪽엔 의미를 모를 짱돌 무더기가 있었다.
전시해놓은 작품은 아닌 듯했다.
‘그나저나 역시 반항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예준의 그림은 실로 대단했다.
정문을 지나 들어와 제 1수감동으로 향하기 위해 오른쪽으로 돌면 담장에 걸린 세 점의 누드화가 눈에 들어왔는데, 단순 모작이라고 하더라도 굉장히 묘사가 대단했다.
19세기 당시 사람들이 받았을 충격을 지금도 재현하기 위해서인지 좀 더 묘사가 노골적이어졌지만 그 외설은 단순히 눈길을 끌어당기기 위한 게 아니었다.
오로지 작품성에만 봉사하고 있었다.
“어? 다시 오셨네요?”
멀리서 방송국 사람들과 인터뷰를 하던 예준이 네빌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네빌은 여인들의 몸에 그려진 문신의 의미를 생각하고 있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양의 문신이 여성의 몸 이곳저곳에 그려진 상태였는데, 그나마 예술에 조예가 깊은 네빌이 보아도 그 의미를 빨리 캐치하기는 어려웠다.
“이 그림들을 보고 충격받아 쓰러지는 게 제 역할은 아니겠죠?”
“충격받으셨나요?”
“예, 받았습니다. 쓰러질 정도는 아니지만.”
내친김에 문신의 의미를 물어보았다.
예준의 답은 간단했다.
보기에 멋진 패턴, 유행하는 문신 패턴을 그냥 그대로 그렸을 뿐이란다.
그려진 위치도 보통 사람들이 자주 하는 위치에 그대로 그렸다.
“......정말 그게 답니까?”
“네. 저 옆구리는 가리고 싶을 때 가리고, 보여주고 싶을 땐 보여줄 수 있는 위치라더라구요. 그리고 어깨 부분에 있는 문신은 오프숄더 입으면 예뻐 보인다고. 그래서 주로 저런 위치에 타투를 부탁한대요.”
네빌의 질문은 그래서 그게 ‘예술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게 한심한 질문이라는 건 예준의 반응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반대편 담장에 있는 남성 누드화를 통해 차별의 대상이었던 유색인종에게 신격을 부여했다.
반대로 이 여성 누드화를 통해서는 신격의 위치에 있는 백인들을 가장 낮은 곳으로 끌어내린 것이었다.
“저는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유색인종은 영국 왕실의 순결함을 절대 해칠 수 없고, 또 사회 치안을 흐리는 주범들이죠. 그건 사실이에요.”
네빌이 말했다.
“이 전시회가 얼마나 감명 깊었든 저의 그 생각은 변함이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게 차별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겠네요. 저는 저의 그 생각이 차별이라고는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거든요.”
“다들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거죠. 저도 마찬가지고.”
“옷 벗으면 이렇게 다 같은 사람일 뿐인데……”
네빌은 누드화 감상을 마치고 제1 수감동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오랫동안 수감동을 나오지 않았다.
아직 담장에 남아 있는 ‘교화’라는 단어가 햇볕에 붉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