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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제일 쉬움-191화 (191/241)

191화. 레딩 감옥의 노래 (2)

잭과 한은 주말도 허투루 쓸 생각이 없었다.

짐 헤이스팅스 하나를 때려눕혀 주는 건 쉬운 일이었다.

문제는 미식축구에 완전히 미쳐있는 놈의 친구들이었다.

친구라…… 아니, 차라리 꼬붕이라고 하는 게 옳을 것이었다.

짐이 무슨 짓을 벌이든 아무 생각도 없이 조력하는 게 그들의 학교 생활의 전부였으니까.

설령 그게 살인에 준하는 추악한 행동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어쨌든 문제는 그 부하들이었다.

놈들이 잭과 한을 제압하기 전에 짐을 묵사발 내는 게 중요했다.

그러려면 둘의 호흡이 잘 맞아야 했다.

“여동생은 좀 괜찮은 거야?”

레딩 교도소로 향하던 중에 잭이 한에게 물었다.

“뭐. 여전하지.”

한이 교도소에 수감되었던 당시 불과 중학교 4학년생이었다.

드라마에 자주 나오는 우정놀이에 로망이 많았던 한의 여동생은 유독 친구들 중 세력이 큰 무리에게 헌신적이었다.

불행히도 그들 무리는 한 학년 위, 짐의 무리와도 연이 깊은 녀석들이었다.

한의 여동생은 어쩌다 그들 무리에 들게 되었다.

그녀는 드디어 홈파티에 초대되었다는 소식을 한에게 전하며 해맑게 웃었다.

“뇌졸중엔 약도 없어. 아직 말도 못 하고, 부모님은 아직도 그 녀석 오줌주머니를 갈아주느라고 일도 제대로 못 하고 있지.”

홈파티에 간다던 여동생의 소식은 다음 날 병원 간호사가 전화를 통해 대신 알려왔다.

인적 드문 골목에 졸도한 채 쓰러져 있었으며, 아무래도 마약 중독 같다고.

굉장히 슬픈 일이었지만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오히려 그 사건 때문에 한의 일가족 전체가 마약 검사를 받아야만 했을 정도였다.

이후 여동생 친구의 증언을 통해 사연을 알 수 있었다.

잭은 평소 동급생 하급생 할 것 없이 홈파티에 끌어들여 마약을 주사한 뒤 희롱하는 걸 즐겼다.

주로 그 타깃이 되는 건 가난한 유색인 학생들이었다.

평상시에 유독 동양인과 흑인만 괴롭힌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그 정도일 줄은 몰랐던 것이었다.

“여동생 수사는 어떻게 돼가?”

“피에 마약 농도가 지나치게 높았던 게 오히려 증거가 됐어. 마약을 구할 수단이 없는데 어떻게 마약을 하느냐고. 마약 테러가 맞는 것 같다는 방향으로 이제야 수사 가닥이 잡혔는데, 뭐, 어떻게 할는지.”

자기가 스스로 마약을 주사했으면 그걸 즐겨가며 알아서 양을 조절했을 것이었다.

남이 강제로 마약을 주사하고 우스꽝스럽게 몸을 떠는 걸 보고 웃고 즐겼을 게 뻔했다.

그리고 반응이 적어지면 다시 주사기를 꽂고……

“증거는 없지만 100%야. 그렇게 많은 마약을 구한데다가 아직 걸리지도 않을 걸 보면 주동자는 짐 헤이스팅스라고!”

3선 의원 헤이스팅스의 막내아들 짐 헤이스팅스.

레딩에서 그런 일을 벌일 만한 사람은 그뿐이었다.

그를 죽이든, 아니면 똑같이 마약을 들이켜게 하든 주사를 하든 아예 불구를 만들어줄 생각이었다.

그 계획을 위해서 레딩후기중등학교 근처 레딩 교도소 골목을 회의 장소로 잡았다.

그곳이 가장 인적이 드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레딩 교도소 건물은 하루아침에 수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뭐야?”

“그러게. 왜 이렇게 사람이 많지?”

잭과 한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들은 수선스럽게 떠들며 담장에 새롭게 자리 잡은 그림을 구경하며 촬영하기에 바빴다.

무리 중엔 기자들도 섞여 있었다.

“저 그림 어젯밤까지만 해도 없었던 그림이잖아!”

“맞아. 시청에서도 아는 바가 없대. 누군가 밤새 그려놓고 간 거야.”

잭의 물음에 행인 중 누군가가 대신 대답했다.

“굉장히 훌륭한 그림이군.”

“그러게 말이야. 저 사람의 죄목은 뭘까?”

사람들은 그림을 보며 의견을 나눴다.

그림은 여왕봉으로 보이는 긴 봉을 타고 탈옥을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실제로 한 죄수가 이 레딩 교도소 담장을 넘어 내려오고 있는 듯 말이다.

그리고 그림의 하단에 적힌 인종차별을 멈추라는 문구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죄수의 손은 명백한 흑인의 손이었다.

하지만 얼굴은 가려져 있었다.

그가 정체불명의 하얀 가면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얀 가면을 쓴 흑인이라…… 알 것 같군.”

갑자기 사람들이 붐비기 시작했기 때문에 범죄를 모의할 장소가 사라져버렸다.

잭과 한은 자리를 옮기기로 하고 인근을 계속 배회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계속 모여들었다.

레딩시의 모든 사각지대가 메워질 정도로 말이다.

“아니. 평소엔 사람 별로 지나지도 않는 곳인데 어떻게 이렇게 소문이 빠른 거야?”

잭과 한은 휴대폰을 꺼내 레딩시를 검색해보았다.

레딩시가 최근에 벌여온 사업에 굉장히 많음에도 검색어에는 저 담장 그림에 대한 기사만으로 넘치고 있었다.

죄수는 담장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고 있지만, 오히려 여왕봉의 장식은 담장 가장 높은 곳에 있다.

영국 내 유색인종은 그로부터 가장 멀고 낮은 음지에서만 생활할 수 있다.

또한 여왕봉의 가장 높은 곳에 달려 있는 장식엔 진짜 ‘블랙 오팔’이 부착되어 있다.

블랙 오팔은 하루 전 여왕이 윤예준 화가에게 선물한 것이다.

그러므로 저 윤예준이 그려놓은 게 확실했다.

그래도 도난될 걱정은 없었다.

비싸 보이는 보석이지만, 여왕의 선물을 훔쳐 갈 만큼 간이 큰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사들을 살피며 어떻게 된 일인지 정리해보던 잭과 한은 윤예준이라는 이름을 발견했다.

유명한 동양인 화가의 이름이었다.

하지만 평소 예술에 관심이 없었던 그들이라 윤예준이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별로 없었다.

“어? 이것 좀 봐!”

한이 기사 하나를 잭에게 보여줬다.

윤예준의 사진이 첨부된 기사였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이거…… 어젯밤 그놈이잖아!”

***

나는 금발 가발을 구하고 후드티를 눌러쓴 채 레딩 교도소 골목으로 나갔다.

다시 밤늦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사람은 여전히 많았다.

그림은 하루 사이 충분히 촬영되었고 기사도 많이 작성되었다.

아직도 사람이 모여 있는 건 저 ‘블랙 오팔’ 덕분이었다.

사람들은 나의 벽화에 이라는 제목을 붙여주었다.

거기 적어둔 문구 때문이었다.

바로 하루 전에 여왕이 내게 블랙 오팔을 선물했다는 기사가 난 덕분에 작품의 정체도 금방 밝혀졌다.

전복적인 메시지를 담을 생각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여왕이 선물한 비싼 오팔이 필요하기도 했다.

그걸 작품에 사용하는 건 여왕을 감히 나의 메시지에 강제로 동참시키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여왕으로서도 인종차별에 대해 뭐든 말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블랙 오팔은 야심한 밤에 미세한 빛만 받아도 그 특유의 빛깔을 내뿜으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마치 여왕봉과 블랙 오팔이 하나의 고급스러운 가로등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그 새로운 모습에도 매료되어 인증샷을 남기기 바빴다.

하지만 관심은 이것으로 충분했다.

이곳은 작품을 그려놓은 전시장이기도 했지만, 나와 소년들의 밀회 장소가 되기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봐! 너 생각보다 유명한 동양인이더군.”

벽화를 남긴 골목의 반대편 담장을 지나던 때였다.

낯익은 목소리가 내 걸음을 붙잡았다.

“사람이 많아져서 못 뵐 줄 알았는데. 다행이네요.”

사람이 많아지기는 했지만 쉽게 이 장소를 버리지는 못했을 것이었다.

마치 결국은 다시 교도소로 돌아오게 되는 탈주범들처럼 말이다.

“이렇게 해놓으면 우리가 범행을 저지를 장소가 없어질 거라고 생각한 거야?”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했을 리가 없잖아요. 그냥 저는 여러분들에게 저 작품을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에요.”

나의 말을 듣던 한이 차갑게 웃었다.

“미안하지만 우리는 너처럼 고상하질 못해서 말이야. 예술작품을 그려줘봤자 우린 눈뜬장님이라고.”

“예술 앞에 눈뜬장님이 어디 있어요? 그냥 그림을 보시면 돼요. 저 그림이 영국을 어떻게 바꾸는지까지 함께요.”

“영국을 바꾼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듣기로 저 벽화의 가치가 500만 파운드나 된다던데. 저걸 팔아서 우리를 위해 써주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작품을 그린 게 나라는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한 미술작품 전문가가 500만 파운드짜리 그림이라고 발언한 게 화제가 된 것이었다.

‘비싸게’ 그릴 생각은 없었지만, 그 덕분에 영국 의회에 나를 추천하는 네빌에게 조금 더 힘을 실어줄 수는 있게 되었다.

기사를 접한 네빌은 레딩 교도소 부지를 예술 단지로 꾸미는 데에 나만큼 적합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모두들 동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냥 여태 사업이 흐지부지되었던 건 예술 단지가 돈이 안 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듯했다.

500만 파운드.

그가 조금 더 높은 값을 불러주었다면 그게 작품의 값이 되었을 텐데.

조금 아쉽지만 500만 파운드로도 영국 의회를 잡아 흔들기는 충분했다.

“그건 조금 힘들어요. 이곳 전체를 예술 단지로 만들 거거든요. 만약 이번 제 그림이 여러분들에게 아무런 감동도 드리지 못했다면 예술 단지는 계속 시도할 거예요. 여러분들이 작당 모의를 그만둘 때까지.”

“뭘 몰라도 한참 모르네.”

잭은 자신들이 왜 범행을 저지르려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짐이라는 백인 소년이 유독 유색인 학생들만 못살게 굴고 있는 상태라고.

자신이나 한이나 그 때문에 큰 피해를 당했고, 다른 학생들이라고 해서 다를 건 없다고.

“마음가짐 좋은데요. 그러니까, 인종차별을 없애고 싶으신 거잖아요.”

“그래.”

“그럼 방법을 다시 생각해보셔야죠. 차별하는 백인 양아치를 때려눕히는 건 좋은데, 그게 좋은 본보기는 안 될 것 같거든요. 모든 백인들을 다 때려눕힐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중간에 경찰에 잡혀버리면 아무것도 못 하잖아요. 안 잡히는 방법으로 해보자는 거예요.”

둘은 조금 설득되는가 싶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겪어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꼭 그렇게 이성적인 척 이야기하지. 너나 여왕이 한두 마디 이야기해주면 효과가 있긴 하겠지. 그래도 그때뿐이야. 결국은 우리가 알아서 해야만 한다고. 하지만 우린 힘이 없어. 할 수 있는 건 고작 짐을 때려눕히는 것뿐이지. 그게 최선이고, 우린 최선을 다할 뿐이야.”

“조금만 시간을 주세요. 레딩 교도소 사업이 확정되면 제가 꼭 바꿔볼 테니.”

미국과 사우디, 아프리카에서 내가 해낸 일이 있었다.

영국이라고 더 어려울 건 없었다.

“아니. 기다릴 순 없어. 이 순간에도 놈들의 홈파티는 계속되고 있거든. 심지어 망할 헤이스팅스 의원은 네 그림을 극찬하기까지 했지. 죽은 골목을 살리는 그림이라고 말이야. 저 그림으로 뭘 하고 싶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입만 번지르르하게 놀리지 말라고. 결국 이번에 네가 얻은 건 500만 파운드짜리 사리사욕뿐이니까. 이 골목은 여전해.”

“맞아. 그렇게 대단한 인지도 가지고 여태 대체 네가 한 일이 뭔데? 인종차별을 없애기 위해 한 마디라도 소신을 밝힌 적은 있어?”

그들의 비난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그 비난엔 확신이 없어 보였다.

나와 예술 단지 사업을 믿고 싶은 충동을 애써 억누르고 있는 것이었다.

“예술 단지로 제가 얻고 싶은 건 영국 내 인종차별 해소예요. 예술을 통해서 말이에요. 여태 이런 일을 수도 없이 벌여왔지만 실패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이번에도 마찬가지겠죠. 당신들이 나를 도와주기만 한다면.”

내가 말했다.

그래도 나의 행적을 알고는 있는지 더는 반박하지 않았다.

“무슨 말인지 잘 알겠어. 너의 그 고귀한 사업에 방해가 될 뿐이니 괜히 분탕질 치지 말라는 거지? 유색인종의 범죄율 상승에 가담하지 말라고.”

“우리가 도울 건 그것뿐이니까.”

한은 가래침을 끓이더니 항의하듯 골목 바닥에 탁 뱉었다.

“막을 수 있으면 막아보시지. 경찰에 신고하려면 신고하시라고. 우리는 우리가 할 일을 할 테니.”

나는 돌아서서 골목을 빠져나가려는 그들의 등에다 대고 외쳤다.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제 사업 메이트가 되어달라는 거였죠.”

“뭐?”

적극적으로 설득하더라도 거짓말은 한 치도 섞을 생각 없었다.

“힘이 없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건 짐을 때려주는 것밖에 없다고 하셨죠? 그 힘을 제가 드리겠다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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