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레딩 감옥의 노래
빅벤은 과거에도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런던 풍경은 그때와 크게 달라질 건 없었지만, 군데군데 도로가 단조롭게 정리된 모습이 오히려 빅벤을 빛나게 했다.
명작은 세월이 지나도 명작이라는 말을 더 실감할 수 있었다.
이후 웸블리, 콜른 밸리 저널공원, 비콘스필드, 말로를 지나 ‘레딩’이라는 지역에 도착했다.
거기 도착하기까지 1시간 20분 정도 걸렸다.
“도착했습니다.”
도착하기 직전까지 달려온 레딩 시내도 그리 번잡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네빌이 내려준 지역은 특히나 한산했다.
길 건너편에 버려진 듯한 건물과 벽장이 숨을 틀어막는 것만 빼면 말이다.
“여기가 어디예요? 교도소 건물 같은데.”
“맞습니다. 지금은 쓰이지 않는 곳이지만요. 레딩 교도소입니다.”
레딩 교도소는 오래전 정부에 의해 폐쇄되었다.
현대 21세기에 이르기까지 몇 가지 터무니없는 죄목이 사라지고 교도소의 역할이 조금 줄어든 결과 이 교도소를 폐쇄해도 될 만큼 수감자가 줄어들었다고.
이후 정부는 이곳 부지를 개발자에게 판매해보려고 노력했지만, 혐오 시설을 매입할 사람은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혐오 시설이라고 해서 재개발을 안 하나요? 재개발을 하면 혐오 시설이 아니게 되잖아요.”
“일반적으로는 그렇지만 이 교도소는 좀 다릅니다. 유명한 문인이 여기서 적은 옥중고가 너무 유명해진 탓에. 이곳에 교도소 부지였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죠.”
한국으로 치면 서대문 형무소 정도의 명성이라는 뜻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재개발은 필요했다.
언제까지고 저 높은 담장이 삭막하게 골목을 가둬놓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그냥 정부에서 나서서 직접 재개발을 하기로 마음먹었답니다. 이곳을 예술단지로 바꿔줄 예술가를 찾고 있죠. 만약 윤예준 화가께서 마음이 있으시다면 제가 직접 추천해드릴 수 있습니다.”
왜 하필 예술단지로 바꾸려고 하는 것인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교도소 모퉁이마다 세워진 푯말에는 이 지역 일대를 예술 구역으로 전환하라는 시민들의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그 요구를 정부도 인지한 것이었다.
푯말이 오래된 데에 비해 아직도 진행되지 않은 걸 보면 거기 무언가 착오가 있는 듯했지만.
나는 네빌이 차 안에서 기다리는 동안 교도소 일대를 몇 바퀴는 돌며 주변 분위기를 파악했다.
“뭘 그렇게 보십니까?”
“일단 간단하게 저 담장에 벽화를 남겨볼 생각이에요. 하지만 실외 작품은 굉장히 까다롭죠. 매분 매초, 날씨와 계절에 따라서 광선이 바뀌기 때문에 그 모든 걸 파악하는 게 중요해요.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겨울과 여름 모두를 기다려볼 수는 없으니까 밤낮이라도 확인해보려는 거예요.”
역시나 영국은 오늘도 흐렸다.
하지만 흐린 날의 느낌만으로도 맑았을 때의 인상을 떠올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여름과 겨울의 기후 차이도 한국만큼 극단적인 편도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영국은 전생에 방문해봤을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모습이니까 말이다.
그렇게 야심한 밤이 찾아왔다.
잠시 쉬어볼 생각으로 차량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이렇게 오래 왕궁을 비워도 되는 거예요?”
나는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네빌에게 물었다.
네빌은 그냥 말을 돌리며 질문을 피했다.
그의 휴대폰 배경화면에 ‘오늘의 임무: 윤예준과 친해지기’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 걸 보아 이 모든 일정이 외근 처리되고 있는 듯했다.
“응?”
문득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피던 네빌이 건너편 골목 쪽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왜요?”
“저기. 범죄의 냄새가 풍겨오는군요.”
네빌이 바라보는 곳에는 한 동양인 소년과 흑인 소년이 주변을 살펴보며 배회 중이었다.
“......어디서 범죄의 냄새가 풍겨온다는 거예요? 저것만 봐서는 리처드도 모를 것 같은데.”
“진짜 냄새가 풍긴다는 뜻이었겠습니까? 저 불량한 거동과 표정, 그리고 무엇보다도……”
네빌은 무언가를 말하려다 내 눈치를 보곤 입을 꾹 다물었다.
뻔했다.
유색인이기 때문에 으레 범죄를 저지를 것이라고 생각한 거겠지.
“...... 솔직히 통계가 그렇습니다, 통계가. 영국 내에서 범죄를 저지르는 이들이 백인이 많겠습니까, 흑인, 동양인이 많겠습니까? 수는 백인이 더 많은데 범죄자는 유색인종이 더 많습니다.”
네빌의 의견과는 별개로 나도 그들이 무언가 일을 칠 거라는 생각이었다.
근처에 은행도 없는 뒷골목에서 저렇게 분주하게 주변을 살피는 모습이라니.
그들은 순찰 중인 경찰을 조심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와 네빌은 그들 뒤를 쫓기로 했다.
“차 조심하십쇼. 털릴지도 모르니.”
“글쎄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같은 범죄라도 단순 절도를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그들은 딱히 목적지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나와 네빌은 방금 그들이 지나쳐간 모퉁이를 돌았다.
하지만 모퉁이 너머에는 예의 그 소년들이 자리를 잡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다시 모퉁이 바깥으로 빠져나와 벽에 붙어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빌어먹을 짐 헤이스팅스! 아직도 표정 좋더라고!”
“그러게 말이야! 또 한 번 만져줘야겠어. 우린 어차피 잃을 것도 없으니까!”
그 수상쩍은 대화를 들은 네빌은 자신의 말이 맞았다는 듯 나를 보며 웃었다.
***
경찰에 신고하겠다는 네빌을 한사코 말려냈다.
한 나라의 백작으로서 범행 모의 현장을 보고도 모른 척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기껏해야 112에 전화하는 게 행동의 전부이면서도 기세는 좋았다.
“말로만 사람을 죽이네 살리네 안 해본 사람이 그렇게 흔하겠어요? 보니까 미성년자들 같은데 그냥 갱스터 놀이 하고 있는 거겠죠.”
이런 사례 하나하나가 네빌의 인종차별에 확신을 주고 있다는 사실이 답답하고도 가슴 아플 따름이었다.
네빌을 잘 구슬려 차에 태워 보낸 뒤 나는 다시 모퉁이 옆에 붙어 섰다.
“지난 3년간 놈이 한 건 피시 앤 칩스나 처먹으면서 살찌운 것밖엔 없어. 소년교도소에서 산전수전 다 겪어본 우리라면 충분히 제압 가능해!”
“이번 매질은 내가 할 테니 너는 잘 붙잡고나 있으라고.”
그들은 ‘짐 헤이스팅스’라는 친구를 흠씬 두들겨줄 생각이었다.
이름을 보아 짐은 일반적인 영국 백인인 듯한데, 한 사람을 괴롭히려는 소년범들 치고 계획이 상당히 체계적이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때려눕혀 주겠다느니, 떡실신을 시킨 후에는 옷을 홀딱 벗겨서 미식축구 골대에 매달아주겠다느니.
목적은 그를 때리는 것 자체가 아니라 망신 주는 일 같았다.
“......재범으로 다시 교도소에 간다면 이번엔 몇 년이 될지 몰라.”
동양인 소년이 나약한 소리를 하자 흑인 소년이 그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이봐, 정신 차려! 이건 복수가 아냐. 지금 이 순간에도 놈에게 고통받고 있을 우리 형제들을 위한 일이라고.”
그의 격려에 동양인 소년의 눈에 결의가 들어찼다.
거기까지 들었을 때 그들이 무엇을 저지르려는지 잘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일전에도 짐이라는 소년을 때려 교도소에 갔다.
짐을 때리려는 이유는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었다.
짐이라는 소년이 그들의 형제들, 그러니까 유색인종 친구들을 대상으로 힘자랑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종차별에 대한 반발심이 그들을 불타오르게 하고 있었다.
“불행히도 오늘은 금요일이야. 내일 학교는 텅텅 비게 되지. 월요일 하교 시간을 노린다. 레딩후기중등학교가 몇 시에 끝나는 줄 알아?”
“그런 건 홈페이지에 나오잖아?”
다행히도 아직 주말 이틀의 말미가 주어진 셈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과 헤어지면 범행을 막을 수 없게 되었다.
월요일에 레딩후기중등학교로 경찰을 보내지 않는 이상 말이다.
‘그럼 아마 경찰은 미수범에 불과한 저들을 지나치게 박대하겠지.’
남미에서 만난 이탈리아 마피아에게도 맞서본 나였다.
엿듣기를 멈추고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만두는 게 좋을걸.”
내가 말하자 그들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뭐야, 너! 언제부터 있었던 거야?”
“짭새인가? 어디서부터 엿들은 거야?”
처음부터 다 엿들었다고 하자 그들은 묻지도 않은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미안하지만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 우린 범죄자가 아니라고.”
“맞아. 경찰이 해주지 않는 일을 대신하려는 것뿐이야. 얼굴을 보니 동양인 같은데, 너도 우리 심정을 알 거 아니야?”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들이 뒷걸음질을 계속하며 내게서 멀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우리 심정을 모르겠다면 그냥 못 들은 걸로 하는 게 좋을 거야. 아무 상관도 없는 너에게까지 손대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까!”
거기까지 말하고 그들은 냅다 달렸다.
어찌나 빠른지 골목을 다 빠져나가는 데까지 5초도 걸리지 않았다.
도망치는 데에도 손발이 딱딱 맞는 걸 보니 교도소는 다녀왔어도 좋은 친구는 얻은 모양이었다.
그들의 눈빛에선 무언가 강한 결의 같은 게 느껴졌다.
그 짐이라는 소년을 때려눕히기 위해서는 자신의 인생 정도는 가져다 바칠 준비가 된 것처럼 말이다.
말도 거칠고 화를 다스릴 생각은 없어 보였다.
‘전과를 감수할 만큼 강한 분노라니.’
사람이 그만큼이나 내몰릴 수 있다는 게 조금 충격적이기도 했다.
이미 교도소에 있다가 나온 상태이니 꽤 어렸을 때부터 전과를 갖게 된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 처해본 적은 없었던 나였다.
인종차별이 이 정도로 사람을 내모는 것이었다니.
‘네빌이 꽉 막힌 사람처럼 굴 땐 그냥 그가 왕족이기 때문이라서이길 바랐는데.’
네빌은 나름대로 지식인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가 나 같은 유색인에게까지 그렇게 반발심을 가지는 모습만으로도 유럽 전체의 차별 문화에 대해 대충 예상을 했어야 했다.
예상은 했지만 애써 흐린 눈을 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폭력은 범죄고, 나는 범죄에 이유를 붙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머릿수로도 소수에 불과한 유색인종의 범죄 통계가 더 높은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 아닌가?
범죄자 DNA가 깊이 각인되어 있는 게 아닌 이상, 인종차별 속에서 사회 안전망 바깥으로 쉽게 내몰릴 수밖에 없다는 뜻밖엔 안 됐다.
‘정황 다음은 통계라니. 참…… 할 말은 많지만 내가 정치인도 아니고.’
사람들 앞에 마이크를 붙잡고 호소하는 건 나의 직업이 아니었다.
나의 직업은 따로 있었다.
‘그림을 그리자.’
나의 그림이라면 그들도 바꿀 수 있었다.
그들의 심정을 헤아려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적어도 다시 교도소에 들어가지 않도록 막는 게 우선일 것 같았다.
그렇게나 유명한 레딩 교도소에 그리는 그림이라면 분명 도움이 될 것이었다.
나는 네빌을 버킹엄에 데려다주고 차로 돌아와 물감과 붓을 꺼냈다.
야외에 물감으로 그림을 그린다면, 가뜩이나 비가 많이 오는 영국에서 하면 금방 지워질 것이었다.
하지만 아르간 오일도 충분히 챙겨둔 상태였다.
나는 물감과 붓을 들고 미리 봐둔 위치에 가서 섰다.
무엇을 그릴지를 계속 고민하며 이 일대를 몇 시간 계속 헤매기만 했는데.
방금 두 소년과의 대화로 인해 그릴 것은 분명해졌다.
오히려 당장 그리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했다.
‘사명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게 이런 기분일 줄이야.’
아버지가 비엔날레에서 선보인 <추모제>를 떠올려보았다.
그 작품은 인종차별 범죄를 지적하는 동시에 문제의식을 공유함으로써 관람객을 감화시켰다.
이 사안은 그보다 좀 더 특별했다.
범죄자라는 악명을 쓴 게 다른 누구도 아닌 유색인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어려울 건 없었다.
나는 바로 붓을 들어 벽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손이 닿지 않을 정도로 높은 곳은 스포츠카를 가져와 딛고 올라서서 그렸다.
그래도 닿지 않을 땐 차 위에 벽돌을 올려 디뎠다.
짐을 때려눕히려는 소년들은…… 철딱서니가 없었지만 어딘가 낭만적이기도 했다.
그 느낌을 잘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이 그림은 가장 처음 두 소년부터 설득해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알현식 때 보았던 여왕의 여왕봉을 떠올려보았다.
영국의 유색인이 가장 최하위에 있는 계층이라면 그 여왕봉은 그들로서 평생 구경도 못 할 만큼 귀한 물건이었다.
나는 그 여왕봉을 타고 담장을 기어 내려오는 흑인을 그렸다.
그리고 인종차별을 규탄하는 메시지를 강렬하게 표현하기 위해 하단에 ‘Racism, like virus, lurking in wait.(인종차별은 마치 숨어서 기다리는 바이러스와 같다.)’라는 문구를 적었다.
그림을 완성한 뒤 차를 치우고 전체적인 구도를 확인했다.
완성인 듯했다.
하지만 무언가 부족하게 느껴졌다.
‘살짝 부족한데…… 뭘 더 추가해야 하지?’
그때, 주머니 속에서 든 무언가가 허벅지를 짓눌렀다.
꺼내어 확인해보니, 여왕의 블랙 오팔이었다.
나는 블랙 오팔과 주변의 밤 풍경이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그린 그림과도.
‘여왕의 선물을 벽에 박아넣는다니, 누가 보면 미친 짓이라고 하겠지?’
예술에 안 되는 건 없었다.
작품이 멋지다면 누가 비난할 수 있겠는가.
나는 다시 벽화로 다가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