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이 제일 쉬움-189화 (189/241)

189화.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 하였는데 (2)

“일단 처음 말씀하신 정황 이야기는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왜요?”

“그런 일이 있었을지언정 작품이 명백히 원본으로 보인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요.”

나의 말에 네빌이 콧방귀를 뀌었다.

“보고 싶은 대로만 보겠다는 거 아닙니까?”

“아뇨. 예술품은 정황으로 감상하는 게 아니라는 뜻이에요. 원본을 보고 원본이라고 하는 것일 뿐인데 믿어주시질 않으니 답답할 따름이네요.”

네빌은 한번 해보자는 듯 캐묻기 시작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냥 억지를 부리겠다는 말로 들립니다.”

“설령 야바위꾼이 원본을 위작 틈에 숨겨 뒤섞어놓았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작품 그 자체만으로 원본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다는 믿음을 져버려서는 안 돼요. 감히 동양인이 버킹엄 궁에 발을 들였다고 해서 여왕님의 권위가 바닥을 치는 건 아니듯이, 고귀한 예술작품도 마찬가지거든요.”

조금 자극해볼 생각으로 비아냥거리자 네빌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둘째로, 붓질을 이야기하셨는데 이 작품은 돈모로 그려진 게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원본이 맞습니다.”

“예? 제 설명을 듣기는 했습니까? 당시에는 이렇게 부드러운 붓보다는 돈모로 된 붓을 많이 썼다니까요?”

그 말만은 맞았다.

“그렇죠. 그런데, 네빌 백작님은 무리요의 작품을 별로 안 보셨죠?”

“......?”

“다른 분들은 작품을 마음으로 음미했기 때문에 몰랐다고 치더라도 붓질까지 분석할 줄 아는 네빌 백작님이라면 아셔야지요. 무리요의 다른 작품들도 모두 다 저 부드러운 붓을 사용해 그려졌다는 걸요.”

네빌은 그제야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듯 큰 충격을 받더니 쏘아붙였다.

“다, 당장 증거가 없다고 아무 말이나 가져다 붙이지 마시죠! 17세기 모든 화가들이 돈모를 썼다는 건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당시까지만 해도 없던 붓을 어떻게 사용합니까?”

네빌은 궁 내 미술관에 무리요의 작품이 하나 더 있다고, 그걸 확인해보자며 무리를 이끌어 미술관으로 들어갔다.

무리요, <창가의 두 여인>

다른 작품을 봐도 별 차도는 없었다.

네빌은 봤던 곳을 두 번, 세 번 또 보며 제 눈을 비비는 시늉까지 했다.

“뭐야…… 이, 이럴 리가 없는데. 왜 이 작품도……”

“돈모로 저 그림을 그렸으면 인간 범주를 벗어난 수준인 겁니다.”

“뭔가 잘못됐습니다. 아무래도 이 그림도 가짜 같아요!”

“그리고 붓이 상용화되지 않았다고 화가들이 이용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는 그 편협함도 놀랍군요.”

듣던 여왕은 복잡한 심경을 한숨으로 뱉어내며 근위대에게 무언가를 지시했다.

그러자 근위대원 두 명이 네빌의 양쪽 팔을 붙잡아 끌어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기쁜 날 더 난동을 부리게 놔둘 수는 없군요, 네빌. 궁 밖에서 며칠쯤 쉬고 계세요. 사흘간 궁 출입을 금합니다.”

“여왕님! 무언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전량 조사를 한번 해봐야 합니다!”

“그만 하세요! 네빌 백작이 그렇게나 좋아하는 정황상 원본이 확실한 것을 뭐 하러 전량 조사씩이나 해요?”

험한 얼굴로 네빌에게 쏘아붙이던 여왕이 인자한 표정으로 뒤바꿔 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예준 군. 정말 신통하네요! 돈모로 안 그리는 게 맞는 거였다니. 그림에 대한 설명을 더 들을 수 있을까요? 모두 궁금할 거예요.”

“예, 맞습니다!”

내빈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해주었다.

“그나저나 정말 궁금한데. 어떻게 된 일이에요? 어떻게 돈모로 그려지지 않았다는 것이 원본의 근거가 되는 거죠?”

답은 간단했다.

그에게는 출신지와 연관된 특이한 붓 취향이 있었다는 점 말이다.

“당시 영국을 포함한 대륙 화가들 대다수가 돈모를 활용한 붓을 쓴 건 사실이에요. 화가들은 사용하던 붓의 질감이 달라지면 굉장히 불편해하거든요. 붓질의 감각이 완전히 바뀌어버리니까요. 무리요도 마찬가지였겠죠. 그래서 무리요는 유럽 내륙에서 활동하던 당시에도 어릴 때 살았던 지역에서 사용하던 붓을 그대로 들여와 쓴 거예요.”

“스페인이라고 알고 있는데, 스페인에서는 다른 걸 썼나요?”

“네. 당시 그는 스페인 항구를 통해 들어오는 담비 털로 된 붓을 즐겨 사용했어요. 지금처럼 쉽게 구할 수 없어서 북유럽 일부 국가와 스페인에서만 담비 털로 그림을 그렸죠. 그리고 특히 무리요는 수입된 담비털붓을 쓰다가 스페인에서 주로 발견되는 비싼 알비노 담비의 털로 그렸고요. 알비노 담비 털은 굉장히 부드럽거든요.”

사실 그런 건 당대 붓 유행이라는 특수한 지식이 없어도 알 수 있었다.

한 번 작품에 의심이 생겼을 때 무리요의 다른 작품들도 두루 확인해봤다면 붓에 대한 미스테리는 풀렸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네빌이 말한 그 ‘정황’이라는 게 작품을 더 면밀하게 검토해 볼 의지를 모두 꺾어놓은 것이었다.

모작을 의뢰해서 받아온 그림이 진품일 리 없다는 바로 그 정황 증거 말이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작품은 진품이 맞아요. 정황이 작품을 규정하기보다는 작품이 정황을 뒤집어놓을 수 있어야 하죠.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몰라도 작품이 명백히 원본이라면 정황을 밝힐 이유도 없지 않겠어요?”

“맞네요! 예준 군 의견이 옳아요.”

여왕은 굉장히 기뻐하며 손뼉을 쳤다.

그리고 곧 영국 사학회에 연락을 취해 국내 고고학 연구에 조금 더 열성을 쏟으라고 지시했다.

해외 식민지 활동이 활발했던 영국이기에 국내 사료 연구가 오히려 부진했던 면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

그 결과 무리요의 <돈 오르티스 데 주니가의 초상화>는 분실된 게 아니라 백수십 년 전 영국의 왕자가 인도에 선물했던 것이라는 기사가 발견되었다.

세포이 항쟁 당시 당황한 인도의 영국군이 인도에서 보관 중이던 유물들을 다시 본령으로 돌려보냈다는 내용이었다.

그 뒤 인도에서 <돈 오르티스 데 주니가의 초상화>의 언급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당시 반환된 유물들 중 <돈 오르티스 데 주니가의 초상화>가 포함되어 있을 거라는 분석이었다.

[충격! 무리요의 명작, 영국 버킹엄서 약 150년간 뒷마당 신세……]

[윤예준, 이집트 전설 속의 기술 복원도 모자라 이번엔 사라진 무리요의 작품까지!]

[원작으로 밝혀진 무리요의 초상화, 감정가 4억 5천30만 달러 추정]

굳이 새로운 ‘정황 증거’가 나오지 않더라도 무리요의 그 작품을 원본 취급해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정황 증거라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좋을 것이었다.

해당 작품이 원본인 게 확실시되었을 때 나는 다시 버킹엄 궁에 초대받았다.

버킹엄 궁 정문을 열고 입장하자 <돈 오르티스 데 주니가의 초상화>가 그 안에 떡하니 걸려 있었다.

누구든 이곳을 방문하자마자 그 그림부터 볼 수 있도록 말이다.

원본이라는 게 밝혀지자마자 옮겨놓은 모양이었다.

이번엔 실내였는데 19개의 알현실 중 가장 거대한 방이었다.

“다행히 아직 영국에 있었구나!”

“네. 바로 떠나기엔 너무 매력적인 여행지였습니다.”

여왕은 체통을 생각하지 않고 큰 목소리로 웃었다.

“어쩜! 이렇게 하는 말마다 예의가 바를 수가. 우리는 예준 군께 진 신세를 큰 결례로 갚았는데, 예준 군은 끝까지 우리에게 큰 선물만 주는군요.”

여왕은 거기까지 말하고 알현실 한쪽을 돌아보며 손짓했다.

그러자 근위병과 함께 서 있던 네빌이 들어왔다.

“네빌 백작이 당신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하더군요. 처음엔 감히 말을 섞을 엄두도 내지 말라고 타일렀지만 워낙에 간곡히 요청하는 바람에.”

여왕의 그 말에 눈치를 보는 네빌의 표정으로 보아 조금의 과장이 섞여 있는 듯했다.

내가 떠나기 전에 한 번 와서 사과를 하라고 여왕이 명령을 했겠지.

“그…… 죄송합니다. 사실 그렇게까지 나설 건 없었는데. 솔직히 유럽 출신도 아닌 당신이 유럽에서 이만큼 큰 성과를 내는 데에 질투심 같은 걸 느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아직 사람이 성숙하지 못해서 범한 실수이니 너그럽게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네빌은 손에 들고 있던 모자를 앞으로 모아들며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이번 사과는 저번과 느낌이 달랐다.

영국의 예법을 아는 나로서는 그게 얼마나 정중한 사죄의 표시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잘됐으니 괜찮아요. 네빌 씨도 그게 영국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한 거겠죠.”

“......이해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하지만 외지인에게 가지고 계신 적대감은 조금 내려놓으셔도 좋을 것 같아요.”

솔직히 영국인이 외국인을 적대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그 반대라면 또 몰라도.

“저도 그렇지만 무리요도 당시에는 외지인이었잖아요. 그러니 네빌 씨도 외지인을 조금 더 너그럽게 받아주시길 바라요.”

“잘 알아들었습니다. 가르침 감사합니다.”

나와 네빌이 화해하는 모습을 보던 여왕이 만족스럽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바쁜 사람을 오래 잡아놓을 수는 없군요. 준비한 답례품을 어서 이 아이에게 전달해주세요.”

여왕의 왕좌 앞에 대기하고 있던 신하 두 명이 실크로 된 상자를 옮겨 내 앞에 보였다.

신하 중 한 명이 그 뚜껑을 열자 안에서 블랙 오팔 가공석이 빛을 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이렇게 비싼 걸 제가……”

“괜찮아요. 제가 친히 준비한 물건이니 부디 받아주세요. 그리고 아무리 비싸 봐야 무리요의 작품보다 비싸겠어요?”

여왕은 왕좌로 걸어 돌아가며 진중한 목소리로 외쳤다.

“오늘은 기쁜 날입니다! 윤예준 화가가 우리 왕국에 머무는 동안 극진히 모시도록 하세요. 그리고 올해 성인이 된 이분의 방문을 맞아 같은 나이의 모범수들을 특별 사면하도록 하죠.”

“예, 여왕 폐하.”

내가 올해 한국 나이로 20살이 되었다는 걸 신경 써준 것이었다.

블랙 오팔을 포함해 그 정성도 감사히 받고 왕궁을 빠져나왔다.

***

나는 왕궁을 나오며 여왕에게 받은 오팔을 어디에 사용하면 좋을지 생각해보았다.

영국 여왕에게 받은 선물이니 일단 굉장히 비쌀 것이었다.

하지만 빛깔이 굉장히 좋았고, 파는 것보다는 어디 예술 작품에 사용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았다.

물론 선물로 받은 물건이라 팔 생각도 없었고 말이다.

오팔을 손에 들고 이리저리 굴려보고 있으니 옆에서 두 걸음쯤 떨어져 다가오던 네빌이 안절부절못했다.

“그거참, 조심 좀…… 얼마짜리 물건인데.”

“걱정 마세요. 안 떨어뜨리니까요.”

나는 네빌을 돌아보았다.

불편해하는 표정이 비단 오팔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백작님도 사과할 줄 모르는 사람이시죠?”

“네? 갑자기 그게 무슨.”

나는 네빌을 볼 때마다 괴팍한 드가가 떠올랐다.

그림을 주고받은 일로 크게 다퉜고, 화해하기가 어렵게 느껴져 꽤 오랜 시간 다툼을 끌어야만 했다.

그건 다 분노에 대한 보상 심리 때문이었다.

나 스스로 괴로움에 가까운 분노에 사로잡혀야만 했으니, 내가 괴로웠던 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책임이라고 믿고 싶은 것이었다.

나는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이다.

“사과라는 게 참 생각보다 힘이 강해요. 말만으로 사람 속을 치료해놓을 수 있잖아요. 용서받을 수 없는 잘못이라면 몰라도 말이에요. 그러려면 누군가 한 사람은 자신의 잘못이었던 걸로 ‘쳐야’ 하는데, 그게 참 어렵죠. 억울하니까.”

나의 말에 네빌은 오히려 그 말이 더 억울하다는 듯 도리질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닙니다. 제 잘못이었다고 저 스스로도 느낍니다. 전혀 억울하지 않아요. 아까는 격식을 차리느라 충분히 굴종적이어 보이지 않았나 본데, 사과만은 진심이었습니다.”

“알겠어요. 굳이 같은 일로 두 번 사과받고 싶은 마음 없으니 괜히 그러지 마세요.”

한 번 더 사과의 제스처를 취하려던 네빌이 양손을 비비며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아, 지금부터 드라이브하시려고 그러십니까? 그럼 조금만 기다리시죠. 근위대 소속 컨보이를 준비시키겠습니다.”

내가 오르쉐 911 스포츠카 앞에 서자 네빌이 말했다.

“에이. 사람들 교통 방해되게 컨보이라뇨. 그냥 조용히 구경하다 갈게요.”

“아…… 그렇시겠습니까?”

조금 민망해하며 엉거주춤 선 네빌이 도로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길로 쭉 나가셔서 런던 시내로 진입하시면 런던의 랜드마크 ‘빅벤’이 보이실 겁니다. 그거 구경하시면 뭐, 런던 관광은 끝난 거죠.”

파리로 치면 에펠탑 같은 거였다.

“아 그래요? 혹시 같이 타셔서 안내 가능할까요?”

“안내라니, 무슨 안내 말씀입니까? 그쪽은 진입이 어려운 곳도 아닐 텐데.”

“그거 말고 다른 랜드마크도 보고 싶거든요.”

네빌은 못할 것 없다는 듯 조수석 쪽 문고리를 잡으며 말했다.

“그런데 관광 목적은 어떻게 되십니까?”

“영국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영감을 얻어보고 싶어요. 빅벤 같은 랜드마크를 만들어볼 수 있으면 더 좋고요.”

조수석 문을 열던 네빌이 무언가를 생각하듯 잠시 멈칫했다.

“왜 그러세요?”

“아닙니다. 좋은 곳을 소개시켜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무슨 좋은 곳이요? 빅벤보다 더 유명한 곳이 있나요?”

네빌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윤예준 화가님으로 인해 더 유명해질 만한 장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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