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 하였는데
한국 정부 포상 용지로 윤예종이가 쓰이게 된 걸 시작으로 이젠 세계 각국의 모든 훈장을 윤예종이로 바꿀 수 있게 되었다.
살롱전에서 나의 이름이 화제에 올랐던 덕분이었다.
내가 주목받을수록 아트밸리에서부터 시작해 한지연까지, 그 모든 집단이 함께 성장하는 걸 보니 책임감이 막중해졌다.
살롱전을 관람하기 위해 프랑스를 찾은 방문객이 예년의 두 배를 넘겼다고 들었다.
그래서 프랑스 국가 총이익이 300억 원을 넘겼다고 했다.
IAA와 솜니움의 명성이 치솟았다.
특히 솜니움이 그랬다.
다비드의 말대로 수많은 화가들이 솜니움에 작품을 걸기 위해 아트밸리로 이주해 들어왔다.
그에 따라 실제 소장 작품도 늘어나게 되었고, 15만 점을 소장하고 있는 뉴욕현대미술관을 결국 뛰어넘게 되었다.
작품을 출품시킨 미술관 관장들이 루브르 내 IAA 회의실에 모여 기쁜 성과보고를 나눴다.
가장 들뜬 건 다비드와 러셀이었다.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유럽의 예술가들은 미술작품을 보기 위해 ‘바다를 건너는’ 경우가 별로 없었다.
그런데 이 일을 계기로 영국과 호주에 미술품 관람을 온 관광객이 굉장히 많이 늘었다고 했다.
같은 성과가 아트밸리와 윤예종에도 있었다.
이렇게 시시때때로 관람객 폭증에 완전히 적응한 로드아일랜드에서는 아예 근처 공항과 아트밸리를 오가는 셔틀을 운행하고 아예 도로를 두세 배 규모로 확장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어떤 성과보다도 내게 가장 중요한 건 바로 다비드가 제안한 버킹엄궁 방문이었다.
그는 미술에 관심이 많은 영국 여왕이 마찬가지로 이번 살롱전에도 굉장히 큰 기대를 걸었다고 했다.
영국 대학 출신들이 모두 탈락되었다는 소식을 전했을 땐 굉장히 불쾌해했다고.
하지만 나 덕분에 그 제도를 없애고 급기야 다섯 명의 신인 화가를 세계에 알렸기 때문에 나를 꼭 만나고 싶어 한다고 전했다.
“그런데 마침 여왕님 탄신일이 다가왔습니다. 그 생일 파티에 제가 윤예준 화가님을 초청하는 게 어떻냐고 제안할 생각인데, 혹시 일정이 되실지요.”
다비드가 이야기해준 파티 날엔 마침 일정이 비어 있었다.
일정이 있었더라도 시간을 냈을 것이었다.
영국 여왕은 내가 여태까지 쌓아온 어떤 인맥보다도 내게 큰 정치적 입지를 선물할 것이었다.
***
버킹엄 궁은 리야드나 라바트 궁보다 내게 익숙했다.
내가 유럽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규모를 놓고 보았을 때엔 익숙한 양식이라 오히려 더 놀라운 구석이 있었다.
리야드 궁은 거대하더라도 낯선 아랍의 건축 양식이기 때문에 큰 실감을 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버킹엄은 내가 봐왔던 같은 양식의 어떤 건물보다도 거대했다.
부분부분 현대화된 곳들도 전체적으로 잘 어울리는 편이었다.
거대한 호수와 대정원이 궁 안에 있었고, 빅토리아 기념비는 올려다봤을 때 허리가 아플 만큼 높았다.
궁 내부엔 이미 미술관도 있었다.
그 앞 광장에서 궁의 호위를 담당하는 근위병 교대식이 진행 중이었다.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모여 교대식을 관람했다.
교대식이 끝나면 미리 정해놓은 순서대로 여왕 앞으로 다가가 각자 인사를 건넸다.
그럼 여왕은 야외에 거대한 의자를 빼놓고 앉아 방문객들에게 한두 마디씩 건넸다.
곧 내 차례가 되었다.
“다음은, 한국에서 태어나 유럽, 아메리카, 사우디, 그리고 아프리카까지…… 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예술적 자취를 남겨온 윤예준 화가입니다.”
진행자의 귀족적 안내가 끝나면 나는 모퉁이를 돌아 바로 여왕을 향해 다가갔다.
설명을 들은 여왕의 표정이 굉장히 밝아졌다.
그녀가 미술에 얼마나 관심이 많은지는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저 윤예준이 폐하의 생신을 맞아 인사 올립니다.”
영국 왕실의 예법대로 인사하자 여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걸어 다가왔다.
“이렇게 예쁠 수가……! 먼 곳까지 오느라고 얼마나 고생이 많았나요?”
“아닙니다.”
보좌관들은 여왕이 예상 밖의 행동을 보이자 당황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를 다그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우디 왕궁에서 며칠을 머물렀다기에 초대장을 보내놓고도 마음이 꽤나 쓰였는데. 리야드에 비하면 우리 왕궁은 어떤가요? 많이 초라하지는 않을지 모르겠네요.”
분위기는 굉장히 경직된 상태였지만 여왕은 그런 분위기는 익숙하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다비드는 왕궁 행사 때엔 무조건 정석적인 행동만 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내가 그래서는 여왕이 많이 외로울 것 같았다. 오랜만에 전생으로 돌아간 느낌도 받았기에, 전생에 쌓았던 화교술을 보여주었다.
“리야드 궁이요……? 아, 버킹엄의 아름다움을 보는 순간 다 잊어버려서 얼마나 컸던지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호호호호……! 말도 정말 재미있게 잘하시네요!”
여왕은 박수를 치며 웃었다.
“보좌관. 내 들어보니 우리 예준 군 소개가 너무 짤막해서 섭섭하더군요. 우리 왕국에 얼마나 큰 도움을 준 사람인데. 더 성심성의껏 소개해주지 않고요.”
“송구합니다.”
여왕은 자리에 모인 사람들을 향해 내가 IAA에서 해낸 일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미리 약속한 식순이 아니었기 때문에 모인 사람들은 눈치를 살피며 박수를 보내주었다.
이미 들어 알고 있는 사안이라는 것이었다.
“아닙니다. 제가 아니었어도 영국의 예술은 언젠가 세계적으로 빛을 발했을 겁니다.”
“호오, 그래요?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나는 주변을 돌아보다가 정원 변두리 발코니 복도에 걸려 있는 무리요의 그림을 가리켰다.
<돈 오르티스 데 주니가의 초상화(The painting of Don Ortiz de Zuniga)>
“저 작품 17세기 유명한 스페인 작가 무리요의 작품이지요? 저런 위대한 역작을 보관하고 있다는 것만 해도 여왕님께서 예술에 얼마나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계신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여왕은 조금 떨떠름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다시 미소로 동의해주었다.
뭔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여기서 말할 것은 못 되었다.
알현식이 끝난 후 진행되는 연회에서 네빌 백작이라는 자가 한숨을 내쉬면서 비아냥거렸다.
“원 참 한심해서. 동양인 꼬맹이에 불과한 인간의 잡설을 진지하게 듣고 있는 꼴이라니.”
거만한 말투의 네빌 백작이 사람들을 돌아보며 비아냥거리자 다른 귀족과 내빈들이 호들갑을 떨며 그를 다그치려 들었다.
“이렇게 좋은 날에 왜 그러십니까?”
“그냥 너무 속상해서 그렇습니다, 속상해서.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랍시고 모신 사람이 모작에 불과한 그림을 두고 위대한 역작이라고 하는데……”
“거기까지만 하세요!”
급기야 여왕이 호통을 치자 네빌은 다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을 몇 초쯤 노려보던 여왕은 반색을 하며 내 어깨를 쓰다듬었다.
“어이구…… 왕실에 너무 괴팍한 사람들이 많아서 기분 나쁘게 할 뻔했네요…… 너무 담아두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리고 누가 저 작품을 모작이라고 확언했나요? 모작이라는 것이 확실했다면 애초에 궁에 걸지 않았을 겁니다. 처음부터 의견이 분분했던 걸 가지고 어째서 괜한 시비인 건지….”
모작인지 아닌지 의견이 갈린다는 것인가?
그런 일이 있는 줄은 몰랐다.
여왕의 말에 네빌은 무어라 항변하고 싶어 하는 듯했지만 결국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리고 초라한 모습으로 서 있던 자리를 벗어나 광장 출구 쪽으로 걸었다.
“잠깐만요. 제 기분이 나쁠까 봐 그러시는 거라면 이럴 필요 없어요.”
기분 나빴지만 우선 말은 그렇게 해두었다.
“이렇게 갸륵하다니……! 예준 군이 더 백작위에 어울리는 것 같네요. 네빌 백작의 저 언동이 기분 나쁘지 않았나요?”
“네. 오히려 명백한 원본을 두고 왜 모작이라고 하는지 궁금할 뿐이에요.”
나의 말을 들은 궁내 귀빈과 신하들은 놀란 눈을 뜨며 내게 시선을 모았다.
아무래도 다들 저 작품이 모작이라고 철석같이 믿은 모양이었다.
***
나와 여왕을 포함한 사람들은 잠시 연회를 중단하고 발코니 앞으로 모였다.
“일단 사과드리죠. 원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꽤 있는 상황이라 존중해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네빌이 나를 힐끗 노려보며 사과했다.
여왕과 주변의 눈치를 봤을 뿐 정말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닌 듯했다.
동양인 운운하는 것만 봐도 내가 이곳에 와 있다는 것 자체가 불만이라는 티가 났다.
“그래, 윤예준 씨. 이 작품이 왜 원본이라는 건지 자세히 이야기해주시겠어요?”
여왕이 물었지만 그건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글쎄요. 오히려 이 작품이 모작인 이유를 들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이 작품을 원본이라고 한 건 모작이라고 할 만한 구석이 단 한 군데도 없어서였기 때문에…… 이 작품의 어디가 모작이라는 건가요? 누빔 백작님?”
“네빌입니다.”
네빌은 상대하기 싫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다가와 무리요의 작품을 한 번 훑어보았다.
“첫째로 정황상 모작이죠. 이 작품은 영국 웨일스 뱅고어 펜린성에 장식되어야만 했던 작품인데 그 전에 분실되어 모작 의뢰를 해두었던 작품입니다. 실제로 모작을 해서 그곳에 걸었고, 지금은 모작이라 미술관에 들어가지도 못한 건데 여기 걸려 있으면 당연히 모작이라고 해야겠죠? 갑자기 누군가 마법을 부린 게 아닌 이상.”
네빌은 그 정황이 너무 확실하기 때문에 누구도 이 작품의 진가를 몰라주었다고 했다.
그나마 모작으로서 큰 가치를 가지게 되었으니 이 위치에 계속 장식될 수 있었던 거라고.
“그리고 17세기에는 돈모로 만든 빳빳한 붓을 선호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붓질을 보면 붓털이 굉장히 특징적으로 부드럽다는 걸 알 수 있죠. 이게 앞뒤가 안 맞지 않습니까?”
거기까지 들었을 때 나는 네빌이 작품을 작품이 아니라 유물로 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네빌을 포함한 버킹엄의 모든 사람들이 말이다.
그러니 원본을 두고 여태 모작이라고 착각해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네빌이 말을 마치자 여왕은 조금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왕 말고도 비슷한 표정을 짓는 귀족들이 꽤 있었다.
그 작품이 원본이길 바란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왕궁에서 가지고 있었던 작품이니 모작보다는 원본인 게 왕실 체면에 훨씬 좋은 거겠지. 아까 모작인 게 확실했다면 궁에 걸지 않았을 거라고도 했고.
“다들 모작으로 생각하고 있었잖습니까. 물론 저희도 그냥 봐서는 절대 알아보지 못하지만 말입니다.”
“맞아요, 맞아요.”
몇몇 귀족은 모작이라는 네빌의 말을 지지하면서도 나의 비위를 맞추려 들었다.
고맙지만 필요 없는 배려였다.
그리고 네빌처럼 저 작품이 모작이라고 믿는 이들은 영국 왕실이 모작을 보관 중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싫어하고 있었다.
그래서 왕실 내 미술관으로 완전히 소장 처리하지 않고 이렇게 내원에 빼놓은 것이었다.
“그게 다인가요?”
“이것만 해도 너무 명백한 증거라서요. 달리 더 필요합니까?”
아마 논란은 있어도 모작이라는 설이 더 유력할 것이었다.
애초에 원작이라는 증거가 확실히 없으니 모작이라는 말이 돌았을 것이다.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말씀하시지 왜 창피를 주려고 하셨나요?”
“그럴 리가요. 저는 그냥 사실을 이야기했을 뿐입니다.”
이미 네빌은 여왕의 손님인 내게 맞섰다.
자신에게 떨어질 처벌은 감수하고 있는 듯했다.
물론 해고 같은 걸 당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혹시 저처럼 저 그림이 원본이 맞다고 생각하는 분들 계신가요?”
여왕을 포함한 몇몇 귀족들이 눈빛을 교환했다.
모작파와 원본파는 딱 반반씩 되는 것 같았다.
“일단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네빌 씨의 주장을 하나씩 반박해볼게요. 저도 그냥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뿐이니 부디 창피해하지는 마시구요.”
네빌의 분석을 듣고도 내가 물러서지 않으니 다들 당황하는 것 같았다.
그 분석이 굉장히 설득력 있게 들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분석이 무용했다.
설득력은 있지만, 나까지 설득하지는 못했으니까.
“여태 이 정도로 강력하게 원본을 주장한 사람은 없었는데……”
여왕이 기대된다는 듯 손을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