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이 제일 쉬움-187화 (187/241)

187화. 사람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5)

“그러니까, 솜니움 미술관을 IAA에 포함시키는 걸 조건으로 종이 계약을 하시겠다는 겁니까?”

“네.”

협회장을 배웅할 때 관장은 ‘다음 회의’에 대해 언급했다.

지금 IAA에 가입하면 그 다음 회의라는 것에 내가 참여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솜니움에 괴물 신인이 많은 건 저희도 알고 있죠. IAA에 적합한 미술관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윤 화가님께서 당연히 거절하실 줄 알고 그동안 제안하지 않은 건데.”

“그럼 되는 건가요?”

“아마도 그럴 것 같습니다. 물론 권한은 협회 전체에 있으니 회의를 거쳐봐야 하지만요. 내일 회의가 있으니 참여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관장은 그때 보자며 계약서를 미뤄두었다.

그렇게 다음 날이 되어 루브르를 다시 방문했다.

어제와 다른 차림새의 협회장과 한 무리의 남성이 회의실로 들어왔다.

다른 관장들은 나를 보고 조금 놀라는 듯했지만, 미리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협회장은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예, 일단 수상작품을 선정하기에 앞서 솜니움 미술관의 협회 가입에 대한 회의를 먼저 진행하고자 합니다.”

관장의 진행이 시작되자 관장들은 그제야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회의를 할 때마다 굉장히 많이 언급되었던 미술관 아닙니까? 미국에서는 뉴욕현대미술관 다음으로 꼽히는 미술관인데. 저희 협회에 가입된 대부분의 미술관들보다 나은 것 같은데요”

“맞습니다. 이번 기회에 아트밸리 아고라 센터의 노하우도 배워두는 게 좋아요. 그게 IAA가 나아갈 방향과 가장 흡사하니까요.”

솜니움 가입 건은 긍정적으로 검토되고 있었다.

윤예종이 계약도 마찬가지로 잘 진행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어제 뵈었던 분들보다 오늘은 인원이 더 적은 것 같네요?”

“아. 그건.”

표정이 좋지 않던 두 남성을 의식하고 묻자 관장들은 눈빛을 교환하더니 대답했다.

“AoT(Art of Today) 갤러리와 ‘스테이트모던’ 미술관 관장을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만, 아마 그들은 오늘 안 나올 겁니다.”

AoT는 영국, 스테이트모던은 호주에 있는 대형 미술관들이었다.

이번 국제 살롱전 대학교 적합성 평가에 영국과 호주 두 국가의 대학이 모두 배제되었다고 했다.

“다들 미술계의 발전을 위해 힘쓰고 있는데, 고작 자기네 나라 대학이 모두 탈락되었다는 이유로 이렇게 농성을 하니 원…… 왜 IAA에서 애국을 하려고 하느냐, 이 말입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다 욕심이죠. 타국의 신인 화가들에게 줄 돈 몇 푼까지도 싹 긁어 자국의 거장들 과잣값 해주려는 속셈인 겁니다.”

아무리 그들이 없는 자리라고는 해도 말들이 너무 심했다.

아직 회원이 아닌 내가 관여할 바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자, 그럼 의결하겠습니다. 솜니움 미술관의 가입을 찬성하는 분들은 손을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모든 관장들이 손을 들었다.

“그럼 만장일치로 협회원 자격을 부여하도록 하겠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윤예준 관장님.”

“축하합니다!”

회의실은 박수 소리로 가득 채워졌다.

전생의 살롱전에서는 환영받아본 기억이 거의 없는데, 이 정반대의 평가가 씁쓸하게도 느껴졌다.

그들은 마냥 좋아 보였다.

가드너의 13명작을 솜니움에 빼앗겼는데, 다시 그 솜니움이 IAA에 소속되게 되었으니 소탐대실하지 않았다고 믿고 있으리라.

“그럼 저도 이제 오늘 회의부터 참가할 수 있는 건가요?”

“물론이죠.”

호평을 받기 시작하면 꼭 하고자 했던 게 있었다.

잘못된 시스템을 완전히 바꿔버리는 게 그중 하나였다.

나는 관장의 회의 진행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건의사항을 전했다.

“대학교 부적합 판정 제도를 폐기했으면 좋겠습니다.”

***

관장들은 당황했지만, 예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발언을 계속했다.

역시나 과감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들었는데, 소문엔 과장이 한 치도 없었다.

“단순히 유명 대학을 나왔다고 해서 그 사람이 아카데믹한 그림을 그릴 거라고 생각하는 건 너무 부조리한 일인 것 같습니다. 그건 작품을 보고 판단할 일이죠.”

“하지만 윤 화가, 아니. 윤 관장님. 우리는 화가들을 학력으로 차별하려는 게 아닙니다. 요즘 화가들은 대부분 미술 대학을 나오는데, 돈이 없어 미술 대학을 가지 못하는 학생들도 많지 않습니까? 세계적인 권위를 가지는 우리 국제 살롱전이라면 그런 불합리한 일을 나서서 해결할 의무가 있습니다.”

아직 대화가 그렇게 극적으로 진행된 상태는 아니었지만, 관장은 IAA로서 큰소리칠 형편이 못 된다는 것쯤은 알았다.

방금 발언한 관장은 단지 대학교를 차별하는 대외적 명분을 앵무새처럼 읊고 있을 뿐이었다.

윤예준이 그 생각을 안 해봤을 리가 없었다.

“대학을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살롱전에서 배제된다면 가난한 걸 꾹 참고 몇 년에 걸쳐서 등록금을 갚아낸 화가들은 뭐가 돼요? 입학, 졸업에 성공했다고 그 화가가 가난했다는 사실이 아예 없는 일이 되나요?”

“그러니까 가난하고 말고가 문제가 아니라 그 아카데믹한……”

“아카데믹한 화풍이 문제라면 그 화가의 작품을 보자는 거예요. 이력서가 아니라.”

예준은 거침이 없었다.

“보니까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 다른 국가들의 대학은 아예 금지된 경우가 없던데요. 프랑스야 1대학, 2대학, 대학 이름에 넘버링만 해놔서라고 치지만 다른 나라들은 뭐죠? 애초에 프랑스에게만 유리한 장치였던 데다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제도도 아니잖아요?”

“......”

“신인들에게 기회를 주자는 건 다른 유명 화가들의 기회를 빼앗자는 뜻이 아니에요. 신인 화가들에게 공평한 기회를 갖게 해달라는 거죠. 특정 대학 출신을 배제하는 게 유명 화가를 제대로 배제하고 있는지도 사실 의심스럽지만요.”

더는 아무도 나서서 반박하지 않았다.

사실 AoT와 스테이트모던 관장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지만, 철저히 무시당해왔다.

영국과 호주 대학이 전체 배제된 어제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몇 번 배제되어본 그들은 속으로 몇 마디 욕을 집어삼키는 것으로 울분을 풀었겠지만, 예준은 달랐다.

관장들이 반대 의견을 낼 때마다 조목조목 따지고 들 것만 같았다.

듣던 협회장이 물었다.

“그럼 윤 관장님. 신인과 중견, 거장의 구분을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협회장의 질문은 조금 비겁했다.

그는 누군가 현상 개선을 주장할 때마다 이런 식으로 대안을 묻고는 했는데, 그 대안이 충분히 구체적이지 않으면 그걸 빌미로 아예 일축시켜 버리기 때문이었다.

대안을 지적하는 것으로 기존의 문제점을 묻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 구분을 아예 안 하면 되잖아요? 참가 제한이 있는 거장 몇 명만 제외하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나요? 작품 받으면 어차피 심사를 할 거잖아요.”

어쭙잖게 신인, 중견, 거장을 일률적으로 나눠버리면 꼭 사각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예컨대 햇수로 나누면 윤예준처럼 위대한 화가는 그 햇수를 채우기 전까지 살롱전의 신인 혜택을 다 받게 되었다.

반대로 십 년 때 무명인 화가는 중견 내지 거장으로 간주되어 어떤 혜택도 받지 못하게 될 것이고 말이다.

햇수로 구분하든, 작품 판매량으로 구분하든, 전시량, 판매 액수, 언론 노출도 등등 기준을 무엇으로 잡든 문제는 항상 남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준은 긴 심사를 통한 합의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우리가 그 합의에 실패하면요? 엄밀한 기준이 없으면 신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거장을 신인 취급하는 등의 실패가 생길 거 아닙니까?”

협회장이 마지막으로 물었다.

“세계 최고 미술가들이 모인 이 자리에서 그 정도 합의도 못 해낸다면…… 이제 미술은 망해서 없어져 버려야죠. 아니면 IAA가 해산되든가. 혹시 미술의 미래를 짊어질 자신이 없으세요? 현대미술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지저분해져 버렸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예준의 말이 백번 옳았다.

언제까지고 IAA를 프랑스 화단의 사리사욕을 위한 도구로 사용할 수만은 없었다.

다른 유럽 국가에서도 프랑스 화가들에게 꿀리지 않기 위해 자국의 유명 미술가들만 수상 후보로 들이미는 상태였다.

신인의 무대를 빼앗아 거장들 배만 채우는 꼴이었다.

관장들은 협회장이 더 강력하게 예준에게 반대하고 나서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협회장은 골치가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짓눌러 볼 뿐 별수는 없어 보였다.

“......AoT와 스테이트모던에 연락해봐야겠습니다. 대학 제한을 없애게 됐으니 돌아오시라고..”

***

다시 루브르로 돌아온 두 관장은 굉장히 얼떨떨해하는 표정이었다.

그들을 처음 만났던 로비에서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라져 있었다.

협회장은 떨떠름해했고, 관장은 조금 진지한 표정이었다.

이익을 좀 빼앗기게 되었지만 받아들이기는 해야 하겠다는 식이었다.

다른 관장들은 이번 변화가 자신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줄지 손해를 가져다줄지 감을 잘 잡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건 심사까지 완료를 해봐야만 알 것이었다.

“저희를 위해서 대학교 적합판정 제도를 없애주셨다고 들었습니다.”

AoT의 관장 다비드, 스테이트모던의 관장 러셀이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럴 리가요. 보니까 저희 아트밸리 출신 화가들이 많이 투고했더라구요. 어떤 방식으로든 신인 우대 분위기를 만들어놓는 게 제게도 이득이에요.”

너무 과한 감사는 사양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들은 내가 괜한 소리를 한다는 걸 아는 모양이었다.

윤예종과 아트밸리 출신 투고자가 많은 건 맞지만 솔직히 대학 부적합 판정 제도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

그들이 말하는 대학엔 윤예종도 아트밸리도 포함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주장하고 개선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관장들은 며칠간 루브르 회의실에 모여 작품을 추천하고 심사하길 반복했다.

굉장히 긴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국제 살롱전 전시가 끝나면 수상작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그것도 회의를 거쳐 소장할 미술관을 결정합니다.”

그래선 거장의 작품에 상을 주고 싶다는 유혹을 뿌리치기 어렵지 않은가?

신인이라고 해서 화가가 직접 전시할 미술관을 고르지 못하게 하는 건 일종의 갑질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것도 조금 바꾸죠. 수상자가 전시관을 선택할 수 있게요.”

내가 말을 시작할 때부터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던 루브르 관장이 풀죽었다.

여태 누가 이익을 보고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며칠간의 심사를 계속하던 나는 관장과의 종이 계약도 함께 진행해 결국 마쳤다.

코란 소장본 복원뿐만 아니라 고대 희랍어부터 현대의 아랍어, 영어, 프랑스어, 등 각국의 언어로 여러 판본을 만들어 특별 전시도 해둘 생각이라고 했다.

물론 윤예종의 윤예종이로 만들었다는 사실도 톡톡히 홍보하고 말이다.

이번 루브르 일은 생각보다도 내게 훨씬 더 뜻깊었다.

아트밸리 예술가들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신인들, 윤예종 출신들, 그리고 몽마르뜨 거리 예술가들도 심사 반열에 올랐다.

아는 이름과 나와의 연이 눈에 띌 때마다 객관적으로 평가하려 노력했다.

이미 다른 화가들이 보여준 적 있는 화풍의 화가는 웬만해서는 큰 점수를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아트밸리 화가들에겐 너무 흔한 소양이었다.

오히려 객관적으로 평가한 뒤에도 내가 과한 점수를 줬을까 봐 오히려 점수를 깎기도 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내가 객관성을 잃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내가 점수를 낮게 준 몽마르뜨 거리 화가, 윤예종 출신 화가, 그리고 아트밸리 화가들이 다수 수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심사가 끝나고 세계 각지에서 수상 작품을 옮겨왔다.

거의 절반에 가까운 수상작이 나와 함께한 화가들의 작품이었다.

[IAA, 심사 기준 바꿔 올해 국제 살롱전은 100% 신인 작품으로 장식해……]

[새로운 IAA 식구로 솜니움 미술관 선정, 그 수상작은?]

[윤예준, 몽마르뜨 거리에서 IAA 협회 요인으로 우뚝 서다!]

[아트밸리 등 소외작가의 대거 입문. 카루젤 루브르 홀에서 확인하는 세계 미술의 미래]

“솜니움, 정말 크게 성장하겠네요.”

살롱전이 진행되는 모습을 보던 AoT의 관장 다비드가 말했다.

생각보다도 더 많은 수상 화가들이 솜니움 미술관을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저희 영국 출신 신인 화가들도 다섯 명이나 수상했습니다. 굉장히 이례적이죠. 윤 관장님 덕분입니다.”

“뭘요.”

굉장히 기쁜 표정으로 살롱전 전시장을 살피던 다비드가 물었다.

“아, 그런데. 모로코와 사우디, 두 왕국을 다 가보셨잖습니까?”

“네.”

“어디가 더 크덥니까?”

다비드는 조금 뜬금없는 질문을 해왔지만 대답은 해주었다.

“부지는 모로코 라바트 왕궁이 더 넓었던 것 같은데, 건물 규모나 채 수, 화려함은 사우디 왕궁이 더 컸죠.”

“오호!”

다비드는 머릿속으로 그 왕궁들의 모습을 그려보듯 눈을 감더니 제안했다.

“영국 버킹엄은 와보실 생각 없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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