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이 제일 쉬움-185화 (185/241)

185화. 사람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3)

새로운 한지의 매력에 빠진 일섭과 도약관 아이들, 그리고 예고 학생들은 한동안 작업실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다.

그들이 한지 테마파크에 쓰일 작품을 만드는 동안에 나는 한지연과 지속적으로 교류하며 한지 개발에 힘썼다.

오마르의 상태가 많이 호전되어 통원치료가 가능해졌을 때 김화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 오마르 선생님 퇴원하십니다. 골수염은 치료가 잘 되어가고 있는데 척추 관절 몇 군데가 아예 고름이 굳어 문드러져 버려서, 유합 수술만 몇 번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잘 됐나 보네요.”

-네. 건강은 타고 나셨다더군요.

최근 아프리카연합에서 전쟁을 포함해 대인 살상 무기에 가족을 잃거나 다친 사람들을 지원해주는 정책을 새롭게 펼쳤다.

아프리카에서 진행한 <챌린저스 아트워크>의 여파였다.

치료비의 경우 아프리카 내 병원 치료만 지원해준다고 했지만, 오마르는 정당하게 외래 진료 의뢰를 받고 나와 있기 때문에 지원 대상에 포함되었다.

-돈 몇 푼 아끼겠다고 고국으로 돌아가실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파피루스 제지법을 제대로 연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김화가는 오마르와 함께 한지의 국내 대중화를 넘어 세계화까지도 이뤄내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미술 장르를 가리지 않고 모든 회화 화가들이 한지를 사용할 수 있도록 말이다.

한지 테마파크의 중요성이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윤예종과 한지연이 합심해서 한지 테마파크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곳곳의 신문사에서 인터뷰를 요청해왔다.

조상철 해고 사태가 있은 뒤 윤예종과 원만한 관계를 쌓아온 FC코리아를 비롯해 <미,감>까지.

게다가 주요 국영 방송사 다큐멘터리 팀에서까지 한지 테마파크의 개장 시기와 장소를 물었다.

테마파크가 열리는 장소는 이미 공개 입학식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진 부지 중앙광장이었다.

김화가는 형형색색의 한지를 만들기 위해 여러 안료를 풀물에 섞어보았다.

그 과정에서 닥나무 접착 성분과 안료 사이의 화학적 상호작용을 줄이려면 모로코 테너리의 천연 안료가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기존의 화학 안료로 색을 내기 위해서는 아주 소량만을 섞어 종이 내구성 저하를 통제해야 했다.

하지만 천연 안료라면 확실한 발색과 강한 내구성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윤예준, ‘아프리카 제지 명인 오마르-한지연’ 합동 연구 성사 일등 공신으로 밝혀져……]

[윤예준과 한지연이 함께 개발한 일명 ‘윤예종이’, 새로운 한지 시대 여나]

[올해 체험학습은 윤예종 한지 테마파크로]

[윤예종 측, 한지 테마파크를 통해 “한지의 우수함과 독창적인 한지 회화 예술 선보일 것” 포부 밝혀]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윤예종이가 압도적으로 오래가는 종이라는 사실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한국이 멸망해 없어져도 한지는 남기게 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아직 할 일은 하나 남았다.

한지 회화 예술을 선보인다는 발표에 수많은 사람들이 오랜만에 나의 동양화를 만나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진 것이었다.

어차피 아직까지는 한지의 매력을 살리는 데에 동양화만 한 그림이 없다는 생각이었다.

마침 한지연을 들락거리며 한국화 아이디어가 생긴 참이었다.

나는 이젤과 한지를 챙겨 중앙광장으로 나왔다.

개나리꽃 한 가지를 그릴 생각이었다.

이젤을 수평으로 눕혀 한지를 깔고 먹과 노란 안료를 풀었다.

‘진짜 갈필의 매력을 발산할 수 있는 종이야. 활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나는 갈필법의 감각을 유념한 채로 봄의 느낌을 떠올려보았다.

봄의 개나리는 겨울이 끝나자마자 다급하게 가지 바깥으로 터져 나오듯 피었다.

아직 겨울이 끝난 줄도 몰랐던 이들도 그 꽃을 통해 봄이 왔음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재빠르게 말이다.

우선 노란 안료를 마치 뿌리듯이 그려 넣었다.

물을 많이 탔기 때문에 중간중간 말려가며 안료를 적묵해나가야 했다.

그럼 불꽃처럼 터져 나오는 노란 색채로부터 속도감 있는 붓질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먹을 찍어 그 위에 가지 하나를 그렸다.

그림은 그것으로 완성이었다.

한지 위에 노란 안료를 수차례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거칠게 도침한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덕분에 가지 표현도 건조하고 묵직하게 해낼 수 있었다.

가지의 척박함과 부드럽게 역동적인 개나리 표현이 균형 있게 어우러졌다.

나는 이젤 하단에 <봄의 신호>라고 적은 이름표를 붙이고 작품이 마를 때까지 기다렸다.

이 시기, 이 장소, 이 종이엔 이 그림뿐이었다.

***

아프리카 전쟁 억제부터 시작해 한지와 파피루스라는 세계 최고 제지술의 결합까지.

새로운 한지는 한지 테마파크 시작과 동시에 판매되기로 했다.

그래서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윤예종울 들락거리며 인터뷰를 요청했다.

하지만 이젠 충분했다.

어차피 테마파크가 열리면 알아서 잘 홍보가 될 사안이었다.

괜히 섣불리 홍보하겠답시고 준비를 게을리하고 싶지 않아 더 이상의 인터뷰는 대부분 미뤄뒀다.

그렇게 테마파크가 열리기 하루 전이 되었다.

나는 그림 배치를 마무리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 한지연에서 보내주기로 한 한지 작품들이 도착하지 않았다.

김화가에게 전화를 하려는 순간 큰 트럭 몇 대가 들어왔다.

한 작은 승용차가 트럭 꼬리를 물고 즉시 들어왔는데, 그곳 운전석과 조수석에서 각각 김화가와 한 남성이 내렸다.

한지연에서는 종이접기 예술가를 섭외해 조형예술을 만들겠다고 했다.

하지만 날씨에 민감한 종이 특성을 생각하면 야외에 미리 배치해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개장 전날인 이제야 설치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원’ 작가님 맞으시죠? 윤예준입니다.”

조수석에서 내린 남자에게 다가가 악수를 하자 원은 조금 두리번거리더니 천천히 내 손을 마주 잡았다.

가끔 한지연과 이런 이벤트를 작게 진행하던 아티스트였다.

이름과 작품 사진은 전해 받아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나는 트럭에 실려 있는 작품들을 하나씩 내려 위치를 일러주었다.

수많은 작가들의 한지 조형물과 한지 패션 등이 각자 제자리를 찾아서 이동했다.

“어?”

그러던 도중 원의 작품이 트럭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원은 한지를 괜찮은 모양새로 구겨놓은 작품을 제출하기로 했다.

사진으로 봤을 때는 그냥 A4용지 크기의 한지를 구겨놓은 줄 알았는데, 실제로 보니 가슴에 닿을 정도로 컸다.

“이거 원 작가님 작품 맞죠?”

내가 묻자 원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당히 심약한 인물인 듯했다.

“어…… 네. 그, 사진 보내드렸는데……”

“그렇죠. 사진보다 크길래요.”

크게 보니 작품은 달라 보였다.

사진으로 봤을 땐 그냥 한지를 구겨 원을 만들어놓았다는 데에 포인트를 맞춘 단순 조형인 줄 알았다.

한지로 시도한 예술인 데다가 ‘윤예종이’의 질감을 홍보하는 기능이 있으니 그냥 한지연에 맡기기로 하고 전시 통과를 시킨 작품이었다.

하지만 크게 보니 전체적인 원형 구도보다는 구겨진 모양새가 더 눈에 띄었다.

제목도 <원>이었지만 내용은 원이 아닌 것이었다.

“이 작품 어떻게 만드셨어요?”

“어떻게 만들었냐니……”

“뭐, 작의라든가, 제목의 의미라든가, 그런 거요. 이 작품을 통해서 표현하고 싶으셨던 게 뭔가요?”

내가 묻자 원은 평가받는 사람처럼 우물쭈물댔다.

작품 활동을 많이 해보지 못한 아마추어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의 작품을 비판하려고 한 게 아니었다.

나는 이 잠깐 사이 그의 작품에 큰 감명을 받았고, 나의 그 감상이 작의와 호응하는지 확인하고 싶을 뿐이었다.

“어어…… 막, 그런 건 없는데.”

“저한테 이런 작품을 만들라고 한다면 구김을 더 심하게 해서 원형에 더 가깝게 했을 것 같거든요. 그런데 원 작가님은 이렇게 살짝만 구겨놓으셨잖아요? 특별한 이유가 있죠?”

구체적으로 질문했더니 원은 그제야 조금 의도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내 인생이 이렇게 잘 굴러갔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으로……”

원의 말은 이랬다.

자신은 어려서부터 종이접기로 시작해 현재는 조형예술 전반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일반인 예술가라고 했다.

열심히는 하고 있지만, 생계 문제도 있고 재능을 알아봐 주는 사람도 없어서 작품 활동이 그리 쉽지는 않았다고.

원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경사로에 두어도 움직이지 않는 육면체’ 같은 삶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정부의 예술가 보조금이 나오고 가끔 그림을 팔기도 시작하면서 조금씩 예술가로서의 인생이 굴러가기 시작했다.

잘 보면 정육면체로 접어놓은 큰 한지를 이리저리 구겨 구체을 만들어놓은 상태였다.

“제, 제 삶을 당신이 구겼어요. 그 보조금 덕분에…… 아무튼 그래서 감사하는 마음이고, 이 작품은 그냥 선물로 줄…… 주는 거예요.”

구긴다는 표현은 별로 어감이 좋지 않았지만, 작품으로 보니 무언가 북받쳐 올랐다.

힘든 삶을 살아오며 여러 차례 구겨진 끝에 초라한 모습으로나마 조금씩 구를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자기만의 세계가 굉장히 뚜렷한 예술가였다.

내가 경험해본 바로는 자의식이 이렇게 강한 예술가들은 늦더라도 예술계에 큰 획을 그을 수 있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작품 하나하나가 소중한 시기일 텐데.”

내가 감사를 표하자 원은 감격에 찬 눈빛으로 소리 없이 웃었다.

“찰칵!”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입으로 낸 셔터음이 들려왔다.

나와 김화가를 비롯한 그곳의 모두가 그쪽을 돌아보았다.

어머니와 <미,감>의 도효정 기자가 함께 들어오고 있었다.

“미안해요. 그렇게 놀라실 줄은 몰랐는데. 미리 와서 저도 동선 좀 짜려구요.”

도 기자는 빈손으로 카메라 드는 시늉을 하며 이곳저곳 살펴보았다.

목에 카메라를 걸지 않고 들어온 게 신경 쓰이기 때문인 듯했다.

“어떻게 같이 오세요?”

내가 묻자 어머니가 대신 대답했다.

“이번에 도 기자님이 동대문 옥상낙원 관련 기사를 쓴다고 하셨거든. 그래서 그거 인터뷰하고 같이 들어오는 거야.”

예전에 홈페이지를 통해 인터넷 신문으로서의 역할도 슬슬 하기 시작했던 <미,감>은 이번에 아예 일간지까지 창간했다고 했다.

매일 예술가들을 한 명씩 만나며 대표작에 관해 이야기 나누는 기사가 있는데, 이번 예술가는 어머니가 되었다.

YJ종합예술학교 실내디자인을 넘어 동대문 옥상낙원까지.

지어진 지 좀 되었지만, 아직 실내디자이너로서의 호평은 이어지고 있었다.

“정말 오래간만에 뵙네요.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나 잘생겨졌을 줄이야.”

옆에 선 도 기자가 웃으며 끼어들자 어머니가 받았다.

“그렇죠? 다행히 애 아빠보다는 저를 더 닮았나 봐요. 도 기자님 보시기에도 그렇죠?”

“어…… 음…… 중립국.”

요즘 협업이 많다더니 어머니와 도 기자는 부쩍 가까워진 것 같았다.

서로 농담도 주고받는 걸 보면 말이다.

“엄마는 잘 지내셨어요? 너무 바빠도 몸이 피곤하실 텐데.”

매번 어머니와도 함께 해외여행을 한번 해야겠다고는 생각하는데 겨를이 안 나서 신경 쓰였다.

“엄마 걱정해주는 거야? 다 컸네, 우리 아들. 엄마는 괜찮지. 그동안 쌓아놓은 체력이 있어서 그런가?”

표정은 좋아 보여서 다행이었다.

“이번에 시각장애인을 위한 전시회도 준비하고 계시잖아요. 아들이 하는 거라면 같이 해봐야 한다면서.”

도 기자가 말했다.

<챌린저스 아트워크>에 감명을 받아서 비슷한 전시회를 한국에서 해볼 생각이라더니, 도 기자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와. 그럼 도 기자님도 같이 바빠지시겠어요. 이러다 우리 한지 테마파크 기사는 못 쓰시는 거 아니에요?”

“아아. 이번 한지 테마파크는 별책에 따로 수록될 예정이에요. 저 개인보다는 팀으로 움직이고 있죠. …… 사실 전 그 팀에 소속돼 있지 않은데 여기 와보려고 인터뷰를 근처에서 진행했어요.”

도 기자는 사진은 못 찍어도 눈으로 먼저 담아가도 되겠냐고 물었다.

그렇게까지 딱딱하게 굴 생각은 아니었기에 마음대로 하시라고 하자 도 기자는 조형물을 옮기는 인부들을 거들며 작품을 하나씩 구경했다.

그때 김화가로부터 전화가 왔다.

“무슨 일이세요?”

-혹시 전화 받으셨나요? 방금 루브르 박물관에서 전화가 왔는데.

“네? 아니요. 저는 뭐 전화 온 거 없는데요. 루브르가 왜요?”

김화가가 조금 횡설수설하더니 말했다.

-윤예준 화가님한테 혹시 ‘신의 말씀’을 받아적을 생각이 없으시냡니다.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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