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이 제일 쉬움-181화 (181/241)

181화. 태양의 권력을 당신에게 (2)

박물관으로 들어선 나와 제프는 일단 ‘투탕카멘’이라는 작품을 보게 되었다.

바닥에 수평으로 누워 있는 투탕카멘은 누군가의 모습을 본뜬 관처럼 보였다.

전체적으로 황금과 이집션 블루의 반복된 스트라이프 패턴이 인상적이었다.

알기로 고대 이집트의 파란색 염료는 변색이 심하다던데, 잘 보관된 것인지 본연의 색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저 모자 굉장히 익숙하지 않습니까? 이집트 디자인을 하겠다고 하셨을 때 솔직히 저 모자를 먼저 떠올렸는데.”

제프는 투탕카멘의 사자 모양 두식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두식부터 시작해 턱에 있는 기다란 보형물, 그리고 곳곳에 박힌 앙카 문양과 양손에 든 도리깨까지.

그중 하나만 떼어놓고 보아도 이집트의 수천 년 역사가 금방 떠오를 만큼 강렬한 것들이었다.

“확실히 저 청색과 금색 패턴은 참고할 만하네요. 하지만 디자인적 요소를 많이 따가기에는 손목시계가 너무 작아요. 한번 신중하게 살펴보죠.”

나는 투탕카멘에서 시선을 떼며 말했다.

“태양력이 고대 이집트에서 생겼다더라고요. 그럼 현재의 달력도 이집트에서 나온 거죠.”

짝퉁과 아류 때문에 매상이 꽤 줄었다고 했다.

그럴 때일수록 스펙터클라크는 정통성에 호소해야 했다.

체계적인 시간관념이 처음으로 나타난 이집트의 이미지를 스펙터클라크가 선점한다면 굉장히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 것이었다.

제프는 감탄하며 맞장구를 쳤다.

“그러네요! 태양력의 발상지. 그런 면에서 이집트와 저희 스펙터클라크가 상통하는 구석이 있네요.”

시계에 문페이즈를 처음 적용한 게 스펙터클라크였다.

지금은 흔한 아이디어가 되었지만 말이다.

“호루스의 눈은 전지(全知)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잖아요? 기존의 문페이즈를 호루스의 눈으로, 태양력으로 표현하면 적절할 것 같아요. 그러니까 문페이즈가 아니라 썬페이즈가 되는 거죠.”

나는 태블릿을 꺼내 아이디어를 스케치했다.

시간은 평소대로 숫자로 표현하고 문페이즈가 들어가던 자리에 호루스의 눈을 그려 넣는다.

그 눈동자는 나일강의 태양과 동시에 뜨고 질 것이다.

그리고 시계의 둥근 옆면에는 투탕카멘의 도리깨와 앙크 같은 왕의 상징을 적절히 배치한다.

마지막으로 스트랩엔 시간을 나타낼 수 있는 이집트 상형문자를 새겨넣으면 되었다.

“오. 이 정도면 벌써 완성된 것 같습니다.”

나의 스케치를 보던 제프가 박수를 쳤다.

“일단 이집트 색이 물씬 나도록 하나를 디자인해볼게요. 아까 말씀하셨던 금색과 청색을 과감하게 활용해서요. 하지만 손목시계도 패션의 일부잖아요? 금색만 있으면 어떨지 몰라도 청색이 함께 있으니 조금 맞춰 입기 어려울 거예요.”

금색과 청색을 섞어 과감하게 표현한 디자인은 1만 개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출시하고, 블랙에 메탈 색으로 디자인한 건 기성품도 함께 판매하기로 했다.

신상품 이름은 ‘이집션 블루 트라바’로 결정됐다.

리미티드 에디션을 가지지 못했어도 기성품만으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한 디자인이 나올 것이었다.

그렇게 디자인이 확정되자마자 제프는 쐐기를 박듯 계약서를 꺼냈다.

디자인은 전적으로 내가 원하는 대로 진행하고, 수익금의 3%를 내게 제공하는 조건이었다.

그렇게 디자인 최종안을 보내줄 기일을 잡은 뒤 제프와 헤어졌다.

공항까지는 택시를 잡아서 가겠다고 했다.

나는 박물관에 남아서 작품을 더 구경할 생각이었다.

이집션 박물관에서만 볼 수 있는 종이를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이곳까지 지나오면서 잠깐 봤는데, 당장 급한 건 디자인 회의였다.

이젠 회의가 끝났으니 확인해볼 수 있을 것이었다.

이집션 미술관에 기원전 14세기에 그려진 그림이 있었다.

이집트 역사가 오래된 줄은 알고 있지만, 종이에 그려진 그림이 4천 년 가까이 남아 있다는 건 굉장히 신기한 일이었다.

색이 조금 바래고 얼룩진 모습이기는 했지만 컨디션은 매우 양호했다.

-......문헌에 따르면 이 작품은 원래 <오시리스의 법정>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작품이었으나 그 대부분이 소실되어 진리의 저울 앞에 앉은 아누비스의 모습만이 남은 상태이다.

<오시리스의 법정>은 잃어버린 고대의 기술 ‘파피루스 제지술’로 만든 종이에 그려진 작품이라고 적혀 있었다.

<사자의 서> 속 오시리스의 법정엔 신만 해도 다섯 명이 묘사되어 있기 때문에 유실 전에는 지금의 다섯 배가 넘는 크기였을 것이라는 추측이 뒤를 이었다.

그럼 꽤 많이 훼손이 되었다는 뜻인데, 조금이나마 남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놀라웠다.

‘보통의 종이도 오래 잘 보관해야 몇백 년이 고작인데 이렇게나 오래 보관할 수 있다니.’

사람 수명이 그리 길지는 않아 백 년을 넘긴다고 하면 그 작품은 영원한 작품이나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나는 복원 작업을 하면서 처참하게 훼손된 작품을 여럿 보았다.

140년을 건너뛰어 환생해오면서 시간이라는 게 작품을 얼마나 망쳐놓는지도 말이다.

‘분명 그 파피루스 제지술이라는 건 어딘가에 아직 남아 있을 거야.’

나는 반전예술가협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더 오래가는 것도 굉장히 큰 매력이었지만, 이집트에서 발명된 최초의 종이에 그린 그림을 전시한다면 전시회는 더 큰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었다.

***

완성된 디자인 도안을 보내자마자 스펙터클라크의 1차 홍보가 시작되었다.

호루스의 빛나는 눈을 크게 그려놓고 ‘스펙터클라크X윤예준 이집션블루 트라바 리미티드 에디션 사전구매 접수 중’이라고만 적어놓은 상태로 말이다.

아프리카에서는 전화 접수로, 다른 대륙에서는 인터넷 접수를 받았다.

정보 전달 속도 차이를 고려해 아프리카 남부에 전단을 우선적으로 뿌렸기 때문인지 전화 접수자가 상당히 많았다.

물론 대부분이 남아공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남아공 이외의 지역엔 아직 시계를 팔 만한 시장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나의 특별 부탁으로 거의 대륙 전역에 전단 홍보를 해두었다.

아무리 돈이 없다고는 하더라도 스펙터클라크가 잘나가는 브랜드인 건 다들 알았으니까 말이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사람들은 나와 스펙터클라크, 그리고 이집트의 세 조합을 굉장히 신선하게 받아들였다.

당장 보기에 그 셋은 접점이 별로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스펙터클라크에서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디자인으로 홍보물을 잘 만들어 준 덕분도 있을 것이었다.

그리하여 <챌린저스 아트워크> 아프리카 전시회를 홍보할 절호의 기회가 마련되었다.

시계 스트랩 디자인은 테너리 공방으로, 또 <챌린저스 아트워크> 아프리카 전시회 홍보 포스터 시안은 스펙터클라크 남아공 지사로 보냈다.

이름을 알렸으니 본격적으로 예술가들을 모집해야 했다.

포스터에 나와 반전예술가협회 번호를 적어서 보냈더니 수많은 문의가 빗발쳤다.

숨어 있던 예술가들이 참가 의사를 밝히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들 분류는 반전예술가협회에 맡겼다.

당장 기다려야 하는 전화는 따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네, 아프리카 <챌린저스 아트워크> 준비위원 윤예준입니다.”

그렇게 기다리던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여기 파피루스 제지술 보유자도 연락 달라고 쓰여 있는데. 그, 사티스 여신이 인간에게 선물했다는 전설의 제지술 말하는 건가?

“네, 맞습니다.”

-어엉.

그 신화가 실제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신이 인간에게 제지술을 가르쳐주다니, 터무니없지 않은가.

하지만 오래된 파피루스 종이는 분명히 존재했다.

-그 신화가 중요한 거라면 유감이지만 오래가는 파피루스 종이는 만들 줄 아는데. 그럼 나도 예술가로 들어가나?

“물론이죠. 그런데 혹시 얼마나 가나요?”

-그야 나도 모르지. 내 수명이 길어야 80년인데. 근데 <오시리스의 법정> 보고 사람 구하는 거 아니야? 내가 그거 똑같이 만들 수 있어.

그의 말대로 수명 상의 한계로 인해 그의 종이가 얼마나 오래 가는지는 실제로 확인해볼 수 없었다.

하지만 최대 천 년까지 볼 수 있다는 특수 산화 장치를 활용하면 충분히 가능했다.

일단 속는 셈 치고 다녀와 보기로 했다.

“어디 거주 중이신가요?”

-수단인데. 여기가 나일강 상류야. 지천에 파피루스가 널려 있지.

오마르라는 이름의 그는 그냥 나일강 근처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던 농부였는데, 조금 습하다 싶으면 파피루스가 무더기로 자란다고 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잡초 피해를 줄이기 위해 쓸어모으다시피 꺾어야 했다고.

-아마 지금 수단에 이 방식으로 종이 만들 줄 아는 건 나밖에 없을걸. 나 아니면 여기 연락할 사람이 없다고. 기술 있는 양반이 최근에 죽어서.

오마르는 30살이 되던 해 백린탄 피해로 농장과 함께 자신의 두 다리를 모두 잃었다고 했다.

그 뒤 파피루스 제지술 보유자와 우연히 만나 제지 기술을 전달받았다.

하지만 현재는 일반 종이를 많이 쓰기 때문에 기술로 먹고살 수는 없었다.

공장화도 어렵고 그리 오래가는 종이는 수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또한 그에게 제지술을 가르쳐 준 스승은 몇 해 전에 말라리아로 죽었다.

“제가 파피루스를 잘 몰라서 그러는데, 보통 크기 한 장 짜려면 얼마나 걸리나요?”

-내가 다리가 없어서…… 그 양반이 속도는 진짜 빨랐는데. 파피루스 포 뜨는 작두 틀이 있어. 그걸 페달로 막 밟아서 굴리고 그래야 하는데……

오마르는 파피루스 종이를 만드는 방법을 장황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듣기로 생계에 도움이 안 돼 몇 년간 만들어보지도 않았다고 했는데, 설명하는 게 굉장히 구체적이고 자세했다.

소실될 위험이 있는 기술이라서 설명하는 법을 먼저 교육받은 듯했다.

아무튼 중요한 건 아무리 오래 걸려도 재료만 충분하다면 하루에 백 장도 만들 수 있다고 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주소 알려주시면 제가 그리로 가겠습니다. 혹시 만들어놓은 종이 더 있나요? 제가 다 사겠습니다.”

“기술이 아니라 종이가 필요하다는 거였어……? 있으면 그걸 어디다 쓰게?”

오마르는 이상하다는 듯 물었지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내가 하고 싶은 건 백수십 년 만에 끝나는 예술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좋은 일에 쓰지요.”

***

오마르는 주소는 모르겠고, 동골라에 오면 강 위에 떠 있는 섬이 있으니 그리로 오라고 했다.

나는 전화를 끊자마자 카이로 공항에 착륙시켜둔 모로코 왕의 비행기에 올랐다.

그렇게 수단에 도착하니 테레즈로부터 연락이 왔다.

슈링클 관련 상품 판매 총액이 5700억까지 뛰었다는 사실을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유화 보관함 말고도 쓰이는 곳이 굉장히 많더군요. 범용성이 있습니다. 재료 값도 싸서 그런지 몰라도요. 열을 받으면 수축한다는 성질 덕분에 안전용으로도 많이 쓰이고요.

그 사이 별개로 보안카드나 핸드폰 케이스 등을 만들었다고 했다.

열을 받으면 그 부분이 수축되어 두꺼워진 덕에 휴대폰과 보안칩 보호에 용이하기 때문이었다.

“그럴 것 같았어요. 앞으로도 다른 쓰임새를 계속 궁리해봐야겠네요.”

-네. 굉장히 수익률이 좋습니다. 세계적인 연필브랜드 ‘카버 파스텔’ 연매출의 2/3 정도 수준이에요. 계속 재투입하실 거죠?

전망이 좋은 건 맞았지만 5700억을 모두 슈링클에 투자할 순 없었다.

따로 돈이 필요한 구석도 있고 말이다.

“이번에 만들고 있는 가죽 액자에 써야 할 것 같아요. 작업자들 임금도 높게 쳐줘야 하고 가죽도 많이 사서 비싸거든요.”

이번 가죽 액자 소요량은 총 13만 호였다.

크기 고려해서 말이다.

그럼 최소한 5000억은 든다는 뜻이었다.

“거기다가 이번 액자가 큰 호평을 받고 나면 전시를 원하는 화가가 훨씬 더 늘어날 거예요. 그다음부터도 계속 액자를 주문 제작해야 하니까 돈은 계속 필요할 거예요.”

-으음.

테레즈는 조금 고민하더니 물었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그렇게 액자를 만들어봤자 입장료를 올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큰돈을 투자하시는 겁니까? 관람객은 많아지겠지만 손해를 메우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은데요.

전량 가죽 액자로 대체하는 일의 문제점은 나도 생각해본 바가 있었다.

테레즈의 말대로 비용이 만만치 않았던 것도 있지만, 가죽 액자가 어울리는 작품도 있고 아닌 작품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가죽 액자 소식을 접했을 때 내게 개인적으로 연락을 해 자신의 작품은 빼달라고 요구한 화가도 있었다.

하지만 막상 만들어놓은 액자를 보여줬을 때 만족하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테너리의 가죽공예 예술가들의 표현력이 그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실제로 보지 않은 사람은 몰랐다.

그들의 가죽공예가 얼마나 거대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지 말이다.

“처음부터 이런 곳에 쓰려고 돈을 모은 거니까요.”

돈이 없었던 때에는 계속 더 큰 수익을 위해 재투자를 반복해야 했다.

하지만 돈은 모아도 모아도 끝이 없는 법이었다.

신인 화가 발굴, 새로운 예술적 방법론의 발전이 내 유일한 목표였던 것이다.

“그리고 걱정하지 마세요. 돈이 안 되는 곳에 아무리 쏟아부어도 적자는 안 날 것 같거든요.”

나는 옹골라의 사막에 끝없이 늘어서 있는 오프로드를 달린 끝에 오마르가 말한 ‘강섬’에 도착했다.

물가에 도착하니 파피루스가 이곳저곳에 엉켜 자라 있었다.

-적자가 안 난다니요? 뭔가 새로운 상품이 있는 겁니까?

오마르로 보이는 남자가 강변에 낡은 작두를 하나 세워두고 열심히 칼을 갈고 있었다.

휠체어에 앉은 채로 말이다.

저게 말로만 듣던 종이 만드는 틀인 모양이었다.

지금의 파피루스는 줘도 안 갖는 잡초에 불과하겠지만, 오마르의 손을 거치고 나면 상상 이상의 가치를 갖게 될 것이었다.

“네. 그러니까 안심하시고 현금으로 준비해놔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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