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태양의 권력을 당신에게
살마는 약속한 대로 아르간 오일을 가죽 공장에 보내주었다.
앞으로는 공장장 나딘과 직접 연락해 필요할 때마다 보내줄 거라고 했다.
“이 아르간 오일이랑 또 아프리카 여행 편의 봐주기. 약속한 게 그게 다네요? 너무 적지 않아요?”
공주는 나폴레옹의 모자가 완성된 이후부터는 아예 사람이 달라졌다.
평생 소원을 이룬 사람처럼 행복해 보였다.
완성된 나폴레옹의 모자 작품에 붙은 <카사블랑카>라는 이름도 상당히 마음에 든다고 했다.
노인의 태도 변화가 내게 뜻깊어서 그렇게 정한 것이었다.
“지금 금전적인 성과가 어느 정도 되는데요?”
“페즈와 타프라우트는 정 반대편에 있어요. 가죽 액자 일로 페즈로 향하는 관광객과 <카사블랑카> 일로 타프라우트로 향하는 관광객이 훌쩍 뛰었죠. 교통도 교통이지만 상인들 매출이 순수하게 세 배는 뛰었다고 하더군요. 지금 모로코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유명한 국가가 됐어요.”
그 정도면 나라를 달라는 부탁 빼고는 다 들어줄 것 같았다.
“아프리카에서 사업을 몇 가지 더 해보고 싶어요. 또 이런 건이 어디 더 없을까요?”
아프리카 예술가들과 함께한 작업이 성공했다.
그러니 <챌린저스 아트워크>를 열기 전 명함 내밀기 정도는 한 셈이었다.
하지만 명함만 내미는 수준으로는 부족했다.
아직 타프라우트의 노인처럼 나를 모르는 이들이 많을 테니까.
아프리카에서도 미국에서와 같은 파급력을 가질 수 있어야 했다.
살마가 반가워하며 말했다.
“사업이라면 이번 것 같은 예술 관련 일 말씀하시는 거죠? 찾아보면 많죠! 뭐가 좋을지 고민을 좀 해봐야겠는데요? 그런데 하고 싶으신 일이 정확히 뭔데요?”
나는 <챌린저스 아트워크>라는 이름의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했다.
아프리카 대륙은 미국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큰데 교통과 통신은 낙후된 편이었다.
따라서 미국에서보다 더 화제성이 필요한 건 물론이고, 개개인의 일상생활과 관련되어 알음알음 퍼질 수 있는 것이어야만 성공할 수 있었다.
살마는 조금 고민하더니 말했다.
“화제를 끌 만한 전시회 장소를 소개해드릴 수는 있겠는데.”
“어딘데요?”
“페즈에서 보셨다던 별궁이요. 민간에는 한 번도 공개된 적 없는.”
충격적인 제안이었다.
페즈 별궁을 세간에 공개한다니 말이다.
사우디에서 예술광장 사업을 진행할 때 카프탄 별궁이 개방되었던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그곳과 여기 라바트 왕궁은 민간인 출입이 금지되고는 있지만 종종 행사나 방송 보도를 위해서는 충분히 열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세계인들은 그곳에 가보지 않았어도 내부가 어떻게 생겼는지 정도는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모로코의 페즈 별궁은 완전히 비공개였다.
그 내부 모습을 아는 사람은 궁에서 일하는 사람과 왕족뿐일 정도로.
나딘은 그곳 지하에 외계인이 갇혀 있다는 소문을 철석같이 믿고 있던데.
이렇게 선뜻 공개해주는 걸 보아 낭설은 낭설인 모양이었다.
“거기서 <챌린저스 아트워크> 전시회를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특종 감인데요? 전시회 하는 동안에만 한시적으로 개방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엄청나게 모여들겠어요.”
나는 살마가 제안을 무르기 전에 수락했다.
그때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살마에게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으러 자리를 옮겼다.
“네, 아빠.”
-그래. 일은 잘돼가고 있어?
사우디에 갔을 때에도 위험하다고 했던 아버지였다.
그런데 이번엔 중동이 아니라 아예 아프리카로 와버렸으니.
사우디 때보다 더 자주 전화를 주고받아야 했다.
“네. 대륙 한 바퀴 돌면서 예술가들이랑 인연도 꽤 쌓았고요. 모로코에서 활동이 꽤 성공적이었던 덕분에 북부에서는 유명한 편이거든요? 그래서 아마 전시회를 한다고 하면 좀 파급력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 그럼 남부는?
“남부……는 아직이죠. 그래서 고민이에요. 여기 모로코 공주랑 친해진 김에 아예 남부까지 미칠 만한 큰 사업을 하나 벌일지, 아니면 남부로 완전히 내려갈지 말이에요.”
모로코에 남아서 다른 사업을 찾으면 좀 더 큰 건을 만들 수 있었지만, 남부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만약 남부로 내려간다면 남아공쯤이 될 것 같았다.
금이 많이 나는 동네이기도 하고 월드컵 개최지가 될 만큼 국민들 생활 수준도 높은 곳이었으니까 말이다.
거기까지 이야기하자 아버지가 말했다.
-그래? 마침 잘됐네. 예준아, 너 ‘스펙터클라크’라고 알지? 우리 뉴욕 광고 시상식 때 같이 광고하자고 했던.
“어…… 그 시계 기업이요?”
-응. 방금 거기서 전화가 왔어. 같이 신상품 디자인을 하고 싶대.
그때 듣기로 스펙터클라크는 굉장히 고급스러운 손목시계를 취급한다고 했다.
전 세계 백화점 어디든 자리 잡지 않은 곳이 없다고.
-본사는 스위스에 있는데 가장 큰 영업점은 남아공에 있다더라.
“남아공이요?”
시계 회사에서 연락을 받았다기에 모로코 가죽으로 시계 스트랩을 만들어 팔고 싶은 것이겠거니 했는데,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내게 맡기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나의 사정을 그 정도로 봐줄 리는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네가 아프리카에서 이름을 알리는 데에 힘을 쏟고 있다고 했더니 도와줄 수 있대. 평소에 남아공에서 한 번 광고를 하면 가장 빨리 팔렸다더라고. 소비자는 많은데 또 아날로그 광고도 잘 먹히는 동네니까.
인터넷에 전시회 홍보를 하면 아프리카의 숨은 예술가들에겐 잘 전달되지 않았다.
직접 전단을 만들어 배포하는 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됐다.
그 고민을 스펙터클라크는 아프리카 입점 초기부터 해왔을 것이었다.
지금은 그 고민을 일찍이 해결한 상태고 말이다.
“그럼 그 스펙터클라크의 광고 시스템으로 저희 <챌린저스 아트워크> 전시회를 홍보해줄 수 있다는 거예요?”
-그렇지.
잘된 일이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마케팅 담당자 제프의 전화번호를 전달받고 전화를 끊었다.
***
예준은 스펙터클라크 홍보팀을 활용한 전시회 홍보를 조건으로 협업 제안에 응했다.
그렇게 협업이 결정된 시점에서 그는 반전예술가협회에 따로 연락을 취했다고 했다.
필요한 예술가들은 다 확정할 테니, 일단 당장 소개해줄 예술가들과 함께 전시회를 구상하고 있으라고 말이다.
참여 예술가 확정에는 이번 스펙터클라크와의 협업 성과도 포함될 것이었다.
이미 성과가 있다고 판단하고 행동에 들어간 것이니 결정을 무를 리는 없을 것 같았다.
스펙터클라크의 사업팀은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지금까지 예준과 협업했던 기업들이 얼마나 승승장구하고 있는지 떠들며 기대감을 부풀리기도 했다.
역사가 깊고 기능적 질과 디자인 양면에선 따라올 기업이 없는 스펙터클라크였다.
짝퉁과 아류 몸살에 다들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던 것이다.
“잘했어! 아주 잘했어!”
사장이 다가와 제프의 어깨를 강하게 두드렸다.
매우 기뻐하는 표정이었다.
“다들 윤예준의 다음 행선지는 아르메스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던데. 이젠 우리도 수혜를 봐야겠지! 광고 시안 빠르게 한번 뽑아봐!”
“알겠습니다! 조만간 윤예준 화가를 만나서 디자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으니, 그 일이 끝나면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신상품 디자인을 준비하는 동안 제프는 남아공 지사와 연락해 윤예준 화가를 맞을 준비를 했다.
하지만 막상 미팅 날이 다가오니 예준은 제프를 이집트 카이로로 불렀다.
“응? 웬 이집트?”
아프리카 북부에서는 이미 유명세를 얻었으니 당연히 남아공을 타깃으로 한 상품 디자인을 구상할 줄 알았던 것이었다.
“뭐, 이유가 있겠지.”
제프는 확인 문자를 보낸 뒤 여행 일정을 다시 조정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예준과 실제로 만나서 들어볼 수 있었다.
“남아공 지사가 가장 크다고 들었는데, 그럼 그곳 매출이 가장 높다는 뜻이기도 하죠?”
“네. 맞습니다. 그렇게 크게 차이가 나는 건 아니지만, 그쪽 부자층이 생각보다 탄탄하거든요.”
예준은 왜 남아공에서 사업이 잘되는지에 대해 고민해보았다고 했다.
기본적인 의견은 제프와 동일했다.
사줄 사람이 많다는 것이었다.
사업팀에서 전문적으로 분석한 내용이니 아마 그럴 것이었다.
“부자 많은 나라가 남아공뿐인 것도 아닌데 왜 하필 남아공 매출이 가장 높을까요?”
“왜 그럴 거 같습니까?”
“이야기를 들어보니 남아프리카에서의 홍보에 굉장히 많은 힘을 쏟고 계신 것 같더라고요. 전단지를 활용한다고 들었거든요? 근데 빈곤층 사람들에게까지 스펙터클라크 시계를 홍보할 필요는 없잖아요? 비싸면 몇백만 달러까지도 팔리니까.”
예준은 그 홍보의 결과 가격과 상관없이 국민적 브랜드로 자리 잡게 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못 사더라도 익숙은 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좀 별개의 이야기지만, 지난번에 한 번 방문해보니까 아직 흑인 공동체와 백인 공동체가 나뉘어 있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그분들 하시는 말씀으로는 옛날엔 더 심했고 지금은 충분히 섞여든 편이라고는 했지만요.”
시간이 지나면서 남아공 경제도 충분히 성장했고, 거의 백인 갑부들의 자본만으로 굴러가던 경제가 지금은 일반적인 선진국 형태로 자리 잡았다.
그 과정에서 흑인 부자들도 꽤 생겼고 말이다.
하지만 여전히 흑인들과 백인들은 인종이 섞이는 걸 꺼려할 정도로 문화를 합치고 있지 않았다.
예준은 그게 신상품 공략의 포인트라고 했다.
“여태까지는 남아공 백인들에게만 중점적으로 시계를 팔았겠죠. 유럽이나 미국에서 팔듯이 말이에요. 그런데 만약 흑인들에게까지 폭넓은 매력을 어필할 수 있는 디자인으로 출시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단순 계산을 해본다면 매출은 두 배가 뛰었다.
“남아공 흑인들이 좋아할 만한 디자인으로 가겠다는 건가요?”
“음, 아니요. 모두가 좋아할 만한 디자인을 원하는 거예요. 남아공에 있는 흑인들은 소수 부족 역사가 너무 오래돼서, 애초에 공통된 흑인 문화라고 어필할 수 있는 포인트가 별로 없어요. 설령 그게 있다고 해도 너무 생소한 디자인일 게 뻔하죠. 남아공에서만 선방하고 다른 국가에서는 안 팔리게 될 테니까요.”
대신 아프리카 나일강 최대의 문명인 이집트의 디자인을 차용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남아공을 비롯한 아프리카 남부의 국가들과 이집트는 서로 의 상할 일이 생길 만큼 문화 교류가 잦은 편이 아니었다.
“최초의 인류 문명인 동시에 아프리카의 디자인이니 지역적으로도, 세계적으로도 먹힐 거예요.”
“이집트스러운 디자인이라면 굉장히 멋지겠네요! 숨어 있던 소비자들에게도 특별하게 더 어필할 수 있을 것 같고요.”
“그렇죠. 그것 말고도 몇 가지가 더 있는데……”
예준은 이집트 문명에 대해 조사하면서 굉장히 디자인적으로 차용할 게 많았다고 했다.
“더 자세한 건 이집션 박물관으로 이동해서 이야기하는 게 좋겠네요. 어차피 저도 더 고안해볼 게 필요하거든요.”
제프는 예준을 따라 그의 스포츠카에 탔다.
세계적인 부자들만 가질 수 있다던 오르쉐의 슈퍼카였다.
오르쉐 포뮬러1 경기용 자동차를 디자인한 값으로 세계 각지에 이 차량을 배치해줬다는데, 가끔 고객들을 만날 때 본 적은 있어도 타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번 회의로 디자인 기획이 시작될 줄 알았는데. 굉장히 자세히 공부하셨네요. 대단하십니다.”
“아니에요. 말씀드렸던 전시회가 저한테는 굉장히 중요해서. 이번 신상품을 꼭 잘 팔아야 하거든요.”
이집트 디자인을 활용한다는 아이디어만 들어봐도 남아공을 비롯한 세계 시장에서 굉장히 잘 먹힐 거라는 생각이었다.
세계적인 회사에서 베테랑 마케터로 일하는 동안 제프 나름대로 쌓아온 광고 철학이 있었다.
그건 단순 아이디어만으로 밀어붙여서는 B급을 못 면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 생각은 아이디어만으로도 빛나는 디자인을 경험해본 적이 없어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예준과 대화하는 동안 문득 말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천재적이야. 그동안 해온 사업이 괜히 성공한 게 아니었어.’
그렇게 제프와 예준이 탑승한 스포츠카는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두 시간만 달리면 이집션 박물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박물관 관람을 별로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번만큼은 굉장히 기대하고 있는 제프였다.
물론 거기서 예준이 하게 될 디자인이 얼마나 큰 혁신을 가져다줄지는 예상하지 못한 상태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