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아프니까 생명이다 (4)
대륙을 시계방향으로 한 바퀴 돌아 가나를 여행하고 있을 때였다.
자신이 공주라고 주장하는 인물이 내게 문자 몇 통을 보냈는데, 무시하고 답을 안 했더니 끝내 전화가 걸려왔다.
“네, 윤예준입니다.”
-한창 바쁘실 때 전화 드린 건 아닐지 모르겠네요. 문자 받으셨죠? 살마라고 합니다.
살마는 자신의 정체를 믿게 만들 생각이 없는지 바로 본론부터 이야기했다.
자신은 모로코의 살마 공주로, 페인트로 심각하게 훼손된 관광지가 있는데 그 복원을 내게 부탁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다른 예술가에게 부탁할 수도 있었지만 어쭙잖게 했다간 또 40년짜리 흉물만 만들 뿐이라 신중할 수밖에 없다고.
모로코에 있는 예술가들과 협업해본 내가 적임자라고 했다.
“그 관광지가 모로코 국민들에게 밥 한 숟가락이라도 더 떠먹여 준다면 제가 못 도울 이유도 없죠. 의문이 조금 들기는 하지만요.”
-무슨 의문 말이에요?
“고작 바위 색칠 때문에 공주님께서 직접 전화를 주셨다는 게 조금 이해가 안 돼서요. 바위가 예뻐지면 지역민들에게도 좋겠지만 공주님이 직접 나서실 일은 아니지 않나요?”
살마는 그제야 상황을 이해했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달리 나서서 설득하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바위를 다시 칠하려는 목적이 무엇인지 정도는 알고 하고 싶어서요.”
-흠…… 생각하신 것보다 나폴레옹의 바위가 굉장히 유명해요. 모로코에 몇 없는 관광명소인데 그렇게 훼손되어버렸으니…… 이번에 예준 씨 덕분에 페즈 관광 수입이 확 뛰었잖아요? 물론 늘어난 수익은 국민들에게 돌아갈 거고요.
당장은 확언할 수는 없지만, 가죽 공장만큼 큰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판단이 섰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나폴레옹의 바위가 있는 타프라우트는 제 고향이기도 해요. 파스텔톤 페인트를 끼얹기 전까지는 제 놀이터이기도 했죠. 그래서 더 신경 쓰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그걸 두고 제 사리사욕이라고 하신다면 드릴 말씀은 없지만.
개인적인 동기도 있겠다.
그 정도면 될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찾아뵙고 나눠봐요. 모로코 라바트에 있는 왕궁으로 가면 될까요?
-오……! 잘 생각하셨어요! 아뇨, 작은 전용기 하나 보내드릴게요. 계신 곳 근처 공항이 어디인가요?
당장 전용기를 보내주려는 모양이었다.
여행이 거의 끝나기도 했고, 마침 모로코 근처까지 닿은 차였으니 잘됐다.
“가나 쿠마시에 있어요.”
-가나? 마침 잘됐네. 3시간이면 가겠네. 쿠마시면 거기 공항도 있지 않나?
살마는 딱 세 시간만 있다가 공항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공항까지는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아 도착했지만, 근처 카페에 앉아 나폴레옹 바위에 대해 찾아보는 사이 예정 시간이 되었다.
감사하게도 카페 주인이 나를 알아보고 음료를 무료로 제공해주었다.
그리고 곧 보통보다 큰 비행기 소리가 들려 공항 쪽을 내다보았는데, 사자 두 마리가 있는 금색 인장이 박힌 비행기가 착륙을 시도하고 있었다.
정황상 모로코 왕실 국장으로 보이고 도착 시간도 정확히 세 시간이 맞았다.
틀린 건 작은 전용기라는 사실뿐이었다.
여태 보아왔던 어떤 비행기보다도 거대했다.
***
가나로 보냈던 비행기 조종수로부터 바로 모로코로 돌아오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예준의 남은 여행을 돕기 위해서 보낸 것인데 말이다.
예준이 바로 모로코로 오겠다고 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비행기가 모로코로 다시 돌아올 때까지 왕궁 응접실 사람들은 다급히 만찬 준비에 들어가야 했다.
곧 예준이 도착했다.
이미 비행기를 타고 온 상황이라 정말 살마 공주가 전화한 게 맞다는 걸 눈치챈 상태이기도 하겠지만, 그는 별로 당황한 것 같지 않았다.
“리야드 궁에 비하면 보잘것없죠?”
살마 본인은 모로코 궁이 규모는 작지만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행히 예준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굉장히 흥미로워하는 모습으로 궁을 둘러보았다.
“페즈에 갔을 때 왕궁 건물을 보기는 했지만 들어가 보지 못해서 아쉬웠는데 이렇게 기회가 생기네요.”
“페즈에 있는 별궁보다는 훨씬 크죠. 어때요?”
“날이 그렇게 맑은 것도 아닌데 밝게 느껴져요.”
왕궁 곳곳에 노란빛을 내는 밝은 염료를 발라두었기 때문이었다.
내부도 넓게 탁 트여 있어 별로 갑갑하지도 않고 말이다.
살마는 예준을 바로 응접실로 안내했다.
따진과 쿠스쿠스를 포함해 대부분의 음식이 전통 요리였다.
“거리에서 먹었던 음식들도 맛있었는데, 역시 왕궁에서 나오는 음식은 뭔가 다르네요.”
외지인인 예준의 입맛에 맞도록 간이 센 향신료는 사용하지 않았다.
거리 음식이 맛있었다면 필요 없는 배려였던 것 같은데, 잘 먹고 있는 것 같으니 되었다.
살마에겐 디저트 소스까지도 밍숭맹숭하게 느껴졌지만 맛있는 척 꾸며 웃으며 한 입 먹었다.
말이 나온 김에 바로 나폴레옹의 모자에 대해 설명했다.
현재 40년 된 페인트가 묻어 있는 상태이고, 당시 그걸 두고 자연 파괴라는 의견이 많았다.
그래도 초반에는 외국인 예술가와의 교류를 통해 모로코를 나타낼 수 있는 작품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논란을 불식시킬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도 없는 상태였다.
“그나저나 정말 고맙네요. 일을 도와준다고 해주셔서.”
살마는 진심으로 안심이 됐다는 표정이었다.
“일이 끝나면 바로 보상을 해드릴게요. 뭐 원하는 거 있으세요?”
예준은 오는 길에 ‘아르간 오일’이라는 것에 대해 알아보았다.
아르간 오일은 모로코 특산품인데, 아르간 오일 기본에 아보카도 오일을 조금 섞어서 만든 화장품이었다. 보습효과가 굉장히 뛰어나고 일부 소수의 화가들이 그림에 사용하기도 했다.
유화 희석액으로 말이다.
또한 아르간 오일은 온도가 내려가도 여전히 묽어서 그림을 오래 보관할 수 있게 해줬다.
마르는 동안 물감층을 질기게 잡아주기 때문이었다.
활용도 다양해서 수채화를 다 그린 뒤에 코팅하듯 표면에 발라도 좋았다.
“아르간 오일을 이번 바위 그림에 사용하고 싶어요.”
“아르간 오일이요?”
살마는 갸웃거리더니 아르간 오일을 꺼내 예준에게 건넸다.
“이거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엄청 쓰임이 다양하다던데, 혹시 머리에 바르신 거예요?”
살마가 반들거리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림을 다 그린 뒤 이걸 사용하면 특유의 광택 덕분에 더 좋은 그림이 완성될 거 같거든요. 그리고……”
예준은 이번 작품에 아르간 오일을 쓰는 건 물론이고, 또 그걸 페즈 공장에 납품해달라고 부탁했다.
가죽 공정이 끝나고 바르면 가죽의 질을 올리는 데에 특효가 있을 듯했기 때문이었다.
살마는 이런 상황에서도 가죽 공장을 생각하고 있는 예준이 존경스럽게 느껴졌다.
예준은 아르간 오일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아보았다.
식용으로도 쓴다고 일러주자 조금 찍어 먹어 보기도 했지만 맛은 그리 좋지는 않았다.
“어렵지 않은 요구네요. 그렇게 할게요. 솔직히 윤예준 화가님이 실패하실 리는 없으니, 그냥 준비되는 대로 바로 페즈에 전달하는 걸로 해요.”
“감사합니다.”
가죽 공장에 보급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비싼 기름이지만 특산물인 만큼 생산은 무제한으로 해줄 수 있었다.
또 예준의 사업에 활용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 오히려 살마에게 더 이익이었다.
“그렇게 하고, 그리고 늦었지만…… 가죽 공장 일은 공주로서 굉장히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이번 일로 모로코가 세계에 더 알려진 것 같기도 하고. 특히 관광객이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거든요.”
“아니에요. 필요해서 한 일인데요.”
“그리고 이거 잘 쓰고 있어요.”
살마는 주머니에서 타프라우트 선인장 오일 향수를 꺼내 보여주었다.
벌써 반쯤 비어 있는 상태였다.
***
내가 타프라우트에 도착도 하기 전에 대량의 아르간 오일을 전달받았다는 나딘의 연락을 받았다.
나딘과 디콘의 주도하에 500여 명의 전현직 가죽 공예 작업자들이 모였다고 했다.
나딘이 작업자들을 통솔하고 가죽 가공을 관리하면, 디콘은 그림에 가장 어울리는 액자의 모양과 색감을 뽑아내고 디자인을 지시하는 식이었다.
재봉이 많이 들어가는 지갑이나 가방 같은 걸 만드는 건 아니었기에 한 사람당 하루에 대여섯 점 정도는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액자 하나당 가공, 디자인 총 두 공정을 거치니 두당 세 점씩은 꼬박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특히나 디자인이 까다롭거나 작업속도가 느린 사람 기준으로 말이다.
그래서 이미 상당량의 액자가 제작된 상태였다.
나딘은 아트밸리로 보낸 액자의 개수를 계산해 선물 받은 아르간 오일의 50% 정도를 미국으로 보냈다.
공장에서 발라보니 아예 디자인 작업이 완료된 이후에 바르는 게 적절한 것 같다고 했다.
칼로 무늬를 내고 안료를 섞어 그림을 그려야 했으니 충분히 그럴듯한 의견이었다.
타프라우트는 라바트 왕궁에서 하루를 묵은 뒤 방문했다.
이번에는 날개 아래 프로펠러가 달린 5인승짜리 소형기였다.
‘대도시도 꽤 많고 공주도 관광업에 진심이야. 왕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확실히 사우디와는 다르네.’
살마는 이번 작업에 대해 몇 가지 주의사항을 일러주었다.
“어제 타고 온 비행기는 우리 아버지 거였으니까 웬만하면 비밀로 해주세요. 그리고, 타프라우트 지역 사람들이 별로 페인트칠에 호의적이지는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소음이 적은 걸 타고 조용히 다녀옵시다. 한번 타보시면 훨씬 편하다고 생각하실걸요.”
소형 비행기라면 대부분 진동이 강하고 외부 소음도 심했다.
하지만 살마에게는 그 단점이 보완된 비행기가 있다는 듯했다.
“소음이 없는 비행기는 뭐가 다른가요?”
“글쎄요. 비행기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 일단 더 비싸죠.”
착륙할 때 보니 무시할 수 없는 소형기만의 장점은 확실히 있었다.
‘나폴레옹의 모자’라는 바위 근처에 있는 무수한 공터를 전부 착륙지점으로 쓸 수 있다는 점이 말이다.
나폴레옹의 모자는 정말 나폴레옹의 모자처럼 생긴 바위였다.
프랑스 황제의 모자를 이런 객지에서 보니 반가운 느낌이라고 한다면…… 거짓말일 것이었다.
“정말 곳곳에 페인트가 많이 묻어 있네요.”
살마 공주 대신 따라온 수행원에게 말하자 그는 참 걱정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개인적으로 많이 와본 곳은 아니지만 참 마음이 아픕니다. 안 그래도 멋진 바위에 왜 이런, 슬럼가 연립아파트에나 어울릴 법한 페인트들을 발라놓은 건지 원.”
분명 살마는 처음에 예뻤다고 했는데.
사실 처음 살마에게 나폴레옹의 모자 이야기를 들을 당시부터 누가 그런 걸 계획한 것이냐고 묻고 싶었다.
나 같아도 하지 않았을 것 같은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질문만으로도 누군가의 심기를 상하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참았다.
‘그런데 지금과 당시 상황이 별로 다르진 않은 것 같은데.’
물론 40여 년 전의 그 벨기에 미술가보다는 훨씬 잘 그려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모로코의 위대한 자연경관에 외지인이 붓을 댄다는 건 똑같지 않은가?
아마 지역민들도 그게 특히나 불만일 것이었다.
“작업은 언제부터 시작하시겠습니까?”
수행원은 나폴레옹의 모자로부터 아예 고개를 돌려버리며 물었다.
나는 그와 반대로 바위의 모양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전체적인 형태가 머릿속에 들어오자마자 무엇을 그려 넣을지 즉시 구상이 완료되었다.
아프리카 전 대륙을 돌며 회화를 특기 삼는 전쟁 피해 예술가들을 많이 만나보았다.
나중에 <챌린저스 아트워크> 아프리카 전시회 계획이 있다고 하니 자신도 꼭 불러 달라며 번호를 교환할 수 있었다.
아직 반전예술가협회는 감감무소식이었다.
너무 오래 걸리기 전에 미리 협업 한 번쯤 해놓으면 그들에게도, 나중에 있을 전시회에도 좋았다.
그렇게 해야 외지인 예술가의 훼손이라는 오명도 피한 상태로 작업할 수 있었다.
“제 보조로 일할 예술가들을 몇 명 불러와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