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이 제일 쉬움-177화 (177/241)

177화. 아프니까 생명이다 (3)

디콘이 답은 정해져 있다는 듯 묻자 나딘은 조금 고민했다.

“우리 가죽이 유명하긴 한데 대부분 아르메스 가죽으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이 태반이라…… 수익만 놓고 봐도 하는 게 좋긴 한데 아르메스와의 납품 계약이 걸려요.”

아르메스가 독자적인 예술가들을 구성한 뒤부터 테너리는 기본 가죽 생산과 염색까지만 한 뒤 아르메스로 납품했다.

가끔 테너리 작업자들이 만들어 선보인 공예품에 로열티를 주고 특별 상품을 의뢰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결국은 테너리에서 취급하고 있는 가죽부터 작업자들까지 다 합쳐도 13만 점의 가죽 액자를 만들 여유는 낼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래요? 큰일이네. 테너리의 가죽이 아니면 의미가 없는데요.”

“어떡하죠. 포기하기엔 너무 좋은 기회인데.”

나딘은 혹시나 내가 ‘그럼 어쩔 수 없죠. 다른 가죽 공장을 알아볼 수밖에.’라고 선언하진 않을까 조마조마해하며 진땀을 흘렸다.

그럴 마음도 없었다.

테너리의 가죽과 모로코의 가죽 공예 예술가가 아니면 의미가 없다는 건 진심이기 때문이었다.

“아르메스에 그냥 나 윤예준이오, 하면 어떻게 안 될까요? 아까 큐레이터한테는 그게 먹히던데.”

“네? 럭셔리 잡화 브랜드랑은 쌓아둔 관계가 없어서. 도나텔라 뉴욕 말고는…… 그래도 걸림돌이 있으니 일단 두드려보기는 해야겠죠?”

내가 휴대폰을 들자 나딘과 디콘이 눈을 반짝이며 기대감을 표출했다.

정말 아르메스 사업 담당자가 아까의 큐레이터처럼 굽실거리기라도 할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굽신은커녕 사업 담당자 번호도 얻지 못했다.

페즈는 인터넷이 잘 터지지 않아 검색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하는 수 없이 게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윤 화가님! 굉장히 오랜만이네요.

“그러게요, 게리 씨. 윈스턴에서는 고급 가방이나 지갑 같은 거 안 만들죠?”

대뜸 물었지만 게리는 이상할 것도 없다는 듯 바로 대답했다.

-아뇨. 잡화도 취급을 하긴 하지만 저흰 어디까지나 주얼리 전문이라서 말입니다. 왜 그러시죠? 가방이 필요하신가요?

“서운해하실까 봐 걱정했는데 그럼 다행이네요. 가방이 필요한 건 아니고, 지금 아르메스라는 브랜드랑 가죽 공예 관련해서 협의할 게 있는데, 혹시 그쪽에 아는 담당자분 있나요?”

게리는 다른 누구도 아닌 아르메스의 대표 ‘줄리앙 아르메스’가 자신과 알고 지내는 사이라고 했다.

하지만 내가 직접 전화할 일도 없었다.

아르메스 관계자를 찾는 이유를 묻기에 현재 테너리가 처한 상황에 대해 이야기했더니 직접 전화해본다고 하곤 통화를 끊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계획하던 대로 진행하라는 연락이 왔다.

대신 이번 일이 끝나면 이후 사업을 고려할 때 아르메스에 우선권을 한 번 줘야 한다고 했다.

아르메스도 좋은 브랜드이니 그리 어려운 부탁은 아니었다.

어떻게 설득했느냐고 묻는 말에 게리는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내왔다.

-윈스턴 잡화 고급화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면서 친한 척 좀 했죠. 그러면서 화가님 이름을 슬쩍 언급했더니 마침내는 아예 반기더군요.

파이를 두고 협박했다는 뜻이었다.

역시 예술가에겐 친절하지만 같은 사업가에겐 잔혹한 게리였다.

그의 잔혹함이 잘 먹혔는지, 며칠 뒤 아르메스 대표가 내 번호로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제가 너무 곤란하게 해드린 건 아닐지 모르겠네요.”

-아, 절대 아닙니다! 아르메스 고급 가방은 주로 VIP 회원분들에게 판매되는데, 윤 화가님이 급히 가죽을 가져간다니 그럼 기다려보겠다고 하더군요. 저희 회원분들이 예술에 굉장히 조예가 깊으시기 때문에.

줄리앙은 그들이 나의 작품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기다리고 있다니, 빨리 마무리해야 할 것이었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다.

액자와 그림이 상호작용하는 작품을 하루라도 빨리 선보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디콘과 나딘, 그리고 아르메스에서 모인 예술가들은 ‘액자제작밸리’ 테너리 지부와 아트밸리 지부 공방을 차렸다.

아트밸리에서 액자 색상과 크기를 의뢰하면 테너리가 기존의 작업대로 잘라내 보내주는 것이었다.

솜니움에서는 가죽 액자를 사용함에 따라 필요한 온습도 조절 시스템과 화재 대책을 업그레이드했다.

비용이 생각보다 꽤 들었지만, 홍보도 톡톡해서 벌써 솜니움을 찾는 방문객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모로코 염색 공장의 가죽과 염료, 아르메스 재단의 예술가들, 그리고 YJ재단이 합작해 액자가 그림에 포함되게 되었다는 소식이 뉴스에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나는 아프리카 각지를 돌아다니며 계속 지역 예술가들을 만났다.

그들은 각기 다른 삶을 살고 있었지만, 전업 예술가로 활동하는 경우는 한 명도 없었다.

말하자면 게리처럼 예술가이자 사업가인 이들이었다.

조금 가난한 걸 빼면 말이다.

특히 모로코 남부에서 만난 한 예술가는 자신이 ‘전쟁에 대해서밖에 그릴 수 없는 저주에 걸렸다.’라고 말했다.

어떤 심상을 떠올리든 전쟁 당시의 참혹함밖에는 그려지는 게 없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공예품은 굉장히 정교하고 아름다웠지만, 회화 작품은 끔찍하고 절망스러웠다.

그들과는 함께 짧은 사업을 하며 관계를 쌓았다.

그릇을 굽는 예술가와는 관상용 접시를 만들었고, 바구니 같은 일반 잡화를 직접 짜서 파는 상인과는 라탄 공예를 하는 식이었다.

그렇게 모로코를 떠나 아프리카 여행을 시작한 지 보름도 되지 않아 양적인 조건이 충분해졌다.

***

YJ아트밸리의 액자 제작 소식이 전 세계로 퍼졌다.

윤예준이 추진하는 사업은 항상 성공해왔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가죽 액자 사업 정보를 활발하게 공유했다.

하지만 예준은 투자를 일절 받지 않았다.

그들의 투자가 페즈 예술가들의 독자성을 망칠 수도 있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대신 아르메스의 주가를 샀다.

예준에게 가죽을 양보한 아르메스가 이후 예준과의 협업 우선권을 약속받았다는 소식도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소식은 염색공장 덕에 관광업 호황을 체감한 모로코 왕실 사람들에게도 들려왔다.

현재 모로코는 같은 왕조가 100년째 집권 중이었는데, 그 중 ‘살마 공주’가 가장 큰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병든 아버지 국왕을 대신해 왕조를 이끌기에 가장 카리스마도 넘치고 무엇보다 똑똑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살마는 어린 시절 모로코 남부 내륙에 있는 타프라우트에 살았다.

그녀의 오빠들이 차기 국왕감으로 부적격 판단을 받기 전의 일이었다.

타프라우트엔 선인장 과육을 통해 만든 기름이 대중적으로 사용되었는데, 갑자기 윤예준 화가가 그곳의 연구원과 함께 그 냄새를 향수로 개발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갑자기 왕이나 다를 바 없게 되어버린 시골 소녀 살마는 소식을 듣자마자 선인장 오일 향수를 바로 구입했다.

고향을 떠난 뒤로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내왔던가?

생각지도 못했던 권력을 얻게 된 탓에 그녀의 삶 전체를 공주라는 신분에 쏟아부은 것만 같았다.

당연히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침이 돌지 않았고, 좋은 풍경을 봐도 눈이 부시지 않았다.

정신없이 살아온 지 몇 년이 되었는지 이젠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윤예준의 선인장 오일 향수 냄새를 맡고 있으면 마치 마을 곳곳을 뛰어놀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 순수했던 시절로 정말 돌아간 건 아니었지만, 그 시절의 자신이 지금의 살마가 되었다는 당연한 사실을 실감할 수 있게 되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타프라우트에 다녀갔으면 아마 ‘나폴레옹의 모자’도 봤겠지?”

듣던 하녀는 아마 그렇지 않겠느냐고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로코 중에서도 촌이나 다름없는 타프라우트에는 그나마 ‘나폴레옹의 모자’라고 불리는 유명한 바위가 있어 관광객이 조금은 방문하는 정도였다.

사막 한가운데에 그 특별한 자태를 유지하고 있는 수많은 기암괴석들이 자연의 신비를 느끼게 해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곳에 온통 파스텔톤의 페인트를 끼얹어버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과거 국왕은 유난히도 똑똑했던 살마를 굉장히 아꼈는데, 하필 어린 살마가 좋아했던 게 바로 나폴레옹의 모자와 파스텔이었던 탓이었다.

어린 살마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국왕은 벨기에 예술가를 하나 고용했다.

살마가 파스텔을 좋아했기 때문에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것인지는 몰라도, 당시에는 나름 보기 좋았다.

그러나 페인트가 모래바람에 조금씩 지워지면서부터 가려졌던 문제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너무 흉물스럽게 벗겨져 버린 것이었다.

범인은 어디까지나 지극한 딸바보였던 국왕이지만 살마로서도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윤예준 화가에게 맡기면 그 나폴레옹의 모자를 어떻게 해주지 않을까?”

“글쎄요. 그래도 워낙에 바쁜 사람이라서. 예술과는 관련 없어 보이는 그 일을 해줄지 모르겠습니다.”

그건 그랬다.

이번에 가죽 공장 일로 모로코와 윤예준이 크게 엮이기는 했지만 그건 살마와의 개인적인 연이 아니었다.

“무슨 방법 없을까…. 윤예준 화가는 지난번 사우디 결혼식장에서 잠깐 본 게 다인데.”

말 그대로 잠깐 봤을 뿐이었다.

결혼식 증언 준비로 한참 정신없을 텐데 다른 왕가의 인사를 받느라 꽤나 곤욕을 치르는 모양새였다.

살마는 결혼식이 끝난 뒤에나 가서 말을 붙여볼 참이었는데, 하필 그때 정체불명의 테러가 발생한 것이었다.

“하여튼 간에 사우디 애들은 우리 사업에 도움이 안 된다니까.”

모로코는 같은 이슬람 문화권에 속했지만, 사우디보다는 훨씬 진취적인 스탠스를 취했다.

거의 표현의 제한이 없다고 할 정도로 말이다.

그 때문에 사우디의 카프탄 왕자들은 모로코의 일명 ‘나폴레옹 모자 파스텔 페인트 세례 사건’을 언급하며 살마를 놀리기에 바빴다.

벌어진 지 40년이나 지났고 당시 살마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상태였는데 말이다.

그나마 결혼하는 당사자가 무함마드 같은 호인이었기에 그나마 기쁘게 참여한 거지, 다른 사람 결혼식이었으면 그냥 얼굴만 비추고 돌아왔을 것이었다.

아무튼 당시에는 ‘나폴레옹의 모자로 그렇게 놀리더니 꼴좋다.’라고 놀리며 되돌려주기 바빴다.

‘하…… 나도 어른 되려면 아직 멀었어. 이럴 줄 알았으면 그럴 시간에 윤예준이랑 통성명이라도 짧게 하는 건데.’

아쉬운 일이었지만 이미 기회는 놓쳤다.

솔직히 그 난리통에 비적비적 말을 걸고 늘어졌어도 귀찮아하기만 했을 것이었다.

“요즘 아르메스가 윤예준 화가한테 천연 가죽을 양보한 걸로 화제더라고요. 그래서 영업 이익이 꽤나 떨어질 거라고. 결과적으로는 투자자가 많이 모이기는 했지만요.”

듣던 시녀가 그들의 영업 이익을 모로코 왕국이 메워주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좋은데? 대놓고 눈에 띄는 것보다는 그런 식으로 뒤를 봐주는 게 오히려 잘 먹힐지도 몰라. 한 번 아르메스에 연락해봐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야만 그런 걸로 생색도 낼 수 있는 거였으니까.

살마는 고민해보다 물었다.

“윤예준 화가 아직 아프리카에 있어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아프리카 전역에 여행 일정을 잡고 아예 마라케시 국제공항을 오가는 왕복 티켓을 끊은 걸로 아는데, 아직 모로코로 입국하지는 않았잖습니까?”

급한 일이 생겨 어디 남아공 같은 데서 편도 티켓을 다급히 끊은 게 아니라면 아직 아프리카 어딘가에 있을 거라는 뜻이었다.

“이동은 어떻게 하고 있대?”

“옛날에 오르쉐라는 브랜드에서 제공받은 튼튼한 자동차가 있어서, 그걸로 이동하고 있는 걸로 압니다.”

맞다.

오르쉐에서 윤예준에게 스포츠카를 제공했다는 소식을 어디서 들어본 것도 같았다.

하지만 스포츠카는 대개 차체가 낮지 않은가?

대도시를 제외하면 포장도로 찾기 어려운 아프리카라면 결국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무함마드한테 전화해서 윤예준 연락처 좀 받아볼 테니까 아주머니는 아버지 전용기에 주유 좀 지시해줘요. 내 거 헬기랑.”

“네? 폐하께서만 이용할 수 있는 전용기는 왜……”

“그걸로 모셔야 좋은 연이 쌓일 테니까!”

왕족 체면 같은 건 신경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살마가 이 정도 입지를 굳힐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살마는 시녀가 방을 나가자마자 무함마드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바쁜 일이 있는지 무함마드는 신호가 거의 끊기기 직전에 전화를 받았다.

-큼 흠. 어, 나 살만도르 왕인데. 무함마드 장관은 화장실 갔다. 그런데 소국의 공주가 대국의 왕자에게 직통으로 전화하게 돼 있나?

“누님, 하고 알아 모시지는 못할망정…… 하나도 안 비슷하니까 그만하고 윤예준 번호 좀 보내봐. 큰일 났으니까.”

윤예준의 이름을 이야기하자마자 무함마드는 기겁을 하며 거절했다.

-안 돼! 예준이랑 뭐 예술 같은 거 하려는 거지? 괜히 우리 따라 하지 말고 가죽 공장으로 만족하세요.

“카산드라 씨한테 옛날 연애담 좀 풀어볼까?”

무함마드는 얼마간 말을 잃었다.

그리고 곧 휴대폰으로 윤예준의 연락처가 수신되어 왔다.

“좋아. 바로 연락해봐야겠어. 한 나라의 공주가 직접 전화를 하면 엄청 놀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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