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이 제일 쉬움-175화 (175/241)

175화. 아프니까 생명이다

바로 아프리카로 떠날 준비를 해야겠다고 하자 압둘라는 메고 있는 크로스백을 열어 뒤적거리더니 조금 낡은 명함을 하나 건넸다.

“누구 명함인가요?”

“반전예술가협회 협회장 명함입니다. 그분들 출장이 잦아서 본부에 있는 일이 별로 없어요. 일단 YJ아트밸리 이름으로 합종 프로젝트 제안하시면 그쪽에서도 예술가들 모으고 준비하는 데에 시간이 꽤 걸릴 거예요. 다시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가시는 게 좋을 겁니다.”

아프리카는 전생에도 현생에도 가본 적이 없었다.

내겐 그야말로 미지의 대륙이라는 것이었다.

압둘라 말대로 반전예술가협회에서 전시회 준비를 마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아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냥 넋 놓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순 없었다.

또 언제 어디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내가 직접 예술가들을 찾아 나선다면 전시회를 훨씬 더 앞당길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럼 미리 가서 여행을 좀 하고 있어야겠는데요.”

그렇게 말하자 압둘라는 관광객이 많은 곳을 제외하면 돌아다니기 어려운 지역이 대부분이라고 말렸다.

“중요한 사안이니까 빨리 진행해야죠. 전쟁이 많이 일어나는 대륙이라면서요?”

내가 한사코 생각을 굽히지 않으니 압둘라는 급기야 명함 한 장을 더 건넸다.

“나딘이라는 친구인데, 제 친구 늦둥이 동생입니다. 여태 쭉 모로코에서 살았으니 화가님께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곳에 가면 이곳저곳 돌아다닐 일이 많으실 겁니다.”

나는 압둘라가 주는 명함을 받아들었다.

‘나딘’이라는 이름 위로 ‘천연염색가죽공장 테너리’라는 사명이 눈에 띄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거기서 험한 일을 당하시면 화가님 신변은 물론이고 전시회도 없던 일이 돼버리니까요. 급히 가려다가 완전히 고꾸라지는 겁니다.”

“괜한 걱정하지 마세요. 전 총을 든 마피아를 일부러 유인까지 해봤는걸요.”

***

모로코 상공엔 구름 한 점 없었다.

지독한 흙빛 사이로 드물게 녹색 산림이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는데, 공항이 가까워질수록 저층 건물들이 조금씩 모여들었다.

그렇게 작지만 신축인 마라케시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공항 출구 쪽엔 방문객들을 반기는 택시기사들이 끝없이 줄지어 서 있었다.

하지만 나는 다시 모로코 페즈행 국내선에 올랐다.

상공에서 내려다본 마라케시 일대가 조금 작은 아랍 소도시 느낌이었다면, 페즈는 조금 더 사막 지형에 가까웠다.

잔디가 도시 곳곳에 자라 있었지만 어떤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랄 듯 질겨 보였다.

그래도 편견 속의 사막 모습과는 판이했는데, 지나오는 동안 형형색색의 안료로 덮여있는 동화적인 골목들도 몇몇 눈에 띄었다.

반전예술가협회에는 합동 프로젝트를 희망한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전화를 받은 화가는 굉장히 반가워하는 한편으로 당장은 어렵다고 했다.

일을 바로 진행하지만, 준비를 해놓는 데에 시간이 조금 걸릴 거라고.

아마도 그럴 것이라는 이야기를 압둘라에게 들어둔 상태였다.

당장 어렵더라도 괜찮지만, 최대한 빨리 준비해달라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차에 탑승해 얼마간 달린 끝에 테너리 공장에 도착했다.

명함에 적힌 번호로 전화해 나딘을 불렀고, 곧 어린 남자 하나가 내게 접근해왔다.

“공장장 나딘입니다. 압둘라 선생님이 보내서 오신 분 맞죠?”

나딘이 악수를 건네며 자신과 공장에 대해 소개했다.

수도사 같은 복장이 인상 깊은 사내였다.

“네, 맞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내가 대답하자 나딘은 잠시 놀라더니 이내 미소를 보였다.

“여행하는 동안 윤예준 씨를 완벽한 모로코인으로 만들어달라고 하시던데. 이렇게 프랑스어가 원어민보다도 완벽하실 줄이야. 언어 가이드를 생각하고 왔는데…… 제가 뭘 도와드려야 할까요?”

압둘라에게는 그냥 간략한 설명만 들은 모양이었다.

“아프리카에 숨어 있는 예술가들을 만날 생각이에요. 최대한 방방곡곡 돌아다니고 싶다고 말하니 아마 나딘 씨가 도움을 줄 거라고 하던데요?”

“예술가요? 예술가들이라면 그림 그리는 사람들 이야기하시는 거죠? 제가 예술은 잘 몰라서.”

“꼭 그림 아니더라도. 음, 뭘 만든다거나 깎는다거나 하는 것들도 상관없어요.”

알아보니 아프리카엔 원시 조형 예술이 발달해서 꽤 손재주가 좋은 장인들이 많았다.

어쩌면 서방에는 알려지지 않은 장르가 있을지도 몰랐다.

“음…… 압둘라 선생님도 제가 도움을 줄 만하니까 소개시켜 준 거겠죠? 저희 공장에 예술가 소리 좀 듣는 양반들이 있긴 한데, 일단 따라오세요.”

나의 이야기를 들은 나딘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나를 공장 안으로 안내했다.

“이거 무슨 냄새죠?”

“냄새가 많이 고약하죠? 가죽 다듬는 과정에서 나는 냄새인데, 여기. 이거 들고 계세요.”

코를 찌르는 듯한 쩐내가 공장 내부에 가득했다.

인부들은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나와 나딘의 것은 없었다.

대신 나딘이 허브를 몇 개 뜯어서 건넸는데, 인부들은 그걸 마스크 속에 넣고 악취를 견딘다고 했다.

“저희 공장은 전 세계에 고급 가죽을 판매하는 최고의 가죽명가예요. 둘러보기도 좋아서 페스의 대표적인 관광명소로 손꼽히죠. 모로코 국내에서는 다들 저희 가죽을 쓰지만, 아마 다른 나라에서는 비싼 돈을 주고 명품 가방을 구입해야 겨우 만져볼 수 있는 정도겠죠.”

나딘의 말이 맞았다.

오는 동안 기사에게 들었는데 이곳 테너리 가죽공장은 모로코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라고 했다.

공장의 모습도 굉장히 흔치 않았고, 무엇보다 가죽의 질이 굉장히 좋았다.

물론 테너리의 가죽이 훌륭한 덕도 있겠지만 선진국 브랜드는 원재료값에 제작공정, 디자인, 유통, 세금에 수수료까지 거품이 잔뜩 끼었을 것이었다.

그 때문에 해외에서는 비싸지만, 이곳에서만큼은 싸게 구할 수 있는 것이었다.

“가죽 가공이 좀 철저하기는 한 것 같은데, 특별하다고는 하기 어려워 보이는데요?”

예술가를 소개해준다던 나딘이었다.

하지만 나딘은 비싼 패키지 관광객을 대하듯 친절하게 안내하며 공장 설명만 했다.

“일단 이 공정을 알고 있어야 이해하기 더 좋을 것 같아서요. 그리 길지 않으니까 조금만 시간 내주세요. 그래도 여기는 마음에 들어 하실 것 같은데요.”

대화하던 도중 공장 옥상으로 나왔는데, 거기 난 길을 따라 걷다가 탁 트인 공간에 도착했다.

그곳엔 굉장히 이색적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색깔별로 나눠 담긴 물감들이 굉장히 넓게 깔려 있었는데, 나와 나딘이 선 곳에서는 그 모습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인부들은 건조된 가죽을 들고 다니며 물감에 그것들을 조심스럽게 찍어내고 있었다.

멀리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으니 마치 팔레트 위를 오가는 요정들 같았다.

“굉장히 알록달록하네요.”

“네. 여기서부터는 이제 가공이 끝난 가죽에 염료를 입히는 라인이에요. 저 염색약도 저희의 장점 중 하나죠. 가죽뿐만 아니라 옷부터 그릇까지 안 쓰이는 곳이 없어요.”

그러고 보면 오는 길에 형형색색의 골목들을 본 적이 있었다.

아무래도 벽화 그리기에도 사용되는 듯했다.

“그런데 일반 안료 냄새가 아니네요?”

“일반 안료 냄새라면…… 화학약품 냄새 말씀하시는 거예요?”

나딘은 이곳의 안료가 모로코 각지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자연 재료를 통해 만들어낸 천연 안료라고 했다.

갈색은 나무껍질액, 빨간색은 양귀비꽃, 파란색은 인디고, 노란색은 샤프란 등등.

그야말로 아프리카의 색과 향이라는 것이었다.

“천연 재료로는 색깔을 내기 힘들다던데. 테너리 기술이 굉장히 좋네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방식으로 하고 있을 뿐인데요 뭐. 색깔별로 비둘기 똥이나 소 오줌 같은 걸 섞으면 착색이 잘 된다는 식의 노하우가 오랜 시간 쌓인 거죠. 물론 연구도 하고 있고요.”

외젠 들라크루아의 작품 세계가 주로 모로코 시절에 영감을 받은 거였다던데.

실제로 방문해보니 어디서 그런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조금 더 일찍 방문해봤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저 안료 조금 써볼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내려가는 길 안내해드릴게요.”

나는 나딘의 안내를 받으며 염료 공장으로 내려와 붓을 들었다.

캔버스는 없었지만, 제작 중인 가죽은 많았다.

하나 정도는 방문 선물로 주겠다고 했으니 사양하지 않기로 했다.

인부들과 함께 염료 위를 돌아다니며 가죽에 그림을 그렸다.

가까운 데서 맡으니 색깔별로 향기가 완전히 달랐다.

나딘과 인부들의 옷차림, 마라케시와 페즈의 도시 분위기, 그리고 가죽과 염료 냄새 등 모로코가 주는 아이디어에 집중하며 <색채의 허브>를 완성시켰다.

염색되지 않은 연갈색 가죽을 땅 삼아 그 위에 모로코인들의 마을을 그렸다.

색깔과 냄새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치 빛을 내는 듯한 표현을 해내는 게 중요했다.

작품으로부터 비쳐나오는 빛이 이 일대에 완전히 섞여들어 있는 듯 보이도록 말이다.

세계인들에게 이보다 더 많은 색깔과 냄새를 제공하고 싶은 마음도 담았다.

모로코의 예술가들이 그리리라고 생각되는 풍경을 떠올리는 데에 힘을 쏟았다.

“와! 오시는 길에 메디나 시장을 보셨군요! 그림 실력이 엄청난데요? 가죽에 이렇게 정교한 그림을 그리는 건 처음 봐요.”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와 가죽을 보던 나딘이 감탄했다.

반응을 보아 가죽에 이렇게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들은 없는 모양이었다.

예술에 대해 잘 모른다고 했으니 아예 없으리란 보장은 없었지만 말이다.

나딘의 호들갑에 인부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고, 내 가죽을 조심히 옮겨 들어 건조장으로 옮겼다.

“이럴 수가…… 이렇게나 잘 그리다니.”

“다른 장소도 조금 소개해주시면 더 그려볼 수 있는데요.”

나딘은 잊을 뻔했다는 듯이 손뼉을 치며 우왕좌왕했다.

“그렇죠. 계속 안내를 해드려야겠네요. 그럼 일단 가죽이랑 염료 좀 떠와야겠어요.”

그렇게 소풍 전 짐을 싸는 사람처럼 헐레벌떡 가죽 몇 장과 빈 통을 챙겨 염료를 아낌없이 퍼담기 시작했다.

다음은 공장의 마지막 라인으로, 염색이 끝난 가죽을 납품하기 전에 기본 손질하는 곳이었다.

“여기 계신 작업자들을 사람들은 가죽공예 예술가라고 불러요. 대부분은 저렇게 기본적인 손질만 하고 있지만, 특별 주문이 들어오면 재능을 발휘하거든요.”

그들은 도안 하나를 가져다 놓고 가죽을 칼로 죽죽 자르거나 재봉틀로 접어 박았다.

눈대중으로만 봐도 치수를 정확히 아는 모양이었다.

나도 눈썰미가 있었기 때문에 일일이 치수를 재지 않아도 됐지만, 그 경지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한지는 잘 알았다.

나도 전생엔 쉼 없이 그림만 그려내지 않았던가?

나는 그들이 작업하고 있는 모습을 가까이서 관찰했다.

자르고, 손질하고, 덧댄 후 꿰매는 작업이 군더더기 없이 척척 진행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엔 조각칼로 꽤 정교한 무늬의 마크를 새기고 있었다.

하나의 조각칼로, 그것도 굉장히 빠른 속도로 새겼지만 마치 프린트를 한 듯 정확했다.

“와. 이것까지 기초 손질이라는 거예요? 무늬가 엄청 복잡한데.”

내가 감탄하자 작업자가 별거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백날 천날 이 문양만 새기는데 뭐. 이 정도는 해야지.”

“그럼 주문 제작이라는 게 들어오면 훨씬 더 다양하게 만든다는 거죠? 조금 보고 싶은데.”

아쉽지만 제작이 완료되자마자 바로 납품해야 하기 때문에 남은 게 없다고 했다.

주문 제작이 그리 자주 있는 일도 아니고 말이다.

“에이. 그래도 이 아저씨들보다는 윤예준 화가님이 더 대단하시죠. 가죽에 그렇게 뚝딱뚝딱 그림을 그려 넣었는데.”

“거 놈 말하는 것 좀 보게.”

나딘의 말에 작업자들이 콧방귀를 뀌면서도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나딘은 확실히 회화 예술을 편애하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좋아해 주시니까 기분이 엄청 좋은데요? 예술은 잘 모르신다더니. 그래도 그림에는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

“그럼요. 아는 외국 화가는 거의 없지만 그림은 좋아하죠. 보기 좋잖아요?”

예술가를 찾기 위해 아프리카를 방문했다는 말에 나딘은 그림 그리는 사람을 찾느냐고 물었었다.

그림이 가장 일반적인 미술이라서 그랬겠거니 했는데, 이런 개인적인 취향이 있어서일 줄은 몰랐다.

“겉보기에는 그냥 착색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항상 가죽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이 일을 해왔거든요. 그런데 화가님은 정말로 가죽에 그림을 그렸잖아요.”

이곳 인부들이 가죽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말에는 나도 동의했다.

직접 가죽 캔버스와 안료를 제작해 단색의 작품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는 외국 화가가 별로 없다고 했는데, 그럼 누구누구 아시는데요?”

“글쎄요. 그냥 다들 아는 에두아르 마네 정도?”

나딘은 자연스럽게 나의 이름을 꼽았다.

“아, 한 명 더 있다. 마네보다 더 나중 사람이기는 한데.”

“네? 누군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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