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이 제일 쉬움-174화 (174/241)

174화. 챌린저스 아트워크 (4)

오래 이슈가 된 끝에 윤예준의 <챌린저스 아트워크> 전시회는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성대하게 개관되었다.

전시회엔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고, 아프리카 출신 유전공학자 ‘압둘라 조엘’도 그중 하나였다.

그는 ‘EEG바이오센서’라는 뇌파 측정기를 만들어 신체장애인들도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만든 혁신적인 개발자였다.

뇌파를 통해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특히 그 덕분에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된 수많은 미술가들이 작품을 판 돈으로 그에게 연구비를 지원할 정도였다.

하지만 압둘라는 그 돈을 모두 마다해왔다고 했다.

자신은 당신들에게 손을 선물했을 뿐이며, 손이 있다고 해서 모두가 이런 놀라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너무 과한 감사는 받지 않겠다는 그의 인터뷰가 굉장히 유명세를 탄 적이 있었다.

그 이후 압둘라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장애인 예술가들이 사진을 찍어 올린 후 ‘300달러짜리 파티’라고 우스갯소리를 한 것도 소소한 화제였다.

‘로빈슨 섬에서는 예술을 통한 정신 치료에 일조하더니……’

예준은 이번에 환자에 대한 인식 개선에도 발 벗고 나섰다.

HHC에 걸린 수많은 예술가들이 SNS 계정에 자신의 투병 사실을 알렸다.

유명하지만 정체는 밝히지 않은 예술가들도 몇 명 있었다.

그 덕분에 HHC 환자들의 전시회에 큰 관심이 모인 것이었다.

‘HHC의 가장 무서운 증세가 바로 사람들의 시선인데.’

이번 일을 통해 윤예준은 그걸 해결해준 것이었다.

HHC 예술가들뿐 아니라 HHC 자체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높아졌다.

그게 원인 바이러스가 존재하는 질환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것이었다.

사람들의 호의적인 관심이 시작되자 ‘세계도시예술가연대’에서는 전시회가 진행되는 동안 여러 포스터를 만들어 웹상에 확산시켰다.

‘쫄지마, 안 물어’라든가, ‘나는 내게 전염됐다’라는 식의 조금 자극적인 문구를 중심으로 HHC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전달하기 위해 애쓴 것이었다.

압둘라는 그동안 수많은 HHC 환자들과 만나왔다.

난치병에 걸린 사람들을 만나 맞춤형 치료를 진행하면서 말이다.

그런 압둘라가 이런 전시회에 안 와볼 수는 없었다.

작품 설명엔 그림에 대한 시각적인 정보보다는 화가가 적은 자신의 사연이 더 길게 적혀 있었다.

화가가 어떤 마음으로 그 그림을 그렸는지, 자신이 돌이키고 싶은 시절이 언제인지와 같은 작의 말이다.

어떤 화가는 HHC 합병증으로 당뇨에 걸렸고, 또 그 당뇨의 합병증으로 손발 괴사가 진행돼 손가락과 발가락이 모두 없다고 했다.

다른 화가는 HHC로 백내장이 발병해서 한 번 치료했지만, 치료 후에도 다시 생겨 결국 앞을 볼 수 없게 되었다고 했다.

사연을 보면 다들 하나같이 지옥 같은 일상을 보내고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의 그림은 모두 색채가 밝고 쾌활했다.

세계도시예술가연대는 HHC 환자의 친목회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어서 생각보다는 즐거운 일상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감을 계속 안고서 말이다.

그렇게 그림들을 둘러보던 압둘라는 <노스텔지아> 연작 전시실에 들어섰다.

전시실 초입부터 진하게 풍겨오는 물 냄새에 압둘라는 우뚝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압둘라는 재빨리 냄새의 정체를 확인했다.

용도를 알 수 없는 분수대가 한 그림 앞에 작게 조성돼 있었다.

비가 내리는 풍경을 그린 낭만적인 그림이었다.

보기 좋은 연인의 뒷모습이었다.

압둘라는 그로부터 신혼 시절의 풋풋함이 아니라 유년기에 모로코에서 겪었던 홍수를 떠올렸다.

서늘했던 12월의 어느 날이었다.

마을 변두리 모퉁이에 있던 압둘라의 집 한쪽 벽면이 돌연 뜯겨나갔다.

집중호우로 인해 급속히 불어나 버린 급류 때문이었다.

두 명 있던 동생은 눈 깜빡할 새 눈앞에서 사라져버렸고, 어머니는 동생들을 구하려고 급류에 뛰어든 뒤 여태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혹시나 수면 아래 걸려 있을지도 모르는 가족의 시체를 되찾기 위해 작대기질을 하다가 떠밀려온 오토바이에 머리를 맞고 즉사했다.

운 좋게 수해민 탁아소에서 젊은 미국인 부부의 눈에 띄어 이곳에 올 수 있게 되었다.

그때 압둘라의 나이가 고작 일곱 살이었다.

이후 그는 홍수 피해라고는 있을 수 없는 부자 도시에서 자라게 되었다.

그럼에도 비 내리는 밤만 되면 흙탕물에 핏물을 섞어가며 다급히 떠내려가는 아버지의 몸이 떠올라 밤잠을 이룰 수 없었다.

고작 몇십 년 사이에 잊어버리기엔 너무 끔찍한 기억이기 때문이었다.

분수대에서 나는 물비린내는 정확히 그 홍수가 있던 밤의 냄새와 동일했다.

비 비린내를 구현하기 위해 흙을 분수대 하단에 깔아놓았기 때문이었다.

방수 처리된 <노스텔지아>라는 그림과 연결된 조형물인 듯했다.

그 비 내리는 풍경의 냄새를 맡아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냄새로부터 각자 자신만의 과거를 한번 떠올려보라는 것이었다.

그 의도는 성공적이었다.

압둘라의 트라우마라고 할 수 있는 그 사건을 날카롭게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더 이상 괴롭지 않았다.

오히려 옛날 가족과의 화목했던 7년이 떠올라 행복해질 뿐이었다.

압둘라는 안내선에서 벗어나 냄새를 곱씹어 맡으며 작품 설명을 잃었다.

-과거와 미래, 심지어 현재까지도 완전히 포기해야만. 그리하여 납작한 인간이 되어야만 비로소 그리움에 이를 수 있습니다.

압둘라는 그 평면적인 작품 냄새와 실속 없는 작품 설명이 자신의 뇌에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그 냄새는 압둘라의 트라우마에 직접 개입해 관련된 기억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었다.

그 트라우마라는 관문을 열어젖혀야만 가족들을 추억하고 회상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부정하고 싶지만, 그 홍수 피해가 가족과 겪었던 일들 중 가장 강렬한 기억이자 최근 기억인 것이었다.

압둘라는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향수에 대한 <노스텔지아>의 다른 표현들을 계속 감상했다.

어느새 압둘라는 자신에게 상처 준 바로 그 트라우마를 통해 가족을 떠나보낼 수 있게 되었다는 데에 큰 감격을 느꼈다.

‘이런 식이구나. 예술가들은 이런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거야.’

일괄적으로 작용하는 약으로는 모든 이의 병을 치료할 수 없었다.

예술가들은 자신들이 직접 만들어낸 작품으로 각자의 상처와 트라우마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나도 이들을 치료하고 싶다.’

하지만 압둘라는 예술가가 아니었다.

다년간의 연구를 쏟아도 고작 한두 사람의 병만 치료해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이 예술가들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지 고민하며 작품 설명란에 적힌 ‘김솔로몬’이라는 이름만 빤히 쳐다보았다.

***

“시력도 잃고 HHC 환자 낙인까지 찍히면 어쩌나 고민했는데……”

전시회 마지막 날, 그림들을 정리하며 솔로몬이 중얼거렸다.

“제가 성공한다고 했죠?”

“네. 기분으로는 완치된 것 같아요. 너무 좋아요.”

솔로몬은 좋다고 말했지만, 굉장히 서럽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솔로몬의 그림에 감동을 받은 많은 팬들이 지지와 환호를 점자와 음성 파일로 보내주었다.

그게 다시 솔로몬을 감동시킨 것이었다.

인식 개선도 굉장히 중요한 일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병이 아예 없어진 건 아니지 않은가.

지금 그녀의 마음이 어떨지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어떤 기쁨도 지금의 솔로몬에게는 슬픔의 다른 형태일 뿐이었다.

“솔직히 시야가 완전히 닫히면 그냥 바로 죽어버리려고 했어요. 너무 갑갑해 미쳐버릴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장애를 딛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을 줄은……”

“솔로몬 씨도 충분히 할 수 있어요.”

나의 격려에 솔로몬은 조금 홀가분하다는 듯 텅 빈 전시장을 한 번 돌아보았다.

그때 한 남성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전시장 건물 관계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전시회를 기획하는 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아, 저는 그냥 관람객입니다. 윤예준 화가님, 솔로몬 화가님이시죠? 전시회 정말 인상 깊었습니다.”

남자는 자켓 주머니에서 명함을 세 장 꺼내 나와 솔로몬, 그리고 어머니에게 건넸다.

‘미국유전공학연구소 뉴턴스카이’라고 적혀 있는 명함이었다.

이름은 압둘라 조엘이었다.

“일부러 전시회가 끝나고 정리가 다 될 때까지 기다렸는데, 혹시 짧게 대화 나눌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압둘라는 이번 전시회에 굉장히 감동적인 그림들이 많았다고 했다.

자신도 눈물을 흘렸다며 아직 눈가에 묻어 있는 소금기를 보여주겠다고 호들갑을 떨었는데, 솔직히 맨들맨들한 피부만 보일 뿐이었다.

그래도 그가 굉장히 큰 감동을 받았다는 건 사실인 듯했다.

그런 건 눈가의 소금기가 아니라 눈빛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이 예술 활동을 통해 아픈 사람들이 서로를 위로해주고, 또 HHC에 큰 관심 없이 오해만 쌓는 사람들에게 충분히 호소도 할 수 있다는 게 굉장히 인상 깊었습니다.”

“정말 감사하네요.”

“혹시 이 프로젝트를 계속하실 생각이라면 얘기지만…… 한 가지 추천하고 싶은 활동이 있는데요.”

압둘라는 아프리카라는 대륙이 수많은 내전과 국가 간 전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고 했다.

아프리카 어디선가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어지간히 큰 전쟁이 아닌 이상 세간에 알려지지도 않을 정도로 자주 말이다.

전생의 아프리카에 대한 기억을 반추해보면 ‘윤예준’의 아프리카와는 다른 점이 많았다.

적어도 이렇게까지 어지러운 나라라는 인식은 없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국가가 그곳을 식민지화시키지 못해 안달이었을 정도로 말이다.

물론 온전히 경제적인 이유는 아니었겠지만.

이제는 완전히, 그야말로 다 뽑아먹어 텅 비어버린 상황인 듯했다.

그 시기 부유층으로서 유럽에서 예술을 했던 나로서는 조금 책임감이 느껴지는 지역이기도 했다.

“그곳 무장 단체들은 이상하게 대량 살상 무기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생화학, 뭐 그런 거요. 그래서 군인 민간인 할 거 없이 전쟁 피해자가 굉장히 많습니다.”

“정말 끔찍하네요.”

“그런 그들을 대상으로 미술치료를 하는 예술가 단체가 모로코에 있는데, 혹시 그곳에서도 이 프로젝트를 해주실 순 없을까요?”

그들은 미술 도구를 들고 아프리카 대륙 전역을 돌아다니며 전쟁 피해자들과 함께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굉장히 뜻깊은 일이었다.

이번 <챌린저스 아트워크>에서처럼 장애를 딛고 완전히 예술가가 된 피해자들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저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책임감을 덜기 위해 주먹구구식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성과가 없다고 했다.

아트밸리의 파급력이라면 전쟁 피해자를 돕는 예술가들에게 큰 힘을 실어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아프리카라……’

나는 예술의 힘을 믿었다.

내가 해왔던 예술을 선물한다면 더 이상 전쟁 피해자를 고통받지 않게 해줄 수도 있었다.

예술은 그걸 가능하게 했다.

더군다나 아직 가보지 않은 아프리카에서의 활동이고, 또 그곳의 예술가들을 만나볼 기회였다.

“아…… 그리고. 솔로몬 화가님.”

“네? 저 부르신 거예요? 영어 못하는데.”

나의 대답을 기다리던 압둘라가 솔로몬을 돌아보며 말했다.

“약 잘 먹으면서 조금만 기다려보세요. 눈 마사지도 꾸준히 하시고요.”

“네? 뭘요?”

내가 통역해주자 솔로몬은 갑자기 자신의 이야기가 나왔다는 데에 놀랐다.

“망막색소변성증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을 개발하고 있어요. 물론 HHC의 합병증이라서 치료는 당장 힘들겠지만, 경과를 억제하는 건 곧 가능해질 것 같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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