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챌린저스 아트워크
소식을 접한 협회장은 윤예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매분 매초 기자들에게 전화를 받고 있는지 전화 한 번 하기가 굉장히 힘들었다.
통화 연결음을 듣는 동안 좀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수십 분이 지난 후에야 겨우 통화를 할 수 있었다.
“윤 화가님! 기사 봤습니다. 가드너와 합치신다고. 그런데 그림은 로드아일랜드에 계속 전시하실 겁니까?”
-네, 그렇죠.
예준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저희 연명서 못 받으셨나요? 대부분이 프랑스 작품들인데, 미국보다는 프랑스에 전시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몽마르뜨를 되살려준 건 고마웠지만, 그렇다고 프랑스에서의 일이 다 끝났다고 볼 수는 없지 않은가.
만약 가능하다면 몇 가지 일을 더 도와줄 수도 있는 법이었다.
유럽의 명작을 다시 프랑스로 가져오는 것만 해도 그 일환이라고 할 수 있는데, 굳이 그걸 하지 않는 이유를 납득하기 어려웠다.
미국과 어떤 연이 있지도 않은 이상 말이다.
-프랑스에 있는 어떤 미술관보다도 저희 솜니움 미술관의 파급력이 더 커요. 회장님도 그 그림들을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봐주기를 원치 않으세요? 유럽 화가 작품이라고 꼭 유럽에서 전시해야만 한다는 법도 없고요.
“그렇긴 합니다만…… 아! 루아르 성 아시죠? 일전에 윤 화가님이 몽마르뜨를 부활시키셨듯이 루아르 성을 다시 되살리는 데에 목적이 있기도 합니다. 지금 그곳은 완전히 버려진 성이거든요.”
쉴리쉬르 루아르 성은 프랑스가 100년 전쟁을 무사히 치를 수 있도록 해주었던 핵심 요새였다.
성 간격이 오밀조밀해 공성전에 특히 안성맞춤인 곳이었는데, 프랑스인들에게는 굉장히 상징적인 사적지처럼 여겨지는 곳이었다.
-굉장히 좋은 곳에서 하시네요.
“그렇죠?”
-네. 하지만 관광객들이 성을 훼손하면 어떻게 하겠어요? 아마 많은 사람이 들어갈 만큼 충분히 크지도 않을 테고, 미술품만으로 채워놓기에는 굉장히 의미가 큰 곳이라서.
예준은 잘 걸렸다는 듯 본격적으로 따지기 시작했다.
예준은 쉴리쉬르 루아르 성 근처가 그리 버려진 곳만은 아니라는 점부터 시작해서 땅값 이익도 없어 인근 주민들로부터 골칫거리가 되기도 했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다.
혹시 주민단체로부터 푸시를 받은 것 아니냐는 비판이었다.
비판이 타당했다는 걸 떠나서 윤예준은 루아르 성 전시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분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윤예준이 아니라 로드아일랜드주에 직접 전화를 해봐야 할 것이었다.
***
그 후로 IAA는 조금 조용해지는가 싶더니 본격적으로 여론전에 돌입했다.
로드아일랜드로 들어와 가드너의 13작품에 대해 논의하려고 들었다.
그 작품을 솜니움이 이관하는 데에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고 있던 주의회는 굉장히 당황스러워하는 듯했다.
주의회 직원 중 하나가 내게 전화해 사정을 설명했다.
-IAA에서 굉장히 화가 난 모양이더군요. 거기서 빼앗아온 작품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죠.”
-거의 도둑놈 대하듯이 하고 있습니다. 작품을 돌려받아야겠다는 논리도 제법 탄탄해서 이대로 가다간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주와는 관련이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혹시나 로드아일랜드주에서 작품을 IAA에 양보하라는 요구를 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꼭 돌려줘야만 할 의무는 없었지만, 유럽 작가의 작품을 유럽 미술협회에서 가져가겠다는 모양새가 세간에 편집적으로 알려질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알겠습니다. 지금 찾아가 볼게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차를 타고 도착한 주의회 건물은 생각보다 조용해 보였다.
전쟁은 그 안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글쎄, 그림에 대한 건 저희가 참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소송을 거실 일이죠.”
“소송이라니요. 무슨 소송 말입니까? 이 일에 대해 저희 권리를 보장해줄 심급이 없잖습니까?”
IAA 관계와 입씨름을 하고 있던 찰리는 나를 보더니 또 구원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안도했다.
“오셨군요! 자, 솜니움 관장님께서 오셨습니다.”
“잘됐네요.”
직원은 명함을 내밀며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그래서, 제가 들은 게 없어서 그러는데, 주장하시는 게 뭔가요?”
이번에 그들은 루아르 성 전시회 핑계를 대지 않았다.
그게 먹히지 않는다는 걸 이미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대신 나의 도덕성에 호소하려고 들었다.
“작품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게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는 하나 사람들에게 의견은 물어볼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유럽 작품을 유럽에서 보고 싶은지, 아니면 미국에서 보고 싶은지.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솜니움 미술관에는 어울리지 않는 작품들 아닙니까.”
“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세요?”
“솜니움 미술관은 고전 작품보다는 신인 화가 발굴에 더 많이 기울이고 있잖아요? 하지만 저희 협회 소속 미술관은 그렇지 않습니다. 고전 명작을 전시하기에 솜니움은 적합하지 않아요.”
신인을 발굴하는 게 나의 주 사업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전 작품을 아예 전시하지 않을 생각은 아니었다.
이미 다수 전시하고 있기도 하고 말이다.
“잘 기억하지 못하고 계신 것 같은데, 솜니움 미술관은 개관식 때 거장들의 작품과 고전 작품을 함께 전시하면서 유명세를 얻은 곳입니다. 솜니움 미술관에 고전 작품이 있다고 안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관람객은 한 명도 없어요.”
“그래도 양이 적은 건 사실이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런데 언제부터 예술작품을 양으로 따졌나요?”
내가 조금 곡해하자 관계자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 그뿐만이 아닙니다.”
관계자는 가방에서 통계 자료를 하나 꺼내 건넸다.
IAA에서 진행한 미술관 신뢰도 검사였다.
“솜니움과 저희 IAA 소속 미술관을 포함한 전 세계 주요 100개 미술관에 대해 관람객 평가를 정리한 자료입니다. 미술품 보안이나 화재 대책이 잘 되어 있는지에 대한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실제 보안 평가가 아니라 관람객 설문인가요?”
“네. 결국 중요한 건 관람객을 안심시키는 거니까요.”
나는 그가 보여준 자료를 확인했다.
IAA 소속 루브르 미술관이 솜니움의 상위에 있었다.
건물이 신식인 솜니움의 경우 보안으로나 화재 대책도 루브르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철저했다.
하지만 루브르의 이름값이 관람객들 신뢰도를 높여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사실은 인정해야 할 것이었다.
“보시면 솜니움 미술관도 충분히 높지만, 저의 소속 루브르 미술관이 상위에 있는 걸 알 수 있을 겁니다. 또, 루브르 미술관이 고전주의 미술품으로 유명한 건 아시겠죠? 여러모로 저희가 양보받는 게 맞는 일이라는 생각밖에는 안 듭니다.”
하지만 간과해서는 안 될 게 있었다.
그렇다고 미술품을 돌려줄 의무는 없다는 것이었다.
“루브르만큼은 아니지만 솜니움도 꽤 위에 있네요.”
“그렇긴 하죠.”
“그럼 솜니움 하위에 있는 이 수많은 미술관들은 다 어떻게 되나요? 다 고전 작품을 루브르에 반납해야 하나요?
관계자는 할 말을 잃었다.
“알고 계시겠지만 이미 가드너 미술관에서 작품을 솜니움에 옮기기로 결정했어요. IAA는 가드너의 도난 사건을 비판할 수는 있어도 작품을 압수할 권리가 없단 말이에요. 그 작품들이 IAA 소유인가요?”
“...... 작품을 그린 화가들은 루브르를 원할 겁니다.”
더는 작품 반환을 요구할 수 없다고 느낀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관계자는 못내 불만이라는 듯 씹어뱉었다.
“뭐, 그건 본인들만이 알겠죠.”
적어도 마네는 솜니움을 원하고 있지만.
관계자와의 입씨름은 그렇게 끝났다.
그동안 주지사 찰리는 멍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미술품 도난이라니…… 이게 다 무슨 소립니까……?”
찰리는 그냥 가드너가 솜니움에 합쳐지는 거라고만 알고 있었다.
***
그 일이 있은 후부터 IAA는 더 이상 나서지 않았다.
솜니움이 실제로 도난 사고를 당해야만 그들에게 발언권이 생기는 것인데, 그렇다고 작품을 훔쳐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을 테니 말이다.
가드너에 있던 작품들이 모두 솜니움으로 옮겨진 후 솜니움 미술관의 소장 작품 수는 13만 점에 달하게 되었다.
신진화가들을 포함한 미술가들과의 교류를 지속하며 미술관을 증축해온 결과였다.
처음 개관하던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해졌다.
가드너의 유명 작품들이 솜니움으로 옮겨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관광객들은 연일 아트밸리를 방문했다.
솜니움 하루 방문객이 100만 명에 달했고, 솜니움을 찾는 차량이 로드아일랜드의 JFK공항과 뉴욕주까지 길게 늘어섰다.
방문객이 늘어난 만큼 노스브라더와 로빈슨섬을 오가는 배편이 거의 마비될 지경이었다.
100% 이동용으로만 사용하는 배였기 때문에 수송 효율은 좋았지만 두 대로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었다.
다행히도 관광객들이 미어질 때쯤 해저터널 건설이 완료되었다.
“<깊이의 동굴>은요?”
내게 처음 완공 사실은 알리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두 섬을 잇는 해저터널에 길게 스크린도 달아놨어.”
나와 아버지는 막 개통된 해저터널로 진입해 스크린이 있는 위치까지 이동했다.
거대한 돔이 줄기처럼 길게 뻗은 상태였는데, 바닷물이 굉장히 깨끗해서 근처를 지나는 해양생물들을 잘 관찰할 수 있었다.
“하단은 일반적인 다리를 짓듯이 만든 도로라서 붕괴 위험이 없고,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저 유리관들은 두께가 50cm가 넘는대. 그 정도면 절대 깨질 일은 없는 거지.”
해저터널은 원통형 유리관이 길게 늘어선 가운데 콘크리트 다리가 그 안에 늘어선 모양새였다.
콘크리트 다리를 유리관이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구간마다 공기 순환 장치가 매달려 있었고, 다리 바깥으로 빛나는 조명들 덕분에 푸른 바다가 밝게 빛났다.
“이 안에서 차 사고가 나서 유리관을 들이받으면 어떡해요?”
“걱정할 거 없어. 일반적인 터널보다도 강도가 높으니까. 내부 차량보다는 외부 잠수함 대책에 더 중점을 두고 지었기 때문에 100% 안전하다고 봐야지.”
몇십 분간 터널을 달려 <깊이의 동굴-순간의 연대기>가 설치된 구간에 도착했다.
개통은 되었지만, 아직 도로를 열어놓은 상태가 아니라서 차를 정차해놓을 수 있었다.
<깊이의 동굴-순간의 연대기>는 미디어아트센터로 보내져 시각효과가 잘 구현되어 있는 상태였다.
자연스럽게 연결해둔 색채들은 차가 이동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변화했다.
굳이 차선에서 눈을 떼지 않아도 되었다.
곁눈으로 살폈을 때 더 진한 감동을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정성을 들인 작품이기는 했지만, 이곳은 전시관이 아니었다.
감상보다는 안전이 더 중요한 해저터널이었다.
작품은 오히려 시선을 잡아끌기보다는 작품 바깥 출구 쪽에 소실점을 두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망각되고 변하는 기억을 표현하고자 했던 의도가 스크린을 넘어 이 해저터널 전체에 녹아들어 있는 셈이었다.
“이 정도면 이 터널을 이용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많겠네요.”
“그러게. 계속 이 구간만 왔다 갔다 하는 거 아니야?”
그렇게 방문객들은 해저터널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무거운 화물차가 줄줄이 늘어서 있어도 무너지지 않을 만큼 견고한 터널이었고, 차선도 넓게 넓게 만들어 일반 도로보다 오히려 안전했다.
굉장히 큰 규모의 해저터널이었기 때문에 언론에서는 ‘해저터널’이라는 키워드로 보도할 줄 알았는데, <깊이의 동굴-순간의 연대기>가 있는 해저터널을 가리켜 ‘예술터널’이라고 일컫는 신문사가 많았다.
차로 이동하는 도중에도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는 데에 다들 감탄하는 듯했다.
찰리를 포함한 주의회 사람들도 예술터널을 지나 보고는 흥분감을 감추지 못했다.
해저 공간과 차량의 이동 감각이 합쳐져 그야말로 1조 6800억 원짜리 작품이 탄생했다는 의견이었다.
특히 찰리는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터널 유리관 바깥 표면에 따개비와 해조류가 눌어붙을 것이라며, 그것을 제거하는 작업은 로드아일랜드주가 책임지고 예산을 편성해두겠다고 했다.
그 비용은 청소 작업 때마다 정산해 로드아일랜드주로 기부하기로 했다.
그렇게 예술터널을 통과해 로빈슨 섬에 도착하면 가장 처음 ‘베이컨 하스피탈’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해저터널을 처음 계획하던 당시 로빈슨이 꼭 지어 올리겠다고 했던 미술치료 병원이었다.
굉장히 규모가 컸고, 미국에서 노하우를 쌓은 미술치료사들이 그곳으로 모여들었다.
그야말로 미국의 대표 미술치료센터가 된 것이었다.
‘베이컨 씨가 그렇게나 자랑하던 이유가 있구나.’
로빈슨섬은 그야말로 지상낙원 같았다.
섬을 그냥 산책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경관도 좋았고 말이다.
게다가 휴양시설도 잘 조성된 상태였기 때문에 섬 전체가 모두 베이컨 하스피탈처럼 여겨졌다.
미술치료 서비스가 필요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미국의 그 어떤 호텔보다도 이곳에 입원을 하는 게 가장 좋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사업이 실패한 이후로 거식증에 시달렸는데 로빈슨섬에 방문한 이후로 씻은 듯이 나았어요 ★★★★★
-최고예요! 신혼 때 갔던 세부보다 더 예뻐요! ★★★★★
-베이컨 하스피탈에서 2주간 치료를 받았는데, 이 섬 시설과 경관만 생각하면 평생 마음 졸이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
-새로운 마음의 고향을 얻었어요! ★★★★★
방문객들은 대부분 베이컨 하스피탈의 이용 후기란을 이용해 로빈슨 섬의 방문담을 남겼다.
그 모든 게 입소문으로 이어지면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술터널 진입로를 지나게 되었다.
이동 목적으로 사용하던 크루즈는 해상 관광 용도로 바꿔 매일 크루즈 파티를 열었다.
샬롯을 비롯한 유명 셀럽들이 선상 공연 파티를 열었다.
그 일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슈크와 함께 연구소 일에 매진했다.
새롭게 개발한 슈링클 소재 상품들 중에는 유화 보관함이 가장 큰 인기를 끌었다.
슈링클 보관함은 YJ로고가 찍힌 채 전 세계 미술관과 학원으로 수출되었다.
충격을 받을 때마다 미묘하게 온도가 올라 부드러워지는 특성으로 인해 굉장히 내구도가 높다는 장점이 큰 몫을 했다.
크리스티, 소더비와 같은 유명 경매장에서도 YJ의 유화 보관함을 사용했다.
“예준아, 유화 보관함 첫 판매 수익 들어왔다.”
“그래요? 얼마나요?”
아버지는 한화로 환산해본 수치를 손가락으로 숫자를 짚으며 단위를 세었다.
“어디 보자…… 십만, 백만, 천만, 억, 십억…… 백억……”
“......”
“2844억 원!”
2844억 원,
첫 판매 수익만 2844억 원에 달했다.
테레즈를 통해 데려올 수 있었던 MIT 연구진들의 새로운 색상 개발 작업도 잘 진행되고 있었다.
연구 성과가 있을 때마다 내게 자세히 브리핑을 해주었는데, 첫 판매부터 이 추세라면 곧 미술계를 뒤흔들 색상이 개발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엄청난 판매 수익을 보았기 때문에 더는 놀랄 소식도 없을 줄 알았다.
윤예종 사업을 담당하고 있는 민수로부터 문자가 도착하기 전까지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