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개념과 관념 (2)
“가드라인이요. 저거 때문에 제 작품을 치우지 못한 거예요.”
가드라인.
미술작품의 손상을 막기 위해 관람객들의 접근을 통제해놓은 한 줄짜리 경계선이었다.
“저건 심오한 예술작품에 감히 접근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예술적 권위의 상징이기도 해요. 딱 봐도 쓰레기에 불과한 휴짓조각이 저 가드라인 안쪽에 있으니…… 관람객들은 처음엔 의심하다가도 뭔가 의미가 있는 작품이겠거니 싶어 비판을 포기하게 되는 거죠.”
아무리 사조가 다르고 관점이 달라도 어떤 소재가 아름다운가 하는 공통된 미의식이라는 건 존재했다.
벽에 붙여놓은 바나나는 뭔가 파격적으로 보이지만, 바닥에 던져놓은 휴지는 별로 그래보이지 않는 것이다.
벽에 붙은 바나나는 살면서 별로 볼 일이 없지만, 바닥에 떨어진 휴지는 자주 볼 수 있는 광경이니까.
하지만 가드라인 안에 있으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게다가 아방가르드 개념미술이라는 전시 타이틀을 붙이면 더더욱 말이다.
그 타이틀과 가드라인은 휴짓조각에 예술적 권위를 부여해 평범함을 전위성으로 바꿔놓고 있는 것이었다.
거기서 작품은 별 볼 일 없는 만큼 충격적이어진다.
“전시회에 왔으면 대중예술을 해야죠. 대중예술을 하려면 권위를 내려놓아야 하고요. 거장 위치에서 잠시 관람객 위치로 내려와야만 진정한 ‘소통’이 가능해지는 거예요.”
나는 신진화가 전시관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곳엔 바나나 같은 코믹한 설치미술도 없었지만, 보통 있는 가드라인과 특별 조명도 없었다.
집 인테리어나 다를 바 없는 느낌으로 그냥 벽에 걸려 있을 뿐이었다.
특히 아버지의 앞에 선 남자는 더 다가갈 수도 없을 정도로 가깝게 서서는 나무 아래 놓인 노란 장미들을 구석구석 뜯어보고 있었다.
“아…… 이젠 확실히 이해했습니다. 권위…… 그렇지. 여태까지 보편적 미의식이라고 생각해왔는데. 그건 그냥 권위가 가져다주는 위화감이었군요.”
그들은 얌전해졌다.
그리고 이제 대부분의 관람객이 떠난 신진화가 전시장을 천천히 돌아보며 작품을 다시 감상하기 시작했다.
“역시. 예준이가 최고야.”
“아빠 그림을 욕하는데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죠.”
그래도 이제 새롭게 깨달은 그들이 어떤 개념미술을 선보일지 기대가 되기도 했다.
그걸 보고 싶으면 다시 남미를 와봐야겠지만 말이다.
“근데 저 사람 있잖아?”
아버지가 자신의 작품 앞에 서서 그림을 멀거니 봤다 가까이 보기를 반복하는 예의 그 관람객을 가리켰다.
“저 사람 한 셋째 날인가, 넷째 날인가. 그때부터 매일 방문해서 내 작품만 저렇게 몇 시간을 보고 가고 그러더라고. 데리오 화가님한테 그런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지 좀 신경이 쓰이네. 혹시 내 작품이랑 스무고개를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설마요.”
“그런데 저 사람이 굉장히 유명한 영화감독이라는 거야.”
유명한 영화감독이라니.
그런데도 전시장이 이렇게 조용했단 말인가.
“누군데요?”
“아벤 존스라고, <화이트 미러>라는 영화로 유명한 감독님이셔.”
들어본 적 있는 사람이었다.
필립과 함께 세계 영화계에서 실력자로 손꼽히는 인물이었다.
“아빠 그림의 어디를 보고 있는지 저도 궁금한데요. 한번 직접 물어보죠.”
“그럴까?”
나와 아버지는 존스에게 다가가 섰다.
“저번부터 계속 그 그림만 보고 계시더군요.”
아버지가 말하자 존스는 나와 아버지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 윤예준, 윤민제 화가님이시군요. 네…… 굉장히 좋은 그림이에요. 정말 잘 봤습니다.”
“혹시 아무리 봐도 해소되지 않는 부분이 있나요?”
“해소되지 않는 부분이라……기보단.”
존스는 자신의 회색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지망생 시절 저는 좋아하는 영화가 있으면 열 번 스무 번을 돌려봐도 질리지가 않았던 것 같은데, 프로가 된 뒤부터는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도 두 번 이상 보게 되지 않더군요. 한 작품만 몇십 시간을 붙잡고 봐도 질리지 않는 그 열망 때문에 오히려 감독이 된 건데……”
“영화 보는 시선이 날카로워진 덕분이겠죠. 두 번 볼 필요 없을 만큼.”
아버지의 그 공치사에 존스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 아무튼. 이 작품을 보고 있으면 그 당시의 제가 이런 열망으로 영화를 여러 번 돌려봤었구나 싶습니다. 아무리 봐도 그 열망이 해소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존스는 다시 아버지의 그림에 시선을 고정했다.
완전히 그림에 몰입한 것인지 목소리가 조금씩 작아졌다.
“이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파스텔 톤의 나무와 장미들, 그리고 이 저층 빌라의 동화적인 표현이 너무 아름다워서 슬플 정도로 잔인합니다. 사람 하나가 끔찍하게 살해당한 풍경을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하다니. 믿기지가 않아요. 앞으로 제 작품관이 달라질 것 같은 그림입니다. ……그렇죠. 세상은 하나도 아름답지 않아요. 적어도 보이는 만큼은요.”
<화이트 미러>는 사회의 암적인 모습을 굉장히 첨예하게 다뤄낸 문제작이라고 들었는데, 역시 미술작품을 보는 눈도 다르지 않았다.
아버지는 굉장히 기쁜 얼굴로 존스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게 비엔날레 도중에는 그림을 살 수 없는 거지요? 이젠 끝났으니 거래가 가능할 텐데. 혹시 제게 팔아주실 생각 있으십니까?”
“예? 아, 예. 물론이죠. 얼마를 원하시는데요?”
존스는 그제야 작품에서 눈을 떼고 고민하며 아버지를 마주 봤다.
“이 정도 작품은 유로화로 680만은 주고 사야 할 것 같습니다.”
“예? 680만 유로요?”
680만 유로면 한화로 90억이 넘는 금액이었다.
“680만……!”
뒤에서 작품을 감상하던 개념미술 화가들이 금액을 엿듣곤 크게 놀랐다.
하지만 존스는 아랑곳도 하지 않고 제 할 말만 계속했다.
“나도 예술 영화 한 편 하고 싶은데 필립한테 선수를 빼앗겨버렸고…… 요즘 영화제도 윤예준 화가님이랑 필립에게 싹 다 빼앗기고 있으니 원…… 그래도 <시간을 거스르는 자>가 개봉한 지 이제 4년 정도 됐으니 저도 한 편 들어가도 좋을 때가 된 것 같아요. 괜찮은 시나리오가 있는데, 혹시 함께하시겠습니까?”
“예술 영화 말씀입니까? 저와 함께?”
“네. 그리고 여기 전시한 아트밸리 신진화가들도 참여할 수 있으면 좋구요. <시간을 거스르는 자>가 윤예준 화가님의 거의 초능력이나 다를 바 없는 기량과 숭고한 예술혼을 잘 보여줬다면, 저는 신진화가들의 저항적 패기를 선보일 작품을 만들 생각이에요. ……물론 흥행 자신 있고요.”
시종일관 시니컬하게 말하던 존스였지만 그만의 강한 확신과 자신감이 느껴졌다.
90억에 작품을 파는 것도 모자라 영화 제의까지 들어오다니.
아버지로서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잘됐네요! 영화 들어가시면 제게 알려주세요. 아트밸리에 존스 감독님 작업을 위한 공간을 마련해둘 테니까요.”
“정말인가요? 이렇게 감사할 데가.”
존스는 자신의 주머니를 이곳저곳 뒤져 명함을 꺼내 나와 아버지에게 건넸다.
“윤예준 화가님은 이미 필립이 자기 뮤즈로 찜해놓은 느낌이라 이런 제안은 삼가려고 했는데. 이 정도는 괜찮겠죠?”
“당연하죠. 예술에 찜이 어디 있겠어요? 그리고 저희 아버지랑 신진화가들과 하는 작업인데요.”
“잘됐습니다. 그럼 일단 그림 거래부터……”
***
존스와의 거래를 마치고 비엔날레를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리처드 잭슨으로부터 범인을 검거했다는 소식을 전달받았다.
-그날 이후로 우여곡절이 꽤 많았습니다. 사실 멕시코 국경에서 놈들을 한 번 놓쳤죠. 더 이상 단서도 없어 어쩔 도리가 없어졌을 때 윤 화가님이 말씀하셨던 게 떠오르더군요. 그래서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가봤죠.”
나는 리처드에게 이탈리아 리보르노의 상가를 유심히 조사해보라고 했다.
일전에 잠시 여행을 갔을 때 당시 가이드가 상가로 위장한 밀수단이 곳곳에 있으니 조심하라고 했다.
아마 그들의 기지가 될 만한 시설이 있다면 여전히 이탈리아 마피아가 애용하고 있을 것 같아서였다.
“화가님 말씀대로 가게는 깔끔한데 며칠간 장사를 안 하는 가게가 눈에 띄더군요. 사람이 하나 들어갈 때를 잘 봐둔 덕분에 놈들을 다 체포해냈습니다.”
“거기가 본거지던가요?”
“아니죠. 근처를 오가는 어선을 이용해 잠시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였습니다. 그래도 그곳에서 다시 꼬리를 잡을 수 있었고, 며칠간 끈질기게 잠복과 미행을 거듭한 결과 본거지를 발견했습니다. 그 결과 가드너 명작 절도 사건 관련자 전원을 체포할 수 있었죠.
잘된 일이었다.
“작품은요?”
-13점 모두 확보했습니다. 기소한 뒤 장기간 증거품으로 활용한다는 걸 말리느라 애 좀 썼죠. 그런데 검거 작전을 진행하는 동안 훼손된 게 있어서 복원 과정을 조금 거치기는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복원 작업은 내가 나서서 돕기로 했다.
범인들은 이탈리아 거대 마피아 조직에서 파생되어 나온 조직이라고 했다.
이전 단체와 정치적 갈등을 빚은 ‘로지트 과테’가 조직원 다수를 데리고 독립해 나왔다고.
걸출한 활동으로 아직 보고된 게 없어 인터폴로서는 굉장히 낯선 조직에 속했다.
-수뇌부라고 할 수 있는 놈들은 보스인 ‘로지트 과테’와 ‘로버트 티르헨’, ‘바움 도날티’ 이렇게 총 셋이었습니다. 셋 다 검거해서 실형을 구형할 수 있을 것 같으니 재발 위험은 없다고 볼 수 있죠.
“다행이네요. 그런데 왜 훔쳤대요?”
이전 단체에서 행동대장 역할이었던 로지트 과테는 그 특유의 호전적인 성격 때문에 여러 폭력 단체와의 갈등이 잦았다.
세를 확장하기 위해 사업을 키우고 타 단체 매장을 습격하는 등 직접 범법 행위의 선봉에 섰는데, 최근에 그 과정에서 이탈리아 경찰에 체포되어버린 것이었다.
-미국과의 외교 문제를 발생시켜 이탈리아 정부를 협박하기 위해 훔쳤답니다. 로지트 과테를 풀어주면 그림을 돌려주겠다 이거죠. 다행히 놈들이 그림을 이탈리아로 완전히 반출하기 직전에 윤 화가님의 모작이 끝난 겁니다. 그래서 놈들의 작전이 일시 중단된 거죠.
그 뒤부터는 크루즈 여행 눈속임 작전을 제안하던 당시 예상했던 대로 흘러갔다.
가드너가 다시 관람을 재개하자 놈들은 완전히 혼란스러워했고, 내가 인터뷰에서 이탈리아인 모작 의뢰인을 언급했을 땐 서로 총격을 서슴지 않으며 의심하기 시작했다.
-정황상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작품들이 모작인 게 확실시되었을 때부터 작품 관리가 굉장히 소홀해졌더군요. 빗물이 들이치는 비밀창고에 대충 던져놓았고, 확보에 성공하기 직전 그림을 들고 나르던 저희 인터폴 수사관들에게 탄을 쏴댔습니다. 그중 하나가 그림 다섯 점을 뚫어버렸죠.
“그럴 수가…. 수사관은 많이 다쳤나요?”
그 소식을 전해 듣는 순간 그림 걱정이 먼저 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총은 수사관을 향한 격발이었을 것이었다.
그 긴박한 상황에 애꿎은 그림을 쏠 이유는 없었으니까.
모작이든 원본이든 말이다.
-다행히 주머니에 숨기기 쉽도록 약실부터 총구까지의 거리를 짧게 개조한 권총인 데다가 탄알도 작았던 덕분에 크게 다치지는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림 다섯 점을 뚫고 들어온 거라 위력이 꽤 줄기도 했겠죠. 물론 총상은 총상이라 당시 상황은 긴급했지만 말입니다.
수사관의 옆구리에 파고든 납탄은 현장에서 바로 빼냈다고 했다.
입원 중이지만 의식도 있고 중요한 장기는 다치지 않았다.
-수사관은 무사합니다. 어디까지나 문제는 그림들인데…… 구멍도 구멍이거니와 탄흔이 넓게 남아 타버린 부분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도 다 복원이 가능한 겁니까?
“그럼요. 유추할 수 없는 부분에 절묘하게 난 구멍이라면 굉장히 어렵겠지만, 유추할 것도 없이 아예 외운 상태니까요. 탄 부분도 마찬가지고요.”
전쟁 당시 보아왔던 머스킷 총의 탄흔은 손톱만 한 크기였다.
그게 총 치고 큰 편인지 작은 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리처드가 특별히 작았다고 언급할 정도면 아마 그보다도 작은 구멍일 것이었다.
어려울 건 없었다.
“그림이 미국으로 들어오는 즉시 아트밸리로 보내주세요. 아직도 가드너엔 가짜 그림들이 걸려 있으니 복원도 최대한 빠르게 진행해야 할 것 같으니까요.”
“알겠습니다. 아, 정말. 윤예준 화가님께 부탁하길 정말 잘했네요.”
리처드는 장난을 가장해 내게 수사관으로 일해볼 생각은 없냐고 물었다.
미술품을 전문으로 수사하는 부서를 만들겠다고.
하지만 당연히 거절했다.
나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도난당한 미술품을 되찾는 것보다 더 큰 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