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이 제일 쉬움-168화 (168/241)

168화. 개념과 관념

비엔날레 1층 전시장을 쭉 둘러본 다음 라틴아메리카 개념미술 거장들의 전시장으로 들어갔다.

그들의 작품은 조금 복잡한 의미에서 인상적이었는데, 예를 들어 마텔라니라는 화가의 <코믹>이라는 작품은 바나나 한 송이를 가져다가 테이프로 벽에 붙여놓은 게 다였다.

테이프와 굽은 바나나가 어떤 무늬를 연상시키고 있지도 않았고, 펌킨노아처럼 바나나를 칼로 파내거나 조각한 것도 아니었다.

‘데리오’라는 화가는 ‘책상 위 연필’, ‘프로젝트’, ‘칼라 프린터기’, ‘사다리 위 화분’이라는 문구를 적어놓았다.

아비치라는 화가는 ‘화장 프로젝트’라고 이름 붙인 전시장에 정체불명의 잿더미를 가져다 놓고 ‘그렸던 그림을 태웠다’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잿더미는 관람객의 움직임에 조금씩 흩날리고 있었다.

“이게 다 뭐죠?”

내가 묻자 아버지는 개념미술이라는 사조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다다이즘 알지? 다다이즘 사조는 지금까지 다양하게 발전해왔는데, 이 개념미술도 그 일종이야. 작품이라는 결과물 그 자체보다는 그것이 시도된 과정에 중점을 두고 있는 거야.”

“아, 그러니까 해체주의 퍼포먼스를 똑같이 시도하고 있다는 건가요?”

“그렇지! 예를 들어 저 <맥락없음>이라는 작품은 러시아 아방가르드에서 영향을 받은 것 같은데, 마텔라니의 <코믹>처럼 그 사물을 사회적 맥락에서 분리시키고 새로운 가치 부여를 시도하고 있어.”

아버지는 작품들을 하나씩 가리키며 설명했다.

“그럼 저 잿더미는요?”

“잿더미는…… 글쎄. 작품의 물질성에 대한…… 일종의 퍼포먼스 같은 거겠지.”

그래선 그냥 프랭크의 아류일 뿐이지 않은가?

이 작품들에 어떤 가치가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건 둘째치고 이런 걸 예술이라고 할 수는 있는지 의문이었다.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중점을 두었다는 아버지의 말은 이해할 수 있었다.

나도 다다이즘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뒤샹의 <샘>의 경우 ‘변기를 본래 용도에서 떼어다가 전시관에 가져다 놓았다니!’ 하고 감탄하는 데서 그 작품의 가치가 발견되지 않았던가?

작품을 보는 내내 관객의 머릿속에서는 변기의 본래 맥락이 파괴와 재조립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으음……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런 미술을 사람들이 좋아하니까 유명한 거겠죠?”

“아마도 그렇겠지.”

개념미술 작품 관람을 끝내고 밖으로 나서려던 때였다.

신진화가 전시장 쪽에서 누군가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또 뭐야. 혹시 맨해튼 동양인 살인사건, 그 그림인가?”

“설마 아니겠지. 고작 일간지 삽화에나 쓰일 법한 그림이 여기 걸렸겠어?”

그들의 조롱 섞인 수다를 들은 나와 아버지는 신진화가 전시장으로 다시 돌아 나왔다.

세 명의 남성들이 아버지의 그림 앞에서 굳어진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런 저급 회화를 그리는 화가는 현대에 와서 널리고 널렸는데. 요즘 신진화가들 수준이 다 이거밖에 안 되나?”

“그런데 이 윤민제라는 화가는 신인도 아니잖아? 이 사람 동양화에서는 사명감이라도 느껴졌던 것 같은데 이 작품은 영 아니군.”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계속 험담하게 둘 수는 없어 내가 나섰다.

“선생님들, 이 작품이 궁금하신가요?”

내가 끼어들자 잠시 당황한 남자들은 아버지를 발견하더니 호들갑을 떨었다.

“아, 이게 누구야. 윤민제 화가님 아니신가?”

“반갑습니다.”

그들과 인사를 주고받은 아버지가 소개해주었다.

개념미술 전시장에 작품을 전시한 라틴 화가들이라고 했다.

앞선 바나나와 잿더미 퍼포먼스를 선보인 이들이라는 것이었다.

“자네 제갈 화백과 함께 동양화 그릴 때는 좋게 봤는데, 이번 작품은 별로 성공적이지 못한 것 같아. 자네가 소개해준 이 다른 신인들도 마찬가지고.”

“아…… 그런가요?”

“그래. 그림 자체도 추모제의 단순 은유에 불과하고. 게다가 작품 이름까지 추모제면 너무 쉬운 거 아닌가? 저기 있는 나비 어쩌고 하는 그림처럼 말이야.”

개념미술가들은 저들끼리 지리멸렬한 잡담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이런 걸 내가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그래 맞아. 애 키우는 동양인들이 화장실 문에 붙여놓은 영단어 포스터랑 똑같군.”

“아! 맞아. 사과를 그려놓고 Apple 하는 그런 거 말하는 거지? 하하하!”

아예 대놓고 조롱하려고 드는 걸 보니 저들도 어딘가 심통이 난 상태인 듯했다.

훨씬 고차원적이고 잘나가는 자신들이 이런 신인 화가들과 같은 비엔날레에 있다는 게 못마땅한 거겠지.

“여러분들 그림은 좀 더 수준이 높은 것 같던데. 그럼 저희한테 한 수 가르쳐주시죠.”

“응……? 아니 뭐. 윤예준 화가님이 더 잘 아시겠지만 직접 작품 해설만큼은 해드릴 수 있지요.”

내가 다시 나서자 그들은 목소리가 조금 작아졌다.

“저희는 기본적으로 작품의 결과물보다는 작가의 창조적 발상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기성의 의미체계에 오염된 미적 대상의 본질을 사회적 맥락으로부터 구출해내는 거죠. 거칠게만 표현하자면 저의 <맥락없음>은 기호로서의 언어와 추상적 의미 사이의 1대1 대응을 파괴한 것이죠.”

“맞습니다. 나무가 아니라 벽에 매달린 먹을 수 없는 바나나와 더 이상 감상할 수 없는 그림. 저희는 자동화된 의식의 흐름을 거스르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 겁니다.”

표현은 더 과감하고 난해해졌지만, 해설은 처음 다다이즘 퍼포먼스 때와 달라진 게 없었다.

그들이 무언가 잘못된 가치에 경도되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게 뭔지는 뻔히 알 만했다.

“아, 그런가요?”

나는 전시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벽 한쪽에 냅킨 케이스가 걸려 있었다.

나는 거기서 냅킨 한 장을 뽑아내 잘 뭉친 뒤 <코믹>이 전시되어 있는 가드라인 너머로 던져넣었다.

“아니, 뭘 하시는 겁니까?”

“소개합니다. 윤예준의 첫 개념미술, 작품명 <무제(無題)>입니다.”

고작 냅킨 한 장을 던져놓았을 뿐인데 그들은 크게 호들갑을 떨었다.

“너무하시는군요. 저희가 이런 식의 조롱에 얼마나 익숙한지 아십니까?”

“전시장 바닥에 안경을 떨어뜨려 놓고 네오다다 미술이다, 골목에 버려진 개똥을 가리켜 개념미술 작품이다…… 수도 없는 멸시를 받아왔죠. 같은 화가이신 윤예준 화가님께서도 저희를 그렇게 조롱하고 싶으신 겁니까?”

그들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서 따지기 시작했다.

“저의 진지한 작품이니 다들 믿어주시죠. 오히려 여러분들 작품보다 더 위대한 작품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저는?”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죠?”

“뒤샹의 작품은 변기를 떼어다가 미술관에 가져다 놓았다는 점이 굉장히 기발하고 충격적인 작품이죠. 하지만 바나나를 떼어다가 미술관에 가져다 놓은 저 <코믹>은 하나도 충격적이지가 않아요. 무슨 차이인지 아시겠나요?”

충격적이지 않다는 나의 혹평에 마텔라니는 입꼬리를 움찔거리더니 물었다.

그래도 뒤샹이라는 거장의 이름을 빌려 하는 비판이니 참아볼 생각인 듯했다.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아무런 차이도 없죠. 그래서 충격적이지 않다는 거예요. 이미 뒤샹이 <샘>에 쏟은 모든 아이디어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잖아요. 결과물보다 과정에 중점을 두겠다느니, 기성의 의미체계를 파괴하는 퍼포먼스를 통해 충격을 주겠다느니…… 그 아이디어가 여전한 이상 앞으로 얼마나 기발한 걸 가져다 놓든 별로 충격적이지 않을걸요? 그게 아류의 숙명이니까요.”

듣던 데리오가 발끈해서는 아버지의 그림을 위협적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마치 지팡이로 살롱전의 내 그림을 가리키듯 말이다.

“그러는 저 작품은 어떻습니까? 그냥 그림으로 장황하게 써놓은 르포 아닙니까? 미술은 정답이 정해진 스무고개가 아니잖아요? 윤민제 자네가 한번 말해보지. 만약 관람객들 중 누군가 자네의 저 작품에 대해 한날의 봄 풍경을 묘사한 낭만주의 작품이라고 한다면 그 감상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겠나?”

“그건……”

“정치적인 입장을 표명하는 건 예술가의 본분이 아닙니다. 미국 거주 동양인이 아닌 이상 맨해튼 살인사건엔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아요. 윤민제 화가는 지금 이 미술관 공간을 빌려 같은 동양인 편들기를 하고 있을 뿐이라는 겁니다.”

데리오의 말은 언뜻 그럴듯했지만 내가 아는 한 예술가의 본분이란 건 없었다.

관객과의 소통을 제외하면 말이다.

“미술에서 중요한 건 퍼포먼스 그 자체가 아니라 작가의 시각과 관객의 감상이에요. 뒤샹은 기존의 의미체계에 대한 전복적인 시각을 보이기 위해 변기를 뜯어냈겠죠. 말씀하신 대로 저희 아버지는 동양인 살인사건에 대한 동양인으로서의 시각을 빌려 저 그림을 그린 거고요. 저렇게 해놓으면 관객과 작가가 소통할 수 있잖아요?”

마네로서 죽은 뒤 환생한 이후에야 예술이라는 행위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었다.

예술은 작가 본인과 관객의 소통이었다.

그 소통을 위해서라면 일단 작가의 예술적 자의식이 포함되어 있어야만 했다.

결코 과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런데 여러분들의 작품에는 아무것도 없네요. 뒤샹에 대한 유아적인 선망밖에는요.”

“......”

“하지만 저의 작품 <무제(無題)>는 달라요. 제가 저 작품을 통해 파괴하고 싶은 건 의미체계 같은 게 아니라 아방가르드 화가처럼 보이고 싶어 하는 여러분들의 철학적 허영심이니까요.”

그들은 꿈보다 해몽이라며 더욱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그래서 내기를 하나 하기로 했다.

나의 <무제>가 관객들에게 호소할 수 있는 유효한 퍼포먼스인지, 아니면 그냥 누군가 실수로 흘린 코 푼 휴지에 불과한지 확인해보자는 것이었다.

“비엔날레 전시회가 끝날 때까지 제 작품이 남아 있으면 저의 승리고,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들의 승리입니다.

그들은 관람객을 우롱해도 정도가 있다며 분노했지만 내기에는 순순히 응했다.

상금 같은 게 걸린 내기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들의 자존심만큼은 완전히 건 듯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들에겐 자존심이 유일한 무기이자 한계인 듯했으니.

누군가 내 휴지를 주워 쓰레기통에 버린다면 나도 수준에 맞는 관객만 있으면 된다는 현대개념미술에 대해 인정하고 정식으로 사과하기로 했다.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았지만 말이다.

***

다음 날 아침 나는 아버지와 함께 비엔날레 전시장으로 향했다.

아버지는 조금 부정적이었다.

매일 폐관 때마다 수십 명의 청소부가 전시관 구석구석을 청소한다고 했다.

그 많은 청소부들 중 한 명도 그 휴지를 안 치웠겠느냐는 것이었다.

나와 아버지는 개념미술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휴지 쪽을 보았다.

휴지가 사라졌는지 안 사라졌는지 바로 확인할 수는 없었다.

너무 많은 관객들이 그 앞에 모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지? 어제도 이 작품이 있던가?”

“새로 추가된 작품이겠지. 그나저나 정말 인상적이군. 어떤 정형성도 찾아볼 수 없어. 뭉쳐진 모양으로 보나 다른 작품과의 간격으로 보나.”

“그러게나 말이야. 시선을 은근히 벗어나는 게 신선한 충격을 주는걸?”

하루가 더 지나고, 며칠이 지나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마지막 개관일이 되었고, 냅킨은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다행히 제 작품을 아무도 쓰레기 취급하지 않았네요. 제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관람객들이 알아준 모양이에요.”

결과를 확인하고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친 개념미술 화가들은 얼굴만 달아오를 뿐 뭐라 쏘아붙이지도 못했다.

“......저희에게 각성할 좋은 기회를 주시는군요. 이 가르침 잊지 않고 작품 활동에 유념하겠습니다……”

“좋아요.”

“윤민제. 자네한테도 미안하다고 해야겠군. 자네 작품을 비하한 거 진심으로 사과하네.”

아직 마음에도 없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지만 결과에는 확실히 승복하는 그들이었다.

나의 휴지는 개념미술 전시장의 어떤 작품들보다도 많은 관심을 받았다.

연일 카메라 플래시와 셔터 세례를 받았을 정도로 말이다.

“그럼 이제 전시회도 끝났으니 제가 버린 쓰레기나 주워야겠네요.”

나는 <무제>라고 명명한 휴지를 다시 주워 휴지통에 던져넣었다.

그러자 개념미술 화가들은 완전히 기절할 듯 놀라서는 휴지통으로 달려들었다.

“아니, 갑자기 왜 이제 와서 쓰레기라고 하십니까.”

“여러분들 말대로 꿈보다 해몽이었을 뿐, 쓰레기는 쓰레기죠.”

“그럼 관객들이 쓰레기를 작품으로 착각할 만큼 팔푼이였다는 뜻입니까?”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왜 관객들이 이 휴지를 안 치우고 사진씩이나 찍어가며 감탄했다는 겁니까?”

“저거 때문이죠.”

나는 검지를 펴 한쪽을 가리켰다.

그들은 내가 가리킨 방향을 돌아보더니 중얼거렸다.

“저거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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