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아메리칸 느와르 (4)
검지손가락을 문지르던 괴한이 뒷걸음질치며 물었다.
“도대체 언제 들어온 거야? 소리 못 들었는데……!”
“너보다 먼저 들어와 있었지.”
리처드는 괴한이 도망갈 수 없도록 계속 간격을 유지하며 대답했다.
그는 내가 불러 두었다.
일부러 나를 찾아오기 좋은 환경을 조성해뒀으니, 이번에야말로 놈들을 잡을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처음에 리처드는 위험하다고 말렸지만 나는 이미 생각을 굳힌 상태였다.
때로는 위험을 감수할 줄도 알아야 했다.
“한 걸음 다가서면 두 걸음 더 멀어지는군. 애를 태우려고 그러나?”
“가까이 오지 마!”
“어이쿠, 깜짝이야. 놀래키지 말라고. 나는 오른손잡이라서 이걸 까딱할 수도 있거든.”
리처드는 오른손에 든 괴한의 총을 움직이며 도발했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분명 실탄이 장전된 총이 테이저건보다 더 위험할 텐데, 괴한의 눈은 테이저건 쪽만 살피고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어도 그 총엔 위험성이 없다는 것이었다.
‘공포탄밖에 안 들어 있나? 아니야. 아무리 공포탄이라도 이 거리에서 맞으면 죽어.’
나는 리처드에게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귀띔을 해주었다.
나의 말에 리처드가 괴한의 총을 만지작거렸다.
수상한 낌새를 느낀 괴한이 아예 몸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굉장히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였기에 리처드는 바로 범인의 다리를 향해 권총을 쐈다.
하지만 웬일인지 방아쇠는 당겨지지 않았다.
리처드는 총을 급하게 확인해보곤 바닥을 향해 내던져버렸다.
“제기랄! 오토락이잖아…… 놓치면 안 돼!”
플러그가 닿을 리가 없는데도 리처드는 범인을 향해 테이저건을 쐈다.
이미 사정거리 밖이라는 걸 리처드도 알았다.
지금 놓치면 또 어떤 작품을 훔쳐 갈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그로서도 굉장히 급박했던 것이었다.
“거기서!”
리처드는 괴한을 쫓더니 딱 정원 입구에서 멈춰 섰다.
더 이상 괴한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지점이었다.
리처드는 멀어지는 놈의 발소리를 그저 듣고만 있었다.
바로 방금 전까지만 해도 긴박했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방금 컷 사인을 받은 배우처럼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리처드는 무전기를 들어 이렇게 말했다.
“어, 그래. 지금 옥상정원 쪽 계단 통과했다. 슬슬 준비해.”
어차피 한 놈만 잡아 심문만 해서는 일망타진할 수 없었다.
이곳까지 혼자 왔을 리도 없고 말이다.
직접 총을 잡고 옥상까지 올라온 걸 보면 일개 행동대원일 가능성이 컸다.
놈이 어디로 도망치는지 확인한 뒤 제대로 덜미를 잡으려는 계획이었다.
리처드는 무전을 마치고 잠시 나를 보았다.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아, 예. 가벼운 몸싸움도 없었는걸요.”
리처드는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총구가 미간에 겨눠져 있으면 이성을 잃기 마련인데. 간도 크시더군요. 하기야 이 일을 처음 계획한 게 윤 화가님이시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군요. 안 다치신 걸 확인했으니 이제 저도 바로 뒤쫓아야겠습니다.”
리처드는 말을 마친 뒤 괴한의 총을 뒷주머니에 넣고 계단을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후…… 이 정도면 곧 잡히겠지.’
내 그림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생각이었지만, 이런 경험은 한 번으로 족했다.
갑자기 찾아온 평화가 오히려 낯설어 얼마간 바람을 더 쐬어야만 했다.
“잠깐만요!”
무언가 불현듯 떠올라 외쳐 부르자 계단을 반쯤 내려갔던 리처드가 다시 뛰어 올라왔다.
“왜 그러세요?”
“이탈리아에 가면 리보르노라는 항구도시가 있는데요……”
나는 그에게 내가 줄 수 있는 ‘특별한 정보’ 하나를 전달해주었다.
***
그렇게 밤이 지나고 다음 날이 되었다.
오전 이른 시간부터 전화가 걸려오기에 범인을 다 잡았다는 리처드의 연락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아버지였다.
“네, 아빠. 무슨 일이세요?”
-결혼식 다녀온다고 집 나간 아들이 몇 달째 함흥차사이기에 전화해봤지.
사우디 예술광장 때에도, 오르쉐 차량 디자인 때에도, 그리고 <아라비안 오아시스> 영화제 수상 때에도 계속 축하 연락을 받고 있었다.
농담을 하고 있는 거였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이런. 벌써 다 커버렸어. 이젠 아빠보다 네 표현력이 더 다양하다.
“하하하. 스승이 좋았잖아요. 그래서, 저 뭐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전화하셨어요?”
밖에서 통화 중인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잠시 누군가와 짧은 대화를 나누더니 다시 수화기에 입을 댔다.
-응. 뭐 하고 있는지도 궁금했고. 다음 여행 일정도 궁금해서. 인터넷에 나온 대로만 이동하는 거야? 과나후아토 갈 일은 없나?
과나후아토면 세르반티노 영화제 시상식을 진행했던 바로 그 도시였다.
“네. 크루즈 여행이라 해안 도시 위주로 다닐 것 같아요. 왜요? 기념품 가지고 싶은 거 있으셔서요?”
-아니, 지금 아빠 과나후아토에 있거든. 쿠바까지 왔다길래 그나마 근처인 것 같아서 전화해봤어.
아버지는 과나후아토에서 진행하는 비엔날레에 작품을 내게 되었다고 했다.
보통 같으면 제갈사월과 함께 상설전시를 준비하거나 아트밸리 관리에 힘을 쏟고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굉장히 유명한 비엔날레이기도 하고 비엔날레 이력이 없었기 때문에 기회를 잡고 싶었다고 했다.
“아……! 그러고 보니 세르반티노 영화제가 과나후아토 예술 축제 개막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아요.”
-맞아. 20일짜리 예술축제고, 비엔날레는 딱 오늘 시작했어. 꼭 이 비엔날레가 아니더라도 과나후아토 예술 축제는 봐두는 것도 좋을 거야. 죽기 전에 가봐야 할 세계적인 축제로도 꼽히거든.
아버지는 아트밸리에서 교류한 신진화가들도 함께 작품을 제출했다고 했다.
유명한 화가들과 신진화가를 동등하게 전시해주는 곳이라면 개방적이면서도 유의미한 비엔날레일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참여하는 첫 비엔날레라면 아들 된 도리로서 꼭 가줘야 하지 않겠는가.
“와……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축제라니. 엄청 매력적인가 본데요? 안 그래도 지금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상황이라 지체할 시간이 없네요. 내일 해 뜨면 바로 가볼게요.”
-목숨이 오락가락한다니?
아버지가 심각한 말투로 물었다.
“그만큼 기대된다는 거죠. 아무튼 내일 뵐게요.”
아버지와의 통화가 끝나자마자 리처드에게 전화를 걸었다.
리처드는 항구에 모여 출항을 시도하는 조직원들을 다수 목격했다고 전했다.
그중 대다수는 체포했지만 그럼에도 배는 떴다고.
대신 리처드는 위치 추적이 가능한 소형 칩을 조직원들에게 쏘는 데 성공했다고 했다.
중요한 건 그림을 되찾는 것이기 때문에 본진을 치는 게 중요했다.
리처드는 하루 사이에 놈들을 쫓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있는 상태였다.
남미 각국에는 인터폴의 적색수배령이 떨어졌다.
덕분에 연일 쿠바 경찰이 해당 조직원 잔당을 찾아 방방곡곡 이 잡듯이 뒤지고 있었다.
대륙으로 입국하는 모든 선박을 샅샅이 조사하고 쿠바 섬 전역에 숨은 잔당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쿠바 경찰만큼 게릴라전 경력이 많은 경찰은 세계적으로 없을 거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어쨌든 잔당이 있을지도 모르는 쿠바를 제외하면 남미는 안전하다는 것이었다.
리처드가 뒤쫓은 잔당들은 모두 미국으로 넘어갔으니 말이다.
‘그럼 괜히 비엔날레에 민폐 끼칠 일은 없겠어.’
나는 멕시코로 입국할 수 있는 가까운 배편을 알아보았다.
***
세르반티노 비엔날레 전시장은 영화제 장소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래도 영화제와는 달리 오래 진행되어온 비엔날레인지 건물은 제법 크고 고풍스러웠다.
“예준아, 여기!”
입구에 서서 두리번거리던 아버지가 나를 발견하곤 손을 흔들었다.
“와, 예준이 객지에서 간만에 보니까 완전 한류스타인데? 아빠가 외모 하나는 잘 물려준 것 같아서 마음이 놓인다.”
보통 외모 유전에 대해 이야기하면 부모니 양쪽 의견이 다르기 마련이었다.
어차피 어머니가 들었던 발언도 아니니 그냥 넘어가 주도록 했다.
“아니, 이미 한류스타인가?”
“한류스타는요 무슨. 아빠 덕분에 좋은 예술가들이랑 관계가 트여서 덕을 많이 보고 있죠. 사우디 때도 그랬고요.”
아버지는 내 말을 듣자마자 고개를 가로저었다.
“민수는 그걸 두고 일류 예술가들의 성공적인 연대라고 하던데, 내 생각은 다르다. 알고 지내는 예술가들이 아무리 많아도 네가 직접 깃발을 꽂지 못하면 그들은 거기 모이지도 못했을 거야. 가족끼리는 겸손할 것도 없어.”
아버지는 간만에 기분이 좋아 보였다.
세계적인 규모의 비엔날레에 참여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윈스턴 아트페어를 계기로 처음 퓌트니 비엔날레 제안을 받았을 때를 떠올려보면 쉽게 공감할 수 있었다.
화가로서의 내 입지가 그 시점에 크게 성장하지 않았던가?
비엔날레는 내게도 좋은 기회였으니 아버지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나와 아버지는 전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비엔날레 2일차였다.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작품 몇몇을 두고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는 사람도 있었다.
“일단 아트밸리 화가들 그림 먼저 보고 싶어요. 아버지야 뭐, 이번에도 엄청난 그림을 그리셨을 게 뻔하니 좀 나중에 봐도 괜찮죠?”
“그래. 안 그래도 신인들 그림 먼저 보여주고 싶었어.”
아버지가 처음으로 보여준 그림은 <모던 아라베스크>라는 작품이었다.
굉장히 복잡한 패턴을 통해 아라베스크 무늬를 형상화해놓았는데, 아버지는 그 모든 게 수학적 패턴이라고 했다.
수학적 패턴이라면 웬만해선 단순하고 규칙적일 수밖에 없는데 <모던 아라베스크>는 그렇지 않았다.
“이분이 학자 출신 화가셔. <아라비안 오아시스>에 나오는 의상에 대한 연구 논문도 내셨더라고. 예준이 네가 아라베스크 무늬를 문화적으로 분석해서 재창조했다면 이 화가는 수학적으로 천착해낸 거야.”
쉽게 말해 내게 영향을 받아 자신만의 방법론을 적용했다는 뜻이었다.
두 번째 작품은 <나비로부터의 우주>라는 작품이었다.
전시장 곳곳에 눈에 띄는 추상주의 미술들과는 달리 극사실적인 화풍에 만화적인 과장 기법이 적용돼 있었다.
“아, 이거 혹시……”
“맞아. 네가 케니 광고 때 그렸던 <예술가의 눈>이랑 비슷하지? 그 작품에서 모티프를 얻었다더라고.”
한 봄나비가 검은 우주 공간을 날갯짓으로 비행하고 있었는데, 나비의 눈에 비친 별들의 묘사가 굉장히 탁월했다.
감상자는 그 나비의 눈을 통해 직접 우주를 여행하는 인상을 받게 되는 것이었다.
눈이자 카메라 렌즈를 활용해 밤하늘의 모습을 담은 <예술가의 눈>과 아이디어가 흡사했다.
세 번째는 라는 작품이었다.
“원래 마블링 미술은 액션페인팅처럼 우연성에 방점을 두잖아? 그래서 옛날에 네가 모스크바CMC에서 마블링을 통해 구체적인 풍경이나 형상을 표현했던 게 큰 이슈를 몰았던 거고.”
는 보통의 마블링 작품처럼 어떤 형상도 띠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추상적인 물감의 흐름이나 무늬가 우연히 풀어헤쳐졌다기엔 굉장히 절묘하고 무언가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추상표현의 느낌을 유지한 채로 많은 의도적 조작을 가했다는 뜻이었다.
“마블링을 하나의 화풍으로 활용하겠다는 거지. 이 작품도 그렇고 다른 작품들도 네게 영향을 받은 게 많아.”
나와 아버지는 계속 신진 화가들의 작품을 둘러보았다.
내게 직접 영향을 받은 화가들의 전시회라니.
처음 인상주의 화가들이 나타났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와 똑같은 상황이었다.
단체로 돌연변이 취급을 받고 있지는 않다는 것만 빼고 말이다.
마침내 신진화가 작품 관람을 마치고 아버지의 그림 앞에 섰다.
라는 작품이었다.
작품 속 6층 아파트 앞 나무 밑에는 노란 장미 꽃다발 10개가 놓여 있었다.
얼마 전 뉴욕 맨해튼의 6층짜리 아파트에서 한국인 여성이 살해당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Yellow Face가 영어권에서 한국인을 포함한 동양인을 비하하는 단어인 걸 생각하면 노란 장미만 봐도 연상할 수 있었다.
“문제의식이 있는 작품이네요.”
“표현 기교가 많지 않아서 실망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좋게 봐주니 다행이네.”
게리의 저택에서 <옐로우 카드>를 그리던 당시의 나는 문제의식을 드러내기 위한 작품에는 기교가 과하면 안 된다는 걸 무의식중에 알았다.
아마 아버지도 그랬을 것이었다.
그런 것까지 내게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니 굉장히 뿌듯해졌다.
“현대 미술이 표현법이나 아이디어가 굉장히 다양해서 사조를 만들기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식으로 영향을 받는 화가들을 보니 기분이 미묘하네요.”
사조를 만들기 위한 본격적인 시도는 윤예종과 아트밸리를 만들고 신인화가전을 열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들이 영향을 받은 <아라비안 오아시스> 포스터, <예술가의 눈>, 모스크바CMC 광고, <옐로우카드>는 일관적인 작품이 아니었다.
개인적인 작품 활동이었을 뿐 사조를 굳히는 데에 쏟은 활동도 아니었다.
어쩌면 나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의 사조를 동시에 만들고 있는지도 몰랐다.
현대 미술 유행에 걸맞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