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이 제일 쉬움-165화 (165/241)

165화. 아메리칸 느와르 (2)

“제 장기를 최대한으로 살리면 되죠.”

방법은 간단했다.

일단 도난당한 그림들 중 하나를 완벽히 모작해 위작 검증을 뚫고 경매에 등록한다.

그럼 작품을 비싸게 팔 생각이었던 범인들은 자신의 작품이 진품인지 위작인지 의심하기 시작할 것이었다.

비싸게 팔 생각으로 그림을 훔쳤을 테니 그게 위작이라는 게 탄로 나면 아마 크게 동요하겠지.

“그럼 자신의 작품이 진품인지 아닌지 확인해보려는 과정에서 티가 날 수밖에 없겠군요.”

“그렇죠. 차라리 진품을 들고 나타나 위작 시비를 걸어주면 좋겠지만 그럴 리는 없고…… 그래도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기다리다 보면 뭔가 입질이 올 거예요.”

리처드는 충분히 유효한 전략이라고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도 그들 얼굴을 알면 좋을 것 같은데 혹시 몽타주가 더 있나요?”

“아, 예 보여드리겠습니다.”

리처드는 조수석 앞 수납공간에서 종이 파일을 꺼내 내게 건넸다.

흑백으로만 그려진 몽타주였지만 이탈리아인 인상은 분명히 확인되었다.

“너무 믿을 순 없습니다. 목격자 진술을 토대로 받아적듯 그려놓은 게 몽타주니까요.”

적어도 입 모양과 눈빛만큼은 눈여겨볼 만했다.

사람은 누군가를 볼 때 입을 먼저 본 뒤 눈빛을 기억하는 법이었다.

입술과 눈매의 정확한 모양은 리처드의 말대로 확신할 수 없지만 거기서 나오는 인상만큼은 분명 몽타주에 담겼을 것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까 도난당한 작품을 아직 알려드리지 않았군요.”

리처드는 내가 몽타주를 살피는 동안 태블릿을 켜 13점의 그림 사진을 한꺼번에 보여주었다.

대부분 아는 작품들이었다.

이 모든 게 도난당했다는 사실 이전에, 한 미술관에 보관되어 있었다는 사실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비싼 것들이었다.

경계도 삼엄했을 텐데.

굉장히 철저히 계획하고 훔친 것임이 확실했다.

“응?”

나는 그 낯익은 작품들 중에서도 유독 낯익은 작품을 하나 발견했다.

에두아르 마네, <토르토니 카페에서>

창가에 앉아 글을 쓰고 있는 신사의 모습.

배경은 의심할 여지 없는 카페 토르토니.

나, 마네의 그림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무슨 문제 있습니까?”

“아뇨, 이 그림도 도난당했다는 건가요?”

<토르토니 카페에서>를 본 리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나같이 귀한 작품들이죠. 꼭 해결해야 할 사건입니다.”

잠시 분노가 끓어올랐지만, 의식적으로 화를 삭였다.

분노로 일을 그르치기보다는 냉철함을 유지하는 게 나았다.

“놈들을 꼭 잡아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네요.”

“......예?”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이미 충분한 동기가 더욱 강해졌다.

나의 전생이 마네였다는 걸 모르는 리처드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굳이 더 캐묻지는 않았다.

“이 사건 공개수사가 아니라고 했죠? 지금 이 일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나요?”

리처드는 턱을 매만지며 몇 명 꼽아보더니 대답했다.

“그 지역 경찰들은 일단 알고 있고, 기자들에게도 정보가 새서 기사는 다 난 상태입니다. 하지만 가드너 측에서는 저희 인터폴에만 사건을 맡기고 언론 인터뷰에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죠.”

인터폴이 어떻게든 작품을 빨리 찾아주기만 한다면 가드너 미술관 이름에 오명을 남기지 않아도 된다는 계산 때문일 것이었다.

“아까 말씀하신 대로 그림 한 점 모작해서 혼선을 빚어보는 방향으로 가는 겁니까?”

“아니요. 생각이 바뀌었어요.”

호랑이는 토끼 한 마리를 잡을 때에도 최선을 다한다고 했다.

리처드는 나의 말을 기다리다 물었다.

“그럼 어떻게……?”

***

-에두아르 마네의 그림을 비롯한 명작 13점을 도둑맞은 게 아니냐는 의혹에 휩싸였던 가드너 미술관이 전시를 돌연 중단한 지 일주일 만에 다시 관람객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증거를 남기지 않는 일명 ‘유령 절도’ 의혹은 일단 벗었는데요, 전시 일정을 중단했던 이유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려진 바가 없어 여전히 세간의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명작 망실 의혹에 몸살 앓던 가드너 미술관, 일주일 만에 그림들 보니 ‘멀쩡’]

[비어 있던 그림 13점 감정 결과 전체 원본으로 밝혀져…… 경찰, “수사 의뢰 받은 적 없어”]

가드너 미술관은 내가 모작 13점을 보내주자마자 바로 전시를 재개했다.

모작을 원본인 척 전시한다는 데에 조금 불편한 기색을 보였지만, 유사도가 모두 100%에 수렴하는 감정 결과를 확인하곤 주저 없이 수사 협조에 응했다.

그림을 도둑맞은 일은 알리고 싶지 않지만, 관람객을 기만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나나 리처드도 관람객을 기만할 생각은 없었다.

그림을 되찾는 데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과감하게 밀어붙일 뿐이었다.

리처드는 가드너 개관 기사가 쏟아져나오자마자 범인들에 대한 오렌지색 수배를 내렸다.

조금 특수한 국제 수배 방식으로 말이다.

전 세계에 있는 미술품 감정 연구소와 큰 거래소 등등 미술품을 취급하는 대부분의 조직에만 협조 요구를 전달했다.

그리고 잃어버린 13점의 그림과 유사한 작품이 발견되면 바로 인터폴에 자료를 공유하게 조치했다.

가드너 미술관과 언론, 시민들 모두가 나의 모작을 원본으로 알고 있으니 범인들이 생각해두었던 가격으로 원본 그림을 거래하기는 불가능해졌다.

거래소에 자신의 그림들이 원본이라고 아무리 우겨본들 누가 믿어주겠는가.

만약 원본 감정을 위해 감정소에 그림을 맡기거나 괜찮은 모작으로서 반의반 값이라도 챙겨보려 경매라도 붙이는 순간 인터폴에 그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완벽한 외통수였다.

리처드는 이제부터 정보전이 더욱 중요해졌다며 프랑스의 인터폴 본부로 복귀했다.

뭐라도 걸리는 즉시 내게 알려주겠다고 했다.

며칠 리처드로부터 소식을 기다리는 사이, 영화 <아라비안 오아시스>가 개봉되었다.

마침 착공이 완료된 사우디 전국의 영화관에서 동시 상영이 진행되었는데, 매표 수익이 대단하다고 했다.

필립 감독에 의하면 사우디에서의 성공은 당연히 확보하고 들어가야 한다고 했는데, 그것치고도 굉장히 큰 수익이었다.

상영이 끝날 때까지 사우디에서만 1억 달러 이상 벌어들일 전망이라고 했으니 필립이 제작해온 영화들 중 가장 잘된 영화라는 뜻이었다.

물론 수익금은 필립의 호주머니가 아니라 리야드 예술광장으로 돌아가겠지만 말이다.

한국에서의 수익도 굉장히 좋았다.

한국에서 꽤 잘된 편인 지난 <시간을 거스르는 자>가 필립에게 4만 달러의 수익을 안겨줬는데, 이번 작품은 6만 달러 이상의 수익을 낼 것으로 예상되고 있었다.

알리바바의 영화 <오아시스>와 사우디 예술가와의 교류가 필립에게 영감을 톡톡히 줬는지, 제법 사우디스러운 연출이 큰 호평을 받고 있었다.

나와 함께 짠 스토리 진행도 마찬가지였다.

없었던 장르를 새로 개척한 게 아니라 몰랐던 장르를 뒤늦게 발견한 것 같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만큼 사우디의 감성을 제대로 파악하고 영화를 기초부터 새로 다듬었다는 것이었다.

‘아직 개봉 일정이 남은 국가도 몇몇 되지. 이 추세로 봐서는 아마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킬 것 같아.’

더욱 쐐기를 박아야 했다.

나는 사이트에 접속해 영화제 일정을 알아보았다.

베를린, 베니스, 칸의 세계 3대 영화제 일정도 아직 남은 상태였다.

하지만 영화제 출품이 최초 공개여야 한다는 조건에 맞지 않아 출품할 수는 없었다.

계속해서 일정을 살피다가 비교적 눈에 띄는 영화제를 발견했다.

멕시코의 과나후아토라는 지역에서 열리는 ‘세르반티노’ 영화제였다.

남미의 유명 극작가 세르반테스의 이름에서 따온 영화제가 맞았다.

아직 1회 영화제였지만 중남미 최대의 문화 예술 행사로 꼽히고 있었다.

나는 즉시 필립에게 전화를 걸었다.

“감독님. 혹시 <아라비안 오아시스> 영화제에 출품할 생각은 없으세요?”

-영화제요?

필립은 생각해본 적 없는지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네, 흥행 이후에는 어차피 출품 안 해도 비평가 상 같은 건 다 줍니다. 다른 영화제 초청도 많이 들어오고 있구요.

“그중에 혹시 세르반티노 영화제도 있나요?”

-세르반티노 영화제요?

필립은 무언가를 확인해보더니 대답했다.

-아뇨, 그런 영화제는 없는데요.

이름도 처음 들어본다고 했다.

이번이 1회이니 그럴 만도 했다.

나는 필립에게 그곳에도 출품해보자고 제안했다.

중복 출품이 가능한 곳이기 때문에 마다할 이유는 없을 것이었다.

-윤 화가님이 하자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 그런데 이유가 있습니까?

“네, 일단 제3세계 영화 장르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우리 취지와 겹치는 면도 있고, 여기 스웨그 백 중에 ‘남미 크루즈 여행권’이 있는데 제가 그걸 너무 가고 싶거든요.”

크루즈 여행권을 언급하자 필립은 크게 웃었다.

-역시 평범한 대답은 안 해주시는군요. 알겠습니다. 윤 화가님만의 개인적인 사업이 있는 걸로 알겠습니다.

정말 크루즈 여행이 가고 싶어서 세르반티노 영화제에 출품하려는 건 아니었다.

<아라비안 오아시스>와 비슷한 시도를 하는 영화제라는 것도 상당히 중요한 매력점이라는 건 분명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아직 미끼를 물지 않은 명작 절도범들이었다.

‘놈들도 가만히 당하고 있을 생각은 없겠지.’

기껏 궁지에 몰아놓고 너무 많은 시간을 줘버리면 어떻게든 솟아날 구멍을 발견하게 될 것이었다.

그들이 술수를 부리기 전에 어느 정도 압박을 가해야 했다.

나는 필립과의 전화를 끊은 뒤 리처드에게 전화를 돌렸다.

***

리처드는 이탈리아 마피아의 하수인이 있는 취조실로 들어왔다.

절도, 특수절도, 폭행, 폭행치사, 살인, 마약밀수 등 건건이 꼬투리를 잡아 48시간짜리 구속수사를 며칠째 이어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어차피 무언가 나올 것 같지도 않았고, 슬슬 재판에 넘겨버릴 생각이었는데 예준에게 전화가 왔다.

‘놈들을 쥐고 흔드는 데에 좋은 무기가 될 놈이라고 했지……’

예준은 놈을 풀어주라고 했다.

그럼 조만간 범인을 잡을 수 있게 된다고.

조금 부담스러운 일이었지만 당장 중요한 건 원본이 훼손되기 전에 되찾는 것이었다.

“운 좋은 자식. 이놈 수갑 풀어주게.”

리처드가 취조실로 들어서자마자 그렇게 말했더니 수사관은 조금 주저하는 한편으로도 명령을 따랐다.

리처드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수사관이 앉아 있던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하수인을 마주 보았다.

며칠간 계속된 취조에 많이 지친 얼굴이었다.

“지금 가드너 미술관이 그림 13점을 도둑맞았다는 오명을 벗었어. 그런데 너를 그림 절도 혐의로 잡아 가둬버리면 거짓말이 들키게 되잖아? 기분 더럽지만 어쩔 수 없지. 집으로 돌아가 봐.”

리처드가 출구 쪽을 가리키며 말했지만, 하수인은 선뜻 움직이지 못했다.

“오명을 벗었다니, 어떻게 말입니까……?”

“놈들 내부 정보원들한테 돈 좀 찔러줬더니 가짜랑 바꿔치기해서 바로 가져다주더군. 각자 한 점씩 맡아서 말이야. 머저리들.”

리처드는 언급하기도 싫다는 듯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그러니까 어디 가서 입도 뻥긋하지 말아. 어차피 일당 받고 활동하는 히트맨이면 애사심 같은 것도 없을 거 아니야?”

“......”

“괜히 우리 쪽 정보원들 위험하게 만들면 가만 안 둬. 네 신변만큼은 제대로 확보해놓은 상태니까 지금 이 죄목들로 바로 감방 쳐넣을 거야. 알겠어?”

하수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황급히 취조실을 뛰쳐나갔다.

그 모습을 보던 수사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도 몽땅 구속수사로 진행했는데 아예 풀어줘 버리면 굉장히 난처해질 수도 있을 텐데요……”

“나를 누가 난처하게 하겠나? 검사 놈들? 놈들이 인터폴 총재인 나를?”

검경이야 난처해질 게 무서워 함부로 구속도 못하겠지만 리처드는 아니었다.

어차피 하수인은 문제 삼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 죄는 모두 기소하기 충분한 것들이었으니까 말이다.

리처드는 예준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알렸다.

“말씀하신 대로 했습니다. 입도 뻥긋하지 말라고 했으니…… 아마 놈들과 컨택해 다 털어놓겠죠. 있지도 않은 정보원 찾아내느라고 몸살 좀 앓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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