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아메리칸 느와르
자동차 디자인도 성공적으로 해냈다.
나중에 헬기나 비행기 디자인도 하게 될지는 모를 일이지만 이 정도면 예술적으로 시도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성공해본 듯했다.
나는 테레즈에게 전화를 걸어 투자 금액을 전부 빼달라고 이야기했다.
이번 F1 경기를 접한 발리가 바로크의 카본블랙에 관심을 가졌다.
스포츠용 운동화 밑창 고무로 쓰기에 아주 적합하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그렇게 바로크와 파트너십을 맺게 되어 바로크의 전망은 더욱 밝아진 상태였다.
때문에 테레즈는 나의 요청을 조금 의아하게 여겼지만, 내 입장에서는 계속 투자로 돈을 벌 필요는 없었다.
이젠 다른 기업에 투자하기보다는 내가 스스로 새로운 기업을 만들어야 할 때였다.
바로크에 투자해둔 돈은 이제 2300억까지 상승한 상태였다.
아트밸리 관련해 들어온 후원금도 2000억이 모였다.
그 외 부가적인 수익도 꾸준히 창출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럼 이젠 법인투자를 그만하실 생각입니까?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은요. 지금 짓고 있는 공장과 아트밸리 연구소에 직접 투자할 거예요.”
리뎀션 오브 배니티부터 시작해 황칠, 그리고 이번 천연 카본블랙까지.
계속해서 새로운 색상이 나오는 걸 보면 아직 발견되지 않은 색과 재료들은 더더욱 많을 게 분명했다.
더 기다리지 않고 내가 직접 만들어볼 생각이었다.
-어느 때보다도 가장 중요한 투자 건이 되겠군요. 꼭 성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테레즈 씨도 계속 도와주셔야 해요. 연구소가 있으면 연구진도 있어야죠. MIT에 다시 전화해서 인건비가 얼마나 들든 최고로 능력 있는 분들을 데려올 수 있게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지금 연락해보죠. 신소재 개발과 관련된 일이니 아마 다들 반길 겁니다.
테레즈는 전화가 종료되는 시점에서 주식을 모두 매도하고 MIT로 전화를 돌렸다.
그렇게 전화를 끊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보려는데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상대방은 자신을 프랑크푸르트 EU사무국장 다니엘이라고 소개했다.
-이번 F1 경기 정말 잘 봤습니다. 영화를 한 편 보는 것 같더군요. 정말로 인상 깊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리X몽의 디자인에 대해 여러 가지 찬사를 늘어놓던 국장 다니엘은 내가 ‘아르도뇌르’라는 훈장의 수상자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옛날 몽마르트의 예술 부흥 운동과 이번 F1 차량 디자인이 시상 주체에게 긍정적인 인상을 남겼기 때문이라고 했다.
“정말 영광이네요. 그런데 그 아르도뇌르라는 상이 원래는 없다고 들었는데. 새로 생긴 건가요?”
나의 질문에 다니엘은 조금 당황하더니 말을 이었다.
-네. 하지만 다른 상들과 권위는 똑같습니다. 수상하신 분들은 굉장히 명예롭게 여기시죠.
다니엘은 그것만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이번에 어떤 사람들이 이 계열의 상을 받게 되었는지 알려주었다.
수사관에게 수여되는 ‘크림도뇌르’를 수상할 리처드 잭슨 인터폴 총재를 포함해
베스트셀러 <구관조 죽이기>의 하퍼 황, 천체물리학자 갈릴레오, AI 단백질 모델링을 통해 인간 면역체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게 한 와타나베 신타로 등.
이름만 들어도 걸출한 위인들이 이번 시상식에 참여하게 될 거라고 했다.
“이번에 처음 만들어진 상이기도 하고, 모든 영역을 포함해도 첫 번째 한국인 수상자십니다. 그런 걸 다 떠나더라도 도뇌르 상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국가에서의 대우가 달라질 수도 있는 거고요……”
길게 설명하는 다니엘의 목소리가 점점 떨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내가 수상을 거절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인 듯했다.
아마 나 때문에 없는 분야의 상을 만든 것 같은데, 내가 가지 않아버리면 아마 그들로서도 큰 낭패일 것이었다.
예술가로서의 명예는 환생 이후로 6년간 계속 쫓아왔지만, 예술 외 분야에서의 정치적인 입지를 쌓는 데에는 별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인 입지는 알아서 쌓였다.
그러고 보면 앞으로 더 필요할 것도 같았다.
아트밸리를 처음 지을 때 미국인들의 반발을 받았던 걸 생각하면 정치적 입지가 영 쓸모없는 건 아니지 않았던가.
‘좀 더 큰 그림을 위해서라면 이들과의 인맥은 필수지.’
그때 이후로 유명세를 훨씬 많이 갖게는 되었지만, 다니엘의 말대로 걸출한 수상 이력이 하나 있다면 귀찮은 일 몇 가지는 덜 수 있을 듯했다.
***
도뇌르 훈장 수여식은 프랑크푸르트 EU 사무국 앞에서 이루어졌다.
각계 거물들이 참여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인파가 굉장했다.
하지만 윤예준이 참여한다는 소식 때문에 역대 시상식 중 가장 많은 사람이 모인 것이기도 했다.
기자들은 한 명씩 수상자들이 등장할 때마다 카메라를 바쁘게 움직였다.
매스컴 노출이 잦은 인물들이 아니기 때문에 기자들이 더 극성을 부릴 줄 알았는데, 그들 나름의 기준은 있는지 취재는 생각보다 조용히 진행됐다.
많은 인파에 비해 생각보다 조용하게 식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시상식이 임박했을 때쯤 멀리서 오르쉐 차량 중 최고 성능을 자랑하는 슈퍼카, ‘얼티밋 베놈’이 접근해왔다.
세계적으로 가진 사람이 별로 안 된다는 고가의 제품이었다.
기자들은 관심을 가지고 그 차를 예의주시하다가, 상석에서 내리는 예준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시끄럽게 셔터를 눌러대기 시작했다.
언론에 익숙하지 않은 뻣뻣한 인사들만 대하던 와중이었다.
그나마 기자들과 면식이 있는 예준이 반가운 모양이었다.
“유럽 최고의 예술가에게 주는 상을 받게 되셨는데 기분이 어떠십니까?”
“최초의 한국인 도뇌르 훈장 수상자인데 한국에서는 어떤 혜택을 준다고 합니까?”
수많은 질문들이 쏟아졌지만. 질의응답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곧 시상식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한국인 최초로 수상을 하게 된 예준이 단상에 올랐다.
“리틀마네라는 별명으로 처음 이름을 알린 뒤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문제의 화가, 영광의 제 1회 아르도뇌르 수상자, 윤예준 화가입니다.”
시상자로 나선 다니엘은 예준의 업적을 하나씩 거론하며 사람들의 박수를 유도했다.
최대한 예준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한 일이었다.
그의 기분이 좋아져야만 유럽에 남아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니엘은 쐐기를 박았다.
“한국과 미국, 사우디, 그리고 최근엔 F1 레이싱까지. 유럽에서 시작해 유럽으로 다시 돌아온 윤예준 화가는 이제 유럽 사람임에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앞으로 더 많은 활약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이 훈장을 수여합니다.”
다니엘은 예준의 가슴께에 훈장을 걸어주고 악수를 건넸다.
다니엘과 악수를 나눈 뒤 연단에 서서 마이크를 잡은 예준은 수상소감을 전하기 시작했다.
“정말 예상치 못한 상인데, 그냥 상만 해도 굉장히 큰 기쁨이었겠지만 시상해주신 다니엘 국장님의 칭찬 하나하나가 더 감격스럽게 들리는 것 같습니다.”
다른 수상자들은 예준의 모습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기자들은 정신없이 예준이 하는 말을 받아적었다.
“그래도 제가 유럽 사람이라는 말은 정중하게 사양하고 싶습니다. 저는 한국 사람이고, 앞으로 유럽에서 활동하더라도 한국인 예술가 윤예준의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훈장 감사합니다.”
예준이 한국식으로 허리 굽혀 인사하자 사람들은 박수를 보내주었다.
지켜보던 다니엘은 나름대로 만족했다.
유럽이 미국처럼 이민자에게 개방적인 곳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이번 시상을 통해 예준의 유럽 활동은 완전히 자유로워졌을 테니까 말이다.
***
나의 수상 이후로 다른 여러 명사들의 훈장 수여가 마무리되면 시상식이 종료되었다.
그렇게 자리를 정리하고 운전기사가 기다리는 스포츠카로 돌아가려는데 누군가 다급히 내게 다가왔다.
“인터폴입니다. 잠시 이야기 나눌 수 있을까요?”
인터폴이라면 국제경찰을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갑자기 협조를 요청해오는 경찰의 장엄한 목소리에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앞서 크림도뇌르 상을 받았던 인터폴 총재 ‘리처드 잭슨’이었다.
“아, 놀랐네요. 체포되는 줄 알고.”
“예? 아, 이거 죄송합니다. 이름을 말해서는 못 알아보실까 봐 소속부터 소개한다는 게.”
농담 삼아 한 말이었지만 리처드는 다급히 손에 든 인터폴 배지를 주머니에 넣었다.
식이 끝나자마자 접근해왔으니 아마 수여식이 진행되는 동안 계속 내 쪽만 보고 있었을 것이었다.
어쩐지 등에 정체불명의 시선이 계속 꽂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내가 용건을 묻자 그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더욱 목소리를 낮췄다.
“긴히 드릴 부탁이 있는데 장소가 적절치 못합니다. 혹시 시간 조금 내어주실 수 있나요?”
어두운 안색과 낮은 말투만 놓고 봐도 뭔가 중요한 일이 터졌다는 건 눈치챌 수 있었다.
퓌트니도 그렇고 지난번 무함마드도 그렇고, 누군가 내게 대뜸 부탁을 해오는 경우 그림과 관련된 일이 대부분이었다.
“네, 그러죠.”
“감사합니다. 그 차는 너무 화려하니 잠시 세워두시고, 제 차로 이동하시죠.”
나는 운전기사에게 그만 돌아가 보시라고 말한 뒤 리처드의 차에 올라탔다.
그는 프랑크푸르트 교외로 이동하는 동안에도 계속 사이드미러와 백미러를 살피며 사주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굉장히 삼엄한 경계였기 때문에 미행이 붙었어도 금방 탄로 났을 듯했다.
그렇게 이동 중에는 운전에만 온 신경을 기울였다.
그는 어느 한적한 길 한복판에 차를 세운 뒤에야 본격적으로 용건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최근에 미국 동부에 있는 ‘가드너’ 미술관에서 작품이 도난당했습니다.”
리처드는 미국에서 그 도난 사건을 수사하고 있었는데, 대대적으로 알려지면 안 되는 일이라 갑작스러운 수여식 일정도 불참하기 어려웠다고 했다.
그가 참여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뜻이었으니까 말이다.
“도대체 얼마나 비싼 작품이기에 비밀리에 진행하고 계신 거예요?”
“굉장히 비쌉니다. 값도 값이지만 그 역사적 의미도 큰 작품이죠. 총 13점이나 사라졌습니다.”
13점의 작품이 한 번에 도난당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퓌트니 때보다도 더한 일 아닌가.
심지어 퓌트니 때는 그 한 작품을 빼내기 위해 수많은 장치를 해둔 뒤에야 범행을 성공할 수 있었지만, 13점은 무리였다.
“엄청난 일이죠. 수사를 해도 가닥이 잡히지 않습니다. 범행 당시에도 아주 귀신 같았고요. 범인은 한 사람이 아닙니다.”
“들고 나르기가 어려워서라도 조직적으로 가담했겠어요.”
리처드는 범행을 계획한 조직은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탈리아 마피아라고 했다.
증거도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들의 집을 샅샅이 뒤진 결과 목격자 증언으로 제작한 몽타주와 일치하는 조직원 하나를 체포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럼 그 사람을 취조하면 되겠네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도둑질이면 도둑질, 살인이면 살인, 딱 지시받은 일만 이행하는 히트맨에 불과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더군요.”
과학수사를 의뢰해도 지문 한 점 나오지 않았고 그 몽타주 증언 말고는 얻은 정보가 하나도 없었다.
그림이 이탈리아로 반출되었는지 아닌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조직원 취조로부터 아무것도 듣지 못한 인터폴은 이제 공개수사도 고려하고 있었다.
가드너 미술관 입장에서는 큰 손실이 생기긴 하겠지만 말이다.
“사우디에서 태국으로 반출된 보물을 찾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게 완전히 수사의 영역이기는 하지만 혹시나 도움을 받을 순 없을까 싶어서 선뜻 말씀드린 겁니다.”
위작 감정이나 복원 건도 아닌 일이었다.
하지만 놈들을 잡는 데에 내가 도움을 줘야만 한다는 건 확실했다.
가드너 다음은 솜니움 미술관이 타겟이 될지도 몰랐으니 말이다.
‘곧 10월이야. 미술관이 완전 개방되고 혼잡하기까지 한 할로윈의 솜니움이라면 너무 털기 좋은 빈집 아닌가.’
“당연히 도움을 줘야겠네요. 잡아야만 하고, 잡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잡을 수 있을 것 같다니요?”
나의 수락에 한도의 한숨을 내쉬던 리처드가 반색하며 물었다.
“범인을 잡을 좋은 방법이 생각났거든요.”
“예? 그 방법이 뭡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