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이 제일 쉬움-162화 (162/241)

162화. 페인트머니 (2)

직원은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건넸다.

오르쉐라는 상호 아래로 ‘디자이너 유리’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하지만 이름을 보고도 딱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당시 통성명은 안 했었죠. 지난 LA 올림픽 때 스포츠웨어 브랜드 빅토리에 임시 고용된 담당 디자이너 중 한 사람으로 몇 가지 선수복을 디자인했던 사람입니다. ‘Kokobab’에서 인사 한 번 뜨겁게 나눴었죠?”

그제야 기억났다.

바지락탕을 먹으며 발리 험담을 하던 그 빅토리 직원들 중 한 사람이었다.

“아……! 알죠. 기억났네요.”

“다행이네요.”

“그런데 왜 지금은 오르쉐에…… 혹시 캐나다 브레이크 댄스팀 사건으로 불이익을 보신 건가요?”

유리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그건 빅토리 사업팀과 기성품 생산부 과실이지 저와는 관련 없는 일이에요. 그냥 제가 그만뒀죠.”

“무슨 일로요?”

“어디까지나 외주 디자이너였고, 제 꿈은 다양하게 활동하는 기능성 산업디자이너였어요. 빅토리에서는 충분히 활동했으니 이번엔 자동차를 디자인해볼 생각인 거죠. 더 큰물에서 놀고 싶은 마음인 거예요.”

유리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지난번에 만났을 땐 그도 흥분한 상태라서 그랬겠지만, 현재의 그는 보다 여유로워 보였다.

“이번 경기를 크게 만드는 건 제 역량에 달린 문제 아니겠어요? 계속 새로운 걸 시도함으로써 제 영역을 넓혀나가는 거죠.”

“아. 저와 생각이 비슷하시군요.”

“네. 윤 화가님이 제게 그러셨죠. 진정한 예술가는 새로 그려야 할 그림에 주먹구구식으로 덧그리지 않는다. 빅토리에 덧그리는 게 아니라 오르쉐에 새로 그리기를 선택한 겁니다.”

그날 나는 유리를 직접 가리켜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건 농구화를 터뜨린 빅토리의 과오에 대한 이야기였지 유리에 대한 지적이 아니었다.

하지만 유리에게도 스스로가 생각하는 과오랄 게 있는 것이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나로서 알 도리가 없었지만, 확실히 빅토리에 묻어두고 오기는 한 모양이었다.

그는 조금 홀가분해 보였고, 인상이 새로워졌다.

“그리고 이번에 준비하는 대회는 결코 작은 대회가 아닙니다. 괜히 오르쉐가 40년 만에 출전하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그런가요?”

“네. 경기장에는 수용인원이 넘치도록 모일 거예요. 라이브로는 400만 명 이상이 예상되구요. 지난 LA 올림픽 때 사용된 모든 경기장 관객 수를 합쳐도 이만한 크기는 안 나올 겁니다. 트랙이 넓고 길어서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거죠. 전 세계 생중계도 물론 진행되고요.”

유리는 오르쉐가 무리해서라도 이 대회에 참가하려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거라고 설명했다.

“무리라니. 그래도 오르쉐라면 세계적으로 인지도가 있는 탑급 브랜드로 알고 있는데요.”

“그렇죠. 하지만 F1은 조금 특별합니다. 계속 참가해 온 투어링카와는 다르거든요. F1을 위한 엔진을 생산하지 않은 지 벌써 40년이 됐으니까 많이 뒤처져 있을지도 모르는 거예요.”

유리는 오르쉐의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그 가능성을 짚고 넘어가는 걸 잊지 않았다.

오르쉐는 40년 전 F1 경기에 출전해 압도적으로 1위를 했다.

그 뒤로도 수차례 참가해 단 한 번도 1위를 놓친 적이 없었다.

당시에도 디자인으로 수많은 조롱을 받았지만 엔진 성능만큼은 확실히 알린 것이었다.

그 뒤 1985년 경기를 마지막으로 오르쉐 CEO는 더 이상 F1 경기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여태까지 해온 1위 전적만 보더라도 오르쉐 엔진은 평생의 증명을 한 셈이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후 참가는 여태까지 없었고, 그 일화가 유명해져 오르쉐가 급성장할 수 있었다.

지금 오르쉐는 그 패기의 일화를 깨고 다시 도전하려는 것이었다.

이번 F1 경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었다.

“임원진들은 지금 밤잠을 설치고 있어요. 오르쉐다운 우승이라면 단연 압도적인 1등이어야만 하는데 지금은 1위를 할지 말지도 불투명한 상황이니까요. 일단 카본블랙으로 타이어 성능은 올렸으니 한시름 놨지만요.”

“옛날 모습을 보여주더라도 옛날 디자인은 보여줄 수 없겠네요.”

내가 한 마디 얹자 유리가 작게 웃었다.

“오르쉐에 대해 자세히 알고 계시네요. 맞아요. 악명은 좋을 게 하나도 없죠. 드라마틱한 반전의 토대가 되지 않는다면 말이에요. 포토샵으로 대충 평면 프레임만 맞춰서 인쇄해도 오르쉐 경기차량보다는 멋진 디자인을 만들 수 있겠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었을 정도니까.”

“모욕적인데요?”

“그렇죠. 하지만 이제 윤 화가님께 디자인 의뢰가 전달됐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겠죠?”

물론이었다.

처음 해보는 시도였지만 사람들의 미의식은 특별할 것 없었다.

캔버스에 그리든 옷을 디자인하든, 자동차를 디자인하든 말이다.

나와 유리, 막스는 오르쉐의 레이싱 모델, ‘오르쉐 911 하이엔드 타이칸’이라는 차량을 확인해보러 갔다.

도색을 하지 않은 차체를 조립해둔 상태라 완전한 잿빛이었다.

그 자체로도 봐줄 만했지만, 아마 경기 때엔 번쩍번쩍하게 커스텀한 차량들이 수도 없이 출전할 예정이었다.

이 상태로 1등을 해도 별로 눈에 띄지 않을 것이었다.

“차체 디자인은 생산 공정에서 굉장히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진작 디자인을 마쳐놓은 상태입니다. 전문가들과 함께 며칠을 고심해 만든 디자인이니 아마 다른 차량들과 비해서 특별히 해로운 구석은 없을 거예요. 바퀴도 좋고요.”

유리는 굳이 바퀴를 한 번 더 언급하며 막스를 향해 미소 지었다.

“이 상태에서 딱 표면 디자인만 하면 된다는 거잖아요?”

“네. 지금 충분히 한번 살펴보세요.”

나는 차량으로 가까이 이동해 디자인이 들어갈 수 있는 부분은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차량 전면을 차지하고 있는 프론트윙과 바퀴의 바람 간섭을 최소화하기 위해 이어지는 휀더.

리어윙과 노출된 레이서의 헬멧까지.

유리의 설명을 들으며 캔버스 사이즈를 다 파악해두었다.

“뭔가 떠오르는 게 있으신가요?”

“네, 그러네요.”

그렇다고 대답하자 막스와 유리는 큰 관심을 가지며 내 앞으로 모여 섰다.

“아직 아이디어가 떠오른 건 아니고, 어떻게 디자인해야 할지는 가닥이 잡히네요.”

“어떻게 디자인하실 건데요?”

“으음……어떤 디자인이 대중적인가 하는 고민부터 시작해봐야 할 것 같아요. 여러분은 자동차 경주를 볼 때 어떤 차량에 눈길이 갈 것 같으세요?”

막스는 고민해보더니 대답했다.

“특별히 응원하는 차가 없다면 1등하고 있는 차량을 보겠죠.”

“저도 그래요. 출발선에 설 때부터 1등할 것 같은 차가 있으면 다들 그쪽을 볼 것 아니에요? 가장 빨라 보이는 차. 그래서 1등할 것 같은 디자인을 해놓는 게 중요한 거예요.”

디자인이 좋더라도 시선을 잡아끌지 않을 거라면 잿빛 톤 하나로 통일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시선을 잡아끌더라도 별로 1등할 것 같지 않다면 사람들은 그 차량을 오래 봐주지 않을 것이었다.

눈에 띄면서도 빨라 보여야만 하는 것이었다.

“듣기로 레이싱카가 시속 350km의 속도로 달린다던데. 그 속도감이 느껴지는 디자인을 해놓으면 될 것 같아요.”

“오호…… 그렇군요.”

“그래서 그런데 제가 저걸 직접 한번 타봐야 하겠는데요.”

나의 말에 놀란 막스와 유리가 벙찐 얼굴이 되었다.

***

내가 차량을 직접 운전하면 안 될 이유는 법적으로나 경기장 규칙으로나 협회 안전수칙으로나 굉장히 많이 들 수 있었다.

다행히 오르쉐 소속 프로 레이서에게 부탁해서 합승했다.

덕분에 속도감을 확실히 체감할 수 있었다.

‘전신이 강하게 조이는 느낌이었어. 그런데도 해방감만큼은 형언할 수가 없었지.’

시속 350km면 비행기보다는 느린 속도였다.

하지만 지형지물과 가장 가까운 상태로, 바닥에 붙은 채 이동한다는 게 주는 속도감이란 건 절대 무시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불꽃 튀는 속도감이었다.

그 속도감을 경험해보는 순간 디자인이 머릿속에 완전히 그려졌다.

오르쉐가 마련해준 작업실에 들어오자마자 경기 차량 안에서 구상한 디자인을 바로 도면에 옮기기 시작했다.

휠커버는 빨강, 프론트윙을 포함한 차체 하단은 주황, 레이서 머리 높이의 상단에 가까울수록 노란색에 가깝도록 디자인했다.

이미 달리고 있는 차를 언뜻 보듯 흐리게 말이다.

그 색의 조합만으로 불꽃을 연상할 수 있게 만들었다.

‘바퀴의 카본블랙과 안 맞아.’

바퀴 색은 순수한 검정이었지만 내가 디자인한 차체 색은 너무 뻔한 불꽃색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휠커버의 붉은색은 이대로 유지해도 돼. 문제는 주황과 노랑인데……’

나는 주황색 물감에 검정 물감을 조금씩 섞어 톤을 낮춰보다가 문득 사우디에서 사용해본 황칠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때 끈질기게 활용해봐서 바로크 물감과의 배합법도 터득한 상태였다.

황칠에 붉은 물감을 조금 섞었더니 조금 진한 주황빛의 황금이 탄생했다.

거기에 카본블랙을 섞어 활용하면 자연스러운 불꽃을 연출할 수 있을 것이었다.

‘좋아. 이건 도안에 그려볼 필요도 없어. 바로 차량에 그린다.’

나는 무함마드에게 전화해 리야드 별궁에 맡겨둔 황칠을 ‘특별배송’해달라고 요청한 뒤 물감을 들고 경기장으로 나갔다.

다량의 황칠을 실은 무함마드의 전용기는 그렇게 몇 시간 뒤 경기장 한가운데에 착륙했다.

***

“윤예준 화가가 지금 독일에 있다는 겁니까……?”

같은 시각 프랑크푸르트의 EU 사무국에서는 예준에 대한 이야기가 긴밀히 이루어졌다.

그가 독일에 들어와 있다는 건 이미 모두 알고 있었다.

이유는 몰랐다.

그가 독일 회사인 바로크의 지분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회사 확인차 방문했다고만 여겼을 뿐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무함마드 카프탄의 긴급 비행 신고를 계기로 예준의 입국 목적을 알게 되었다.

예준은 바로크가 아니라 오르쉐와의 협업을 위해 입국해 있는 상태였다.

그것도 곧 있을 포뮬러1 프로레이싱과 관련한 일로 말이다.

“F1 경기의 신화를 쓴 오르쉐와 윤예준의 조합이라니. 이건 성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르쉐의 유일한 단점이 디자인이었는데…… 아마 크게 한 건 하겠군요.”

“유가로 골치깨나 썩고 있는 판이었는데 이런 호사도 다 있네요.”

직원들은 오르쉐와 윤예준의 협업을 기대하는 한편으로도 불안감을 나누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세계 어디든 가는 사람입니다. 그 위험한 사우디도 다녀왔죠. 오르쉐와의 협업이 끝나면 다음엔 북극을 가더라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맞아요. 안 그래도 지금 전 유럽이 이렇게 힘든 시기 아닙니까?”

직원들은 예준이 한국과 미국에서 얼마나 큰 성과를 거뒀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최초 활동은 프랑스라고 할 수 있었다.

몽마르뜨 언덕을 거리 예술가들의 성지로 바꿔놓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 활동을 끝으로 그가 유럽을 떠난 것에 대해 직원들은 아쉽게 생각하고 있었다.

특히나 미국은 유럽 인재들이 주로 유실되는 블랙홀 같은 대륙이었다.

계속 이렇게 눈 뜨고 코 베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아직 유럽엔 윤예준이 필요했다.

유가 상승으로 한참 삭막해진 유럽이었다.

바로크의 송유관으로 유럽을 오일쇼크에서 완전히 구원해줄 수 있을지도 몰랐고, 또 어쩌면 아트밸리처럼 거대한 예술공동체를 유럽에 만들어줄 수도 있었다.

“강제로 유럽에 붙잡아둘 수도 없는 일. 윤예준 화가에게 유럽에서의 활동이 얼마나 매력적인지를 알려주면 될 겁니다.”

“어떻게요?”

먼저 제안한 직원이 아이디어를 냈다.

“좋은 상을 주는 건 어떻습니까? 몽마르뜨 일로 EU가 윤예준에게 해준 게 뭐가 있습니까? 레지옹도뇌르 같은 명예로운 훈장을 주면 그도 섭섭해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하긴.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줄 수 있는 훈장이 있나요? 레지옹도뇌르는 군인에게만 줄 수 있고, 남은 건 크림도뇌르인데 윤예준 화가는 경찰도 아니잖습니까?”

다른 직원의 그 반박을 끝으로 이야기는 오래 수렁에 빠졌다.

“그럼…… 윤예준 화가를 위한 상을 만들어서 주면 되겠죠. 아르도뇌르라는 이름이면 될까요? 상 받을 사람은 이렇게 버젓이 있는데 시스템이 없다고 나 몰라라 할 순 없으니까요.”

직원들은 마지막으로 국장이 내놓은 대안을 굉장히 반겼다.

국장이라면 아르도뇌르라는 훈장을 충분히 만들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바쁜 분이라 일이 끝나자마자 유럽을 떠나실 수도 있으니 바로 수상할 수 있게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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