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이 제일 쉬움-161화 (161/241)

161화. 페인트머니

나는 기쁜 마음으로 바로크 주가 변동을 확인했다.

테레즈와 바로크 주식을 유지하기로 합의한 지 열흘도 되지 않아 바로크의 주가는 거짓말처럼 뛰었다.

아예 다른 기업이 되었다고 봐도 무방한 정도였다.

물감을 제외하면 최종 소비자를 직접 만나는 기업도 아닌데, 현재는 유럽에 있는 기업들 중 가장 유명한 회사가 되었다.

카본블랙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게 바로크에서 개발되었다는 사실에 놀라는 사람이 많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절반은 실제로 카본블랙을 개발해준 바로크의 몫, 나머지 절반은 송유관을 통해 석유를 공급해주고 바로크의 카본블랙을 완벽하게 홍보해준 모스크바CMC의 몫이었다.

아무래도 이번 송유관 일로 인해 두 기업의 관계가 더욱 돈독해진 것 같았다.

나는 영화 <아라비안 오아시스>가 개봉될 때까지는 사우디에서 대기하고 있으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막스에게 전화가 걸려왔고, 다시 아트밸리로 돌아가려던 나의 행선지가 돌연 변경되었다.

“네, 여보세요.”

-바로크의 막스 밀리엄입니다, 윤 화가님. 소식 접하고 계신지 여쭤보고 싶어서 전화 드렸습니다.

아랍에미리트 반군사태 이후로 주가가 1000%나 상승했다는 소식도 이미 테레즈에게 들은 상태였다.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는 막스였지만 전혀 들뜬 기색도 없이 차분한 말투였다.

“송유관도 제 역할을 했지만, 카본블랙 개발은 우연이 아닌 것 같던데. 사람들은 시기를 잘 만났다고 생각하겠지만 대표님도 고생이 많으셨겠더라구요.”

-아닙니다. 시기를 잘 만난 게 맞죠. 하지만 윤 화가님의 첫 투자가 없었다면 이 시기까지 기다리지도 못했을 겁니다. 어차피 기회를 잡지도 못했겠죠. 자본금부터 모스크바CMC와의 파트너십까지…… 무엇 하나 저희가 직접 이룬 게 있나요.

애초에 투자금에 기댈 수밖에 없는 게 주식회사였다.

그가 얼마나 자신감을 가지고 사업에 임하는지는 알고 있으니 이번엔 그 겸손함만 봐주기로 했다.

-제가 일전에 사업 계획서를 보내드린 것 같은데, 계획만 거창하고 시행하지 못하는 기업이 더 많잖습니까? 저희도 그럴 가능성이 더 컸고요. 저희의 무엇을 믿고 그런 큰돈을 선뜻 투자해주신 겁니까?

송유관을 연결에 다양한 재료를 생산하는 화학기업으로 거듭나겠다는 계획서였다.

“그 계획서가 보통보다 구체적이었던 것도 있고요. 울트라마린 물감을 개발해낸 역사만 생각해도 쉽게 과소평가할 순 없었어요.

-그렇군요.

“그걸 개발할 기술력이 있느냐 없느냐는 별개의 문제죠. 그걸 개발할 수 있으려면 소비자들의 니즈를 잘 파악할 수 있어야 하고, 또 다른 어떤 기업보다 대중화에 열망이 강해야 하는 거잖아요. 그것만 놓고 생각해봐도 실패할 투자처로는 안 보였죠.”

내가 보기에 바로크는 쉽게 만족하는 기업으로 보이지 않았다.

한 번 물감 값을 드라마틱하게 낮춘 뒤로도 계속 원가 절감에 힘을 쏟지 않았던가.

물감을 위해 비싼 송유관을 매립하다니.

그게 가능한 건 바로크뿐이었다.

-그래도 사업은 저보다는 윤 화가님이 더 소질 있으신 것 같더군요.

“아, 사우디 소식 들으셨군요.”

-당연하죠.

막스는 그제야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번 사우디 일도 있고, 한국의 예술종합학교, 미국의 아트밸리도 지금 세계적으로 유명한 예술인 공동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쪽으로 납품되는 물건값을 아예 무수익으로 돌려볼 생각입니다.

이미 바로크와 물감 계약을 맺은 상태였다.

바로크 쪽에서 물감 개발에 재투입할 수 있도록 제값을 주고 물감을 받아왔는데, 이젠 아예 원가와 생산가만 받고 팔겠다는 것이었다.

“괜찮으시겠어요? 좋은 뜻으로 하시는 일이라는 건 알지만 그렇게 무료 나눔만 해서는 끝도 없을 텐데요.”

-괜찮습니다. 어차피 물감 외 수익을 많이 내고 있는 상태고, 저희 가치를 알아봐 준 예술집단에는 가장 저렴하게 제공해줘야죠. 오히려 큰 빚을 푼돈으로 퉁치는 기분이라 마음에 걸립니다.

처음부터 그의 그 사업 철학을 고평가했던 것이었다.

사양하지 않고 감사히 받기로 했다.

-아, 그리고. 아직 사우디에 계십니까? 많이 바쁘신지……

“아뇨. 그렇진 않은데. 그런데 왜요? 뭐 제안하고 싶은 게 있으신가요?

막스는 바로크가 세계적인 자동차 기업 ‘오르쉐’와 카본블랙 계약을 체결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오르쉐는 나도 알고 있는 자동차 브랜드였다.

세계 어느 도로를 가보아도 오르쉐의 마크를 달고 있는 자동차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만큼 대중적이었지만, 또 비싼 자동차도 굉장히 많이 만들었다.

무함마드도 오르쉐 차량 몇 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굉장히 오랜만에 F1 경기에 출전하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F1 경기라니요?”

-윤 화가님께서 생각하시는 일반 차량들 말고, 오로지 빨리 달리기 위해서만 디자인된 차량으로 참가하는 레이싱입니다. 흔히 레이싱카라고 하죠.

그의 말에 의하면 오르쉐는 과거에 딱 한 번 F1 경기에 참가한 이후로는 계속 일반 차량을 생산하는 데에 쏟아왔다고 했다.

성능도 좋고 디자인도 우수해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하지만 그 좋은 평가도 카레이싱 경기장에 있어서는 180도로 바뀌었다.

-시판된 일반 차량 홍보 목적으로 투어링카 경기에는 여러 번 나가보았더군요. 투어링카는 실제 차량과 같은 성능, 같은 차체에 겉 디자인만 바꿔서 참가하는 경기인데, 매 경기 때마다 오르쉐는 디자인 면에서 무수한 혹평을 받아왔습니다.

매번 출시하는 모델마다 자랑할 만한 기능이 다르기 때문에 경기 중 적절한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게 기업 입장에서는 좋았다.

예컨대 순간 가속력이 좋다면 계속 감속과 가속을 거듭하는 방식으로 승부와는 멀어지되 모델 홍보만은 확실히 하는 것이었다.

그 퍼포먼스 기획과 센스는 우수했지만, 디자인이 영 아니라는 것이었다.

“얼마나 별로길래 그럴까요?”

-완전히 못 쓸 정도는 아니지만, 결코 좋다고는 할 수 없는 디자인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중요한 건 디자인이 아니라 성능이라는 윗사람 마인드가 한몫했겠죠. 그래서 사내 경기용 차량 디자이너가 없어 왔던 게 가장 큰 문제일 겁니다. 대중적으로 잘 먹히지 않는 친환경 마케팅을 밀어붙이는 식이었습니다.

차량 사고가 굉장히 많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건 성능이 맞았다.

하지만 오르쉐라는 브랜드 입장에서는 이미지가 더 중요한 것 아닌가.

-이번에 40년 만에 F1 경기에 출전하게 되면서 새로 디자인 담당자도 뽑았다고 합니다. 과감하게 혁신할 각오가 된 거죠. 그래서 윤 화가님과의 협업을 부탁하던데, 혹시 참여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카본블랙 타이어로 바로크와 연을 튼 뒤 그것으로 나의 디자인까지 받아내겠다는 셈인 듯했다.

막스 말대로 기존 이미지를 완전히 벗어던지기 위해 충분히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는 느껴졌다.

‘자동차 디자인이라……’

한 번도 해본 적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 흥미가 생기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또 어쩌면 이 일을 계기로 몰랐던 예술 세계를 발견하게 될지도 몰랐다.

“이번에 개발하셨다던 카본블랙을 한번 보고 싶었는데, 마침 잘됐네요. 참여하겠다고 전달해주세요. 타이어도 좀 준비해 주시구요.”

-도움을 주신다니. 다시 한번 영광입니다.

막스는 휴대폰 메시지로 독일 라인란트-팔츠주의 뉘르부르크에 있는 서킷 주소를 보내주었다.

그렇게 나의 다음 행선지가 결정되었다.

***

나는 사우디 스튜디오 사람들과 급히 작별인사를 한 뒤 바로 독일로 들어왔다.

무함마드는 언제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느냐고 물었다.

차량 디자인만 마치면 가게 될 거라고 했는데, 사실 확실하지는 않았다.

아랍으로 갈 때까지만 해도 결혼식만 마친 뒤 바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독일 뉘르부르크링의 F1 경기장에 도착했다.

굉장히 넓은 부지에 조성된 트랙이었는데, 미들타운에서 방문해본 적 있는 미식축구 경기장의 몇 배는 되어 보이는 크기였다.

특히나 신기한 건 그곳을 주행하고 있는 차량들이었다.

‘정말 일반 차량과는 느낌이 다르구나.’

막스는 F1이 ‘오로지 속도전을 통한 엔진 성능과 레이서의 기량만 겨루는 경기’라고 했다.

오르쉐가 이번에 1등을 하지 못한다면 느린 차를 만든다는 오명만 쓰게 될 것이었다.

그만큼 속도가 중요하기 때문인지, 차량들은 꼭 필요한 뼈대만 남기고 모두 떼어내 놓은 듯한 모습들이었다.

바퀴와 바퀴를 잇는 휠이 다 들여다보일 정도였다.

‘마치 뼈만 남은 모양새야. 꽤 까다로운 디자인이 되겠어.’

내가 디자인할 수 있는 부위의 차체가 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지, 그 기능이 무엇인지 고민하며 주행을 지켜보고 있는 사이 한 젊은 남성이 내게 다가왔다.

“윤 화가님, 오셨군요!”

실제로는 처음 만나보는 막스 밀리엄이었다.

그도 내가 많이 자랐다고 생각한 것인지 놀란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기사로 몇 번 뵙기는 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훤칠하시네요!”

“하하하. 감사합니다.”

나는 먼저 오르쉐 차량의 기본 디자인에 대해 물었다.

막스는 다른 F1 레이싱 차량들처럼 골격만 남은 T자형 자동차인 건 다르지 않다고 했다.

디자인을 수정하기 전 모델이 지금 경기장에 있으니 천천히 확인시켜주겠다고 했다.

“아, 그보다. 카본블랙 타이어를 보고 싶다고 하셨죠. 따라오시죠. 어차피 오르쉐 담당 디자이너와 약속한 장소도 그 근처입니다.”

나는 막스와 함께 이동용 카트에 올라 약속 장소로 이동했다.

그곳엔 레이싱 차량용 바퀴가 굉장히 많이 깔려 있었다.

“와. 여기 왜 이렇게 바퀴가 많아요?”

“경기 특성상 바퀴 마모가 굉장히 심하거든요. 그래서 거의 한두 바퀴마다 한 번씩 바퀴를 갈아줘야 하기 때문에 이렇게 구비를 해놓는 겁니다.”

막스는 대신 이번 카본블랙을 이용한 오르쉐의 타이어는 강도도 높고 접지력도 우수해 사고와 속도 저하에 높은 이점을 발휘한다고 설명했다.

사고가 나지 않는다면 레이서의 실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속도 저하가 심하지 않다면 엔진 성능을 더 오래 보여줄 수 있었다.

바로크의 카본블랙 타이어가 이번 레이싱에 굉장히 큰 기여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여기 있는 게 오르쉐의 카본블랙 타이어입니다.”

막스는 타이어 하나를 굴려 빛이 잘 드는 경기장 바깥으로 나갔다.

나는 햇빛에 비친 타이어 표면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어떻습니까?”

“......음. 광택이 없는데 굉장히 투명한 느낌이네요.”

황칠만큼 신기한 색이었다.

일반적으로 블랙이라는 색깔은 다른 여러 색깔들을 섞어서 만드는 것이었다.

거기 어떤 재료가 더 많이 들어갔느냐에 따라 아이보리 블랙, 램프블랙 등 미묘하게 톤이 달라지는 것이었다.

마치 그 색이 극한으로 어두워져 검은색에 이른 듯이 말이다.

하지만 이 카본블랙은 오직 블랙으로서 순수하고 투명했다.

블랙의 원석을 보는 기분이었다.

“이거 안료로도 사용할 수 있나요?”

“물론이죠. 범용성도 있는 편이라 프린트기용 잉크로는 이미 가공하고 있습니다. 곧 물감도 나올 테니 기대하셔도 좋겠네요.”

미국을 떠나기 전 연구소를 지었다.

카본블랙을 활용하면 여태까지 있었던 어떤 블랙보다도 훨씬 매력적인 색감의 블랙을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서 그림을 그려보고 싶은 마음 한편으로 더 다양한 색을 개발하는 데에 이 카본블랙을 활용해보고도 싶었다.

“음? 저기 오르쉐 직원이 오는군요. 여깁니다!”

막스가 외치자 멀찍이서 누군가가 이쪽을 확인하곤 잰걸음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벌써 와 계셨네요! 혹시 제가 늦었나요?”

“아닙니다. 미리 와서 확인해볼 게 있어서. 오히려 일찍 오신 것 같은데요?”

오르쉐 직원과 막스가 가볍게 인사를 나눴다.

그 모습을 보는데, 왜인지 직원의 얼굴이 낯익게 느껴졌다.

분명 아는 사람 얼굴이었는데 누구였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저희 혹시 어디서 뵈었던가요?”

내가 그렇게 묻자 직원은 실망한 척 울상을 지었다.

“저를 잊으시다니. 너무하시네요. 그래도 화가님께 큰 인상을 남긴 사람이라고 자부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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