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이 제일 쉬움-160화 (160/241)

160화. 통과 의례 (7)

왕국이라는 대형 투자자의 뒷배를 안고 있기 때문에 영화는 빠르게 제작되어갔다.

제목은 <아라비안 오아시스>로, 아랍어 서체를 살려 포스터에 포함시켰다.

그렇게 포스터는 완성하는 즉시 전 세계에 공개되었고, 수많은 배급사에서 연락을 취해왔다.

무함마드는 영화가 다 제작되기 전에 각지 영화관 건설도 마무리될 것 같다고 했다.

나는 포스터 제작뿐만 아니라 작품에 등장하는 소품 총괄을 맡았다.

직접 그리는 건 무함마드와 자크 담당이었다.

그중 대부분이 영화 후반, 반군이 왕궁으로 침입해 들어오는 장면에 노출될 명작들이었다.

얼굴 없는 화가로 활동해 온 자크의 작업을 처음으로 볼 수 있었는데, 캔버스 앞에 비스듬하게 서서 그리는 모습이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작품의 반항적인 면모가 작업간에도 드러나는 것이었다.

“와. 역시 프랭크 명성이 괜히 생긴 게 아니네요!”

“에이. 명성 얻은 지 얼마나 됐다고요.”

황갈색과 녹색의 대비가 잘 드러나도록 그려달라고 했는데, 자크는 무함마드가 그린 작품을 참고해 두 색채가 잘 대비되도록 유지하는 배려심을 보이기도 했다.

나는 작품의 아랍풍을 유지하기 위해 아라베스크 무늬를 활용한 의상들을 직접 제작했다.

히라미술관에서 본 동굴벽화부터 시작해 예술광장의 여러 작품들에서 느낀 사우디 아랍 예술의 인상을 떠올려보았다.

그 덕에 훌륭한 아라베스크 무늬를 디자인할 수 있었다.

사우디 내 음악가들과 아랍인 배우들, 무함마드와 자크의 작품들과 내가 디자인한 의상까지.

영화는 완벽히 사우디다운 작품이 되었다.

<오아시스>처럼 단발성 성공만 거두는 게 아니라 다른 사우디 영화인들에게 좋은 방향성을 제공해줄 수 있는 단초가 될 수 있을 듯했다.

“필립 감독님 계획이 진짜 철저하시더라. 씬을 소수점 초 단위로 계획해서 들어가는데 변동 건이 하나도 없어. 배우들 연기 코치도 장난 아니고. 신인 배우들 완전 강하게 키우시던데?”

무함마드가 반쯤 질색을 하며 말했다.

“그 길로 가야 성공할 게 뻔히 보이시니까 양보할 수 없으신가 보죠.”

“뭐 그렇겠지. 아무튼 그래서 촬영은 이대로만 진행시키면 될 것 같아. 투자자 변수도 없고, 상영관 변수도 없고. 모든 게 완벽해.”

내 역할은 이제 끝났다는 것이었다.

무함마드는 특수효과 담당이기 때문에 사우디에 좀 더 남아 있어야 했다.

“이제부터 어쩔 생각이야?”

“글쎄요. 이번에 예술을 하는 장소가 중요하다는 것도 알게 돼서요. 아트밸리로 돌아가서 새로 추진할 만한 사업이 있는지 검토해봐야 할 것 같은데요?”

무함마드 자크라면 몰라도, 이미 주 활동지를 미국으로 잡아버린 무함마드도 선뜻 사우디에 남는다는 선택을 하기는 어려웠다.

“카프탄 왕자님, 계십니까?”

그때 집사가 집무실 문을 두드리며 물었다.

무함마드가 그를 들이자 집사는 문서 하나를 들고 들어와 섰다.

“무슨 일이야?”

“지금 아랍에미리트의 유전 시설 몇몇이 예멘 반군에 의해 점거당했다고 합니다. 우리 사우디에 있는 반군과도 관련된 일일지 몰라 현재 본궁에서 참모 회의가 진행 중인데, 왕자님께서도 빨리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뭐?”

집사의 말을 들은 무함마드가 사색이 되어 벌떡 일어났다.

반군의 습격을 받는다니.

<아라비안 오아시스>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었다.

나는 무함마드와 함께 전차를 타기 위해 별궁 밖으로 향했다.

그동안 집사는 못다 전한 상황을 보고했다.

“유전 시설은 다시 지으면 됩니다. 문제는 그 안에 인질로 잡힌 유전 인력들이죠.”

“그게 다가 아니지. 시설이 파괴되면 유럽에서 난리가 날 거 아니야? 그동안 공급은 어떻게 하는데? 인질이 있든 없든 어떻게든 잘 구슬려야지.”

무함마드에 의하면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는 대부분 아시아 국가로 공급된다고 했다.

유전 시설이 파괴되면 송유 일정에 차질이 생기는 것이었다.

“곤란한 일이죠.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기도 합니다.”

“이미 벌어졌다니. 아랍에미리트의 모든 유전이 파괴되기라도 했다는 거야?”

“아뇨. 아랍에미리트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송유관이 파괴되었습니다.”

파괴된 송유관을 걸어 잠그고 현재 복원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지하에 있는 송유관인 만큼 복구가 오래 걸린다는 것이었다.

아랍에미리트 정부에서는 반군을 상대로 지지부진한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고, 급한 대로 다른 산유국에서 유럽 쪽으로 비싸게 석유를 공급하고 있다고 했다.

사우디도 그 수혜를 보고 있는 국가들 중 하나였지만 가만히 앉아 좋아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예준! 여기서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금방 다녀올 테니까.”

“알겠어요.”

외부에 알려질 수 없는 참모 회의에 부쳐진 사안이었다.

이 일이 얼마나 중차대한 일인지 그들 모두가 잘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비상사태인 건 어차피 내게도 마찬가지였다.

이 근처에서 자원을 조달하는 바로크에게 타격이 있을지도 몰랐다.

이미 유가가 올랐을 것이었다.

나는 즉시 테레즈에게 전화를 걸었다.

-테레즈입니다. 소식 듣고 전화하신 겁니까?

“네. 지금 독일 상황이 어떤가요?”

-석유뿐만 아니라 석탄과 천연가스를 비롯한 다른 발전 에너지 자원 조달도 불안정해졌죠. 패닉에 빠진 건 다른 유럽 국가들과 다르지 않아요.

굉장히 심각한 상황이었다.

어떻게든 다른 수급처를 알아보았으니 허덕이면서도 살 만은 할 테지만 만약 사우디마저 유전을 공급할 수 없게 되면 정말 큰 일이었다.

아랍에미리트와 사우디가 세계 석유 공급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으니 유례없는 오일쇼크를 맞이하게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바로크는 일전에 모스크바 CMC와 함께 유럽과 러시아, 그리고 아라비아반도에 이르는 송유관을 독자적으로 구축한 상태입니다. 잠시 바로크 자사의 원료 사용량을 줄이고, 러시아에서 생산된 석유 공급량을 슬슬 늘리고 있는 상태죠.

“그거 정말 다행이네요.”

-네. 곧 유럽 석유 제 2 공급처인 사우디와의 가격 경쟁이 시작되면 석윳값은 낮아질 겁니다.

미리 바로크 송유관을 통해 위기를 넘긴 유럽 공장에서는 연일 바로크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있다고 했다.

바로크라는 기업 하나가 유럽 공장 수백 군데를 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유럽에서는 바로크의 시그니처 컬러인 바로크 옐로우가 가장 유명한데, 그 물감을 이용해 공장 벽면마다 바로크 로고 표시를 해놓는 유행도 생기고 있고, 어떤 시설보다도 전력이 중요한 병원에서는 환자들이 바로크 옐로우를 활용한 노란 수건을 창문에 걸어두고 있기도 합니다. 그렇게라도 감사 인사를 전하는 거죠.

사우디로서도 공급 재고가 마땅치 않아서 비싸게 제공한 것일 텐데.

무언가 착잡하면서도 바로크의 호황은 몹시 기뻤다.

“주가가 꽤 올랐겠네요.”

-네. 반군 기사가 나온 직후로 여태까지 300%가 오른 상태입니다. 하지만 일시적인 상황인 게 뻔하니 잠시 주식을 빼놓은 후에 나중에 다시 투입하는 걸 추천합니다.

그럴 순 없었다.

바로크도 유럽 유가 안정을 위해 발 벗고 나선 상황이었다.

“아니요. 그대로 기다려보시죠. 처음부터 바로크의 그 고결한 장인 정신이 빛을 발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거예요. 조금 더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테레즈가 결의에 가득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

“성공한 사업가는 자네 같은 젊은 사업가 창의력을 훔쳐다가 배를 채우는 법이지. 내가 딱 그 꼴이야. 그래도 배부르니 좋은걸?”

막스의 머릿속은 한동안 모스크바CMC 이반의 그 애매한 칭찬으로 채워져 있었다.

막스는 유가 파동 기사를 접하자마자 바로 이반에게 전화를 걸어 원유 공급을 제안했다.

사우디가 너무 큰 수익을 보고 있으니 빨리 사장님 몫을 챙기시라는 것이었다.

모스크바CMC로서도 2차 가공 산업 일정이 없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부담스러운 일이었겠지만 이반은 흔쾌히 허락했다.

복잡하긴 하더라도 어쨌든 막대한 이익이 생기는 일이기는 하다는 것이었다.

“미래를 보고 투자하라던 자네의 말이 떠오르는군. 그게 정말이었어. 이번 일로 꽤 벌겠는데?”

“최대한 투자비용 수급하는 방향으로 가시죠. 저희 쪽 생산 일정 몇 가지는 좀 미루겠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송유관 메이튼데. 자네도 이익을 좀 봐야 하지 않나?”

꼭 단기적인 이익을 봐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어쨌든 이익을 볼 수밖에 없는 건 바로크도 마찬가지였다.

계약에 의해 송유관 사용료를 모스크바CMC로부터 받게 될 것이었고, 그것만으로도 적자비용은 모두 메워졌다.

그래도 이반에게 인정이라는 건 있는지 바로크에 대한 좋은 이야기가 많이 나돌기 시작했다.

대부분 ‘바로크의 송유관 덕분에 모스크바CMC의 석유를 유럽에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라는 식이었다.

사용료도 받고, 유럽 사람들의 감사도 받게 된 것이었다.

수익도 생기고 투자금도 많이 모였다.

막스는 생산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던 ‘천연 카본블랙’ 색상 개발 소식을 발표했다.

상품 공급 이익이 가장 낮아진 시점에 반등 기회로 삼고자 아껴두었던 건이었다.

원래 있던 카본블랙은 재료가 되는 천연가스가 매우 비싸기 때문에 타르를 섞어 만든 게 다였다.

그 과정에서 유해물질이 나와 화가나 노동자들의 목숨을 위협했었다.

그 뒤로 완전히 다른 색상으로 대체되었지만, 이번에 바로크에서 그 위험성을 없앤 카본블랙을 개발한 것이었다.

‘천연 카본블랙 생산을 위한 준비는 다 되어 있는 상태야.’

유가가 잡히면 지금의 송유관을 통해 합리적인 가격으로 천연가스를 들여올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틈틈이 가공해두어 최종공정 상태에 있는 카본블랙도 많았다.

그것을 대량으로 생산하기에 공장이 멈춘 지금 시점이 최적기였다.

이반은 생산라인을 가동한 직후 다시 이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래 막스 밀리엄 군. 또 무슨 재미있는 제안을 해주려고 전화를 주셨나?

유가 파동이 생긴 이후로 이반은 좀 더 친근감 있게 막스를 대하기 시작했다.

“모스크바CMC 홍보부 힘을 빌리고 싶은 일이 있는데, 혹시 여력이 있으십니까?”

-뭐 그렇지. 그런데 지금 바로크가 홍보할 거리가 있나? 이미 전 유럽의 영웅이 돼 있으신데.

막스는 이반에게 미리 개발해둔 천연 카본블랙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타르가 일절 들어가지 않으며 천연가스 사용량도 많이 줄어들어 공업용으로 공급할 수 있게 된 물건이라고 했다.

이런 유사시에 더욱 효과적으로 공개하기 위해 몇 달간 묵혀두었다고 하니 이반이 잠시 침묵했다.

-......못 해줄 건 없지.

“부탁드리겠습니다. 홍보 가이드라인은 오늘 내로 모스크바CMC 홍보부에 전달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이반은 마케팅 총책임자 에바 채플린을 불러 막스와의 통화 내용을 전했다.

“......이런 이야기를 나눴으니 처리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이봐 에바.”

이반이 전달하는 건 단지 허락 의사였다.

이제부터 에바는 직접 바로크 사업본부로 연락해 구체적인 홍보 일정에 대해 조율해야 했다.

막스가 모처럼 만들어둔 홍보 타이밍을 놓칠 수는 없다는 판단하에 빠르게 대표실을 나서려던 에바를 이반이 불렀다.

“네, 대표님.”

“미리 카본블랙을 개발해둔 막스의 판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이반의 질문에 에바는 마케팅 전문가로서의 의견을 내놓았다.

“직접 반군들을 움직인 게 아니라면 굉장히 뛰어난 선견지명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가?”

이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선견지명이라…… 그런 건 그냥 미신이지. 막스 밀리엄은 단지 신중했을 뿐이야.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는 몰라도 카본블랙을 공개하기 좋은 시기는 따로 있다는 것을 모를 리는 없었을 테니, 매일을 기민하게 국제 정세만 살펴온 거라고.”

“맞습니다.”

“그 별거 아니어 보이는 신중함 하나가 얼마나 대단한 재능이 되는지 알고 있나? 그 재능이 동네 구멍가게만 한 물감 기업을 지금 이 위치까지 성장시켜 놓았지. 자네 말대로 선견지명이라면 우리 같은 범인들이 따라 할 수 없는 경지겠지만, 정말 그런가?”

에바도 모스크바CMC에서 일하는 동안 바로크의 성장을 지켜봐 왔다.

그들은 항상 사업 확장을 효율적으로 해냈다.

모든 시기에 가장 현명한 판단을 했고, 한 번 마음 먹은 사업은 얼마나 장기적인 프로젝트이든 의심하지 않고 추진했다.

“욕심부리지 않고 차분하게 걸어온 결과 과감함까지 겸비하게 된 거야. 처음 윤예준 화가님은 바로크의 그 잠재력을 발견하고 투자한 거겠지. 그분에게도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라는 게 있는 거야.”

“......”

“하지만 자부심을 가져도 되는 건, 그런 윤예준 화가가 자네를 담당 마케터로 선택한 적이 있다는 사실이야.”

칭찬에 인색한 이반이 웬일로 에바를 치켜세워주었다.

“그러니까 자신감을 가지고 한번 과감하게 광고해봐. 아무래도 바로크라는 새끼 호랑이는 나를 물 생각이 없어 보이는 것 같으니.”

“......감사합니다.”

그렇게 에바와 모스크바CMC의 홍보팀에서는 바로크의 혁신적이고 착한 기업가 이미지에 걸맞은 광고를 제작해 공개했다.

그 결과 바로크에 관한 관심은 본사 전화기부터 새로 깔아야 할 정도로 폭발적으로 쏟아져나왔다.

바로크의 카본블랙과 계약을 체결하겠다는 회사들이 줄을 선 것이었다.

그렇게 주가가 300% 올랐던 바로크는 그에 700%를 더해 1000%까지 성장세를 끌어올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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