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이 제일 쉬움-159화 (159/241)

159화. 통과 의례 (6)

사우디의 숨은 급진 예술가 중 프랭크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고는 생각해왔다.

아랍 왕자인 무함마드가 개인적인 연을 가지고 있다면 오래 알고 지낸 아랍인일 확률이 높았으니까 말이다.

오아시스 프로젝트 초기, <헌화>라는 작품이 공개되었을 때 그 생각은 거의 확신에 가깝게 되었다.

그런데 설마하니 무함마드 자크일 줄이야.

사람들은 자크가 ‘프랭크’, ‘무함마드 자크’의 SNS 계정에 동시에 인증을 한 뒤엔 그를 격찬했다.

그러면서도 누구도 그를 테러할 수 없게 은근히 스크럼을 짜기도 했다.

“와……! 처음에 예술광장에 바닥 그림을 남기셨잖아요? 엄청 두려우셨을 텐데…… 정말 대단하십니다.”

기자들 중 하나가 말하자 자크는 손사래를 쳤다.

“에이, 뭐. 별것도 아니죠. 솜니움 때처럼 윤예준 전시회에 첫 작품을 낼 좋은 기회인데. 그거 무섭다고 마다할 순 없잖아요?”

그 뒤로 그는 자신의 작품 <헌화>에 대해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동안의 프랭크의 작품을 생각하면 사우디 국민들에게 예술을 제안하고 있는 그림이 아니냐, 나의 <예술의 엘도라도>가 아니라 그 너머에 위치한 유전 시추기에 죽음을 고하고 있는 거 아니냐, 등의 다양한 추측들에 대해서는 ‘다 맞는 말이라 더 얹어 설명할 작의가 없네요.’라고 재치있게 대답했다.

“요 근래 무함마드 자크로서의 활동이 굉장히 뜸해지셨는데, 그럼 다시 시작하시는 건가요?”

“그렇죠.”

“그럼 미국에서의 활동은요? 바쁘게 오가시는 겁니까?”

기자들의 질문에 자크는 웃으며 대답했다.

“프랭크로서의 작품활동은 저 <헌화>가 마지막입니다. 을 시작으로 앞으로는 무함마드 자크로만 활동할 거예요. 얼굴 없는 화가 프랭크보다는 이단 예술가 무함마드 자크의 작품이 더 기다려지지 않으세요?”

사람들은 더는 프랭크로 활동하지 않는다는 자크의 말에 굉장히 아쉬워했다.

하지만 나는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수경으로서의 활동을 정리할 때의 일섭이 그랬듯, 그에게는 책임감이 있는 것이었다.

자신의 예술적 고향이자 예술의 불모지인 사우디엔 지금의 그가 꼭 필요했다.

아쉬워하는 한편으로, 사람들은 그의 말처럼 자크로서의 활동을 기대하기도 하는 눈치였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헌화>가 프랭크의 마지막 작품으로서 굉장히 뜻깊다는 걸 깨달았다.

그건 그의 작품 <화동>의 일부분이기도 하고, 활동을 끝낸 프랭크 자신에 대한 추모이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저기 있는 은 어떤 마음으로 작업하신 작품입니까?”

“네. 제게는 직접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강한 유대감을 가지고 활동했던 동료 예술가들이 있었습니다. 무함마드 자크로 활동하던 당시에요. 그 친구들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제작한 작품입니다.”

“......네? 추모라면, 죽었다는 뜻인가요? 그게 누굽니까?”

기자의 거듭된 질문에 자크는 작품 쪽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그건 곧 알게 되실 겁니다.”

자크의 그 인터뷰는 전 세계로 보도되었다.

자크와 프랭크가 동일인물이라는 사실, 프랭크의 활동이 중단되었다는 소식, 새로운 작풍의 자크가 등장하리라는 소식은 예술가들이 흥미를 갖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자크는 그 말에 쐐기라도 박듯 프랭크로서 그렸던 미공개 작품들을 모두 사우디로 들여와 예술광장에 전시했다.

적어도 백수십 점은 되어 보였다.

세계적으로 내로라하는 비평가와 예술가들은 고대 문명 유적이라도 발굴된 것처럼 예술광장 근처에 임시 협회 건물을 세워 프랭크의 작품들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와. 이 자식 진짜 너무하네. 사우디에 들어왔으면서 연락 한 번을 안 해?”

그 모든 소식을 뉴스로 접한 무함마드는 펄쩍 뛰었다.

“<헌화> 그렸을 때 들어와 있는 줄 이미 알고 계셨잖아요.”

“그때는 나 바쁜 줄 알고 슬쩍 들어와 후딱 그리고 홀연히 떠난 건 줄 알았지. 계속 사우디에 있었다는 거잖아? 하여간 늦바람이 무섭다니까? 정체 공개하고는 신나 가지고 여기저기 인터뷰하고 다니는 것 좀 봐.”

무함마드는 계속 컴퓨터로 뉴스 기사를 검색하며 이를 갈았다.

나와 무함마드가 벌인 일이 굉장히 큰 건이기도 하고, 그만큼 많은 조명을 받고 있기도 했다.

그만큼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내가 이 일을 나서서 벌인 덕분에 왕국과 사우디 국민들 사이에서 한국인 전체에 대한 인상이 달라졌다고 했다.

그래서 한국과 사우디 간의 외교도 풀리게 되었다고 했다.

한국 측에서는 나의 활동과 함께 이후 유가 절감에 관한 산업 변동 예측 기사들이 무수히 쏟아져나왔다.

세계 각지에 숨어 있던 사우디 출신 예술가들도 정체를 드러냈다.

꽤나 유명한 화가들도 그들 사이에 포함되어 있었다.

뒤늦게 예술가의 유가족이 나서 부고 소식을 알리고 대신 지지 선언을 한 경우도 있었다.

그중 한 명이 바로 자크와 쌍벽을 이루던 ‘아시라프 막툼’이었는데, 자크와는 달리 계속 사우디에서 화가 생활을 계속해오던 도중 괴한에게 피살되었다고 했다.

곧 알게 되실 거라던 자크의 말을 사람들은 그제야 이해했다.

막툼을 포함해 이름난 화가들의 부고 소식은 계속 전해졌고, 자크는 그들 모두를 추모하기 위해 을 제작한 것이었다.

사우디 예술의 폐쇄성이 수많은 예술가들을 죽였지만, 모래성은 생각보다 견고하지 않다는 자크의 인터뷰가 여러 신문사의 전면을 장식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만큼 쉽게 허물 수 있는 성도 아니었다.

일각에서는 이 프로젝트가 <오아시스> 때처럼 보여주기식의 개혁 정책일 게 분명하다고 확언했다.

또한 현재의 예술광장 프로젝트가 굉장히 잘 진행되고는 있지만, 선뜻 리야드시를 넘어서지는 못하고 있었다.

다른 아랍국가에도 마찬가지였다.

대도시 단위로는 긍정적인 이미지가 계속 파급되고는 있지만…

그걸 가지고 결코 아랍 전역을 휘어잡은 흐름이라고는 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와. 필립 감독님도 들어와 계시네. 너 연락 받은 거 있어?”

기사를 살피던 무함마드가 물었다.

최근에 문자 한 통을 받긴 했다.

프로젝트가 한참 진행 중일 때 들어와 ‘리야드 스튜디오’를 임시로 차렸다고 했다.

그는 사우디가 2억 명의 관객이 숨어 있는 블루오션이라고 말했는데, 차마 내게 대놓고 떠벌리기 민망한 정의감에 의한 것일 터였다.

인구수가 중요했다면 중국으로 갔을 테니까 말이다.

“아뇨. 처음 듣네요, 저도.”

굳이 무함마드를 토라지게 할 필요는 없으므로 거짓말로 둘러대자 그는 기사에 적힌 필립의 근황을 전하기 시작했다.

“할리우드 여신 샤를로트 로렌스와 함께 들어와서 영화 산업 발전에 힘쓰고 계신대.”

마찬가지로 이미 필립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필립뿐만 아니라 여러 영화사에서 시도하고 있는 사업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일은 크게 성공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예술광장에 마련된 야외 상영관을 통해서만 공개하기에는 촬영 비용이 굉장히 많이 들기 때문이었다.

사우디 영화인들이 성공한다면 직접 배급사를 차려 상영관을 짓겠지만, 사실 지금과 같은 상황으로는 성공할 길이 없지 않은가?

“감독님. 혹시 사우디에 영화관 짓는 거 많이 비싼가요?”

“당연하지. 예술가들은 당장 끼니 때우기도 바쁜데.”

“그럼 사업비를 재투입하면요?”

무함마드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말했다.

“예술가들은 꿈도 못 꾸지만, 사업가 입장에서는 그리 비싸지 않아. 의외로 사우디에 건설 명가가 많거든. 자재도 싸고. 왜? 영화관 지어놓으면 영화사가 많이 생길 것 같아?”

“네. 미국에 있는 전차 몇 대 팔면 거기 보탤 수 있지 않아요?”

“어…… 그렇긴 하지. …… 그래. 내 차들 좀 팔지 뭐. 도시마다 한 군데씩 지어놓으면 되겠네. 돈도 충분해 보이고.”

무함마드는 알아보겠다며 잠시 집무실을 떴다.

회화는 수틀리면 야외 전시회라도 하면 되지만 음향이 중요한 영화관을 계속 예술광장에서처럼 야외 상영으로 연명시킬 수는 없었다.

조건은 까다롭지만, 영화관만 지어지면 영화 산업 기반 시설은 다 갖춰진 셈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영화관만 지어놓고 내버려둘 생각은 아니었다.

나는 필립에게 즉시 전화를 걸었다.

-네, 윤 화가님. 필립입니다.

“기사 계속 접하고 있어요. 생각보다 힘드시죠?”

-예, 이게 참. 언어도 안 통하고. 그래도 해볼 만은 합니다.

필립은 짧게 웃으며 근황을 전했다.

트레이너와 번역가를 통해 연기 일반론을 가르치는 건 수월한 편이지만, 아랍 출신 배우 찾기가 어려워 아랍어 연기 지도에는 애를 먹고 있다고 했다.

“배우가 많이 없나요?”

-있긴 있죠. 다른 아랍국가 배우라든가, 아니면 아랍계 미국인 배우라든가. 혼혈도 있고요.

“에이, 뭐. 그럼 영화 한 편은 찍겠네요.”

나는 필립에게 내 아이디어를 전했다.

<오아시스>와 비슷한 감성으로, 그보다 더 선진적인 작품을 만들어 전국 영화관에 상영할 계획이었다.

“무명 예술가들과 사우디 상인들의 마음 따뜻한 유대로 인해 사우디가 세계 예술 1번가로 발전하는 내용으로 한 편 찍어봐요. 팩션 영화로요.”

-성공 사례가 있…… 아니, 있을 리가 없죠. 멍청한 질문을 할 뻔했네요.

“성공 사례는 없죠. 그래도 참고할 만한 건 있습니다. 보내드릴 테니 한번 확인해보시고 구체적으로 이야기 나눠봐요.”

유럽과 미국에서는 예술가로서 작품성을 가진 작품만을 고집해왔던 필립이지만, 사우디에서는 ‘흥행’이 가장 중요한 과제라는 걸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필립이었다.

그리고 그는 누구보다도 흥행 공식에 능통한 사람이었다.

“아직 드림캐쳐 쪽 사람들이랑 영화 협업은 안 해보셨죠? 이번에 한번 해봐요.”

-예? 누가 더 있나요?

“고매하신 무함마드 카프탄 왕자님이랑 노라 교수님의 애제자인 카산드라도 함께할 거예요.”

필립은 고심해보더니 대답했다.

-블록버스터급 팩션이 되겠네요. 알겠습니다. 스튜디오로 방문하실 건가요?

“네. 내일 바로 가볼게요.”

나는 전화를 끊은 뒤 바로 카산드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카산드라는 고민해볼 것도 없다는 듯 승락했다.

***

간만에 재능 발휘할 생각에 신이 난 무함마드와 카산드라는 들뜬 마음으로 필립의 리야드 스튜디오를 찾았다.

미리 도착해 스토리보드를 정리하고 있던 나는 필립과 함께 그들을 맞았다.

“왜 오셔놓고 연락을 안 했어요!”

필립을 보자마자 무함마드가 타박하자 필립이 당황했다.

“예? 우리가 그렇게 친했던가요……? 카산드라라면 몰라도.”

“그럴 수가……”

“지금부터 친해지면 되잖아요? 일단 스토리부터 완성을 해야 하니까 앉아보셔요.”

필립의 선 긋기에 무함마드가 충격을 받고 있는 동안 내가 직접 나서서 정리했다.

“일단 필립 감독님께서 <오아시스>와 이 일대 신화를 바탕으로 성공할 법한 이야기 틀을 완성해주셨어요. 당연히 신화 그대로 가지는 않겠죠. 영화 시작 5분 만에 스크린이 찢길 수는 없으니.”

사우디에서 활동하던 무명 예술가 여성이 주인공으로, 어느 날 남자친구가 가상의 국내 반군에게 납치된다.

남자친구를 찾는 동안 주인공은 여러 성향의 예술가들과 만나 예술적 유대감을 쌓고 반군을 상대로 액션 활극을 벌이는 내용이었다.

“수구세력들의 심기를 크게 거스르지만 않는다면 국내 성공은 이미 보장돼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바로 해외 성공이에요.”

필립이 나의 말에 덧붙이자 카산드라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왜요? 국내에서만 영화 산업이 활발해지면 되는 거 아니에요?”

“그렇긴 한데 사우디 민간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영화가 세계적으로 성공했다는 자부심도 함께 안겨줘야만 더 큰 효과를 볼 수 있어요.”

세계적인 흥행을 위해 필립은 RISA 출신 특수효과 감독들의 노하우, 샬롯이라는 여배우의 까메오 파워, 그리고 나의 포스터 디자인을 꼽았다.

게다가 제3세계 배경의 필립 작품이라는 것까지 포함한다면 흥행 요소는 완벽했다.

관객들을 실망시키지 않도록 각자 맡은바 최선을 다 하라는 뜻이었다.

“맙소사! 샬롯이 내 영화에 나온다니!”

“카산드라 씨가 있잖아요, 감독님. 말조심하세요.”

“됐어요. 질투는 펭펭이 이후로 안 하기로 마음먹었으니까.”

무함마드는 뒤늦게 카산드라의 눈치를 봤다.

그들처럼 다사다난한 신혼 생활을 보내는 부부는 전 세계적으로도 없을 것이었다.

무함마드와 카산드라, 필립은 구체적으로 스토리라인과 촬영 가이드를 잡아나가기 시작했다.

그동안 나는 포스터에 들어갈 그림을 그렸다.

영화가 클라이맥스에 다다랐을 때 배경은 실제 리야드 왕궁이었다.

리야드 왕궁은 영화 속에서 명화를 숨긴 퍼즐 역할을 해야 하니 실제보다 튀어야 했다.

‘강렬한 색감으로 먼저 이목을 끌어놓는 게 좋겠지.’

사막에서 가장 눈에 띄는 색은 단연 초록색일 터였다.

영화에서와 마찬가지로 황갈색과 짙은 녹색을 과거와 현재의 은유적 대비 효과로 활용할 것이었다.

그렇게 녹색의 리야드 성을 완성해냈다.

“오우! 척박한 모래땅 위에 생명력 넘치는 녹색 성이 탄생했군요!”

어느새 내 작업을 보고 있던 무함마드가 외쳤다.

손에는 휴대폰을 든 상태였다.

“스토리 안 짜세요?”

“내 집중력은 딱 한 시간이야. 중간중간 이렇게 쉬어줘야 한다고.”

무함마드의 휴대폰은 카메라 렌즈가 내 쪽을 향해 들려 있었다.

“동영상이에요?”

“아니. 동영상 플랫폼 라이브 방송이야. 내 손 안에 방송국이 있다!”

“그거 실시간으로 반응 적어주는 거 아니에요?”

모스크바 CMC 라이브 방송 때 활용해본 적 있는 기능이었다.

“응 난리도 아니야.”

“뭐라고 하는데요?”

나는 무함마드의 뒤에 서서 함께 채팅창을 보았다.

영화에 대해 기대하는 댓글들이 폭발적으로 스크롤을 올리고 있었다.

“내 뒤에 붙지 마! 잘생긴 얼굴 제대로 찍으라고 악플 달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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