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이 제일 쉬움-158화 (158/241)

158화. 통과 의례 (5)

프랭크의 꽃다발 그림 하단에는 ‘헌화’라고 적혀 있었다.

작품 이름인 듯했다.

그 작품을 시효로 해서 수많은 예술가들이 광장에 작품을 가져다 놓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프랭크처럼 밤늦게 몰래 작품을 두고 가는 경우가 태반이었지만, 사람이 많이 모이기 시작한 뒤부터는 아예 낮부터 나와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이 늘었다.

종종 급진적인 작품이 발표될 때는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소리소문없이 작품이 파괴되어 있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급진 예술가들은 꾸준히 작품을 광장에 내다 걸었다.

계속 똑같은 작품에 똑같은 반응만 반복되었던 건 아니었다.

급진 예술가들은 어떻게 하면 살람파와 같은 수구주의자들을 감동시킬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럼 수구주의자들은 과격행위를 조금 추스르며 우상숭배를 빗겨나갈 수 있는 방법을 도리어 제안하기도 했다.

예술광장이 토론장 기능을 톡톡히 하고 있는 것이었다.

“사이비 망자들의 저급한 신파극이다!”

무함마드의 <토토>가 상영되는 동안에는 항상 살람파 신자들이 나서 방해 시위를 펼쳤다.

스크린 앞에 모인 관객들은 며칠째 반복 상영하고 있는 <토토>를 대부분 통달한 상태이면서도 계속 영화를 관람했다.

그리고 살람파 신자들의 방해 구호를 계기로 정말 그 영화가 ‘사이비 망자들의 저급한 신파극’인지 아닌지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했다.

그 과정에서 더 좋은 형태의 영화에 대해 합의할 수 있게 될 것이었다.

마치 시사회를 하듯이, 무함마드는 스크린 앞에 임시로 조성된 단상 위에 올라서서 마이크를 잡았다.

광장엔 이제 수많은 예술 작품들과 훼손된 잔해, 그리고 행인과 예술가들로 가득했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무함마드 카프탄입니다.”

무함마드가 소개하자 사람들은 큰 목소리로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무함마드는 자신과 내가 함께 기획한 이 예술광장 이벤트가 잘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고 했다.

일시적인 행사가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진행할 이벤트라는 사실은 언급하자 사람들은 더 크게 환호했다.

“알고 계시다시피 저는 왕가 일을 폐하와 형님들에게 모두 일임하고 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견문을 쌓아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왕위를 계승할 지혜는 쌓지 못했지만, 적어도 우리 왕국에 큰 부를 가져다줄 수 있는 역량 하나를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함마드는 예술 산업을 시행해보겠다고 발표했다.

예술 산업을 통해 수익을 내고 관광객 수를 더욱 폭발적으로 늘리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태까지 금기시되어 왔던 예술 활동 전반을 이 예술광장 안에서만큼은 허용할 것입니다!”

무함마드가 그렇게 선언하자 그 소식을 반기는 사람들 틈으로 몇몇 사람들이 반발하기 시작했다.

“신성성을 격하시키는 모방물이 쏟아져나와도 허용하겠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일각에 선 사람들은 무하마드의 즉답을 듣고는 조금 당황하더니 주장했다.

“알라 이외에는 신이 없고 마호메트는 신의 사도이다!”

“율법을 어기는 자는 지옥에 가게 됩니다!”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치기 시작하자 무함마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만!”

마이크를 든 무함마드가 외치자 그 큰 소리에 기죽은 사람들이 구호를 멈췄다.

“너희들 중 알라의 계율을 따르지 않는 자가 있다면 주저 없이 때려죽여라. 그를 죽인 자는 너희가 아니다. 알라께서 죽이신 것이다. ……그 얘기를 하고 싶은 거지요, 지금? 그럼 한 번 얘기해봅시다. 그 계율 앞에 우리들 중 누가 완전히 떳떳할 수 있는지.”

무함마드는 스크린을 통해 자신의 그간 작품활동에 대해 줄줄 설명하기 시작했다.

절대 대외적으로는 공개하지 않을 것 같던 정보들이 그 순간 낱낱이 알려지게 되었다.

<토토>를 포함한 그의 작품들이 시각적으로 알려지는 동안 관객들은 조금씩 박수를 치며 무함마드의 이름을 외치기 시작했다.

“저는 미국에서 이 우상들을 직접 구상하고 만들어 세계인의 찬사를 들었습니다. 그럼 어디 한 번 누가 나서서 나를 때려 죽여보시지요.”

침묵이 이어졌다.

무함마드는 충분히 기다려준 뒤 계속했다.

“아무도 없네요. 왜 나서지 않으시는 겁니까? 우리들 중엔 이단인들밖에 없나요? 알라의 계율보다 왕가의 권위가 더 무서우신 것 아닙니까? 이게 당신들의 현실입니다. 필요할 때만 율법 운운하며 살인을 정당화할 뿐, 여러분 본인의 목숨을 걸 생각들은 전혀 없으시잖습니까.”

“......그럼 저희는 알라의 가르침을 어떻게 전파합니까?”

그 물음에 무함마드는 예술광장 전역을 가리켰다.

“이곳에서요. 나를 때려죽이든, 아니면 이곳에 나와 이단 예술가들을 설득하든. 아니면 당신들이 설득되든. 다 때려죽일 마음이 없다면 이곳에 나와 우선 대화를 해보자는 겁니다.”

무함마드는 그 말을 시작으로 자신의 개인적인 각오에 대해 이야기했다.

무명 예술가로 객지 생활을 오래 보내온 자신은 아랍의 예술가들이 얼마나 힘든 일상을 보내고 있는지 잘 안다고 했다.

더 이상은 숨어다니지 않고 떳떳하게 예술을 할 수 있게 될 거라고 공표했다.

특히 <토토>의 흥행 성적을 공개하며, 그를 통해 벌어들인 돈을 모두 사우디 예술 산업 자금으로 사용하겠다고 말했을 땐 열렬한 지지를 받기도 했다.

“내가 묵고 있는 리야드 별궁을 개방하고 공연, 전시회가 가능하도록 할 생각입니다. 일전에는 이 같은 변화가 나조차도 감당이 안 돼 사우디를 떠난 적도 있었지만, 윤예준이라는 예술가를 만난 뒤부터는 조금 변화할 수 있었죠. 저를 성장시킨 것으로도 모자라 이번 프로젝트의 대부분의 아이디어를 제공해준 윤예준 화가에게 이 자리를 빌려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무함마드가 마이크를 놓고 박수를 치자 사람들도 나를 돌아보며 웃으며 박수를 쳐주었다.

그러고 보면 살만도르를 포함해 사우디에서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격이 호방하고 유쾌했다.

그런 그들이 예술 불모지에서 얼마나 갑갑한 일생을 보내왔을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리는 일이었다.

예술의 광장은 그들의 창작 욕구를 조금 틔워줬을 뿐, 본격적으로 터져 나오는 건 지금부터였다.

***

무함마드와 나의 모습이 담긴 그날의 영상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이번 오아시스 프로젝트에 대한 기대감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많은 관심을 받게 되었다.

세계 시민들은 자신이 재미있게 본 애니메이션 작품들이 아랍의 왕자가 몰래 만든 작품이라는 데에 큰 충격을 받고 사우디의 상황에 주의를 기울였다.

무엇보다도 프랭크라는 얼굴 없는 화가가 <헌화>라는 작품을 몰래 그리고 간 게 예술계에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그 덕분에 지금은 전 세계의 예술가들이 예술광장에 모여들어 작품을 선보였다.

보수적인 사우디의 기존 예술관과 예술광장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이 그들에게 좋은 흥미 요소가 된 듯했다.

일반 관광객들도 리야드를 찾았다.

<예술의 엘도라도> 앞에서 찍은 인증샷이 전 세계 SNS에 게시되었다.

카프탄 별궁 내성은 사우디 전통 옷을 입고 활보하는 관광객들로 붐볐다.

그 상황이 며칠간 지속되자 본궁에서 또 근위대를 보내왔는데, 전처럼 많은 인원은 아니었다.

근위대의 안내를 받아 두 번째로 방문한 알현실엔 살만도르 왕이 조금 누그러진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 옆에 앉은 무함마드도 전보다 훨씬 편안해진 표정이었다.

“일전엔 일류 예술가로서 배짱을 부리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상황을 보니 그렇지만도 않았던 모양이구나.”

“좋게 봐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이 유행이 급진 예술가들의 천국이 되지는 않을지 염려가 되는 것도 어쩔 수가 없구나. 무릇 우리 왕가의 권위는 국민들의 신앙심을 바탕으로 유지되는 법인데. 신앙을 우롱하길 좋아하는 이들이 너무 설치는 모양새는 아닌가?”

살만도르에게 두고 보자는 식의 약속을 받기는 했지만, 이 논쟁을 아예 피할 생각은 없었다.

왕인 살만도르와 예술가인 나로서는 늦더라도 언젠간 짚고 넘어가야만 했을 문제였다.

“제 생각은 다릅니다.”

“......”

“신앙심 넘치는 국민들이 왕가를 떠받들어주는 것도 사실이지만…… 현대에 와서는 그 신앙심을 유지시켜 주는 장치는 따로 있다고 생각해요.”

내 이야기를 듣던 살만도르 왕이 말했다.

“그게 석유다, 이 말인가? 내가 듣기에 그렇게 유쾌한 발언은 아닌 것 같은데.”

솔직히 해외 법인 활동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민 세금이 면제되는 국가는 사우디가 거의 유일했다.

그 부유함으로 왕가의 권위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알리바바의 <오아시스>가 많은 찬사를 받았을 테니까 말이다.

“그래도 제 이 아이디어가 왕가에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만 한다면 폐하께서도 자비심을 베풀어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무함마드 카프탄 왕자의 예술 산업은 왕가에 막대한 부를 가져다줄 테니까요.”

“......”

“일단 약속하신 대로 사형수들을 완전히 석방해주시고 왕자의 사업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십시오. 그럼 석유 판매권을 갖지 못한 서민들은 더 이상 굶지 않게 될 것이고, 왕국민들은 더 건강해질 것이고, 사우디는 아랍 문화의 전초지가 될 겁니다. 물론 제 이 약속도 단순 배짱은 아닙니다.”

살만도르 왕은 조금 고심하는가 싶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석유가 아무리 풍부하다고는 해도 언젠간 동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에게도 있었을 것이었다.

석유와 남서부 경작지를 제외하면 거의 고원 사막이나 다를 바 없는 아라비아반도였다.

살만도르 왕은 언젠가 대책을 세워야만 했고, 아랍 예술에 대해 세계적으로 관심이 끓어오르는 지금이 기회라는 걸 모를 만큼 그는 멍청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테러를 자행한 살람파 활동가들이 석방되었다.

그들에 대한 공포심으로 위축되기는커녕, 예술광장은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오히려 그들에 대한 왕의 자비가 기사화되어 무함마드의 예술 산업이 더 많은 조명을 받았을 뿐이었다.

무함마드는 왕이 할애해준 막대한 사업비를 모두 문화 공간 조성에 쏟았다.

예술광장 근처에 개방된 극장을 조성했고, 별궁 한쪽에 왕가의 보물을 전시하는 박물관을 지었다.

해외에서 들어온 관광객과 예술가들은 리야드 궁전 근처 상인들의 좋은 소비자가 되었다.

거기 교통비만 더해도 사업비 모두를 메우고도 남는 수익이 한 달 만에 창출되었다.

회화, 조각, 영화, 연기 등등, 수많은 분야의 예술가들이 왕국으로부터 사업비를 받고 교육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동안 알리바바와 무함마드는 예술광장을 전전하며 신자들이 합의한 표현론을 바탕으로 여러 신흥 극단과 화방을 전전하며 자문을 해주기도 했다.

나도 매일 예술광장에 나서 사우디 예술가들과 끊임없이 의견을 주고받았다.

“최근에 킹 둘 압지즈 대학에 현대미술학부가 새로 생겼는데,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리야드 국왕에게는 얼마나 많은 지지를 받고 계십니까?”

여러 외신 기자들과 퐁피두 센터와 같은 세계적인 문화 기관의 사보 기자들이 녹음기를 들이밀며 질문했다.

한 번 다녀간 사람들이 예술광장의 안전에 대해 충분히 증명했기 때문인지, 이 유행은 사그라들기는커녕 갈수록 열기가 뜨거워졌다.

사우디 예술가들과 함께 기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프랭크다!”

기자 하나가 그렇게 외쳤다.

나와 예술가들, 기자들은 모두 소리가 난 방향을 돌아보았다.

한 남성이 트럭 위에 실린 조형물 앞에 서서 조형물 곳곳을 깎거나 붓으로 곳곳을 칠하며 작품을 살펴보고 있었다.

청바지에 허름한 카키색 점퍼, 정육점에서 쓸 법한 번들번들한 앞치마에 무시무시한 가면.

거기에 트럭 한편에 세워진 전기톱까지.

영화 <한 여름밤의 전기톱 살인마>의 전기톱 살인마 복장이었다.

프로젝트 초기에 작품 하나를 그려놓은 뒤로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나는 나를 둘러싼 기자들을 헤치고 그에게로 다가갔다.

솜니움 개관식 때 봤던 바로 그 코스프레였다.

작품은 전체적으로 잿빛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큰 돌 밑에 깔려 허우적대는 모습이었는데, 보고만 있어도 그들의 비명이 들리는 듯했다.

그동안 표현의 자유를 펼치지 못하고 죽은 수많은 예술가들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었다.

프랭크는 작품의 후면에 조각칼로 이라고 새긴 후 트럭에서 뛰어내렸다.

“프랭크 씨! 저 작품은 뭘 의미하는 건가요?”

내가 대표해서 물었다.

트럭 위 조각 작품은 예술광장 가장자리로 이동해 크레인에 실려 내려와 자리를 잡았다.

그동안 프랭크는 전기톱을 들고 이런저런 퍼포먼스를 한 뒤 말했다.

“나는 프랭크가 아닌데.”

“아, 죄송합니다. <한 여름밤의 전기톱 살인마>의 제임스 씨.”

“아니. 그게 아니고.”

내가 영화 속 배역 이름으로 고쳐 불렀지만, 프랭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곤 가면을 벗었다.

“나 무함마드 자크입니다.”

그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이름과 아랍인 인상에 놀란 기자와 예술가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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