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통과 의례 (2)
나는 무함마드에게 그렇게 생각한 이유를 이야기해주었다.
옷장 관리 상태를 보면 수시로 청소한 티가 날 정도로 먼지 하나 없었다.
무함마드가 별궁에 들어와 지내게 된 것도 최근 일일 테니 이 방은 오랫동안 사용된 적이 없을 것이었다.
이 방을 관리하는 사람인 데다가 옷장에 황칠을 새로 했다면 그의 손에도 칠이 옮겨 묻었을 확률이 높았다.
또한 <그라나다의 항복>에 묻은 정체불명의 안료는 술탄의 망토를 한 번 찍고 위로 쓸어올린 듯한 모양새였다.
걸쇠에서 그림을 풀어내기 위해 그림 자체를 손바닥으로 짚어 밀어 올린 것이었다.
반짝이는 무언가를 손에 소량 묻힌 상태로 말이다.
그 정도 광택과 굳기를 따져보면 정황상 정체는 황칠뿐이었다.
나의 이야기를 듣던 무함마드는 무언가 짚이는 게 있는지 바로 보좌관들을 불러들였다.
“네, 왕자님. 별궁에 출입할 수 있는 인력들은 전체 소집했습니다.”
“최근에 일을 그만둔 사람 없어? 청소부라든가.”
무함마드의 물음에 집사 중 한 사람이 대답했다.
“별궁 내부 청결 상태를 관리하던 태국인 청소부가 그저께 그만뒀습니다.”
“그 사람 지금 국내에 있어?”
혹시나 자신들이 의심받는 건 아닐까 두려움에 떨던 집사들은 저들끼리 눈치만 살폈다.
그중 수행원으로 있는 정장 차림의 남성이 말했다.
“퇴직자 대우로 제가 마지막 퇴근 의전을 담당했는데, 공항으로 데려다줬습니다. 아마 바로 비행기에 오른 것 같습니다.”
“뭐?! 어디로 갔는데?”
“바로 조사해보겠습니다.
리야드 궁엔 맡은 역할의 중요도와 관련 없이 퇴직 시에는 최고급 대우를 해주는 전통이 있었다.
그 덕분에 수행원이 청소부의 국내 마지막 행적을 알 수 있었던 것이었다.
바로 그게 소지품 검사를 적극적으로 하지 못한 원인도 되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수행원은 태국인 청소부의 신분 정보가 완전히 파악된 상태였기 때문에 행적을 바로 추적해볼 순 있다고 했다.
수행원은 어딘가로 다급히 전화해보고는 보고했다.
“일을 그만둔 그저께 날짜로 바로 국제공항 검문소를 통과한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행선지는…… 태국이랍니다.”
어느 정도 가닥이 잡혀가고 있었다.
영 손쓸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알게 된 무함마드가 한숨을 쉬며 자책했다.
“그래…… 그런 거라면 별궁에서 블루 다이아몬드를 빼간 건 이해가 되네. 그래도 믿을 만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서 살림을 맡겼으니 나갈 때도 섭섭하지 않게 하려던 거였는데……”
“감독님 잘못이 아니에요. 별궁에서는 그랬다고 치더라도, 결국은 공항에서 잡혔어야 했으니까.”
나는 자책감 사로잡힌 무함마드를 달래주었다.
애초에 믿을 만한 사람이니까 궁 청소도 도맡길 수 있었던 것 아닌가.
아마 수행원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잘못한 사람은 도둑질한 당사자 청소부였다.
“그렇지. 예준이 네 말이 맞아. 만약 그가 범인이라면 블루 다이아몬드를 반출할 수 있도록 검문소 직원을 매수해뒀을 거야. 그게 아니라면 방법이 없어.”
이후 조사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무함마드는 태국 정부에 해당 청소부의 신원 정보를 넘기고 수사 협조를 요청했다.
범인은 반나절도 되지 않아 바로 체포되었는데, 방콕 근교 우범지역 불법 전당포를 전전하다 적발되었다고 했다.
도둑질할 물건이니 제값을 받아낼 욕심은 부리지 않은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공항 검색대 직원 중 한 명이 태국인 여성 한 명을 그냥 통과시켜주었다는 증언을 확보했다.
며칠 뒤 태국 공관이 직접 리야드궁을 방문했다.
“밀반출된 보물은 현재 사우디로 향하는 전세기에 오른 상황이며, 범인도 조속히 처벌하겠습니다. 부디 이 일로 왕가 간 신뢰 관계에 금이 가지 않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공관은 무함마드를 굉장히 두려워하며 적극적으로 상황을 해결할 것을 약속했다.
사우디라는 나라의 영향력이 굉장히 큰 모양이었다.
하지만 공관의 그 노력이 무색할 만큼 무함마드는 굉장히 불편해하는 표정이었다.
“처벌하겠다고? 태국에서?”
공관이 소식을 전하는 동안 관자놀이만 짓누르던 무함마드가 언성을 높였다.
“당신네들은 우리 왕가를 존중할 생각이 있긴 한 거요? 우리 왕실에서 일어난 일을 왜 태국에서 처벌한단 말입니까?!”
처음 보는 무함마드의 모습이었다.
공관에게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는 쩔쩔매며 대답했다.
“사우디에서 처벌받는다면 그는 틀림없이 사지절단형에 처할 겁니다. 태국에서라면 그것만큼은 피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 왕실의 처벌이 너무 과하다? 그 말뜻입니까, 지금?”
“그게 아니라……”
변명을 늘어놓으려는 공관의 말허리를 자르고 무함마드가 탁상을 힘껏 내리쳤다.
“왕가를 우롱하고도 고작 사지절단형에 처할 거라고 생각했습니까?! 아예 온몸을 찢어 죽여도 모자랄 일입니다! 외교 문제 빚기 싫으면 당장 범인 데려다 이 자리에 꿇려놓으세요.”
“알겠습니다…..”
공관은 빠르게 카프탄 별궁을 나갔다.
“견물생심이라는 말도 있는데. 그래도 사지절단은 너무 심하지 않아요? 그냥 태국에 맡기는 게 어때요……?”
무함마드의 낯선 모습에 내가 조심스럽게 제안하자 그가 가볍게 한숨을 쉬며 나를 보았다.
“나도 진짜 그럴 생각은 없어. 우리나라 원칙과 권위가 그렇다 보니까 강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던 거지. 구색 맞추기로 선고만 하고 집행은 안 되도록 할 거야. 한국에도 그런 거 있지 않아?”
“아, 그건 그렇죠.”
리야드궁 방문 첫날 무함마드는 이곳에 있기 싫었다고 말했다.
왜 그렇게 왕자 자리를 싫어하는지 알 것 같았다.
“아무튼 정말 고맙네. 역시 윤 수사관이라니까? 덕분에 왕실 보물을 되찾게 됐어. 진짜 불법 전당포에 팔리면 꼼짝없이 장물 신세가 될 뻔했는데.”
“그러게요. 타이밍이 잘 맞아서 한시름 놨네요.”
“사례로 뭐 원하는 거 없어? 전 세계 왕자들 중에서도 가장 럭셔리하고 엘레강스한 이 무함마드 카프탄 님께서 친히 소원을 들어주지.”
공관에게 호통을 치는 바람에 차갑게 내려앉은 분위기를 띄우고 싶었던 것인지, 무함마드는 램프의 요정 흉내를 내며 물었다.
“괜찮아요. 결혼 선물로 도와드린 셈 치죠.”
“그걸로 퉁치기엔 너무 값진 선물인데? 그러지 말고 말해봐. 우리집 돈 많아.”
무함마드가 별궁 전체를 가리키며 웃었다.
“하나 있기는 한데 너무 귀한 선물일까 봐 조금 망설여지는데요.”
“뭔데?”
***
나는 왕실 보물을 찾은 보상으로 문제의 그 ‘황칠’이라는 안료를 선물 받기로 했다.
내 요청에 의해 무함마드는 범인을 데려오는 길에 황칠을 가져오라고 요구했다.
이미 무함마드의 심기를 거스를 대로 거스른 공관은 질 좋은 황칠을 무더기로 가져다주었다.
평생을 써도 모자란 양이었다.
‘이렇게 많이 부탁할 생각은 없었는데, 이미 받았으니 감사히 써야지.’
나는 침실에 캔버스를 펴고 안료를 묻혀 그려보았다.
무함마드의 말대로 굉장히 끈적거려 점도 조절이 힘들었다.
어떻게 해야 농도를 조절할 수 있는지도 금방 감을 잡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 낯섦 덕분에 탐구해나가는 재미가 있었다.
굳이 왕실에서 하듯 주기적으로 칠을 바꾸지 않아도 광택이 수천 년을 간다던데.
‘영원한 광채’라는 생각이 들면 창작 욕구가 마구 샘솟았다.
그렇게 황칠 그림을 여럿 그리는 동안 블루 다이아몬드 밀반출 사건은 전 세계에 보도되었다.
태국은 사우디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범인을 인도하면서도 자체적으로 30년 장기복역을 구형했다.
정작 중요한 사우디에서의 심급에서는 예외 없이 사지절단 형을 선고받았다.
집행이 없더라도 평생 감옥에서 지내야 하는 것이었다.
무함마드는 1, 2년 내에 태국에 돌려보내질 것이라고 했다.
확실히 ‘사우디의 법은 무섭다’라는 인상은 심어졌으니 왕가의 체면은 차린 셈이었다.
대부분의 보도에 범인을 잡는 데에 내가 크게 기여했다는 정보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우디 국내지와 여러 외신들이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지금 내게 황칠만큼 중요한 건 없었다.
한두 번 인터뷰했다가는 끝도 없을 것이었다.
나는 내 앞으로 전달되는 인터뷰 요청들을 모두 마다하고 그림 연습에 몰두했다.
“예준. 그래도 마이크 잡고 생색도 좀 내지 그래?”
잠시 별궁 내 집무실에서 나온 무함마드가 그림을 그리는 내게 물었다.
“제가 진짜 수사관도 아닌데요 뭐. 그리고 딱 알려진 그대로잖아요? 인터뷰해봤자 감독님 말씀대로 생색내는 것밖엔 할 게 없는데. 그 시간에 그림을 한 점 더 그리는 게 나아요.”
“참…… 하긴, 그 정도 열정이니까 나의 역작 <당근전사>를 꺾을 수 있었던 거겠지.”
3년 전에 함께 참가한 캐릭터공모전 이후로 1등을 놓친 적이 없다는 무함마드가 말했다.
아직도 언급하는 걸 보니 굉장히 맛이 쓴 패배였던 모양이었다.
잠시 옛날얘기를 나누는 사이 누군가 별궁 본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와 무함마드는 본관으로 나섰다.
“들라.”
무함마드가 허락하자 문이 벌컥 열렸다.
근위병 복장의 남성 여럿이 열린 문 너머로 우르르 들어와 무함마드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너희들 뭐야?! 본궁 근위대 같은데, 별궁이 무슨 너희들 안방이야?”
무함마드가 그들의 손에 들려 있는 칼을 가리키며 소리치자 그들은 주춤거리며 저들끼리 칼을 모았다.
“죄,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 있어서.”
“무슨 급한 일?”
“무함마드 살만도르 폐하께서 윤예준 화가를 꼭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출국 일정을 알 수 없으니 급히 데려오라고 하셔서……”
‘무함마드 살만도르’라면, 무함마드의 아버지이자 사우디 국왕이었다.
‘아랍의 수장이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니……!’
말 한마디로도 여러 사람 목숨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력자 살만도르였다.
물론 그 권력이 탐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 아랍에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 상태였다.
그를 만나 좋은 인상을 심는 것은 앞으로의 작품 활동에 긍정적인 첫 행보가 될 것이었다.
나와 무함마드는 별궁 건물 너머 야외 공원으로 시선을 옮겼다.
본궁 의전대가 공원을 가로질러 도열한 상태였다.
그들에게 공간을 내어주기 위해 전차가 비적비적 자리를 옮기는 중이었다.
그 모습을 봤을 때에야 내가 얼마나 큰일을 한 것인지 실감이 났다.
“이번에 윤예준 화가가 무슨 일을 했는지 다 들어 알고 계십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친히 만찬회를 꾸리셨으니 와서 즐겨주시기를 바랍니다.”
근위대 수장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이번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곤 장엄하게 말했다.
기자들은 모두 마다했어도 왕의 요청은 거절할 수 없을 것이었다.
나와 무함마드는 함께 본궁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근위대의 안내를 받아 본궁에 도착했다.
정치 업무도 이루어지는 곳이라 백악관과 분위기가 크게 다르지는 않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바쁘고 호화로운 곳’이라는 백악관에 대한 감상은 수정해야 할 것 같았다.
이곳은 전체 크기를 제대로 어림조차 못할 만큼 거대한 곳이었다.
무함마드의 말만 들어봤을 때 그의 아버지인 무함마드 살만도르는 조금 아들바보 같은 사람일 줄 알았다.
하지만 아랍문화권이 수장이라는 수식에 어울릴 만큼 근엄하고 매서운 인상이었다.
“그래. 카프탄의 친구라고? 들은 바가 있어 대단한 이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엄청난 일을 해결해줄 줄은 몰랐구나.”
“아닙니다. 어려운 일도 아니었어요.”
살만도르 왕은 굵은 목소리로 차분히 감사 인사를 전한 뒤 무함마드를 쏘아보았다.
“한심한 놈. 그 멍청한 머리로 어떻게 미국 생활을 하고 있나 했더니만…… 그냥 총명한 친구 하나 두고 묻어가는 거였어.”
“아, 제가 무슨 예준이 등에 업혀 있는 줄 아세요? 그런 거 아니에요. 제가 얼마나 한 총명 하는데요.”
“......밖에 누구 없느냐? 와서 이놈 가죽을 벗겨라.”
유머러스 한 건 무함마드와 비슷했다.
살만도르 왕과 무함마드는 결혼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대개 무함마드의 일 처리 능력을 믿지 못한 살만도르 왕이 괜한 참견만 놓는 과정이었는데, 의외로 그 자리에서 결혼식의 많은 것들이 결정되었다.
괜한 참견이 아닌 것이었다.
그중 하나가 결혼식 ‘증인’에 관한 것이었다.
“보통 왕자 친구나 은사가 증인을 해주는데, 너는 이곳에 아무런 연도 두지 않았으니 참 곤란한 일이지. 네 형들 결혼 땐 이런 걱정이 아예 없었는데.”
“저도 별걱정 안 하고 있는데요? 여기 예준이가 해주면 되죠.”
증인이란 아랍의 결혼식에만 있는 결혼 문화였는데, 결혼식 전체를 참관하며 두 사람이 자신들의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면 그 증인으로 나서주는 역할이었다.
무함마드는 그 역할을 내게 맡기고 싶은 것이었다.
“들러리 같은 거예요?”
“응. 좀 중요한 들러리.”
나와 무함마드가 조용히 의견을 나누는 동안 왕이 말했다.
“친구인 건 그렇다 치더라도 아랍인이 아닌 건 어쩌려고?”
“혈통 검사 한 번 더 할까요?”
“됐다, 됐어.”
조금 싫은 표정으로 한숨을 쉬던 살만도르 왕이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예준이 네가 적합하긴 하겠구나. 어차피 이놈 결혼식이 전통혼사와는 많이 다르기도 하고…… 인지도로 보나 이번 공로로 보나…… 그리고 결혼할 아이와도 잘 아는 사이라고?”
“네. 맞습니다.”
“그럼 정식으로 부탁하마. 증인으로서 두 사람의 결혼을 축복해줄 수 있겠느냐?”
왕의 말대로 내가 적합하기도 했고, 나 개인적으로도 큰 기회였다.
수많은 왕실에서 결혼을 축하하러 올 것이었다.
증인처럼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면 그들에게 보다 효율적으로 눈도장을 찍어둘 수 있었다.
“네. 한번 잘 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