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통과 의례
사우디에는 일부러 결혼식을 3주 앞두고 방문했다.
아직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문화권 중 하나가 아랍이었기 때문이었다.
미리 도착해 아랍 문화와 예술관에 대해 조금 알아두고 싶었다.
그렇게 14시간의 긴 비행 끝에 사우디아라비아의 킹칼리드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굉장히 수많은 저층 건물들이 빽빽이 모여 있는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직선으로 쭉 뻗은 도로와 단정하게 정리된 골목들이 마치 바둑판을 연상시켰다.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자동차를 타고 동부로 쭉 달려 ‘후푸프’라는 도시에 도착했다.
거의 수십 시간을 직선 도로만 내달리다 중간에 한 번 우회전했을 뿐이었다.
후푸프는 아라비아반도 내에서도 상당히 깊은 역사를 자랑하는 곳이었다.
규모도 엄청났지만, 오아시스의 도시라는 별명과 어울리는 아름다운 경관이었다.
‘히라(Hera) 미술관이라고 했나?’
이전에 무함마드가 사우디에 오면 꼭 가보라고 했던 미술관이었다.
규모로는 어떨지 몰라도 미국 어느 미술관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 미술관이라고 했다.
그 유명세 덕분에 미술관 위치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휴대폰 지도 어플로도 찾을 수 있었지만, 후푸프 주민 누구를 붙잡고 물어봐도 친절하게 안내해주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미술관으로 들어가자마자 동굴 벽화를 보러 향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예술 작품, ‘히라 동굴 벽화’
최초의 미술 작품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현존하는 것들 중에서는 가장 오래되었다고 했다.
4만 4천 년 전 그림이라는 것이었다.
‘이걸 보러 사우디에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벽화가 원래 있던 환경을 유지하기 위해서인지 실내 온도가 많이 쌀쌀했다.
하지만 추운 걸 신경 쓰기에는 살펴볼 벽화가 많았다.
새나 파충류 머리를 하고 있는 인간의 모습,
창과 밧줄을 휘두르며 야생 동물들을 쫓는 모습 등등.
어떻게 4만 년이 넘도록 이렇게 보관될 수 있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굉장히 경이로웠다.
동굴처럼 조성된 미술관은 건물 반대편을 향해 길게 뻗어 있었다.
문득 터널을 지나 로빈슨 섬으로 오라고 했던 베이컨의 말이 떠올랐다.
‘동선을 확보하기 위해 복도형 전시관을 기획했지. 터널이라고 이렇게 작품을 만들지 않을 이유가 있나?’
나는 전시실에서 나와 태블릿을 켰다.
그리고 해저터널 모양의 원통 내부에 들어가면 좋을 그림을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어느 한 시기를 살았던 생물은 지층에 자신을 평면으로 남겨 화석이 된다고 했다.
언뜻 층층이 쌓여 있는 지층 사이엔 한 끗 차이밖엔 없어 보이지만, 사실 그 사이엔 짐작할 수도 없는 만큼 긴 시간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그렇게 평면화된 기억은 서로 완전히 단절되어 있는 것이었다.
나는 그 아이디어에 착안해서 지층을 연상시킬 만한 그라데이션 배치를 활용해 스케치를 완성했다.
작품 제목은 <깊이의 동굴-순간의 연대기>.
그렇게 태블릿을 접고 본격적으로 히라 미술관을 관람하고 있는데 무함마드로부터 전화가 왔다.
결혼 준비로 한참 바쁠 때 무슨 일이지?
“네, 여보세요?”
-어? 뭐야! 국제전화로 안 넘어가네? 지금 혹시 사우디야?
“네. 그런데…”
목소리부터가 정신이 없었다.
-오, 이런 우연이! 역시 우린 보통 사이가 아닌 모양이라니까! 지금 엄청 비상사태거든? 혹시 우리 집으로 좀 와줄 수 있어? 진짜 너무 곤란한 상황이라서 그래.
“무슨 일이신데요?”
-예준이 네가 꼭 봐줬으면 하는 그림이 있어. 와도 후회는 안 할 거야. 내가 장담할게.
무함마드는 주소를 문자로 보내준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
수도 리야드의 궁전 정문에 도착하자 정장을 입은 남성들이 무서운 속도로 내게 달려들었다.
무함마드가 보내준 의전원들이었다.
모든 게 낯선 상황이었지만 의전 차량 하나만큼은 익숙했다.
가끔 조수석에 앉아본 그 전차 같은 세단이었다.
다를 만한 건 내 좌석이 상석이라는 점뿐이었다.
정문에서 궁전까지는 직선의 거대한 길을 달려야 했다.
굉장히 큰 궁전인 줄은 알았지만 가까워질수록 궁전은 끊임없이 커졌다.
정문에서 보고 예상했던 것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크기였다.
의전은 거의 군사 작전을 하듯 칼같이 진행되었다.
내가 궁전으로 향하는 중앙 계단을 오르면 의전원들은 궁전 방향을 제외한 세 방향을 모두 검은 천으로 가렸다.
그렇게 궁전 내부로 들어서자 집사들과 함께 찻상을 차리고 있는 무함마드의 모습이 보였다.
아랍 전통 옷을 입고 지체 높아 보이는 자세로 점잖게 대화하는 모습을 보니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어, 예준이 왔구나. 어서 와!”
낯선 건 비단 복장 때문만이 아니었다.
무함마드는 어느 때보다도 진지해 보였고, 말투에서 이전의 장난기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나는 무함마드가 가리킨 자리에 앉아 ‘까흐와’라는 아랍식 커피를 마셨다.
“서론으로 낭비할 시간이 없네. 너무 급한 일이라서 말이야. 전화로 상황은 전해 들어서 알고 있지?
“전화로 듣기는 했는데, 아마 감독님이 너무 바쁘셔서 자각을 못하셨겠지만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들었어요.”
“그래?”
무함마드는 그제야 내 머릿속에 어지럽게 분산되어 있던 퍼즐 조각을 맞춰주었다.
“우리나라에는 ‘마흐르’라고, 결혼할 때 신부 측에게 굉장히 귀한 보물을 예물로 줘야 하는 풍습이 있어. 그런데 이제 와서 왕가 간 결혼이란 게 제대로 이루어지기가 어려운 법이잖아? 그래서 지금은 형식적인 의례로만 남아 있는 상태야. 엄청 중요한 형식적인 의례.”
먹지도 않을 케이크를 커팅하는 등의 형식적인 식순을 말하는 것 같았다.
“이번 결혼식 때 주고받을 예물은 ‘블루 다이아몬드’라는 보물이야. 사우디의 전통 세공법으로 만들어진 보석이고, 현존하는 블루 다이아몬드 세공석 중 가장 큰, 가장 오래된 물건이지.”
“와. 굉장히 귀한 거네요.”
“응. 너무 귀해서 값을 매기지도 못하는 물건이야. 그런데 지금 그걸 도난당했어.”
무함마드는 침통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조금 이상한 말이지만, 값을 매기지도 못할 만큼 값진 물건이 왕실에서 분실되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곳으로 오는 동안 거쳤던 그 삼엄한 경계들을 생각해보았다.
“굉장히 골치 아프시겠는데요?!”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야. 그래서 그냥 미국에서 하겠다고 한 건데……”
무함마드는 결혼 허락을 받고 예술의 섬 개방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오기 전에는 블루 다이아몬드가 있었다고 했다.
“잠시 블루 다이아몬드를 이곳에 보관해둔 사이에 없어졌어. 아마 대외적으로는 다들 내가 이곳에 있는 줄 알았을 텐데. 내 생각엔 내가 그곳에 참여한다는 걸 아는 사람이 미리 알고 와서 훔쳐 간 것 같아.”
“이곳에 잠시 보관해두었다면 원래 보관 장소는 어딘데요?”
“원래는 리야드 궁궐에 있지. 여긴 내 별궁이야.”
이 넓은 건물 전체가 별궁이었다니.
“아무튼…… 그럼 그림 이야기도 하시던데, 그건 무슨 뜻이었어요?”
“딱 그 블루 다이아몬드만 가져갈 생각이었던지 창고를 아예 쥐잡듯 뒤집어엎어 놨더라구. 다른 건 손상되지는 않았는데, <그라나다의 항복>이라는 그림 한 귀퉁이가 칠이 벗겨져 있어.”
수많은 복원가들이 있겠지만, 무함마드가 알기로는 나만큼 믿고 맡길 만한 실력자는 없다고 판단했다는 것이었다.
그림 복원은 어렵지 않았다.
안 그래도 바쁜 상황일 테니 가능하다면 최대한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어쩌면 범행 현장에서 내가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말이다.
***
프란시스코 P 오티즈, <그라나다의 항복>
“어휴, 한시름 놨네. 역시 실력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복원이 끝난 작품을 두고 무함마드가 땀을 닦는 시늉을 했다.
내가 오기 전에 복원 시설까지 모두 갖춰놓은 상태였다.
칠이 벗겨진 부분은 캔버스 천 부분 마모도가 각기 달랐다.
여태 해봤던 복원 작업 중 가장 간단한 작업이었다.
“그럼 이제 유사도 측정을 해볼까?”
“잠시만요. 떨어져서 손상된 거라면 다른 흠집이 또 없는지 확인해봐야죠.”
작품을 옮기려던 무함마드가 다급히 손을 떼었다.
나는 복원실 조명을 이용해 그림을 이리저리 기울이며 흠집들을 확인했다.
몇 가지가 눈에 띄기는 했지만, 복원 이력을 남겨놓을 만큼 큰 손상은 아니었다.
보통 사람 육안으로는 제대로 확인도 하지 못할 것이고 말이다.
‘음……?’
흑색 말을 타고 있는 술탄의 망토 부근에서 무언가 반짝이는 걸 보았다.
흠집인가 싶어 자세히 확인해보았지만, 다시 봤을 땐 매끄럽기만 했다.
‘잘못 봤나?’
다시 복원대에 올려놓으려고 각도를 바꾸는 순간 또 무언가가 번쩍하고 모습을 잠깐 드러냈다.
“왜 그래? 무슨 문제 있어?”
“아뇨, 뭔가가 눈에 띄는데……”
이번엔 위치를 분명히 확인했다.
내가 가리키는 곳을 무함마드도 함께 확인하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19세기 물감으로는 보이지 않는 어떤 칠이 아주 얇게 묻어 있었다.
플래시를 들어 여러 각도로 조명을 쬐어보았다.
얇게 묻은 물감층 치고 반짝임이 심했다.
‘확실히 내가 아는 물감은 아니야.’
화가가 그린 걸로도 보이지 않았다.
세척액으로 섬세하게 닦아내자 정체불명의 칠은 더 이상 발견되지 않았다.
“일단 됐어요. 이대로 검사해주세요.”
나는 카프탄 별궁의 집사들에게 그림을 맡기면서도 찝찝한 마음을 가누지 못했다.
별수 없이 주변만 돌아보며 창고를 나왔다.
무함마드는 나를 그동안 묵을 숙소로 안내해주었다.
별궁 내에 있는 방이었는데도 꽤 걸어야 했다.
그동안 나는 앞서 보았던 정체불명의 빛나는 물감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자. 여기서 묵으면 돼. 내 방이다, 생각하고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고.”
“아, 감사해요.”
굉장히 호화로운 방이었다.
나는 방 인테리어를 조금 살펴보다가 황금빛을 내는 옷장 하나를 발견했다.
“저거 하나만 좀 분위기가 다르네요?”
“아, 응. 그건 옛날에 결혼 축하 선물로 태국 왕실에서 받아온 거야.”
방 안에서도 유독 불교문화권에 가까워 보이는 패턴의 디자인이었다.
무함마드에 의하면 옷장뿐만 아니라 화장대, 향로 등 태국 장인의 작품을 다량으로 선물 받았다고 했는데, 그중 옷장만 이 접객용 침실에 가져다 놓은 것이었다.
“아, 그럼 이것도 보물이네요. 상하지 않게 조심히 쓸게요.”
“괜찮아. 전체적으로 황금색 칠이 돼 있잖아? 그게 황칠이라고, 옻나무 수액을 뽑아서 만든 안료래. 너무 끈적해서 다루기가 어렵다더라고. 잘 마르지도 않고. 나중에 태국 왕실에서 장인을 보내 다시 칠해줄 테니까 괜찮아.”
최근에도 한 번 새로 칠했다고 했다.
원래 그렇게 주기적으로 관리해줘야 하는 건 아니었지만, 왕실 간에 교환하는 선물이다 보니 태국 측에서도 신경을 써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옷장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황칠이라는 것은 마치 투명한 금덩이 같았다.
겉만 칠해진 안료겠지만 일반 도금보다도 깊이가 있었고, 색이 좀 더 진해 훨씬 고급스럽게 느껴졌다.
“이 방 누가 관리해요?”
“응? 왕실 청소부가 하지. 그건 왜?”
이 정도 깊이의 광택에 점성이라면 아까 창고에서도 하나 본 게 있었다.
“그 사람이 범인일지도 모르겠네요. 블루 다이아몬드 훔쳐 간 범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