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예술의 허브 (6)
제 삶을 선물로 주겠다는 말을 시작으로 베이컨은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용돈이랍시고 몇십만 달러씩은 선뜻 줄 수 있는 위인이었기에 잠시 긴장했는데, 차라리 다행이었다.
베이컨은 한때 예술가를 꿈꿨다고 했다.
프로 화가가 되는 데에 실패해 일찍이 포기했다.
테레즈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사연이었다.
그래도 예술가들과 교류하거나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기쁨을 대신 누릴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섬이 있습니다. ……아마 내가 죽으면 또 다른 누군가 그 섬을 사서 저와 같은 여생을 보내게 되겠지요. 풍경이 굉장히 아름답고 여유로운 곳이에요. 그곳에 있으면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착각이 든답니다.”
그 섬이 어찌나 좋았던지, 금융가로서 바쁜 삶을 살아온 자신의 평생이 그 섬을 사기 위한 과정처럼도 여겨진다고 했다.
나는 그가 이야기하는 동안 휠체어를 끌며 다시 지하 1층을 향해 걸었다.
“나는 반평생을 혼자 독식하고 누려왔지만, 늦게라도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양보해볼 마음이 생겼어요. 내가 지금 남은 돈이 좀 있는데, 로빈슨 섬과 이 노스브라더 섬을 잇는 해저터널을 지어보는 건 어떨까요.”
“그럴 수 있나요?”
“그럼요. 보니까 이 노스브라더 섬에 수많은 예술가들이 찾아올 것 같은데, 그 친구들을 위한 휴양지를 내가 제공해주고 싶거든요. 굉장히 아름다운 곳이에요. 해저터널만 지을 수 있게 하시면 병원도 짓고 휴양 시설도 짓고, 그래야지요.”
로빈슨 섬은 노스브라더 섬으로부터 5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거기다 미들타운의 아트밸리와 노스브라더 섬을 오가는 정기 항해편이 마련되어 있으니 항로를 둘로 나누기만 한다면 굉장히 거대한 규모의 아트밸리가 완성되었다.
미술관 입구로 향하는 복도를 지날 때 베이컨이 말했다.
“저도 긴 통로를 지나 윤 화가님 작품을 보러 왔지요. 윤 화가님도 터널을 따라오시면 됩니다.”
삶을 선물로 주겠다는 말은 과한 표현이 아니었다.
제 삶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는 로빈슨 섬을 예술가들에게 넘겨주기로 결정했으니만큼 말이다.
***
얼마 지나지 않아 베이컨은 말 그대로 휴양 시설, 병원, 그리고 해저터널을 짓겠다는 사실을 언론에 알렸다.
일명 ‘예술의 섬’에 방문한 뒤로 큰 감동을 받았다는 게 그 이유였다.
로빈슨 섬 통행료 같은 것도 없을 전망이었다.
공사가 끝나면 로빈슨 섬을 국유지로 활용하도록 기부하겠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베이컨은 바로 해저터널 착공에 들어갔다.
미들타운의 아트밸리, 로빈슨 섬, 예술의 섬을 잇는 삼각의 해저터널은 총 30km였고, 건설 비용은 총 1조 6800억이 예상된다고 알려졌다.
그 사실이 알려지자 YJ재단에 대한 후원금이 상당히 많이 입금되었다.
한국의 윤예종에서 매년 진행한 미술치료 이력과 함께 미술치료 상담소와 정신과가 로빈슨 섬에 생기게 되었다는 소식이 쌍을 이뤄 퍼졌기 때문이었다.
설마하니 1조 6800억 원짜리 선물일 줄은 몰랐다.
물론 후원금의 명목도 분명했고, 더욱이 예술을 위한 사업인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베이컨이 자산 현금화에 애를 먹는 동안 후원금 5000억 원을 바로 입금해 주었다.
곧 ‘크로니클 오브 필랜스로피(chronicle of philanthropy)’라는 단체에서 기부금 단체 순위를 발표했다.
한 해 동안 가장 많은 기부금을 받은 단체를 서열화해 매년 순위표를 발표해주는 곳이었다.
1위는 YJ재단으로, 아칸소, 코넬 등 수많은 사학 재단을 포함하고도 압도적이었다.
처음 예술의 섬 프로젝트를 기획한 계기가 바로 대통령이었는데, 생각보다도 훨씬 좋은 방향으로 사업이 발전하는 걸 긍정적으로 여긴 것인지 아트밸리에 다양한 특별 혜택을 제시해주었다.
특별 비자나 절세 혜택 같은 것 말이다.
예술엔 국경이 없어야 하기에 세금이든 비자든 아트밸리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비어 있던 공간은 나와 게리, 도연의 그림으로 다 채워 넣었다.
보통의 미술관만큼 많은 규모는 아니었지만, 테나리우스라는 이름이 꾸준히 유명세를 타 인산인해를 이뤘다.
실험적인 시도를 한 건축물이라는 평가까지 생각하면 미국에서 가장 화제성이 높은 미술관이 되었다.
하지만 국가 혜택들 중 가장 파격적인 건 YJ재단을 ‘세계예술인대회’의 메이저 스폰서로 지정해준 것이었다.
‘세계예술인대회’는 올림픽에서 예술 분야를 다시 독립시켜 따로 세계 규모의 종합 대회로 기획한 신생 대회였다.
올림픽처럼 4년에 한 번씩, 항상 노스브라더 섬에서 열리게 되었다.
이미 공연장과 체육관이 많이 마련되어 있지만, 세계예술인대회를 열기에는 부족한 게 사실이라 선수촌을 따로 조성해놓게 되었다.
그 과정은 다른 예술인들이 모여 자생적으로 준비해나갈 수 있도록 했다.
해저터널이 지어지는 동안 나와 아버지는 회계 처리로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나는 끊임없이 두 섬과 미들타운을 오가며 사업 진행 상황을 살폈고, 아버지는 재단 계좌와 후원금 관리만으로도 하루 24시간이 부족했다.
“미술관 건축 디자인 수익이 270억이나 들어왔네. 작품 비용은 20억.”
그렇게 아트밸리 내 숙소에서 일을 처리하고 있을 때였다.
계좌를 확인하던 아버지가 말했다.
미국 정부에서 들어온 돈이었다.
현재와 샐리, 다지오의 몫을 생각하면 엄청난 금액이었다.
작품 전시 비용은 어차피 좋은 의미에서 하는 것이니 최소한만 받기로 한 게 20억이었다.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방문을 해줘야겠네요.”
“그렇지.”
계속 정기선만을 기다리며 불편을 감수하게 할 순 없었다.
해저터널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질 것도 아니고 말이다.
지금 수준의 배편은 곤란했다.
좀 더 운행을 자주 할 수 있는 배를 한 척만 더 운행시켜도 훨씬 더 많은 방문객들을 이동시킬 수 있을 것이었다.
“배를 한 척 살까요?”
지난번 선상 예술 파티 때가 떠올랐다.
굉장히 움직임이 적은 배였는데, 풍경도 좋고 안에서 그림을 그리기에도 적합했다.
나와 아버지는 바로 사용할 수 있는 배를 알아본 뒤 가격을 확인했다.
675억짜리 배였다.
너무 비싸게 느껴졌던지 아버지가 조금 주저하며 나를 보았다.
“돈 걱정할 시기는 이미 지나지 않았어요?”
“하기야 그렇지?”
그리곤 피식 웃으며 해운회사 영업부서로 전화를 걸었다.
그때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렸다.
낯선 중년 남성이었다.
“누구세요?”
“계셔서 다행이네요. 슈링크래프트의 슈크입니다. 지난번에 연락하셨던.”
***
인수 의사를 밝힌 뒤 고민할 시간을 달라고 하자 ‘예술의 섬’ 프로젝트가 끝나면 한번 만나서 이야기 나눠보자고 했다.
그때 슈크는 그럼 그때 직접 찾아뵙겠다고 했는데, 정말로 프로젝트가 끝나자마자 직접 찾아올 줄은 몰랐다.
아트밸리 내 카페로 이동해 대화하기로 했다.
음료를 하나 시킨 슈크는 별로 사업가 같아 보이는 사람은 아니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인수 이야기가 나온 뒤부터는 모든 영업 활동이 정지된 상태라고 했다.
사업가답지 않은 여유로운 분위기엔 다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제가 인수 의사를 너무 갑작스럽게 밝혔나요?”
“그런 이야기들이야, 항상 갑작스러울 수밖에 없죠. 저희로서는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아직 얼떨떨하긴 하지만요.”
슈크는 앉은 자세가 올곧고 신사다운 인상이었다.
“그런데 왜 굳이 저희 회사를 인수하고 싶으신 건가요? 설립된 지 5년밖에 안 된 데다가, 그…… 부채도 상당한데요.”
“슈링클스라는 종이가 굉장히 마음에 들었거든요.”
나는 슈크에게 내가 생각하는 슈링클스의 장점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지난번에 임시로 만들었던 슈링클스 보관함도 굉장히 편리했다.
유화 작품 취급에 굉장히 공을 많이 쏟는 미술관이나 경매장에 판매한다면 굉장히 반응이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병원, 학교, 어린이집에서도 사용하기 좋은 미술 재료이기도 했다.
찰흙처럼 슈링클스를 주무르며 여러 조형물을 만들 수 있지 않은가.
어쩌면 그 기술을 활용해 다른 친환경 소재를 만들어 더 다양한 미술에 기여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굉장히 비전이 구체적이시군요. 그럼 인수가는 어느 정도로 생각하고 계십니까?”
“470만 달러요.”
“예?”
한화로 60억 원이었다.
재무제표를 보니 슈링크래프트의 부채비율이 500%를 넘기고 있었고, 전망 평가도 암담했다.
“부채가 많아서 50억 이상은 생각도 안 해봤는데. 그렇게나 전망이 좋아 보입니까?”
“네. 5년 사이에 좋은 소재를 두 번이나 개발하셨잖아요? 현재 부채는 그 개발에 필요한 돈이었을 테고. 개발에 투자한 셈 치면 되죠.”
좋은 작품을 낸 화가가 작품과 함께 인정받듯 회사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러스트벨트 지역에 굉장히 솜씨 좋은 노동자들이 많은데, 만약 필요하시다면 그들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공장들이 대부분 폐쇄되어서 아마 그들도 환영할 겁니다.”
생산 규모를 키울 것이기 때문에 인력도 더 많이 필요할 것이었다.
이미 숙련된 노동자들이라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계약을 체결한 뒤 테레즈에게 입금을 요청했다.
‘하지만 슈링크래프트만 가지고는 그 많은 혁신을 이뤄낼 수 없어.’
좀 더 다양한 연구 기관과의 협동 연구가 있어야만 슈링클스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공장뿐만 아니라 직접 연구소를 지어 소재 개발 과정을 전문화해야 했다.
‘그러고 보니까 최근에 흥미로운 미술 기사를 하나 봤는데.’
좀 더 알아보고 싶었지만 일이 바빠 스크랩만 해두었던 기사였다.
반타블랙보다 더 검은 물질을 발견했다는 소식이었다.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학 연구진이 개발한 리뎀션 오브 배니티가 99.995%의 빛 흡수율을 보여 반타블랙보다 더 검은 물질이 되었다……
반타블랙에 비하면 반사율이 7분의 1 수준으로 떨어진 것이었다.
역시 영원히 안 되는 일은 없었다.
드림랜드 폐장쇼 때만 해도 하늘에 그림을 그리려면 드론을 사용해야만 했는데, 이번 예술의 섬 개방 때는 빛만으로 쇼를 성공시킬 수 있지 않았던가.
나는 MIT에 직접 전화를 걸었다.
그 연구진들을 아트밸리로 데려오면 슈링클스 개발에도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어쩌면 새로운 색을 하나 만들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나는 전화를 받은 MIT 연구소 관계자에게 리뎀션 오브 배니티 개발진들을 아트밸리로 데려오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혹시 리뎀션 오브 배니티보다 더 검은 물질을 원하시는 겁니까?
관계자가 물었다.
세상에서 가장 검은 물질이라고 한다면 흥미가 가는 건 사실이었지만, 그 무의미한 빛 흡수율에 매달릴 생각은 없었다.
아마 리뎀션 오브 배니티가 나온 뒤로 반타블랙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색이 되었을 것이었다.
가장 검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색이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나는 울트라마린처럼 다양한 가치를 담고 있는 색이 만들어지기를 원했다.
“아뇨. 연구원들이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예술에 새롭게 필요한 소재나 물감이 무엇인지 스스로 판단하고 개발할 수 있게 할 겁니다. 인건비는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구요.”
듣던 연구원은 아트밸리에 연구 시설이 완성되면 꼭 인력을 지원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렇게 로빈슨 섬과 노스브라더 섬, 아트밸리를 잇는 삼각형이 바다에 그어졌다면, 슈링크래프트와 아트밸리, MIT를 잇는 삼자협약이 육지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곧바로 부지 내에 연구소, 실험실, 그리고 공장을 짓기 시작했다.
전체 지출 비용으로는 525억 9000만 원 정도가 소비되었다.
산, 학, 예술인의 교류가 차세대 예술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무엇도 예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언론에서도 MIT와 YJ아트밸리의 제휴를 시끄럽게 보도했다.
그동안 무함마드와 카산드라의 결혼식 일정은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정작 더 흥미로운 사건은 미국이 아니라 아랍에서 이루어지게 되리라는 걸 당시의 나는 모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