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예술의 허브 (5)
예술의 섬이 개방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아트밸리 내부에 지어진 선착장에서 ‘올림픽선’ 정기 항로에 올랐다.
개방을 맞아 대통령이 선물해준 크루즈였다.
[스카이 댄스오브라이트]
올림픽선 위에서 짧은 선상 예술 파티를 즐기다 보면 예술의 섬 정상에 화려한 빛이 반짝이는 게 보였다.
개방과 동시에 테나리우스 개관식이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개관식 이름은 ‘스카이 오브 댄스라이트’였다.
최신 조명 장치로 하늘에 ‘Dance of Light’라는 글씨를 형상화시켰다.
과거 드림랜드 퍼레이드 때는 상상도 못해본 기술이었다.
차세대 기술을 활용해 도연, 게리와 함께 만든 회심의 퍼포먼스였다.
빛은 돔 근처에 설치해둔 조명 장치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지만, 유리로 된 돔 내부가 매우 화려해 보였던 덕분에 그 빛이 새어 나온 결과처럼도 보였다.
올림픽선에서 내린 방문객들은 홀린 듯이 테나리우스 미술관으로 향했다.
돔 아래서 올려다보면 조명이 굉장히 화려해 착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낮처럼 빛났기 때문에 방문객들은 선착장 바로 앞 미술관 입구를 지나 복도형 전시장을 지나는 동안 틈틈이 내다보이는 하늘만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특별전시관에 입장한 뒤부터는 원형 홀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본격적으로 쇼가 시작되면 나와 게리, 도연의 작품들이 그들의 눈길을 사로잡았기 때문이었다.
층별 복도가 둘러싸고 있는 중앙 공간에는 줄을 여럿 늘어뜨려 놓았는데, 음악 소리와 함께 줄이 올라가기 시작하면 최하층에 숨어 있던 그림들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줄은 모든 작품이 모습을 드러낸 뒤 상승을 멈췄다.
대신 모빌처럼 돌며 겹쳐져서 안 보였던 작품들을 하나씩 관객들에게 선보였다.
마치 중력이 없는 공간에 그림들이 둥둥 떠 있는 듯했다.
“그냥 버려질 수도 있는 공간이었는데 이렇게 활용하다니……!”
관람객 중 한 명이 감탄했다.
돔을 통과해 내려오는 창백한 빛 때문에 명암이 분명했다.
덕분에 그림은 빛을 냈지만 그림을 매달고 있는 끈은 눈에 잘 띄지 않았다.
관람객들은 1층 복도부터 시작해 차근차근 최하층을 향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매달린 작품들을 감상하느라 상당히 천천히 움직였다.
최대한 활용해둔 흡음재도 제 역할을 해준 덕에 발소리는 굉장히 조용했다.
“마치 작품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기분이군.”
“미술관 설계 단계부터 이 연출을 의도했던 걸까요? 굉장히 대단한 연출력이에요!”
오직 이 쇼만을 위해 설계했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었다.
그러나 이 설계에 적합한 연출은 이 쇼 말곤 없었다.
최하층에 도착한 관람객들이 신비롭게 부유하는 그림들을 올려다보며 감상에 젖어있을 때였다.
“사람들이 엄청 만족스러워하는 것 같은데! 나도 빨리 내려가 보고 싶어.”
“초대장 고마워요.”
지하 1층 로비에서 관람객들의 반응을 살피고 있는 내게 무함마드와 카산드라가 다가왔다.
“당연히 초대장 보내드려야죠. 특석 같은 게 없어서 특별 대우를 못 해드린 게 죄송할 뿐이죠.”
“복도 어디에 서더라도 특석 같은걸요?”
카산드라가 말했다.
모든 동선에서 그림을 온전히 확인할 수 있도록 계획해 두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모든 위치가 특석 같다는 평가는 굉장히 고마웠다.
“그런데 두 분이 함께 계신 모습을 다 보네요.”
“미디어아트센터에서 알고 지내게 됐지. 거의 항상 함께 작업하고 있다고.”
나와 무함마드가 잠시 미디어아트에 관한 대화를 나누는 동안 카산드라가 품에서 카드 한 장을 꺼냈다.
“저도 초대장을 드려야겠네요.”
하얀 실크 색깔의 빳빳한 종이에 금박이 프린트되어 있었다.
초대장이 아니라 청첩장이었다.
“어? 카산드라 씨 결혼하세요?”
“네, 그렇게 됐네요.”
신부 측 이름에 카산드라의 이름이 버젓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가장 놀라운 건 카산드라의 결혼 소식 그 자체가 아니었다.
신랑 측 이름에 적힌 긴 왕가 성씨와 ‘무함마드 카프탄’이라는 이름이었다.
“와. 카산드라 씨 아트밸리로 오신 게 벌써 그렇게 됐어요? 두 분이 결혼하실 정도면.”
“그렇지. 그런데 우리가 결혼한다는 건 별로 놀랍지 않은 거야?”
왜인지 더욱 성숙해 보이는 무함마드가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당연히 놀라웠다.
그나저나 무함마드가 지금 객지 생활을 하고 있다고는 해도 왕자였다.
왕가의 혈통을 유지하려면 아랍인과 결혼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카산드라는 미국인이었다.
내 반응을 보던 무함마드가 주변을 살핀 뒤 속삭였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혈통 검사를 해봤거든? 그런데 베두윈(아랍토착민 인종) 혈통이 27%나 나온 거야! 어쩐지 처음 봤을 때부터 친숙하고 마음이 가더라고. 그걸 강하게 어필했더니 마지못해 수락하셨어.”
베두윈 혈통이라는 게 얼마나 희귀한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축하할 일이었다.
나는 축하 인사를 건네며 청첩장을 확인했다.
결혼식 장소가 사우디 궁전으로 되어 있었다.
“결혼식도 아버님이 직접 열어주시는 거예요?”
“응. 결혼 허락받았을 때 그렇게 하라고 하시더라고. 그래도 그냥 미국에서 열 생각이었는데, 그 성의까지 무시하면 안 되겠더라고.”
하긴, 수시로 차를 보내줄 정도로 무함마드를 내심 아끼는 아버지였다.
“멀어도 꼭 와줘야 해. 사우디에서 하는 거라고.”
“당연히 꼭 가야죠.”
***
예준은 무함마드와 카산드라처럼 개인적으로 알고 지낸 사람들뿐만 아니라 자신의 작품을 사준 이들에게도 초대장을 전했다.
일전에 마네의 붓을 활용해 만든 설치미술 작품 <아마란스>를 구입한 베이컨 로빈슨에게도 말이다.
베이컨은 저택 안에 조성해둔 <아마란스> 전시장 앞에 서서 ‘스카이 댄스오브라이트’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축제 현장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한 손에는 예준의 초대장이 들려 있는 상태였다.
베이컨은 이렇게 홀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는 것을 좋아했다.
이 저택에 살게 된 이후부터는 더더욱 말이다.
베이컨의 저택은 미국 남부 연안 로빈슨 섬에 있었다.
1993년에 이 섬 전체를 당시 돈으로 1,100만 달러(127억 3천만 원)에 사들였고, 그 이후로는 쭉 혼자 살았다.
혹자는 혼자 사는 게 외롭지 않느냐고 물었지만, 그들의 우려와 달리 베이컨은 굉장히 즐거운 노후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종종 저택 관리인들과 시시콜콜한 차담을 나누기도 했다.
수영장과 스쿼시 코트도 조성되어 있어 건강을 챙기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헬리콥터 코트도 여럿 만들어두었기 때문에 손님을 초대하기에도 좋았다.
그렇게 손님이 찾아오면 함께 사냥 캠프를 열어 꿩 사냥을 즐겼다.
그 일상을 보내던 와중에 예준의 초대장이 전달된 것이었다.
사실 초대를 했어도 베이컨이 먼저 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 어린 친구가 자신처럼 고리타분한 늙은이를 만나 휴양이나 제대로 할 수 있겠는가.
괜한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기약 없이 미뤄만 왔던 것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선뜻 초대장을 보내주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스카이 댄스오브라이트라……’
솜니움 미술관 파티는 코스프레라는 까다로운 조건 때문에 가보지 못했다.
그래도 그 명성만큼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굉장한 개관식이었다고 들었다.
그가 계획한 두 번째 개관식이라면 아마 마지막 즐길 거리로 삼기에 부족함은 없을 것 같았다.
참여를 마음먹은 베이컨은 즉시 선박 정비사와 항해사들을 로빈슨섬으로 불러들였다.
배는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그렇게 개관식 당일이 되었고, 베이컨의 배는 대통령의 올림픽선 옆에 정박했다.
파티가 열리는 미술관은 산꼭대기에 있었다.
하늘 위에 별과 함께 수놓아진 ‘Dance of Light’라는 글자가 나이 든 베이컨을 설레게 했다.
혈기왕성하던 어린 시절, 지금은 죽고 없는 친구들이 가장 예뻤던 때 자주 놀았던 파티 장소에 참여하는 기분이었다.
산 정상에 있어 비서들이 곤욕을 치를 뻔도 했지만, 신통하게도 언덕 초입에 미술관 입구가 위치해 있었다.
그곳으로 들어서면 비어 있는 전시관들이 복도형으로 쭉 나열돼 있었다.
종종 비어 있는 액자와 뻥 뚫린 실외 공간을 맞닥뜨릴 때마다 베이컨은 전동 휠체어를 멈췄다.
빈 캔버스 같은 삶을 살아온 베이컨이었다.
그 덕분에 가능성 넘치는 즐거운 시간을 보내올 수 있었지만 공허한 마음만큼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종종 트여 있는 천장 너머로 먼 메인 전시관의 파티 조명이 어지럽게 흘러들어올 뿐 적막만이 가득한 텅 빈 전시관이었다.
베이컨은 그곳을 자신의 인생길과도 같다고 생각했다.
듣기로 예술의 섬으로 조성하면서 수많은 건축물과 정원을 세웠다던데.
기존의 산림도 대부분 남아 있어 자연의 냄새를 그대로 맡을 수 있었다.
‘섬 전체가 예술작품 같구나……’
냄새뿐만 아니었다.
미술관 건축도 굉장히 세련되고 자연주의적이었다.
‘내가 알던 노스브라더 섬이 맞단 말인가……’
베이컨이 기억하는 노스브라더는 여전히 전염병이 들끓고 낙오된 군인들이 신음하는 지옥도(島)였다.
실제로 방문해본 적은 없어도 현재의 모습을 보면 과거의 그 악명은 완전히 헛것처럼 느껴졌다.
베이컨이 메인 전시관에 도착할 즈음 다른 관람객들은 이제 출구 쪽으로 걸었다.
파티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보다는 조금 한산해진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늦게 온 보람이 있었다.
그렇게 베이컨은 뒤늦게 메인 전시관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지하미술관이라기에 잠시 당황했지만, 거대 돔을 통해 내리쬐는 조명 빛에 갑갑함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파티가 끝나고 낮이 찾아오면 아마 지하에 있다는 실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의 햇볕이 들이칠 것이었다.
베이컨은 홀 복도를 따라 천천히 움직이며 그림을 감상했다.
2층, 3층, 깊이 내려갈수록 조금씩 정신이 몽롱해졌다.
원형의 공간을 계속 돌았기 때문인지, 경계를 알 수 없는 공간으로 빨려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최하층에 도착했다.
“와주셨군요, 베이컨 선생님!”
최하층 중앙홀 가운데 무수한 그림들 아래 서 있던 예준이 다가왔다.
“아주 멋진 개관식이군요. 초대해주셔서 얼마나 영광인지 모릅니다.”
“당연히 초대해야죠.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베이컨은 예준의 그림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화가님 작품 중에…… 구도가 상하 대칭인 게 있더군요.”
천국을 묘사한 돔이 이곳 미술관의 돔과 같은 패턴을 가지고 있기에 메인 전시관을 그대로 옮겨 그린 것인가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작품이 구형 구도였던 것과는 달리 미술관은 지하로 깊어져도 폭이 일정했으니까 말이다.
“위아래를 뒤집어서 보아도 그림이 자연스럽던데, 지금 제가 천국에 있는 건지 지옥에 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림의 최하층은 지옥, 뒤집으면 천국이었다.
“아직 살아 계세요.”
베이컨의 짧은 자문(自問)에 예준이 대신 대답해주었다.
그 말이 맞았다.
늘그막에 모험 없는 여생을 보내고는 있어도 베이컨은 살아 있었다.
그렇기에 휠체어를 타고 이곳까지 내려올 수도, 다시 올라갈 수도 있는 것이었다.
“이거 너무 과분한 선물을 받네요.”
“아닙니다.”
개관식과 작품에 감명을 받은 베이컨이었다.
“그래도 나도 뭘 좀 줘야지 윤 화가님도 수지가 맞으시겠지요. 어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