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이 제일 쉬움-151화 (151/241)

151화. 예술의 허브 (4)

도연이 떠나는 동안 구두 소리가 크게 울렸다.

내부 공간이 크게 계획되었기 때문에 소리가 강하게 울리는 것 같았다.

‘이래선 작품 감상에 집중할 수 없는 사람도 있겠는데.’

같은 소음을 내는 사람이 열 명, 스무 명, 4층 전체에 걸쳐 백 명이 넘는다고 생각하면 정말 끔찍했다.

지금 바닥 그대로 착공이 완료되지는 않겠지만 소음을 최소화할 수 있는 인테리어가 필요할 것 같았다.

예준은 실내 디자인을 맡은 안도 다지오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전화 받았습니다.

“다지오 씨. 제가 실내 디자인 계획을 아직 받아보지 못했는데, 혹시 바닥 표면 자재를 어떤 걸 쓰시나요?”

-소음 때문에 그러시는 건가요?

다행히 염두에 두고 있기는 했던 모양이었다.

-일반적인 자재로 하기에는 공간이 커서 울림이 심할 거고, 그렇다고 카펫을 깔면 생각보다 훨씬 더러워질 겁니다. 산 정상에 있는 미술관이니까요. 비라도 왔다간…… 난리가 나겠죠.

“굉장히 어려운 문제 같은데요?”

-생각해둔 대책은 있습니다.

다지오는 얼마간 고민에 빠졌다.

-이야기 나누기 전에 확정안을 보여드린 뒤에야 검토받으려고 했는데, 이참에 중간 검토 한번 해보는 게 좋겠네요. 지금 뵙죠. 현장에 계신가요?

다지오와는 비교적 조용한 지상층에서 만나기로 했다.

보면서 이야기할 수 있도록 내부 조감도나 설계도를 지참해달라고 했는데, 다지오는 아예 조형물을 가지고 왔다.

“벌써 이런 게 만들어졌나요? 아직 확정이 안 됐을 텐데.”

“아, 네. 저는 작업 간에도 사용합니다.”

다지오는 층별로 분해해 가져온 조형물을 조립하듯 쌓았다.

지하 4층짜리 메인 전시홀과 멀리 선착장까지 비켜 서 있는 지상 미술관 입구.

그리고 그 사이를 잇는 긴 복도식 전시관들.

원하는 부분을 그때그때 떼어내 확인할 수 있어 편하기는 편했다.

다지오는 긴 복도와 각 층의 원형 복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발소리는 빨리 걸을 때 커지죠. 그리고 걸음은 이동을 위해 있는 공간인 복도에서 가장 커지는데, 그곳을 관람 공간으로 만든 지금의 형태라면 지금처럼 큰 소음은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복도에도 작품을 전시한다는 것이었다.

그건 사전에 이야기가 되었던 부분인데, 다지오가 이야기하는 아이디어는 흡음 소재의 타공판이었다.

흡음재 타공판을 활용해 그림을 전시하면 방음뿐 아니라 소리 흡수가 원활해 울림이 적어질 거라는 뜻이었다.

다지오가 보여주는 타공판 사진을 보면 디자인도 우수했다.

바닥 재질은 도서관에서 사용하는 타일에 쿠션력을 올려 효과를 극대화시키겠다고 했다.

“그런데 타공판이라는 게 조금 두껍게 들어가는 거 같은데, 복도 전시관은 이렇게 좁으면 안 돼요. 그림을 보려면 물러설 공간이 필요하니까요.”

다지오는 설계도를 함께 확인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네요. 소재 두께를 좀 많이 줄여놔야겠습니다. 어차피 바닥도 어느 정도는 연장할 수 있어요.”

다지오는 스프레이를 꺼내 조형물에 뿌리더니 복도를 조금 넓도록 수정했다.

분명 딱딱한 플라스틱이었는데, 다지오가 스프레이를 뿌려 구기자 종이처럼 형태가 자유롭게 변형됐다.

“어? 이게 뭐예요?”

“아, ‘슈링클스’라는 소재인데 요즘 건축가들은 모형 만들 때 많이 씁니다.”

자유롭게 변형되는 플라스틱이라는 점에서 그럴 만한 소재였다.

다지오가 변형시킨 부분은 금방 굳었다.

내가 만지면 굉장히 딱딱해서 힘을 주면 부러질 것 같았다.

“신기하네요. 어떻게 이렇게 종이처럼 구겨지죠?”

“종이라고 보는 게 적절하다고 하던데요. 쉽게 말하면 지금은 딱딱하게 얼어 있는 종이 상태고, 열을 가하면 녹는 거죠.”

슈링클스는 열을 가했을 때 크기가 줄어들지만 그만큼 두께가 늘어나 형태를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는 소재였다.

하지만 그 정도가 되려면 너무 뜨거워 다지오처럼 맨손으로 만지기 어려웠다.

건축가들에게 사용되기 시작한 건 다지오가 뿌린 스프레이가 발명되고 나서부터였다.

스프레이를 뿌리면 슈링클스가 일시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 놓이게 되는데, 그럼 체온 정도의 열만 가해도 형태가 바뀌게 된다는 것이었다.

손을 대면 변하고, 떼는 순간 굳는다는 점에서 일반 종이를 접는 것과 비슷했다.

기온이 높은 날 잘못 뿌렸다가 낭패를 보지 않게 조심해야겠지만 말이다.

‘잘 활용하면 좋은 도구를 만들 수 있겠는데?’

“혹시 이 슈링클스라는 거 비싼가요?”

“아뇨. 그냥 플라스틱 가격과 비슷해요. 액세서리를 만드는 데 아니면 별로 사용되지 않거든요. 스프레이도 마찬가지고요.”

다지오에게 더 많은 슈링클스를 보여달라고 했더니 굉장히 많은 양의 슈링클스를 가져다주었다.

“이렇게나 많아요?”

“네. 말씀드렸다시피 생산량에 비해서 활용할 곳이 별로 없어서, 저 같은 건축가가 아니면 잘 안 쓰죠.”

활용할 곳이 없다니.

당장 생각나는 것만 해도 몇 가지 있었다.

간편함만 생각해보아도 미술품 보관 상자를 만들 수도 있었고 미술치료에서도 다양하게 활용될 여지가 많았다.

나는 도연의 그림을 떠올리며 알맞은 비율의 상자를 만들어 넣어보았다.

그림 크기에 따라 알맞은 상자를 만들 수 있다는 건 굉장히 큰 장점이었다.

여러 미술이 다양하게 유행하는 지금이라면 직접 작품에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고.

“이거 개발한 회사가 어디예요?”

“‘슈링크래프트’라는 회사인데, 슈링클스와 스프레이 모두 그 회사가 만들었어요. 규모는 작지만요. ……그런데 회사 이름은 왜요?”

***

나는 그날 공사가 끝나자마자 숙소로 돌아와 바로 테레즈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부분 새로운 투자처에 대해 상의할 때 전화했기 때문인지, 수화기 너머로 바쁘게 마우스를 움직이는 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네, 윤예준 화가님.

테레즈가 투자처 조회를 준비하며 전화를 받았다.

“네, 테레즈 씨. 혹시 슈링크래프트라는 회사 아시나요?”

-......소규모 화학회사군요. 최근에 특허 건이 있네요?”

“네. 슈링클스라는 종이를 다양한 형태로 변형시키는 기술인데요, 지금 투자자가 많은가요?”

볼 게 많은 모양인지 테레즈는 평소보다 더 천천히 살펴보더니 대답했다.

-아니요. 별로 유망 회사는 아닌가 봅니다.

“잘됐네요. 그쪽으로 투자해주세요.”

-그런데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 굉장히 부채가 많은 회사라서, 갑자기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은 회사예요. 위험한 투자처입니다.

생각보다도 더 찬밥 취급을 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면 내가 생각했던 쓰임새는 모두 예술 관련 활용이었다.

다지오에게 들었듯 별로 용도가 다양하지 못한 건 사실인 듯했다.

-윤예준 화가님의 선택이 틀렸던 적은 없지만, 위험성은 짚어드려야 할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적극적으로 말리고 싶군요.

“음…… 그 정도인가요?”

처음 바로크에 투자할 때보다도 더 강한 경고였다.

“혹시 재무제표를 볼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천천히 살펴보신 후 결정해보십시오.

곱씹어 생각해보니 부채가 많다는 건 이해가 되었다.

용도는 없는데 그런 대단한 기술을 개발했으니 연구비 투자 대비 수익이 전혀 들어오지 않은 상황일 것이었다.

곧 슈링크래프트의 재무제표와 테레즈의 자세한 분석 자료들이 메일로 도착했다.

테레즈 말대로 상당한 양의 부채가 조회되었다.

이래선 아무리 투자해도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격이었다.

이전의 투자보다도 더 적극적인 투자여야만 슈링클스를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나는 재무제표에 적혀 있는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네, 슈링크래프트 대표 슈크입니다.

바로 대표 번호로 연결되었다.

“재무제표 보고 연락드렸는데, 잠시 통화 가능하실까요?”

슈크는 조금 당황하는가 싶더니 대답했다.

-네, 가능합니다만…… 무슨 일이십니까? 전화 거신 분은 누구신지.

“아, 윤예준이라는 사람인데요, 슈링크래프트를 인수하고 싶어서 연락드렸습니다.”

수화기 저편에선 얼마간 대답이 없었다.

***

파격적인 인수 제안을 하자 슈크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회사를 팔 생각은 해본 적 없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회사 임원들과도 관련 사안을 두고 상의를 해봐야 할 것이었다.

나도 당장 ‘예술의 섬’ 프로젝트에 집중해야 했으니 느긋하게 시간을 가진 뒤 만나보기로 했다.

그렇게 계획했던 건축물들이 대부분 자리를 잡았다.

테나리우스도 이젠 완공되었다.

완공 소식이 알려지자 기자들이 몰려와 종일 사진을 찍어댔다.

분명 올해의 건축물이 될 거라고들 했다.

조용해 보이는 현재의 복도형 전시관만 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규모의 공간이 돔 아래 지하에 조성되어 있으니 그 자체의 반전 효과만 두고 보아도 분명 매력이 있었다.

나와 게리, 도연은 지상 미술관에 조성한 간이 작업실에서 각자 그림을 그렸다.

메인 전시관을 채울 그림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개관식 때 이 그림을 화려하게 선보일 생각이었다.

게리의 작품 중 는 수준급의 포토 페인팅이었다.

하지만 게리는 자신의 작품을 계속해서 배경으로 후퇴시켰다.

사진 위에 명암을 주고, 명암을 준 뒤 새로운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었다.

그동안 그림의 분위기는 계속 어둡게 가라앉았다.

결국 보석 몇 가지를 붙여 그림을 완성했다.

굉장히 어두운 분위기의 에펠탑 그림이었는데, 게리가 스위치를 올리면 촘촘한 보석들이 각양각색으로 빛났다.

마치 말로만 들어본 에펠탑의 야경을 보는 것 같았다.

낮에는 음울하지만 밤에는 화려했다.

게리의 말로는 윈스턴 크리스탈 페어에서 본 내 작품에 영향을 받았다고 했는데, 명암을 이용한 괴리감 표현을 보면 납득이 되기도 했다.

도연은 이라는 작품을 그렸다.

도연의 그림 속 노부부는 녹색으로 표현된 밭이랑을 함께 걷고 있었다.

한 걸음 떨어져 걷는 모습이 오히려 부부의 신뢰 관계를 보여주었다.

추수가 끝난 밭은 황량해 보였지만 부부는 별로 쓸쓸한 모습도 아니었다.

하늘과 공기 표현은 인상적이었지만 밭이랑은 추상미술의 것 같았다.

그 비현실적인 모습이 주는 신비로움이 매력적인 그림이었다.

나는 테나리우스 미술관 그 자체를 기념할 만한 그림을 그렸다.

라는 그림이었는데, 일전에 보았던 단테의 신곡에 표현된 풍경을 활용했다.

돔 형태의 그림 상단은 천국, 어둡게 표현된 그림의 하단은 지옥을 상징할 수 있도록 했다.

당연히 돔은 테나리우스 미술관 천장과 동일하게 그렸다.

요약하자면 내세의 두 극단이 이 미술관 안에 모두 있는 것이었는데, 가능하면 돔 바깥의 현실 세계가 더 중요하다는 마음으로 그림을 봐주기를 바랐다.

“다들 그림 괜찮게 나온 것 같죠?”

“그렇네요.”

나의 자찬에 게리가 동의해주었다.

“가능하면 잘 보이는 곳에 걸고 싶은데.”

도연이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면 도연에게는 미술관 첫 전시였다.

안 그래도 잘 보이는 곳에 전시할 생각이었다.

“1층 가장 첫 동선을 기획 전시로 하는 게 어떨까요?”

“그쪽에 가장 관람객이 많을 테니까요?”

“아무래도 그렇죠.”

게리와 도연은 의견을 저마다 나누기 시작했다.

시선이 가장 많이 머무는 곳이 전시하기에 가장 좋은 곳이었다.

조연은 지하 1층 로비로 나와 복도 초입을 가리켰다.

1층을 확인하지 않고 바로 2층, 3층으로 내려가는 게 아니라면 확실히 특별전시장 내에서는 가장 발길이 많이 머무는 곳이긴 했다.

“그러지 말고 아예 동선 바깥에 전시하는 건 어때요?”

“동선 바깥에 전시하다뇨?”

나의 제안에 게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동선을 벗어나면 그림을 볼 수 없어요. 그 동선을 타야만 작품을 볼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애초부터 동선 바깥에 그림이 걸려 있다면 1층부터 4층 어디에 있든 볼 수 있을 것 아니에요?”

“그게 어딘데?”

성질 급한 도연이 물었다.

나는 로비 반대편 복도 난간을 가리켰다.

정확히 말하면 홀이 둘러싸고 있는 빈 공간이었다.

“저기요. 공중에 띄워놓으면 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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