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이 제일 쉬움-150화 (150/241)

150화. 예술의 허브 (3)

“안녕하세요, <예술 속으로> 시청자 여러분! 리포터 세리 존슨입니다. 반년 만에 이렇게 또 YJ아트밸리에 대해 소개해드리게 되었는데요! 오늘은 미들타운이 아니라 노스브라더 섬에서 인사드립니다!”

<예술의 섬> 프로젝트가 시작된 지 그렇게 2달이 지났다.

YJ아트밸리에 대한 관심이 많기도 했지만, 방송 중 우연히 윤예준을 취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시청률이 대박을 쳤다.

그 뒤부터 계속 YJ아트밸리의 동향을 살피던 ABC방송사에서는, <예술의 섬>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는 소식이 세간에 알려지자마자 이렇게 취재를 나온 것이었다.

프로젝트 공개와 동시에 미국 전역에 걸쳐 봉사자를 모집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현재 노스브라더 섬은 곳곳의 봉사자와 지원 물품, 식량 등으로 넘쳐나고 있었다.

정부 지원을 받는 스털링 인력들이 예술가들과 자유롭게 의견을 나눴다.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공사 추세로 보아 빠른 시일 내에 프로젝트를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윤예준 화가를 중심으로 지난 LA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이 주축이 되어 시작된 <예술의 섬> 프로젝트인 만큼 다양한 테마의 구조물들이 계획되고 있는데요. 배에서 내려 섬으로 진입하시면 가장 먼저 ‘올림픽 조각공원’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건축 분야의 금은동 메달리스트가 나서서 진행하는 만큼 굉장히 큰 기대를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기본적으로 버려진 섬이라는 이미지에 전염병 격리 지역이었던 역사가 전설처럼 회자되는 노스브라더 섬이었다.

그 이름을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수풀에 뒤덮인 폐건물의 모습을 먼저 떠올리곤 했다.

예술가들은 처음 노스브라더 섬에 발을 들였을 때 느꼈던 경이로움을 올림픽 조각공원에 담았다.

특히 섬 최북단에는 산업폐기물 처리장이 있었다.

폐기물 처리에 곤란을 겪는 기업들에게 그동안 열려 있던 유일한 구역인 것이었다.

조각가들은 그곳에 있는 폐기물들을 정화해 트로피 타워 조각을 세우는 중이었다.

여러 폐기물이 모여 트로피 모양을 형성해나가는 모습이 마치 콜라주 조각 작품 같았다.

“그리고 브레이크 댄스 종목 우승 크루인 ‘Elan Vital’의 퍼포먼스에 전 국민이 큰 감동을 받았죠. 그들의 제안으로 계획하게 된 공연장도 함께 만나보실 수 있다고 합니다.”

조각공원에서 숲 안쪽으로 조성된 길을 따라 들어가면 산 경사를 따라 큰 공연장이 지어 올려지고 있었다.

규모가 상당히 컸다.

평소에도 여러 콘서트를 위한 공연장으로 쓰고, 올림픽이 있을 경우 개막식과 폐막식 모두 진행할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노스브라더 섬 곳곳을 돌아보던 세리는 마지막으로 계단식 밭을 따라 오르기 시작했다.

가장 큰 관심을 모으고 있는 ‘테나리우스(Taenarius) 미술관’을 소개하기 위해서였다.

경사로를 오르면서 선착장 쪽을 내려다보면 종종 지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 미술관 건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수풀을 뒤집어쓴 직삼각형의 건물은 마치 자연히 드러난 옛 유적처럼 보였다.

기존 방치되어 있던 폐건물들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언덕 정상에는 정체불명의 거대한 돔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직은 철골만 남아 있는 상태였는데, 대부분의 공사는 돔 내부에서 진행되고 있는 듯했다.

세리는 그 앞에서 현재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예준에게 다가갔다.

“윤예준 화가님! 정말 오랜만에 뵙네요. ABC <예술 속으로>의 세리 존슨입니다. 기억하시죠?”

“네, 물론이죠.”

세리는 돔 형태의 구조물에 대해 질문했다.

“지나오신 저 미술관 건물은 지금 서 계신 곳 발밑에서 끝이 날 거예요. 이 지점에 있는 시점에서 이미 대부분의 작품을 관람한 상태가 되는 거죠. 하지만 저희 테나리우스 미술관의 주무기는 이 돔 아래에 있어요.”

언덕 정상의 지하엔 광장 형태의 대형 전시관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 위에 자리 잡은 돔은 지하 전체에 햇볕을 내리쬘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비장의 무기였다.

공사가 마무리되면 돔 전체를 유리로 뒤집어씌울 것이었다.

지하 공간 특성상 창문을 만들 순 없지만, 탁 트인 중앙 홀을 중심으로 원형의 전시장을 만들면 관람객이 느낄 갑갑함을 해소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중앙 홀에 나오면 저 거대한 돔으로부터 햇볕이 다량으로 쬐어질 테니까 말이다.

“와. 정말 기대되는데요? 그럼 밤에 최하층에서 올려다보면 밤하늘이 장난 아니겠어요! 이곳에서는 별이 굉장히 잘 보인다고 들었거든요.”

“눈이 부셔서 잠을 못 잘 정도죠.”

“여기 계신 진현재 건축가님을 포함해서 최고의 건축가들이 참여해서 큰 무리는 없으셨겠지만, 왜 이런 난이도 높은 공사를 추진하신 건가요? 지상에 공간이 굉장히 많던데요.”

<예술의 섬> 프로젝트가 공개된 이후 스털링 측에서 공사 난이도에 대한 홍보를 단단히 해두었다.

난이도 높은 건축을 성공시켜 주가 상승을 노려보기 위해서 말이다.

덕분에 사람들의 관심은 테나리우스 미술관의 성패 여부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왜 굳이 산 정상에 지하 미술관을 짓느냐 하는 의문점도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현대 미술품은 굉장히 다양화되고 있잖아요? 그에 비해 미술관은 그 다양성에 발을 맞추고 있지 못해요. 동선상의 한계가 있어서 관람이 그리 효과적이지도 못하구요. 다음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생각보다 긴 거리를 걷기만 했던 경험이 다들 있으실 텐데, 우리 테나리우스 미술관에서는 모든 이동 시간을 감상 시간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겁니다.”

“오! 어떤 모습일지 굉장히 궁금한데요?”

“기대를 만족시켜드릴 수 있을 거예요. 그뿐만 아니라, 테나리우스는 현대의 파격적인 작품들을 보관하기 적절한 모습이 될 테니까요. 솜니움 미술관만큼 멋진 개관식을 준비하고 있으니까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

예준과의 인터뷰를 마친 세리는 클로징멘트를 하며 취재를 마무리했다.

“네. 지금까지 <예술의 섬> 프로젝트 진행 현장을 소개해드렸는데요. 아직 완성이 되지는 않았지만, 수많은 예술가들의 협력과 교류라는 YJ아트밸리의 모토를 생각하면 이미 <예술의 섬>은 완성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까지 세리 존슨이 전해드렸습니다.”

***

그 시각 도연은 공사 중인 테나리우스 미술관 지하 1층 공간에서 작업 중인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화폭에 옮겨 담기 위해서였다.

돔 너머를 올려다보면 최하층을 아찔하게 내려다보는 리포터와 예준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큰 관심을 가지는 예술가가 되어 있는 예준이었다.

그 모습이 굉장히 낯설게 느껴지다가도, 천재로서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아온 건 MMS 때에도 마찬가지였던 걸 생각하면 여전한 모습이기도 했다.

도연이 보기에 예준은 성장형이 아니라 완성형 천재였다.

도연은 숲속을 바쁘게 오가는 작업자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인상주의적 표현에는 슬슬 도가 튼 기분이었다.

여러 자재를 옮기는 작업자들은 곧게 뻗은 나무들 틈에 무작위하게 섞여 있었다.

나뭇잎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을 표현하는 데에 온 신경을 쏟았다.

대신 은근한 흙먼지 너머 나무와 작업자는 잘 구분되지 않도록 처리했다.

직접 그리면서도 숲에 깊이 빠져들어 잠시 시간을 잊은 기분이 들었다.

“굉장히 인상적이네요.”

어느새 인터뷰를 마치고 들어온 예준이 도연의 뒤에 서서 말했다.

“뭐야, 언제 왔어?”

“방금 왔어.”

예준은 도연의 그림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도연 스스로도 많이 성장했다고 느꼈지만, 예준에게 보여주기는 조금 민망한 그림이었다.

실력이 미달되는 걸 떠나서, 마치 자신이 예준의 옛 화풍을 치열하게 답습하고 있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었다.

현재의 예준은 더 이상 마네처럼은 안 그리지 않던가.

“그래서, 그림 어때?”

“음…… 인상적인데?”

“그거 말고.”

예준은 조금 상체를 기울여 그림을 들여다보더니 그림 한편을 가리켰다.

“이 부분이 제일 좋아.”

도연은 예준이 가리킨 곳을 보았다.

예준은 굉장히 국소적인 부분을 좁게 가리켰는데, 대단히 특징적인 사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마 그리는 동안 붓이 빠르게 물감을 묻히고 지나간 부분이었다.

“여기가 뭔데?”

“여기 있잖아. 이, 나무줄기랑 이 사람 옷깃 그려놓은 이 부분.”

“......이 부분 빼고는 다 맘에 안 든다는 거지?”

도연의 의심에 예준은 작게 웃었다.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이유 없이 그래. 이 작은 한 부분 때문에 전체가 좋아. 원래 그림이란 게 그런 거잖아.”

자세히 캐물은 뒤에야 이유랄 것을 들어볼 수 있었다.

예준이 보기에 도연의 그림 <숲>은 인상적이지만 전체적으로 무개성한 그림이었다.

하지만 옷 소매를 추어올린 모양새에서 그 작업자만의 다급한 손버릇이 느껴진다고 했다.

그걸 확인한 뒤에 무개성하다는 앞선 평가를 완전히 보류하고 그림을 다시 살필 수밖에 없게 만든다는 거였다.

하지만 그건 굳이 붙인 이유였고, 예준은 어디까지나 ‘그냥’일 뿐이라고 재차 덧붙였다.

옷 주름 모양새와 나무줄기의 거리와 배치, 두꺼운 공기층을 묘사한 색채의 균형이 왜인지 모르게 멋지게 느껴진다는 거였다.

“화가가 별생각 없이 그린 것도 감상자에게는 특별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거든. 나한테는 저 부분이 그랬어.”

도연 본인도 어엿한 감상자였기 때문에 예준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단지 왜 그 부분이 좋다는 것인지를 공감할 수 없을 뿐이었다.

정말로 도연은 그 부분을 그릴 때 별생각 없었으니까.

도연은 그림을 보는 동안 예준과 같은 체험을 했던 경험을 떠올려보려 했다.

하지만 그림에 대해서는 떠오르지 않았고, 6년 전 꽃가게에서 다급히 산 동백꽃만이 떠오를 뿐이었다.

예준이 프랑스로 떠난 뒤 동백꽃의 꽃말을 검색해보곤 며칠 밤을 울며 보내던 때가 있었다.

예준이 은근한 마음을 표현해왔던 걸 둔한 자신이 눈치채지 못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더 긴 시간이 지나고 냉정해진 다음엔 자신이 흘렸던 모든 눈물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예준이 동백꽃을 준 건 오로지 ‘연습하기 좋아서’였을 뿐, 꽃말 같은 데엔 별생각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니까 예준에게 동백꽃의 꽃말은 도연에게 <숲>의 옷소매와 같았다.

“아닌데? 나는 항상 분석적으로만 보거든?”

부끄러운 과거였다.

그렇다고 예준에게 그 과거를 당장 들키는 것도 아닌데, 도연은 들킬까 봐 겁나 그 장소를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림 안 챙기고 어디 가?”

“거기 리모델링 하려면 멀었대. 말리게 그냥 둬!”

쓸데없이 개방형으로 설계해가지고 웬만큼 달려서는 예준이 안 보이는 곳으로 숨기 힘들었다.

점점 빠르게 내달리다가 구둣발이 꺾여 잠시 휘청했다.

‘산길 오를 거면서 뭘 어쩌겠다고 구두를 신고 온 거야……! 주책맞게.’

발목이 아예 다치기 전에 걸음 속도를 조금 늦췄다.

혹시 구두를 신고 온 데서 유별나다고 생각하진 않을까 불안해 예준 쪽을 돌아보았다.

예준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옛날 습관은 남아 있는지 예준에게 반발심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숲>에 옷소매를 그려 넣던 순간의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도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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