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명예의 관 (8)
약속했던 투표 시간 1시간이 지나고 1위부터 3위까지의 작품 공개 도슨트가 진행되었다.
내 작품에 대해서는 의도했던 대로 올림픽의 생생한 감각이 잘 느껴진다는 평가가 주를 이뤘다.
월계관에 가끔 꽃이 한두 송이씩 섞여 있는 화관이었는데, 나뭇잎 모양을 모두 사람의 손 모양으로 대체했다.
악수를 나누거나 하이파이브를 하는 손동작들을 절묘하게 뒤섞어 월계관 모양이 나오도록 연출했다.
대중성을 고려해 자세히 보면 발견할 수 있는 일종의 반전 효과를 노렸다.
나의 <평화관> 도슨트가 끝난 뒤 바로 2위 작품 도슨트가 시작되었다.
도연의 <관중들의 뒷모습>이었다.
전문 투표를 기다리는 동안은 감상할 상황이 아니었으니 도슨트가 진행되는 지금 천천히 뜯어보기로 했다.
도슨트를 맡은 심사위원장은 도연이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다’라고 평가했다.
그 명쾌한 감상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짧은 반바지에 반팔티를 입고 있는 묘령의 여자의 뒷모습이 캔버스 중앙을 차지하고 있었다.
여자의 표정을 확인할 수 없는 것이었다.
여자의 주변에는 다른 관중들의 뒷모습과 육상 트랙 한 귀퉁이가 보일 뿐이었다.
어떤 경기가 진행되고 있는지, 여자가 응원하는 팀이 이기고 있는지 지고 있는지, 어느 한쪽을 응원하고 있기는 한지, 애초에 경기가 진행은 되고 있는지, 올림픽 현장이긴 한지 등등.
그 어떤 정보도 주어지지 않았는데 감상자는 올림픽의 열기를 느끼게 되었다.
오히려 정적인 그 작품 속에서 말이다.
심사위원장은 그 아이러니 자체에 초점을 맞췄지만 나는 도연의 ‘마네풍’에 관심이 갔다.
일단 심사위원이 말한 발상도 과거의 도연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기교였다.
결코 일반적인 발상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뒷모습을 활용한 감정 표현만큼은 마네인 내게 굉장히 익숙한 기법이었다.
에두아르 마네, <철길 (The Railroad)>
<철길>에서 뒷모습을 보인 아이는 그 표정을 궁금해하도록 만들기 위해 감춰두었다.
그 표정이 궁금할수록 감상자들은 울타리 너머의 풍경을 자세히 살피게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도연은 <관중들의 뒷모습>에 그 기법을 제대로 흉내 냈지만 쓰임은 달랐다.
감상자는 공백으로 남아 있는 여자의 뒷모습에 올림픽의 열기를 집어넣는 것이었다.
내가 답이 정하지 않음으로써 해석의 여지를 넓혔다면 도연은 오히려 답을 정해놓음으로써 해석의 여지를 넓혀놓았다.
“와. 이젠 정말 잘 그리시네요. 그러고 보니까 제가 없었으면 1등이었단 얘기잖아요?”
잘 그린다는 이야기는 빈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도연은 피식 웃으며 가볍게 대답해 넘겼다.
“내가 1등을 못하면 항상 너 때문이었지.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건 없잖아?”
결과만 놓고 보면 그렇기도 했다.
“그나저나 너는 네가 만든 올림픽 종목에 나와서 네가 디자인한 금메달을 목에 걸게 됐네?”
“아, 그것도 그렇네요.”
도연의 말을 들은 뒤에야 아버지의 편파판정 걱정이 떠올랐다.
더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말이 대중 평가 50%였지, 리 쯔신 덕분에 거의 100% 비중으로 대중 평가를 받았으니까 말이다.
***
수십 년 만에 부활한 예술 종목 올림픽인 만큼 올림픽 기간 초기에 몰아쳐 끝났다.
메달 수여식은 모든 종목을 일시에 진행시켰다.
수상자들 중에서도 익숙한 이름들이 굉장히 많이 보였다.
건축 분야에서는 현재가 동메달을 수상했다.
세계 3위의 건축가라는 영광을 얻게 된 것이었다.
나와 교류하는 동안 스스로 성장했음은 물론이고 스털링과의 협업을 통해 많이 성장한 것이었다.
이제 진현재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졌으니 감각건축은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건축사가 되었다.
덕분에 그가 진행한 윤예준예술종합학교와 YJ아트밸리가 한 번 더 조명받을 수 있을 것이었다.
2위는 샐리 스털링이 차지했다.
듣기로 건축 주제가 미래 건축이었다는데, 현재가 샐리에게 밀린 게 납득도 되었다.
1위는 ‘안도 다지오’라는 일본계 미국인이 수상하였다.
대형 스크린에 그의 작품이 표시되었다.
발상과 표현에서나 볼 법한 SF풍이 과감하게 시도되었지만, 전혀 과하지 않았다.
샐리와 현재 모두 안도 다지오를 인정하는 눈치였다.
브레이크 댄스에서는 미국 팀이 1위, 캐나다 팀이 2위, 영국 팀이 3위였다.
하필 미국과 영국 중간에 낀 캐나다 선수들의 처지가 안쓰러웠지만, 미국 팀의 퍼포먼스는 1위를 차지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캐나다 팀 선수가 넘어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를 일이었지만.
여전히 미들 타운 외곽 농가에 거주하는 노아는 조각 부문에서 은메달을 차지했다.
호박을 주로 파 왔던 그로서는 1위 칼 데빌과의 속도전을 뒤집을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회화 시상식이 이루어졌다.
나와 도연, 게리는 차례로 메달을 목에 걸고 내려와 각자의 인터뷰에 응했다.
나에 대한 인터뷰는 재투표 결정 직전 리 쯔신 측과 어떤 이야기를 나눴느냐고 묻는 걸 제외하면 특별할 것 없었다.
메달과 의상 디자인에 대한 건 개막식이 시작되기 전에 충분히 인터뷰를 해놓은 상태였다.
<평화관>에 대한 인터뷰는 이후 미술 잡지와 좀 더 심층적으로 이야기를 나눌 계획이었다.
“별 얘기 안 나눴어요. 그냥 원만하게 해결하자고 했고, 리 쯔신 측에서 흔쾌히 수락한 거죠.”
“네? 그런 거 치고 중국 측에서 엄청 화를 내던데요.”
과장은 없었다.
인터넷 선 운운한 건 대화가 아니라 혼잣말이었으니까 말이다.
나와의 인터뷰를 마친 기자는 이제 도연에게로 다가가 질문했다.
“서도연 화가님. YJ재단과 한국회화미술협회에서 유일하게 예선을 치르고 뽑힌 대표 선수이신데 은메달까지 수상한 소감이 어떠세요?”
기자가 의외의 이야기를 했다.
한국 예술 쪽엔 임시 선수단을 만들 조직이 없어서 대부분 유명 화가 개인에게 연락을 취했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최소한 한 자리 정도는 무명화가들 중에서도 선수를 뽑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한국회화미술협회에 연락을 취했다.
그 이후 절차는 김선이 대신 진행해주기로 했는데.
설마 거기서 뽑힌 게 도연이었을 줄이야.
그것도 한 명만 뽑는 자리에 말이다.
“그 예선 경연이 서도연 화가님의 데뷔전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엄청난 화제를 모았는데, 실력을 일부러 감춰오신 건가요? 아니면 갑자기 실력이 수직 상승할 계기가 있었던 건가요?”
“음…… 실력이 빨리 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그런가요?! 그럼 비결이 대체 뭐죠?”
도연은 조심히 시선을 내 쪽으로 돌리다 다급히 기자를 다시 마주 보았다.
“절대 넘을 수 없는 산이 하나 있어서요. 계속 올라봤자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것밖엔 안 되는…… 그게 제 비결인 것 같아요.”
“절대 넘을 수 없는 산이요?”
기자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자 도연이 제 은메달을 들어 올리며 빙긋 웃었다.
기자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왜 도연의 그림에서 마네풍이 발견되는지 알 수 있었다.
도연은 마네가 아니라 윤예준으로서의 내 초기 작품들을 끈질기게 모작해왔던 것이었다.
***
올림픽 스타디움을 나온 뒤에야 인터넷을 활용할 수 있었다.
한국 브라우저로 들어가 봤는데, 난리도 아니었다.
-와. 근데 진짜 캐나다 팀만 딱 윤예준 디자인 담당 아니었던 거 실화냐. 빅토리도 맛탱이 다 갔나 보다.
-ㅇㅈ. 그나마 발리서클 나오고 나락 가서 다행임.
-뭐죠? 왜 저렇게 리 쯔신 비위를 맞춰주죠? 생일파티인가요?
-냅둬요. 애는 착혀.
-애도 안 착한 듯.
캐나다 팀과 빅토리 캐나다 지사는 한창 법정 공방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캐나다 국민들은 빅토리사의 패소를 점쳤다.
운동화가 불량이었다는 증거가 너무나도 분명했고, 그 신발 하나 때문에 캐나다 팀의 매달 색이 바뀌었다는 생각에 온 국민이 분노했기 때문이었다.
올림픽이 완전히 끝난 뒤엔 여러 나라가 다급히 나의 디자인을 채택하게 된 경위가 자세히 알려졌다.
이전까지만 해도 하마터면 올림픽에 탈락할 뻔했던 자국 선수들이 윤예준 덕분에 더 좋은 디자인의 경기복을 입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정도만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내가 올림픽 기간 동안 개인적인 사용료를 받지 않고 발리서클도 생산가만 받을 뿐 경기 중계 중 상표 노출을 강요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오로지 선수의 안위만을 생각한 결과였다.
덕분에 발리와 나는 착한 기업인, 착한 예술가 타이틀을 얻을 수 있었다.
발리는 어차피 나중에 밝혀질 사실이기도 했고, 발리사의 디자인으로 잘 알려진 미국 팀의 경기복이 1위 단상에 올랐으니 가장 큰 떡을 얻은 셈이라고 했다.
어차피 나와 발리가 포기했던 건 올림픽 선수들의 사용료였기 때문에 응용 디자인 상품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익을 챙길 수 있었다.
각국의 브레이크 댄스 선수복 출시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
그렇게 기성복화 한 뒤 내가 얻은 수익은 자그마치 119억 원이었다.
발리서클은 세계 1위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
빅토리를 꺾고 말이다.
내가 디자인한 로고가 전 세계 일상 공간에 파고들게 하겠다는 일전의 목표가 달성된 셈이었다.
“예준이 국위 선양했으니 군대 안 가도 되겠네!”
아버지는 그중에서도 나의 군면제 혜택에 가장 기뻐하는 것 같았다.
1년 6개월을 벌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사자인 내겐 대단히 반가운 혜택으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전생에 참전군인으로 활동했던 나였다.
그래서 내겐 군대를 가지 않는다는 건 의무를 저버린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군면제를 혜택은 오히려 감사하게 받아들일 일이었다.
아니, 목표가 있는 내게는 꼭 필요했다.
총칼보다 더 효과적으로 평화를 얻어낼 수 있다는 걸 로드아일랜드에서 이미 증명하지 않았던가.
모든 시간 그림만 그려도 부족한 나였다.
마침 발리서클 로고 저작권도 갱신되어 1200억이 함께 입금되었다.
수익 들어올 일이 많아 하나씩 정리해보기로 했다.
각국마다 단 100개씩만 판매된 기념주화 수익은 200억이었다.
금방 동이 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아예 매물 정보도 못 봤다는 사람들도 많았다.
몇 가지는 관련이 없긴 했지만 나도 올림픽 특수라는 것을 톡톡히 보게 된 것이었다.
아이필에 투자했던 돈은 2686억이 되었다.
독도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벌었던 돈 458억 2천만 원에 <그림의 힘> 수익 250억을 전부 투자해 얻은 수익이니 4배는 오른 것이었다.
더는 돈이 부족해 예술 사업을 펼치지 못할 일은 없게 되었다.
윤예종도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고, 예술밸리도 여전히 잘 돌아가고 있었다.
지금부터는 수익 생각으로부터 조금 더 자유로운 예술 활동이 가능할 것 같았다.
그렇게 다시 로드아일랜드에서의 일상으로 돌아가려는 때였다.
누군가와 통화를 마친 아버지가 조금 진지한 얼굴로 전화를 끊었다.
“왜 그러세요?”
“아니, 유명해지니 별일이 다 있네 싶어서.”
평화 정신으로 중무장한 올림픽이 끝나기 무섭게 금방 세계는 일상의 모습을 되찾았다.
물론 완전한 일상은 아니었다.
어떤 변화들은 내 피부에 직접 와닿기도 했다.
예술 종목에서 두각을 드러낸 예술가들이 여러 기업으로 초청을 받는 일이 굉장히 많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어디서 온 전화인데요?”
그 동향을 발리도 조금 신경 쓴 것인지 내게 다른 스포츠웨어 브랜드에서 연락 온 것 없었느냐고 은근히 물어오곤 했다.
“하얀집에서 연락이 왔네.”
수많은 유명 브랜드들을 머릿속으로 꼽아보며 발신자를 캐물었다.
그랬더니 아버지는 한국어로 하얀집이라고 말했다.
“하얀집이요?”
“응. 백악관. 미국의 청와대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