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명예의 관 (7)
목소리도 조금 바뀌었고 못 본 새 많이 바뀌기도 했지만 얼굴은 알아볼 수 있었다.
MMS 미술학원의 서도연이었다.
승부에 매달리는 건 여전했지만 학원에서처럼 독기 어린 표정은 아니었다.
“나 못 알아보는 거 아니지? 서도연이야.”
“알아봐요. 이런 데서 다 만나네요. 어쩐 일이세요?”
“어쩐 일이냐니? 나도 출전한 거거든!”
웃는 낯으로 버럭 화내는 동안 그녀의 뒤로 가서 서 보았다.
마찬가지로 백지였다.
나는 보통 빈 캔버스를 앞에 두고 고민하는 시간을 많이 투자하는 편이었지만, 원래 도연은 그렇지 않았다.
답이 정해진 입시 미술 작품을 그리는 데엔 고민할 거리가 별로 없었으니까 말이다.
오히려 시간에 쫓겼으면 쫓겼지.
여전히 학원에서 가르쳐준 대로 그리는 도연이었다면 시작한 지 10분이 지난 지금까지도 백지일 리는 없었다.
이전과는 달리 자신의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된 모양이었다.
선수로 출전할 정도면 한국에서는 이미 정평이 난 화가라는 뜻이었다.
온종일 카밀라를 두고 연습하던 열정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이 놀라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마치 경기장 천장에 숨은 공법이 있다는 걸 알고도 놀랐던 아버지처럼 말이다.
대화가 열려 있기는 했어도 올림픽 경기 중에 계속 떠들 순 없었다.
나와 도연은 인사를 짧게 끝내고 각자 캔버스에 매진했다.
‘올림픽을 다 보지는 못했지만, 그 열기만은 한인타운에서 느껴봤지.’
나는 올림픽 실사 풍경에 매달리지 않기로 결정했다.
대신 화합과 평화, 올림픽의 감동 그 자체를 그려낼 것이었다.
심사 절차는 그림 감별 시스템 ‘픽톨로지’를 통해 공정성을 가린 뒤 진행되었다.
비중은 심사위원의 전문 평가가 50%, 대중 평가가 나머지 50%를 차지했다.
케니 공모전 때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내겐 심사위원 평가나 대중 평가나 똑같이 대중 평가였기 때문에 그리 연연하지 않아도 됐다.
하지만 대중 평가완 달리 심사위원들은 이 경기장 환경을 충분히 고려할 게 분명했다.
‘아마 현장감 넘치는 그림을 그릴수록 고득점할 확률이 높다.’
보고 그리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안 보고도 그리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이곳에서 그런 현장을 생생하게 그릴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화가 역량을 증명하는 유효 전략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장감 넘치는 그림이 주는 장점은 그 사실적인 현장감 그 자체가 아니었다.
올림픽 경기만의 생생한 감각이 현장감에 담길 뿐이었다.
나는 이미 초록 물감을 묻혀둔 붓을 들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생생한 감각과 현장감. 토씨 하나 차이지만 분명 달라.’
도연이 말을 걸어오기 전에 떠올렸던 그림을 그대로 그리기로 했다.
내 선택은 월계관이었다.
앞서 수많은 불꽃이 모여 오륜기 하나를 형성하는 감동을 경험한 바 있었다.
수많은 선수들이 모여 하나의 평화 정신을 형성하는 올림픽 자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내 그림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그렇게 작품을 완성하고 <평화관>이라는 제목을 달아두었다.
그림을 완성했지만, 시간은 꽤 남은 상태였다.
돌아보니 캔버스에 고개를 박고 정신없이 그림만 그리는 도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가지고 서울시민미술대회의 설욕을 하실 수 있겠어요?”
“야. 아직 시간 많이 남았거든?”
***
그렇게 제한 시간이 다 소요되었다.
화가들의 그림은 관객석마다 마련되어 있는 스크린에 전체 표시되었다.
원본 그림은 심사장으로 옮겨졌다.
관객들을 대상으로 대중 평가를 치를 동안 선수들은 경기장 가운데에 모여서 평가를 기다렸다.
조금 부조리했던 건 대중 평가가 끝나기 전에 심사위원들의 전문 평가 결과가 미리 공개되었다는 점이었다.
“오. 전문가 평가가 끝났나 봅니다.”
기민하게 주변 분위기를 살피던 게리가 말했다.
그의 말대로 곧 전문 평가 결과를 발표하겠다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고, 경기장 한가운데에 있는 대형 스크린에 1위 작품부터 10위 작품까지 순서대로 표시되었다.
1위는 <平和之門(World Peace Gate)>이라는 작품이었다.
다음 순위의 작품이 표시될 때마다 박수 소리가 이어졌다.
내가 2등, 게리가 3등, 도연이 4등이었다.
아버지의 작품은 딱 10등에 걸쳐 있었다.
여전히 훌륭한 그림이었지만 화가들이 너무 쟁쟁했던 탓에 순위권 진입은 어려워 보였다.
10위까지 발표가 끝난 뒤 보란 듯이 순위표가 공시되었다.
리 쯔신이라는 중국 화가의 <평화의 문>이 상단에 가장 크게 표시되었고, 2위부터 10위까지는 동일한 크기였다.
아예 대중들에게도 똑같이 찍으라는 식이었다.
“좀 이상한데.”
도연이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아마 리 쯔신의 작품 이야기일 것이었다.
나도 느끼고 있었다.
그의 작품은 분명 수준 미달이었지만, 그려놓은 소재를 보면 어떻게 1등을 할 수 있었는지 알 만했다.
중국 전통문 현판에 한자 번체로 ‘평화’라고 적혀 있고, 전체적으로 붉은 안료가 뒤덮여 있었다.
중국 전통 건물에 붉은색이 많이 사용된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림 속 붉은색은 톤이 완전히 달랐다.
리 쯔신의 그림에 사용된 붉은색은 명백히 오성홍기의 붉은색이었다.
중화사상으로 도배된 리 쯔신의 시선만 봐도 모종의 뒷공작이 있었으리라는 짐작은 어렵지 않았다.
케니 공모전 때도 심사위원 평가가 심상치 않았으니까 말이다.
물론 당시에는 발표 전에 결과가 바로잡혔지만.
내게 더 놀라운 건 오히려 도연의 성적이었다.
스크린에 잠깐잠깐 노출되는 도연의 그림은 유명 미술관에 있어도 모자라지 않을 작품이었다.
내 조언이 잘 전달됐는지 인상주의풍을 굉장히 능숙하게 활용하고 있었다.
그녀의 옛날 그림들을 생각해보면 눈부신 발전이었다.
“아쉽게 순위권에 못 들어오셔서 그래요?”
“아니. 너는 금메달 빼앗기게 생긴 당사자면서 농담이 나오니?”
도연은 심각한 말투로 쏘아붙이며 미간을 좁혔다.
어차피 대중 평가에서 뒤집힐 것이었다.
대중은 언제나 선두에 서기 때문에 뒷공작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관객들에게 전문 평가 순위를 참고할 시간이 충분히 주어진 뒤에야 대중 평가도 끝났다.
예상대로 순위 변동이 있었다.
1위: 윤예준
2위: 리 쯔신
3위: 서도연
4위: 게리 윈스턴
……
결과가 뒤집혔다는 사실보다 오히려 도연이 게리를 꺾었다는 게 더 놀라웠다.
물론 리 쯔신의 점수가 예상만큼 많이 내려가지 않았다는 것도 마찬가지.
게리는 결과에 깔끔히 승복했고, 그렇게 모두가 만족할 만한 결과가 확정되었다.
확정되는 듯했다.
어디선가 알아들을 수 없는 중국어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대기석에서 붉은 단복을 입은 중국인들이 심사위원들을 향해 거칠게 항의를 하고 있었다.
리 쯔신으로 보이는 중국인 화가도 어느새 자리를 이탈해 항의에 동참하고 있었다.
“참나. 결과 뒤집은 건 관객들인데 왜 말 잘 들은 사람들한테 가서 따지는 거야?”
“그러게요.”
이해가 되든 안 되든 그들의 항의는 오래 진행되었다.
다른 스포츠 경기처럼 비디오 판독을 할 수도 없는 사안이라 소모적인 언쟁만이 바쁘게 오가는 모양이었다.
오랜 시간 경기장에서 기다려야만 했다.
하지만 참가한 화가들은 힘든 줄도 모르고 오직 그들의 항의 내용에만 귀를 기울였다.
메달을 받을지 안 받을지의 기로에는 게리와 도연만이 서 있는 상황이었기에 다들 중국 측의 어처구니없는 항의에 성을 내는 데에 전념했다.
“내가 중국어를 좀 할 줄 아는데, 일류 화가들 모셔놓고 왜 관객 평가 따위를 포함시키냐는군.”
“뭐? 정말 따위라고 했단 말이야? 그럴 거면 경기는 애초에 왜 나왔는데?”
“나라에 금이 부족한가 보지.”
화가들은 시시콜콜 떠들었다.
요지는 리 쯔신이 1등은커녕 선수로 선출되기에도 부족한 화가라는 내용이었다.
결국 리 쯔신 측 선수단에게 중국어 통역사가 붙은 뒤에야 대화 내용을 실시간으로 알 수 있었다.
그들은 관객이 대중을 대표한다고 볼 수 없으므로 아예 전체 인구를 대상으로 집계를 하든, 평가 항목에서 제외를 하든 둘 중 하나를 하라는 것이었다.
심사위원들은 터무니없는 요구로 방해를 계속하면 실격 처리할 거라고 협박했지만 중국 선수단 리 쯔신 측은 들어 먹지 않았다.
“실격당하게 생겼군. 윤 화가님, 금메달 축하드립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아직 확정된 것도 아니었는데 화가들은 모두 내게 박수를 보내주었다.
내가 보기에도 리 쯔신 측은 굽히지 않을 기세였다.
1등의 실격이라면 2등이 1등이 되는 게 당연했다.
애초에 승부를 목적으로 올림픽에 참가한 것도 아니었지만, 실격에 얻어먹는 1등은 정말 싫었다.
나는 말다툼에 정신이 팔린 통역사에게 다가가 내 의사를 전했다.
어차피 같은 대중 평가고 투표자 수만 다른 것일 테니 리 쯔신 측 원하는 대로 해도 상관없었다.
나의 배려에 리 쯔신 측은 눈도 피하지 않고 오히려 날카로운 말투로 한술 더 떴다.
통역사가 통역했다.
“관객들 매수한 거 모를 줄 알았냡니다. 어차피 우승은 리 쯔신이 할 테니 쓸데없는 배려 한 거 후회하게 만들어 준다고.”
중국인 인구가 세계적으로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에 그렇게 당당하게 나오는 거였다.
“쓸데없는 배려…… 반박할 수 없네요. 어차피 결과가 바뀔 것 같지도 않아서.”
눈치 없는 통역사가 내 말을 그대로 전달하는 바람에 중국 측이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급기야 올림픽 가드들이 들이닥쳐 리 쯔신 측을 완력으로 제압해야만 했다.
***
정말로 70억 인구 전체가 투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대신 구글을 포함한 전 세계의 대표 소셜 미디어에 본인인증과 투표 폼을 등록해 1시간 동안 투표를 받기로 했다.
중국 측에서도 그 정도면 승복할 생각인 듯했다.
재투표를 얻어낸 뒤 돌아서는 중국 측 대표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웃음은 나도 참고 있던 상태였다.
아무리 오랜 시간 전 세계인 대상 투표를 붙여도 순위는 바뀔 리 없었다.
만약 바뀐다면 도연과 게리가 각각 1위씩 올라오는 정도겠지.
선수들 틈으로 돌아와 재투표 사실을 알리자 모두 탄식을 금치 못했다.
중국 인구수가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왜 중국 측 대표가 당당하게 전 세계 투표를 제안했는지는 곧 알게 되었다.
인터넷을 할 수 없는 선수들에게는 대형 모니터로 순위 현황을 알려주었는데, 투표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리 쯔신이 바로 1위 자리를 되찾았기 때문이었다.
재투표가 결정된 지 30분 만에 투표 환경을 조성한 것도 대단했지만, 더 대단한 건 바로 그 중국인의 단합력이었다.
“그러게 왜 재투표를 해가지고…… 인해전술 앞에 장사 없다고.”
도연이 관자놀이를 짓누르며 중얼댔다.
하지만 나와 리 쯔신의 격차는 금방 줄어들기 시작했다.
아마 리 쯔신의 1위가 부당하다고 여긴 사람들이 투표열을 올린 듯했다.
도연의 말이 맞았다.
인해전술 앞에 장사는 없었다.
13억 인구가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나머지 57억 인구가 훨씬 더 많았던 것이었다.
온전히 내게만 표를 몰아준 것도 아니었다.
나와 도연, 게리를 포함한 다른 화가들의 득표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세계 어딘가는 지금쯤 야심한 새벽일 텐데도 국가별 투표 통계는 균일하게 유지되었다.
오히려 중국 쪽 투표율이 가장 낮았다.
중국 전체 인구 절댓값을 고려하더라도 말이다.
그 결과 리 쯔신은 아예 10위권 바깥으로 밀려났다.
확실히 이긴 것이었다.
화가들은 재미있는 해프닝이었다며 긴장을 놓고 웃음꽃을 피웠다.
하지만 일이 완전히 종료될 때까지 긴장의 끈을 놓으면 안 되는 법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심사위원들은 리 쯔신이 보이지 않는 순위표를 두고 심각한 이야기를 나눴다.
조금씩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한 관객들에게 순위표 변동이 있을 것 같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안내했다.
“또 뭐가 문제란 말이야?”
10분간의 심사위원 회의가 진행된 뒤 다음과 같은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현재 28위에 위치한 리 쯔신 선수 투표 항목에 있어서 ‘불법 가상 사설망(VPN)’을 활용한 IP 접근 정황이 다수 발견됨에 따라 해당 선수를 실격 처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대형 스크린에 표시된 10위권 득표 목록이 30위권으로 변경되었고, 28위에 있던 리 쯔신의 이름이 아예 삭제되었다.
나중에 공개된 바에 따르면 VPN의 대다수가 리 쯔신 선수단 측 IP로 확인되었기 때문에 실격 결정을 내린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