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명예의 관 (4)
유리와 직원들은 근처에 유명한 한식당이 있다기에 늦은 저녁이나 먹을 겸 함께 Kokobab에 들렀다.
발리서클과 경쟁하게 되었다는 소식은 올림픽위원회와 골드파트너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빅토리로서 굉장히 열불나는 일이었다.
하필 미국에서의 알짜배기인 브레이크 댄스 종목을 빼앗길 위기였다.
하나같이 애사심이 넘치는 사람들이었기에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새로운 종목인 데다가 춤으로 퍼포먼스까지 선보일 수 있는 기회였다.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데에 진심인 유리로서도 내심 안타까웠다.
그렇게 바지락탕, LA갈비비빔밥, 쭈꾸미 볶음을 시키고 발리서클 뒷담화에 열을 올리던 도중, 인터넷 기사 사진으로만 본 윤예준이 나타나 딴지를 걸기 시작했다.
‘응? 윤예준이 왜 여기에……’
그러고 보면 예술 종목 올림픽 때문에 각개로 활동하던 예술가들이 국가대표가 된 경우가 많다고 했다.
아마 윤예준 정도 되는 예술가라면 한국에서 억만금을 줘서라도 국가대표를 부탁했을 것이었다.
유리는 전부터 예준을 존경해왔다.
사실 빅토리에 작업실을 둘 수 있었던 것도 예준 덕분이었다.
예준이 빅토리 마케팅 매니저 조나단에게 카드섹션으로 큰 충격을 준 이후로 조나단은 계속 예술인들과의 협업을 중시해왔다.
일류 예술가치고 한 기업에 전속되고 싶은 사람은 없기 때문에 대부분 고정 외주 작가 형태로 진행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 기회마저도 예준의 성공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테니, 유리는 예준에게 빅토리 후배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빅토리의 사소한 실수를 과장해서 지적하는 건 유리도 참기 힘들었다.
그 실수로 떨어졌던 매출은 지금 차근차근 돌아오고 있었다.
올림픽이 1년만 더 늦었다면 더 이상 그 사건은 언급되지도 않았을 정도로 사소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유리의 반발에 예준은 더욱 언성을 높였다.
그 말을 들으니 자신과 빅토리가 마치 궁색한 변명만을 일삼으며 눈앞의 이익만 뒤쫓아온 졸부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그 농구화 찢어진 걸로 올해 반기 영업 손해금이 50억 달러가 넘었어요. 실수 맞죠. 반복되면 안 되는 실수죠. 그런데 이게 타당한가요? 이미 과한 형벌까지 받은 마당에 골드파트너십까지 흔들리는 건 너무 가혹하지 않느냔 겁니다.”
유리가 마지막으로 반문하자 예준은 단호하게 말했다.
“벌이 과하든 덜하든 받아들여야만 하는 게 예술가예요. 판단은 예술가가 아니라 대중들이 해줄 테니까요. 그림 못 그려놓고 ‘아예 안 봐줄 만큼 못 그린 건 아닌데 왜 이렇게 가혹하게 외면하느냐’라고 대중을 욕할 생각이신가요? 아니면 다 받아들이고 다음 작품에 매진하실 건가요.”
예술가로서는 후자를 택하실 거면서 왜 사업 임원으로서는 전자를 택하느냐.
예준은 그 질문을 끝으로 푹 익은 김치찌개를 떠먹기 시작했다.
‘내가 대중 탓을 하고 있다고?’
예준의 말은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번 사태에 대해서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대중 탓을 할 생각은 없지만…… 불량 하나 때문에 이만큼 불신에 시달리는 건……
이번 브레이크 댄스 종목에 대한 기대지평을 생각하면 해외 지사 수십 군데는 더 차릴 수 있을 만큼의 자본금이 마련될 전망이었다.
임원들이 전체 탈세를 해도 이만한 형벌은 또 없을 것이었다.
유리는 계속 그의 말이 신경 쓰여서 식사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래, 빅토리 관계자로서는 대중을 탓하는 사람이라고 칠 수 있다.
그런데 예술가로서는 후자를 택할 거란 보장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
디자인 확정 PT 당일이었다.
발리는 예준의 도안들을 들고 올림픽위원회를 찾았다.
지금의 도안이 확정안은 아니지만, 이번 검토를 통해 디자인 후원사가 확정되었다.
각국의 올림픽위원회와는 계속 연락을 시도하고 있지만, 아직 디자인 청탁이 확정된 국가는 별로 없었다.
검토하겠다, 협의해보겠다는 식의 대답이 대부분이었다.
올림픽위원회 담당자 한 명이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기 때문에 이해할 수는 있었다.
때때로 결과보다 과정이 더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던가.
그렇게 위원회가 소집되었고, 디자인 발표가 시작되었다.
“자, 그럼. 빅토리사 측부터 시작해볼까요?”
위원장이 진행하자 탁자 위에 가방 하나를 올려둔 한 여성이 일어섰다.
“빅토리 사의 담당 디자이너 유리라고 합니다. 보통 같으면 대표님께서 직접 참여하시는 게 맞지만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드리기 위해 제가 직접 참여하는 것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모르는 소리.
아마 바빠서 떠넘긴 것일 터였다.
어쩌면 이 경쟁 발표 자체에 불만을 표시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유리는 바로 자신의 도안이 정리된 팸플릿을 꺼내 위원에게 돌리기 시작했다.
발리 앞으로도 한 부 전달되어 왔다.
그걸 살필 동안 더 자세한 설명을 해낼 생각인지 유리는 컴퓨터 앞으로 가서 USB를 꽂았다.
“디자인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바지와 팔 부분에 직선 한 줄이 그어져 있는 걸 발견하실 수 있을 겁니다.”
실제로 그랬다.
유리는 이번 일을 계기로 그 선 자체가 브레이크 댄스의 포인트가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 선 덕분에 옷 안의 춤선도 잘 보인다는 실용적인 의의도 있었다.
그 설명까지 들었을 때 발리는 웃음을 감출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평이하고 그저 그런 디자인이야.’
이미 예준의 디자인을 모두 알고 있는 발리였다.
프로 디자이너가 아니더라도 예준의 디자인이 더 좋다는 것쯤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발리의 안목을 떠나서라도, 예준에게 저런 애송이 디자이너는 적수도 되지 못했다.
올림픽 후원사 결정이 머지않았다.
잠시 차갑게 미뤄두었던 감격이 조금씩 북받쳐 오르기 시작했다.
일단 위원회 사람들은 유리의 디자인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디자인이 깔끔하고 좋네요. 여기 사용된 소재는 스트레치 소재인가요?”
“네, 맞습니다. 세계 최고 체면의 강대국인 미국 선수들이라면 세계 어떤 나라들보다 더 좋은 옷을 입어야 한다는 고집이 있습니다. 브레이크 댄스의 발상지가 미국이기도 하니 사소한 점 하나에서도 뒤처지면 안 될 일 아니겠습니까?”
유리의 그 발언에 위원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는 가방에서 스트레치 소재를 꺼내 위원들에게 돌렸다.
확실히 일반 스트레치 소재는 아니었다.
원래 스트레치 소재는 스포츠웨어에서 자주 활용되는 원단이었는데, 특유의 번들번들함이 디자인적 단점이라면 단점이었다.
어쨌든 세계 최고 체면을 운운할 만큼 고급 원단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상품을 부풀리고 있는 것이었다.
스트레치 소재에 어떤 변형을 가했는지는 몰라도 꼬집자면 그리 대단한 건 아니었다.
“이거 원단까지 보여드리게 될지는 몰랐네요. 그럴 줄 알았다면 비닐에 소중하게 담아서 왔을 텐데. 그래도 저희가 취급하는 원단은 굉장히 내구성이 뛰어나기 때문에 잘 손상되지도 않습니다. 그것도 제 가방에서 며칠은 뒹군 건데 흠집은커녕 얼룩도 없죠?”
“아, 그래요? 대단하군요!”
위원들은 원단을 건네며 촉감을 만끽했다.
그동안 유리는 디자인 프레젠테이션을 끝냈고, 박수를 받으며 발표를 마쳤다.
“그럼 발리서클 디자인도 볼까요?”
유리의 디자인을 보고 표정이 밝아진 위원장이 진행했다.
역시 빅토리는 빅토리다, 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발리는 컴퓨터 앞으로 나가 예준의 도안 파일을 켰다.
“저희는 실제 선수단의 퍼포먼스를 확인하고 그와 어울리는 디자인을 고안해냈습니다.”
도안 속 선수들은 검은 티셔츠에 청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재질은 각각 달라 보이지만 모두 같은 신소재를 사용하고 있었다.
“지금 저건 청바지인가요?”
“네.”
위원장이 무릎 부분이 찢어져 있는 허름한 청바지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걸 입으면 너무 위험하지 않습니까? 젊은이들이 딱 좋아할 것 같기는 한데.”
“맞습니다. 하지만 청바지처럼 구현했을 뿐 청바지가 아니고, 무릎 부분 안에는 부상 방지용 패드가 부착될 예정입니다.”
브레이크 댄스 중 뼈가 부러지는 사고는 그리 많지 않았다.
아스팔트 바닥에 쓸리고 찢기는 상처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1970년대 당시 브레이크 댄서를 포함한 스트릿 댄서들의 의상 중엔 무릎 부분이 찢어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까 패드 정도만 대도 대부분의 부상은 예방할 수 있었다.
“청바지가 아니라는 건 무슨 뜻입니까?”
“흔히 사용되는 청바지가 아니라 저희 데이비스 발리의 신소재를 활용했다는 겁니다. 발리서클에서는 우레탄 재질을 범용할 수 있는 기술을 확보했고, 덕분에 그 장점을 모두 취할 수 있었습니다. 활동성 면에서요.”
신체에 밀착되는 폴리우레탄 소재의 의상이 갖는 장점은 통기성과 통습성도 있지만 아무리 피부에 비벼져도 다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 장점을 살리기 위해 신축성을 무시하고 넉넉하게만 만든다면 아마 보통의 브레이크 댄스 의상처럼 흐물흐물하게 늘어지게 될 게 뻔했다.
그래서 린넨 소재를 가공할 때 우레탄 성분을 섞어 함께 원단을 짰다.
덕분에 표면은 부드럽고 형상 유지는 잘되는 옷감이 탄생할 수 있었다.
“린넨 소재를 섞으니 색깔을 주기에도 용이했습니다. 에틸렌과 우레탄은 대부분 기본색을 제외하면 코팅으로 색을 낼 수밖에 없는데, 그럼 통풍이 잘 안 될 수 있으니까요. 위원 여러분들도 운동복을 오래 입으면 브랜드 로고가 벗겨지는 거 많이 경험해보셨을 텐데, 그 단점이 보완된 겁니다.”
그 뒤 본격적으로 디자인상의 장점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번 미국 팀의 퍼포먼스는 보통보다 팔 동작이 많은 편인데, 그래서 반짝이는 팔찌를 착용할 수 있도록 했다.
팝핀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부분이 많아 상의의 움직임이 최소화되도록 최대한 사이즈를 맞췄다는 식이었다.
설명을 마치자 위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능성을 확보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지. 그 다음으로 필요한 건 멋 아니겠습니까? 그런 면에서 스트릿 패션을 차용한 발리서클의 디자인이 가장 적합한 것 같습니다.”
그렇게 결정되려는 순간 유리가 손을 들었다.
발리가 발언권을 주자 유리는 일어나서 물었다.
“브레이크 댄스의 경우 옷이 어디 걸려 찢어지거나 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저희 스트레치 소재는 린넨이나 우레탄 합성 섬유보다 더 내구성이 뛰어난데, 그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옷이 어디 걸리면 어떻게 해요?”
딱히 스트레치가 린넨보다 튼튼한 건 아니었다.
스트레치의 신축성 덕분에 손상이 적을 뿐 같은 강도의 자극을 줬을 땐 오히려 린넨이 더 질길 것이었다.
물론 폴리우레탄과 합성을 거쳤으니 발리서클의 신소재 내구성이 떨어지는 건 맞는 말이었지만 말이다.
“그럼 찢어지게 두면 됩니다.”
“네?”
“댄서들에게 가장 위험한 건 춤을 추던 도중 어디 요철에 걸려 동작이 무너졌을 때, 행인의 가방 같은 데에 걸려 몸이 질질 끌려나갈 때입니다. 그 정도로 강한 자극이 주어지면 옷이 찢어져야만 하는 겁니다. 그래야 댄서들이 더 큰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니까요.”
유리의 질문은 마치 수비수의 무리한 돌진 같아서, 발리에겐 오히려 득점의 기회가 되었다.
발리의 마지막 발언이 특히나 인상 깊었는지 위원들은 작게 박수를 쳤다.
“그런 것까지 고려하다니. 정말 대단하군요. 디자인 담당은 누구였습니까?”
“업계 최고의 디자이너를 모셨습니다. 다들 아실 겁니다. 윤예준 화가님이시죠.”
유리는 발리의 말을 듣고 놀랐다.
훌륭한 디자인이라는 건 보아 알고 있었지만 설마 담당 디자이너가 예준이었을 줄이야.
왜 예준이 LA에 있었는지, 발리서클에서 어떻게 이렇게 대단한 디자인이 나올 수 있었는지 그제야 모든 게 설명되었다.
발리가 pt를 마치면 바로 투표가 시작되었다.
만장일치로, 발리서클이 선정되었다.
그 결과에 유리는 당황하지도, 낙담하지도 않았다.
그저 ‘Kokobab’에서 예준이 했던 말만 되뇌고 있었다.
사업가로서는 대중 탓을 하고 예술가로서는 자신 탓을 한다는 말 말이다.
여전히 빅토리가 아니라 발리서클을 선정한 위원회의 결정은 납득할 수 없었다.
하지만 유리가 아닌 예준의 디자인을 선정한 건 백번 이해할 수 있었다.
유리가 보기에도 자신의 디자인은 예준의 디자인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윤예준의 말대로다. 이 정도면 아직 예술 할 여지가 남아 있는 거야.’
발리와 위원회가 골드파트너십 성사의 기쁨을 나누고 있는 동안 유리는 홀로 가방을 정리하며 쓴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