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Somnium (4)
무함마드를 통해 프랭크에게 작품을 포스터에 활용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YJ Halloween Night’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할로윈 밤 퍼레이드’, ‘명화 코스튬’, ‘세계 거장전’, ‘트릭 올 트릿’ 등의 이벤트들을 과감하게 홍보했다.
그중 명화 코스튬에 대해서는 SNS 투표로 베스트 코스프레어를 한 명 정해 3000만 원 상당의 상금을 주기로 했다.
그 밖에도 거대 잭 오 랜턴부터 VR 포토존까지, 구상했던 모든 기획들이 시간 내에 완성될 수 있을 듯했다.
YJ아트밸리에 대한 기대감과 프랭크의 작품에 대한 궁금증이 가장 큰 홍보 수단이었다.
특히 포스터에 활용된 과 는 교묘하게 잭 오 랜턴 버전으로 바꿔 그려두었다.
꽃다발 대신 잭 오 랜턴을 던지고 있는 남자와 ‘KIN’이 지워진 ‘PUMPKIN’이라는 글자 아래 펌프질을 하고 있는 소녀 그림을 그려 화제를 모을 수 있도록 했다.
사람들은 그 할로윈 패러디 그림의 원본을 무척이나 궁금해했다.
[포스트 모더니스트 화가 ‘프랭크’, YJ아트밸리에서 첫 전시 선보여.]
[솜니움 미술관의 원본 없는 패러디. 과연 프랭크의 원본은?]
전 세계 화가들과 기자들의 문의 전화가 폭주했다.
과감하게 선취재를 부탁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중 한 작품, 최소한 몇 작품이나 공개되느냐고 물어왔다.
아버지의 휴대폰은 한시도 문자 수신과 전화벨이 끊이지 않았고, 메일은 한도 페이지를 넘겨 조회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
실로 엄청난 파급력이었다.
하지만 할로윈이라는 홍보 수단을 잊어선 안 됐다.
무함마드가 잘 준비해주고 있기는 했지만, 실제 잭 오 랜턴 소품들이 아트밸리로 배송될 때마다 조금 아쉬움이 남았다.
“할로윈 분위기 내기에는 딱 좋아 보이기는 하는데, 좀 아쉽네요.”
“그래? 어떤 면에서?”
산만 한 잭 오 랜턴을 옮기는 무함마드를 보며 말하자 옆에 있던 아버지가 물었다.
“호박에 눈 코 입을 파놓은 거 보면 저것도 공예품인 것 같은데, 누군가 직접 만든 것도 아니잖아요? 작품으로 활용할 수도 있을 텐데 말이에요.”
“하긴. 진짜 호박을 파다가 장식하는 건 비효율적이라 그동안 안 해오긴 했지. 직접 만들어볼 생각이 있는 거야?”
좋은 작품을 많이 선보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할로윈도 즐길 수 있어야 했다.
나의 부탁으로 아버지는 근처에 있다는 호박 농장으로 나를 데려다주었다.
깎을 호박을 우선 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아트밸리에서 로드아일랜드 시내 반대 방향으로 나가면 여러 농장들이 모여 있었다.
아버지는 그중 호박 농장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실제로 마당 한 편에 늙은 호박들을 진열해둔 농장 하나가 멀리서 내다보였다.
근처에 차를 세우고 내리자 호박들이 심상치 않다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어? 이거 왜 호박들이……”
멀쩡한 호박은 별로 없고 이미 잭 오 랜턴으로 만들어 놓은 것들이었다.
무함마드가 소품용으로 가져오는 것과 달리 보다 정교하고 매력적이었다.
“와, 예준아, 이거 봐. 이건 진짜 사람 얼굴 같다.”
무시무시한 표정이 조각된 호박을 가리키며 아버지가 말했다.
조각 작품들은 많이 봐왔지만 이렇게 호박을 깎는 건 처음 보았다.
호박이 균일한 색깔을 가지지 않았다는 점마저 이용해 조각에 명암을 주었다.
“거기 누구십니까.”
그때 농장 주인으로 보이는 노인과 청년이 집에서 걸어 나왔다.
***
“이거 매년 이 시기면 호박이 너무 많이 남아서 골치가 아픈데. 이렇게 손님이 와서 처리해주니 고맙기 짝이 없습니다. 허허허.”
스스로를 ‘노아’라고 소개한 농부는 우리를 집 안으로 안내한 뒤 펌킨주스를 만들어주었다.
노아가 호박을 짜내는 동안 청년이 능숙하게 손을 맞춰 보조했다.
“저기 저 ‘조니’라는 사람 있잖아?”
아버지가 청년을 가리키며 속삭였다.
“저 사람이 조각한 건가 봐.”
“그래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데요?”
“조각이 너무 정교했어. 노아 영감님은 손을 조금 떠시는데 청년은 몸에 근육이 많잖아. 그리고 저기 저 손가락 봐.”
조니의 손가락엔 밴드가 두어 개 정도 붙어 있었다.
매일 조각을 하기 때문에 손이 베였을 것이라는 의견이었다.
내 생각은 달랐다.
일단 조각 작품은 체력이 아니라 정신력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조금만 산만해져도 저런 정교한 조각은 해낼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호박과 함께 살아온 세월이 길면 길수록 조각 재료에 대한 이해도가 커질 텐데, 마당의 잭 오 랜턴들은 조각가에게 그 물성을 완전히 간파당한 상태였다.
‘시선에 따라 표면이 왜곡되는 구체의 단점을 완벽하게 보완해놨지.’
너무 옅게 파서는 작품이 제대로 완성되지 않고, 너무 깊게 파면 부드러운 속씨 부분이 뭉개지게 되었다.
호박 겉만 봐도 속이 얼마나 익어 있을지 한눈에 파악하는 통찰력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청년이 못할 거라는 건 아니지만 농부로서의 경험이 오래됐을 노인이 조각가일 가능성이 컸다.
“제 생각엔 노아 할아버지이실 것 같은데요.”
“그래?”
아버지는 동의는 해주지만 공감은 못하겠다는 듯 웃었다.
곧 노아가 펌킨주스를 가져다주었다.
“잘 먹겠습니다. 영감님은 안 드세요?”
“어휴. 요즘 너무 많이 먹어서 나는 냄새만 맡아도……”
노아가 거절하며 손사래를 쳤다.
한 잔 들어 마셔보았는데, 무함마드와 먹었던 펌킨주스보다 훨씬 맛있었다.
“그나저나 관광객 같은데, 이런 벽지까지는 무슨 일이신지?”
“관광객은 아니고 미들타운에서 왔습니다. 호박 좀 대량으로 구할 일이 있어서 왔는데……”
“아이고, 한발 늦으셨네. 이젠 얼마 안 남았는데.”
노아는 애써 아쉬운 척 탄식했다.
“그런데 저기 마당에 있는 잭 오 랜턴들은 뭡니까?”
아버지가 묻자 농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건 랜턴이 아니에요. 매년 동네 꼬맹이들이 사탕 얻으러 오거든. 그때마다 선물로 주려고 가면용으로 만든 거지. 아드님 머리에 딱 들어갈 것 같은데, 몇 개 드릴까?”
“직접 깎으신 거라고요?”
노아의 말에 아버지가 놀라며 물었다.
시선은 도구를 닦는 노아의 손에 집중된 상태였다.
확실히 힘이 없어 보이는 움직임이기는 했다.
“그럼.”
농부는 우리를 안방으로 안내했다.
그 안엔 바깥에 둔 것보다도 훨씬 정교한 호박 조각들이 수십 개는 있었다.
농부는 초를 하나 켜고 그 안에 집어넣었는데, 안에 불이 있으니 호박 표면에 조각한 패턴들이 아름답게 반짝였다.
“와! 손재주가 정말 대단하신데요!”
“몇십 년 호박 만지면서 산 늙은이 중에 이 정도 손재주 없는 양반도 있남.”
나는 솜니움 사진을 꺼내 보이며 물었다.
“그럼 혹시 이것도 호박에 조각하실 수 있으세요?”
농부는 사진을 유심히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 부탁한 끝에 작업하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농부는 우리를 뒤뜰로 안내했고, 한 무더기 쌓여 있는 늙은 호박들을 볼 수 있었다.
농부는 그것들을 이리저리 치우며 적당한 것을 골랐다.
“영감님, 호박 별로 안 남으셨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응? 대량으로 필요하다면서? 요놈들 다 갈아도 하루치 장사밖엔 못 할 텐데?”
농부는 우리를 할로윈 이벤트를 준비하는 찻집 사장 정도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주스를 팔기엔 부족할지 몰라도 전시회를 하기에는 충분해 보였다.
곧 농부는 주방으로 호박을 가져와 조각을 시작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벌벌 떨리던 손이 칼을 쥐자 거짓말처럼 차분해졌다.
“제 말이 맞죠?”
“그러네…… 어떻게 알았어?”
청년 조니의 손은 아마 농사일을 하다 다친 것일 테고, 잭 오 랜턴을 보아 조각가는 쉽게 베이지 않는 손을 가지게 되었을 확률이 높아 보였다.
노아의 손은 가늘지만, 농부 치고도 거칠고 두꺼웠다.
오랜 세월 조각을 해오며 다져졌다는 증거였다.
노아는 칼로 호박 표면을 벅벅 긁어 평평하게 만든 뒤 조금씩 솜니움 미술관의 모습을 묘사해나가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사진을 확인하는 시간을 확인하면 거침이 없었다.
그런데도 묘사가 자세했고, 구형의 캔버스에 그려내는 솜니움 미술관인 데에 비해 왜곡이 굉장히 적었다.
마구 조각하는 것처럼 보여도 잠깐 사이 구상이 완벽히 끝났다는 뜻이었다.
‘수준급 실력인데 여태 아이들 선물만 줬다니. 역시 로드아일랜드엔 숨은 예술가들이 많아.’
나와 아버지는 농부의 잭 오 랜턴 안에 촛불을 켜고 연신 감탄했다.
“할아버지. 이거 완전 대단하신데요? 혹시 미술관에 전시할 생각 없으세요?”
“미술관에 호박을? 참 나, 허허허…… 세상천지에 호박 전시해주는 미술관도 있대?”
나는 아트밸리에서 계획하고 있는 할로윈 개관식에 대해 설명했다.
“호박 안에도 미술관이 들어가는데, 그렇게 큰 미술관에라고 호박이 못 들어가겠어요?”
“이렇게 어린 친구가 미술관 관장이라고……?”
농부는 놀라면서도 자신의 잭 오 랜턴을 유심히 보았다.
“그래도 이건 너무 사소한 건데…… 이런 걸로 미술관에 전시할 수 있겠어?”
“손재주도 손재주지만 예술적이기도 하잖아요. 할아버지라면 호박 랜턴 아티스트가 될 수 있을 거예요.”
농부는 호박 랜턴 아티스트라는 말에 크게 웃으면서도 내 제안을 수락했다.
내가 몇 가지 도안을 보내줄 테니 10월 31일 전까지만 솜니움 미술관으로 가져와 달라고 전했다.
***
일은 순조롭게 추진되어 10월 31일을 맞았다.
해 질 녘에 아트밸리 정문에 모여 솜니움으로 퍼레이드를 한 뒤 거대 잭 오 랜턴에 불을 붙이면 축제가 시작될 것이었다.
퍼레이드를 기다리는 동안 여러 코스프레어들이 아트밸리 곳곳을 배회했다.
창의적인 코스프레를 시도한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
중절모에 청사과를 달아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을 흉내 내거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굉장히 퀄리티 높게 구현한 여성도 있었다.
나의 그림 <피리 부는 소년> 코스프레를 한 아이를 봤을 때는 조금 충격적이기도 했지만 즐거웠다.
나는 앙리 팡탱 라투르가 그려준 나, 에두아르 마네의 초상 속 복장을 그대로 구해 입었다.
당시 입었던 옷을 그대로 디자인해 입으니 마치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하지만 붙인 턱수염이 까끌까끌하게 느껴지는 걸 보아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없는 건 확실한 듯했다.
그럴 마음도 없었지만 말이다.
앙리 팡탱 라투르, <에두아르 마네>
‘그나저나 프랭크도 와 있겠지?’
얼굴을 완전히 가린 코스프레를 한 사람을 볼 때마다 프랭크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조금 유심히 보려다가, 어차피 얼굴을 봐도 알아보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에 그만두었다.
그때 라파엘로 작품 속 디오게네스 코스프레를 한 화가가 다가왔다.
머리를 바짝 깎아 그리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근육질의 인형 옷을 입고 있어 마른 몸을 다 가리고 있었다.
“오……! 에두아르 선생!”
구겐하임에서 알게 된 화가 ‘조지 오웰’이었다.
“아. 와주셨군요! 작품 잘 받았습니다. 오랜만에 뵙네요.”
“당연히 와야죠. 이렇게 좋은 기회인데.”
조지 오웰은 프랭크 때문에 전시를 원하는 화가가 너무 많아 불안했다고 했다.
“확실히 잘 그려진 작품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내 몫을 안 챙길 순 없잖아요?”
“그분 그림을 실제로 보신 거예요?”
“봤죠. 당시에 경매장에 있었는데.”
오웰은 프랭크의 작품 <프랭크>가 얼마나 대단한 작품이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죄수복을 입은 한 남성의 그림이었는데, 이번 포스터에 공개된 작품과는 달리 굉장히 정교한 극사실주의풍이었어요. 수집가들은 모두 작품 속 남성의 죄목이 무엇일지 궁금해했죠. 세절된 것을 보면 아무래도 사형수였던 모양인데, 확실하지는 않아요.”
어쨌든 작품 파쇄는 소더비뿐만 아니라 당시 경매장에 있던 모두가 안타까워한 사건이라고 했다.
두 번째 작품을 보기 위해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든 게 더욱 이해가 되었다.
하늘이 붉게 물들 때쯤 퍼레이드가 시작되었다.
행진 끝에 잭 오 랜턴이 빛나기 시작하면 솜니움 미술관이 개방되었다.
미리 1층 리셉션에 자리 잡은 무함마드는 디저트를 나눠주었다.
전시장 내 한쪽에서는 그가 만든 캐릭터 코스튬 플레이 애니메이션이 재생되고 있었다.
프랭크관 앞에 선 나는 게리를 포함해 초대에 응해준 거장들을 맞으며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들은 올해 가장 문제적인 전시회에 초대해주어 감사하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들도 내가 마련해둔 VR 포토존과 잭 오 랜턴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SNS에 올릴 때는 아마 솜니움 미술관이라는 단어를 태그했을 테니 널리 알려지게 될 것이었다.
사람들은 역시나 가장 큰 관심을 끌었던 프랭크의 원본을 보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프랭크 전시관은 바로 관람객으로 들어차 발 디딜 틈이 없게 되었다.
포스터를 통해 궁금증을 극대화시켰으니 그들은 원본이 궁금해서 굉장히 답답했을 것이었다.
무사히 전시관에 선수를 치고 들어간 관람객들은 프랭크의 작품을 저마다 만끽했다.
“원 참. 원래는 꽃다발이었군. 화염병부터 도끼까지 별걸 다 생각했는데. 꽃다발은 생각도 못했어.”
프랭크의 작품을 실제로 본 적도 없는 사람이 태반이었지만, 그림의 분위기로부터 그의 그림이 맞다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나도 그의 일화만 듣고도 이 작품들을 그릴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말이다.
극사실주의 화풍의 작품은 없지만 세절 퍼포먼스를 선보인 그만의 개성은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공원을 없애 주차장을 들여놓은 건가? 아니면 저 여자아이가 주차장을 공원으로 삼고 있다는 뜻인가?”
“둘 다겠지. 어떻게 보면 삭막하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동화적인 게 참 오묘하군.”
굉장히 많은 이야깃거리를 던져주는 화가였다.
왜 속 남자는 무해한 꽃다발을 던지려고 하는가.
왜 속 소녀는 벽화처럼 처리했을까.
정답이 있을 듯 없는 게 프랭크 작품의 매력이었다.
“그런데 윤예준 화가님은 여태까지 작품 공개를 안 하던 사람을 어떻게 설득하신 거지?”
“그러게 말이야. 참 대단한 정보력이라니까.”
나의 섭외력에 대한 칭찬이었는데, 정확히 말하면 프랭크는 ‘솜니움’이 섭외한 것이었다.
나도 프랭크와 무함마드가 어떤 인연인지 궁금했다.
그렇게 프랭크관이 큰 호응을 받는 모습을 보고 장소를 옮기려 했다.
로비 중앙에서 괴상한 가면을 쓴 한 남성이 내 쪽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한 손에는 무시무시한 전기톱을 든 상태였다.
“설마 또 세절되는 건 아니겠죠?”
프랭크관에 모인 관람객들은 프랭크의 작품을 감상하며 그런 불안감을 주고받기도 했다.
어디에도 세절기는 없는데 말이다.
세절기는 없어도, 여기 전기톱을 든 정체불명의 남성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