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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제일 쉬움-136화 (136/241)

136화. Somnium (2)

솜니움 미술관과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있는 주차장을 제외하면 일대 전체를 잔디밭으로 조성해두었다.

그림 아이디어를 가장 많이 얻게 되는 장소가 미술관인데, 내부에 작업실을 아무리 많이 마련해두어도 관람객의 창작 욕구를 담기엔 역부족이었다.

대신 어디든 자리를 펴고 앉아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일대를 조성해둔 것이었다.

나는 솜니움 정문 앞자리에 주저앉아 태블릿을 꺼냈다.

아트밸리에서 할로윈 축제를 벌이자는 제안에 무함마드는 매우 신이 났다.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쏟아내기는 했지만 다들 하나같이 영양가는 없었다.

대신 나는 왜 무함마드가 할로윈을 이렇게나 좋아하는지에 대해 이해하려 애썼다.

10월 마지막 날이 할로윈이라던데, 그럼 할로윈은 아직 며칠이나 남았다.

그런데 벌써부터 호박색 바지에 호박 가면을 쓴 펭펭이 티셔츠를 입고 있는 걸로 보아 의상에 대한 흥미를 가장 강하게 느끼는 듯했다.

그러고 보면 코믹콘에 갔을 때도 코스프레에 가장 큰 관심을 보였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림 창작물이나 페이스페인팅 같은 이벤트가 많았음에도 코스튬 플레이어 근처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였지.

그건 드림랜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많은 댄서들이 춤을 출 뿐인데 드림캐쳐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 복장을 하고 춤을 추니 더 특별했던 것이었다.

코스프레.

이번에도 그게 메인 이벤트가 되어야 했다.

“할로윈 코스프레는 꼭 공포스러워야 하나요?”

“아니야. 공포를 주기가 얼마나 힘든데. 분위기만 맞추면 다 돼.”

원래는 죽은 이들을 기리는 아일랜드인만의 풍습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 풍습은 미국으로 이민해 온 사람들에 의해 미국에 전달되면서 보다 대중적인 문화로 계속 발전되었다고 했다.

꼭 죽은 이를 연상할 필요도, 무서울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코스프레와 예술.

명화 속 인물의 코스프레를 하는 게 적당할 것 같았다.

“아. 그런데 그냥 코스프레만 하면 할로윈인 티가 안 나잖아?”

“그렇죠.”

하긴.

명화 속 인물 코스프레만 하면 그게 할로윈 파티인지 드림랜드 퍼레이드인지 잘 구분되지 않을 게 분명했다.

나의 동의에 무함마드는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가리켰다.

“이건 잭 오 랜턴이라고 하는데, 할로윈의 상징 같은 거야.”

역시 아일랜드의 민담으로, 지옥도 천국도 가지 못한 ‘잭’이라는 영감이 얼굴 모양으로 파낸 호박 안에 불을 넣고 구천을 정처 없이 떠돈다고 했다.

죽은 시기가 할로윈을 앞둔 날이었다고.

잭 오 랜턴은 표정이 으스스한 게 할로윈 분위기를 잡기에는 딱 충분한 소품 같기는 했다.

“명화 속 인물 코스프레를 하고, 저 가면을 쓰면 되겠네요. 그 펭펭이처럼요. 잭 오 랜턴 버전의 명화도 몇 점 그려놓고요.”

“괜찮은데! 그거 완전 할로윈스러운 아이디어야! 일단 코스프레야 잘 만들면 될 거고. 그림이 중요하겠네. 그래도 명색이 미술관 개관식인데 그림이 조잡하면 안 될 테니까.”

무함마드의 말이 맞았다.

하지만 그는 내 얼굴을 보더니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는 듯 정정했다.

“그림 감독은 이미 섭외가 돼 있네.”

무함마드의 열정과 나의 실력만으로도 모든 준비는 다 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남은 건 소품이었다.

잭 오 랜턴을 조각할 사람, 주고받을 초콜릿, 캔디 같은 먹거리를 준비할 사람이 필요했다.

그것들은 모두 무함마드가 담당하기로 했다.

재미있어 보이는 일이 생기면 최대한 많은 역할을 맡고 싶은 게 당연했다.

나는 솜니움 바깥으로 나와 미술관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여기 굉장히 큰 잭 오 랜턴을 딱 놓으면 되겠네요.”

“얼마나 크게?”

“가능한 한 크게요.”

요즘은 유명한 지역을 방문하면 꼭 사진을 찍는 것 같았다.

좋은 풍경을 보면 그림을 그리고야 말았던 나처럼 말이다.

독도 프로젝트로 인해 독도가 한참 유명해졌을 때의 외국인들처럼 말이다.

자신의 얼굴이 나오도록 사진을 찍어 SNS에 게시하면 또 그게 홍보가 되기도 했다.

거대한 잭 오 랜턴이 있으면 아마 사진을 찍어 자신의 계정에 업로드하고 싶어 안달이 날 것이었다.

“이 정도만 진행돼도 어엿한 할로윈 축제가 될 것 같은데요?”

“응? 그래? 너무 평범하지 않아? 미국 최대의 할로윈 축제를 만들 거였잖아……”

실망한 채 고개를 숙인 무함마드에게 내 휴대폰 연락처를 보여줬다.

“뭔데, 이게?”

“부모님 포함 몇 사람 제외하면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미술계 거장들이에요.”

지난번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연락처를 교환한 수집가와 미술가들의 연락처가 계속 이어졌다.

“부족한 부분은 이분들이 채워줄 거예요.”

“오……!”

무함마드는 제 이마를 탁 쳤다.

***

카프탄과 의기투합을 한 뒤 아트밸리 내에 새롭게 조성한 숙소로 돌아왔다.

오래 지낼 숙소였기 때문인지 아버지의 그림들이 가득했다.

“어? 예준아! 뭐야? 돌아올 거면 말하지!”

나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아버지가 크게 놀랐다.

일부러 깜짝 놀래키기 위해 미국 입국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말했다면 공항까지 마중 나왔겠지.

요즘 그림 그리느라 바쁠 테니 시간을 빼앗고 싶지 않았던 것도 있었다.

“아트밸리 공사가 끝났다길래 돌아왔어요. 잘 지내셨죠?”

그리고 싶었던 그림을 이렇게 마음껏 그리고 있는 걸로 보아 잘 지낸 듯했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작업실을 구경했다.

특히나 아버지 작품은 수가 많지 않기 때문에 볼 기회가 없었는데 이렇게 모아놓고 보니 미처 몰랐던 장점들도 많이 발견되었다.

어느 정도는 최근 들어 이뤄낸 발전일 수도 있었다.

“얘기 들어보니까 미들타운 예술가들이 슬슬 아트밸리로 모여들 것 같다던데? 전망이 아주 좋아.”

“네. 그래서 아예 성대한 개관식을 준비하려고요.”

나는 할로윈 개관식에 대해 무함마드와 이야기 나눴던 내용을 아버지에게 들려주었다.

이야기를 듣던 아버지는 ‘뉴욕뮤지엄블록파티’라는 행사를 언급했다.

미술관에서 이루어지는 행사 중 규모가 가장 큰 파티라고 했다.

새로운 사조를 이끌 아트밸리였다.

경쟁심을 가질 생각은 없지만, 당연히 기존 최고보다도 더 큰 규모의 행사가 되어야 했다.

“아트밸리에 예술가들이 모여들면 나도 여기서 작품을 좀 내보려고. 그런 개관식이 열리면 좀 더 일정이 빨라지겠는데?”

“하하하. 천천히 하세요. 어차피 아트밸리는 굉장히 오래 갈 거니까요.”

나는 아버지와의 대화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첫 번째는 게리윈스턴이었다.

그는 아트밸리가 한 번 미국에서 크게 화제가 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다들 오매불망 새로운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의 포부를 듣고는 굉장히 큰 관심을 보였다.

-저뿐만 아니라 다른 화가들도 윤 화가님의 미술관 개관식을 좋아할 것 같습니다.

“그래요? 다행이네요. 미술관이 굉장히 커서 작품을 못 채우면 어쩌나 싶었거든요.”

-지난번에 제가 추천해드렸던 퓌트니 코리아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잖습니까?

“아아, 네. 그 그림 도난 사건 말씀이시죠?”

-네. 그때 이후로 화가들이 퓌트니를 조금 꺼리기 시작했어요. 그렇다고 그곳에 그림을 전시하지 않고 있는 건 아니지만, 차선택이 없으니 어쩔 수 없죠. 다른 미술관에서 자리가 쉽게 나는 것도 아니고요.

시간상 꽤 지난 일인데도 여전히 악명을 벗지 못했다니.

굉장히 큰 실수이긴 한 모양이었다.

하기야 세계적인 전시회에서 그림을 도둑맞고도 CCTV에 범인 얼굴 하나 찍히지 않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런데 솜니움 정도 규모의 미술관이 생겼으면…… 다들 반기고도 남지 않겠습니까?

게리는 나와 연이 닿지 않은 다른 거장들에게도 연락을 취해보겠다고 했다.

어쩌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큰 성과가 날 수도 있었다.

게리에게 도움을 요청한 뒤에도 계속 다른 화가들에게 연락했다.

설치미술을 하는 제임스 쉬라부터 시작해 조지 오웰, 그리고 리사대학 출신의 샤리아 유스까지.

대부분 구겐하임에서 알게 된 미술가였다.

좋은 기회가 있어 연락드렸다고 하자 그들은 하나같이 기쁘게 반겼다.

그렇게 십수 명의 화가들에게 연락을 마쳤을 때쯤 게리에게서 메시지가 한 통 도착해 왔다.

-함께 연락을 돌리고 있는 걸로 아는데 겹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네요. 일단 다들 좋은 차선택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나 할로윈 컨셉의 개관식이라서 그런지 순수한 관심을 보이기도 하더군요. 개관식은 10월 31일에 진행하는 게 맞지요?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가장 큰 규모의 할로윈 행사가 될 것이었다.

거장일지라도 인지도를 더 높이는 데에 도움이 될 것 같으니 쉽게 매력을 느꼈을 것이었다.

내 예상보다 더 많은 거장들이 호응해주고 있으니, 나도 그들의 예상보다 더 큰 성과를 선물해야 할 것이었다.

***

같은 시각, 무함마드는 집으로 돌아와 잭 오 랜턴 제작 주문을 맡기고 있었다.

그때 예준으로부터 전화를 한 통 받았다.

자신은 거장들만 초대했고 아트밸리가 꽉 찰 만큼 섭외에 성공하고 있다는, 과장 섞인 도발이었다.

그래도 확실히 섭외는 잘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았다.

-안 그래도 다들 그림을 전시할 곳이 마땅찮았나 봐요.

예준의 그 말을 듣고 무함마드는 한 화가를 떠올릴 수 있었다.

무함마드의 절친한 친구, 이단 예술가 ‘무함마드 자크’.

‘프랭크’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는 화가였는데, 그와는 옛날에 뉴욕 이슬람센터 기도회에서 처음 만났다.

미국 입국 초기라서 활동 조건으로 아버지와 약속한 일이 너무 많았다.

당시에도 아랍인만 보면 경계하는 조심성은 있었던 터라 기도회엔 항상 마스크를 쓰고 참석했다.

그러던 어느 날엔 자크의 앞에서 재채기를 하다 마스크를 떨어뜨리는 일이 벌어졌다.

그냥 다시 쓰면 될 것을 지레 들켰다고 짐작해 어색하게 우물쭈물댔다.

그 바람에 자크의 쓸데없는 관심을 받게 되었고, 결국 정체를 들켰다.

“에이. 그게 뭐 대단한 비밀이라고. 그 비밀 들킨다고 죽어?”

그래도 왕자라는 비밀은 좀 대단한 비밀 아닌가?

카프탄은 왜 자신이 정체를 감출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애니메이션보다 더 대단한 사명이 무함마드에게 강요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애니메이터로 활동하겠다는 약속은 받아내 미국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왕실에 누가 되지 말라는 조건이 붙었기 때문에 정체를 숨겨야 했던 것이었다.

“누가 보면 천 년짜리 비밀 가지고 있는 줄 알겠네!”

그래도 왕자 신분을 버리고 미국까지 건너온 무함마드에게 호감을 느꼈는지, 자크도 자신의 비밀을 하나 털어놓았다.

그의 것은 천 년보다도 더 오래된 비밀이었다.

그는 처음 사우디에 있을 때 조금 잘나가는 화가이자 조각가였는데, 그의 작품들 중 몇 작품이 우상숭배의 소지가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가 유명세를 얻어갈수록 그 우상숭배는 기정사실화가 되다시피 했다.

당연히 작품들은 모두 파괴되었고, 자크는 미국으로 도망쳐 나올 수밖에 없었다.

“뭐야. 너 유명했어? 그런데 왜 나한테는 알려준 거야?”

“자크 성에 무함마드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한둘이겠어? 이름만 밝혀서는 돌 맞을 일 없어. 화가로 유명해지면 들키겠지만.”

그는 미국에서 ‘프랭크’라는 활동명을 사용했지만 언제든 자신의 정체가 들킬 수 있다는 불안감에 떨어야 했다.

그 ‘프랭크’라는 이름과 동명의 작품을 소더비에 제출하기도 했다.

그 작품은 당시까지 소더비에서 거래되던 작품들 중 최고가로 낙찰되었다.

유명세를 얻게 될 게 무서웠던 자크가 낙찰과 동시에 그림이 세절되도록 해버려 지금은 남아 있지 않지만 말이다.

애초에 프랭크라는 백인 이름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아랍인일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화가로서는 철저히 정체를 감추고, 아랍인으로서는 철저히 독실한 척했다.

하지만 ‘프랭크가 아랍인이었다’라는 소문이 퍼지는 순간 그의 이전 활동에 대해 까발려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아랍 전통은 굉장히 오래되었고, 여전히 많은 계파가 나뉘어 있었다.

그들 중 누군가는 우상숭배에 대한 거부감을 급진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왕가에서는 그렇게까지 심하진 않았지만 일단 우상숭배가 금지되기는 했다.

그래도 언제나 교세 확장과 교리 정리가 수천 년의 숙제처럼 여겨지던 곳이 왕실인데.

무함마드는 그곳으로부터 그냥 도망쳐 나와버렸으니……

마치 자신이 자크를 계속 고통받게 놔둔 것만 같았다.

만약 자크가 활동적으로 작품을 공개할 마음을 먹더라도 예준이 언급한 다른 거장들처럼 미술관을 찾기 어려울 것이었다.

공개하지 못해 쌓인 작품이 많을 테니까.

솜니움 미술관 개관은 그런 의미에서 자크에게 굉장히 좋은 기회였다.

‘설득이라도 해봐야겠어!’

자크도 예술가라면 언젠간 마음먹고 나서야 할 것이었다.

이렇게 좋은 기회라면 자크가 다짐하는 데에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솜니움으로서도 개관식 날 베일에 싸인 화가의 작품을 공개한다면 더 큰 화제가 될 수도 있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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